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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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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제 1 장 성도의 신원 확인조회수 : 513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0분 20초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1 장 성도의 신원 확인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죠지 위야트라는 사람이 전선으로 소집을 당했다. 그는 아내와 여섯 자녀를 둔 상태였다. 그래서 리챠드 프랫이라는 청년이 그 사람대신 가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죠지 위야트라는 이름을 가지고 군대에 합류하였다. 얼마후 이 청년은 전사했다. 당국은 후일 죠지 위야트를 다시 소집하였다. 그러자 위야트씨는 자신은 프랫이라는 사람으로 이미 죽었음을 알리고 항의하였다. 그는 자기를 대신했던 프랫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전사한 사실을 확인해 줄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다. 당국은 그의 신원을 확인하였고 그 결과 위야트씨는 군복무로부터 면제를 받았다. 이는 그가 그를 대신했던 사람안에서 죽었기때문이었다. 군법도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관한 진리를 잘 조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구출하시는 방법 역시 죽음을 통해서이다. 즉 우리의 대속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자신이 동참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사실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진리(롬5장)를 증거한 후 계속해서 우리를 로마서6장으로 안내한다. 이곳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의 신원확인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발견됨을 제시한다. 로마서5장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보여주고 있다면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사실은 복음의 기초요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즉시 그 다음 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우리의 칭의가 단순한 형식적 혹은 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물론 칭의는 본질적으로 법적인 문제이다) 여기에는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실 때 그분은 단순히 법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만은 아니다. 그 순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실재적이고 심오한 생명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을 무시한 칭의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선포하셨을 때 그리스도 밖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즉 그분의 대속(속죄)의 죽음을 믿음으로써 우리 믿는자들은 그리스도와 유기체적인 생명의 연합관계로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우리는 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롬5:20에서 바울이 선언하자 이에 대해 롬6:1의 질문이 등장한다: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는 절대적인 부정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을 때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연합되었기 때문에 (롬5장의 우리의 칭의) 우리의 위치는 “그분 안에서” 죽은 자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고후5:14)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모두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불가피하게 모두의 죽음을 포함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계속해서 죄에 거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죄 안에 있든지” 혹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둘 중 하나이다. 이 얼마나 서로 모순된 일인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은 필연적으로 그분과 함께 죽은 나의 죽음을 동반한다.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이룩하신 그 사역의 근본 성격은 이와 같이 단번에 완전히 성취된 속죄의 양면을 지니게 된다. “하나님께서 합치신 것은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 두 측면을 “분리시킨 십자가와 목이 잘려진 복음으로 불리는 복음”으로 불리는 왜곡된 모습을 지니고 있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크게 손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방법 외에는 그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나를 자신 안으로 집어 넣으셔서 그분과 하나 되도록 만드셨다. 이로써 나는 법적으로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것이다. 이것이 나의 법적인 위치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나는 구원을 받기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나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그분의 죽음을 신뢰하였다. 그리스도의 죄에 대한 죽음은 곧 죄에 대한 나의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승리와 구원을 주시는 방법은 우리를 옛 아담의 나무로부터 잘라내서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죽음 안에서 그분께로 연합된다. 믿는 자로서 내가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즉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나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것은 무슨 심오한 영적인 삶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한 옛 신학자가 말한 대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태어난 것이다”(즉 내가 거듭나는 순간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다).
