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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율법을 주신 목적/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조회수 : 4905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25분 1초
  • 성령의 열매: 율법을 주신 목적/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 말씀입니다. 성령의 열매는(fruit) 단수 즉 한 가지 열매일 뿐임을 기억하십시오. 이 구절에는 이 열매의 아홉 가지 특성이 잘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 중 사랑, 기쁨, 화평 이 세 가지 특성은 내적인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맺고자 하시는 열매라 할 수 있지요.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이 세 가지는 사람을 향한 것으로 인간관계에 있어 드러나는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 온유, 절제는 하나님을 향한 것들로 성령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갖도록 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우리는 이제껏 네 번에 걸친 메시지를 통해 하나하나 공부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이미 살펴본 대로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셔서 황금길을 걸으며 보석으로 된 대저택에서 살게 해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이 죄인을 휴거시켜 죄도 눈물도 질병도 고통도 없는 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그 죄인으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아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여 아들의 형상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이 숭고한 여정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대로 잘 빚어져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히 통제하시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율법도 계명도 규례도 필요없게 되며 더 이상 설교나 성경공부나 권면도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령님을 우리 몸으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신이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될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우리는 인간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통제하시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그리스도처럼 행동하며, 그리스도께서 보시는 것을 나도 보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듣고자 하시는 것을 나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율법이나 계명도 필요 없게 됩니다. 그 누구의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의 통제와 성령의 열매에 대해 조금 배우고 난 후 마음을 성령께 내맡기게 될 때 우리의 육신은 육신적 생각을 동원하여 즉시 전략을 바꾸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싶어서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맡기기로 결단을 내리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우리 옛아담의 성품이 끼어들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그냥 평범하게 그럭저럭 살려고 하는 때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합당한 열매를 맺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보겠다고 마음먹는 바로 그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이 말입니다. 육신은 즉시 전략을 바꾸어 성령의 열매를 그럴싸하게 위조해 내기 시작합니다. 육신은 마치 자기가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소유한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더 이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 혹은 그 누구로부터도 지시나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자기가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도 계명도 규율도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너무도 영적이기 때문에 교회에 갈 필요도 없고 설교를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거나 성경을 읽을 필요도 없고 다른 형제들과 교제할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너무 영적이므로 그런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이들은 “…이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갈 5:23)는 말씀이나 혹은 “너희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와 같은 구절들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킵니다. 만약 이들의 행동이 이 두 구절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라고 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실은 그것이 아니라서 문제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어 인도받는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이나 계명이나 규례가 필요없는데 이는 그가 완전한 자유를 갖고 있어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되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러한 것들 없이도 그 사람을 완전히 통제하셔서 의로운 삶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성령의 통제하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습니다. 자유란 죄를 짓는 자유(liberty to sin)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liberty from sin)입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통치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통치가 없는 상황에서도 통치를 받고 있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자유를 말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메시지를 통해서 여러분과 제가 온전히 성령님의 통제를 받아 율법, 계명, 규례, 다스림, 지시 없이도 성령의 열매를 잘 맺고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육신을 동원해 그런 수준에 다다른 것처럼 착각해서 모든 규례, 율법, 다스림과 통제를 다 무시해 버리고 완전한 “자유”를 제멋대로 구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없다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감정과 나의 모든 행동이 완전히 성령님의 통제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의 명령도 규례도 율법도 다스림도 필요 없다. 나는 자유롭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우리로 그러한 완전한 자유에 이르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단 한번의 헌신 기도나 결단으로 단번에 모든 것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를 도우사 이 놀라운 사실들을 올바로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로 주의 뜻을 바로 깨닫게 하셔서 그 뜻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혹시 오늘 이 시간에 이 메시지를 듣고 계신 분들 중 아직 거듭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차분한 마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들으시면서 받으실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초신자들이 계신다면 마찬가지 자세로 좀 어렵더라도 이해되는 부분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단 몇 %만이라도 이해한다면 큰 유익이 되실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우선 저는 성경에서 율법이나 명령이나 규례의 목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세 군데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디모데전서 1장 5절부터입니다. “이제 명령의 목적(end)은...” 이 목적지 즉 종착점에 다다르면 명령(계명)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될 것입니다. “이제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이 말씀에 따르면 제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와 같은 명령들은 전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제게 그러한 명령이 필요한 것은 제게 그러한 명령이 없으면 그런 못된 짓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람들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하지 말라”, “~하지 말라”와 같은 율법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