    독자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애쓰고 고뇌한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더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기위해 성경을 읽으려고 결심해 보았겠지만 모든 것이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의식적으로 실패와 패배를 이겨보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계명들은 당신에게 너무 고통스럽다. 당신은 그 계명들을 기쁨으로 받을 수가 없다. 당신은 주 예수께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세워 놓으신 기준과는 전혀 모순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어쩌면 당신은 구세주께서 어째서 그러한 요구들을 하셨을까 의아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계명들이 당신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괴롭히고 고문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 문제로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부끄러워하며, 회개를 하더라도 당신의 영적투쟁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그리스도의 요구사항은 성취될 수가 없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사실을 배워야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인 생명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초월적인 요구를 하고 계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단순히 그분을 모방하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그분께서 당신의 무능력을 잘 알고 계시며 또 한편으로 그분께서는 완전히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믿는 자라면 그리스도께서 요구하고 있는 수준은 육신이 달성할 수 있는 범주를 훨씬 벗어나 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놀랄 일인 반면 동시에 당연한 일이기도하다). 도대체 누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며, 박해를 기뻐할 수 있으며, 자신을 미워할 수 있으며,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본질적인 것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요구 사항 앞에 완전히 무력한 존재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요구사항과 인간의 능력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놓여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은 무익하기 때문이다. F.J.Huegel은 그의 책 “그분의 뼈의 뼈”(Bone of His Bone)에서 우리의 실패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잘못된 기초위에서 우리의 삶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리스도를 닮는(모방하는)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참여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다(벧후1:4). 그리스도의 생명을 체험적으로 우리 삶에 참여시키려면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있어 그분과 하나 되었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가야한다.
    죠지 위야트씨는 군법과 맞싸우거나 당국을 기쁘게 하고자 노력해서 전쟁으로부터 구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정부의 기록에 나와 있는 그의 사망기록에 근거해서 군대를 가지 않았다. 즉 그는 “기록된 사실”에 근거해서 행동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의 대리인을 통해 이미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나를 대신하시고 대리하시는 분을 갖고 있다. 그분께서는 치열한 전투에 참가하셔서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시는 것이라”(갈2:20). 이것은 위대한 사실이다. 내 쪽에서 그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이 사실을 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나는 그리스도께 실제로 참여한 사람이요 따라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도 참여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내 안에 살고 계신다. 그분의 삶은 죄에 대해서는 죽는 삶이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있는 삶이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나의 모든 것을 그분께 복종시키고 그리스도를 믿고, 기뻐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하는 것뿐이다.
    한 옛 선교사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패배의 삶을 살았다. 그는 절망 가운데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눈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라는 말씀에 닿았다. “뭐라고? 그리스도께서 정말 내 안에서 사신다고?” 그는 외쳤다. 그는 철저한 장로 교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기뻐 껑충껑충 뛰면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단말이야!”라고 외쳐댔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께서 자기 안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의 옛 삶 즉 자아 중심적인 삶에서 해방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삶은 모든 필요를 채우고, 충만하며 승리하는 삶이다. 이것이 감정이나 격정으로 흥분된 삶과 혼동되어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든 기쁨과 평안이 믿음속에 거하는” 그러한 삶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의지하며 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오도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되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허드슨 테일러라고 하는 위대한 선교의 선구자의 체험은 이 진리를 잘 조명해 준다. 그는 자신의 혼에 더 많은 능력을 얻고, 더 많은 생명과 거룩함을 얻기 위해 수개월간 고뇌가운데 투쟁하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실하신 분을 신뢰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인생에 있어 다른 것보다 더 달콤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중 가장 달콤한 것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 됨으로써 맛보게 되는 안식일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것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지 않다. … 왜냐하면 나는 그분께서 자신의 뜻을 수행하실 수 있음과 그분의 뜻이 곧 내 뜻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나를 어디에 놓든지 아니면 어떻게 하시든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내가 그분의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분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 하심으로 그분께서는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가장 쉬운 곳에 두셔야하며 가장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그분의 은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를 매우 당혹스러운 처지에 놓으신다면 그분께서는 훨씬 더 나를 잘 인도하셔야만 하지 않는가? 어려운 처지에서는 크신 은혜를 주시고 압력과 시련가운데 놓일 경우에는 크신 능력을 주셔야만 한다. 사역에 관해서도 나의 일은 너무도 많고, 어렵고, 책임은 산더미처럼 늘었어도 나의 짐과 긴장은 다 사라지고 없다. 그분의 자원이 내 것이니 이는 그분께서 내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oneness)에서 나온다.”
    나 비록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받아들이네. 당신의 최고의 선물을.
    당신과 나 사이에 이젠 한 생명뿐이니 당신께서 주신 그 한 생명뿐이라네. -Lucy A. Ben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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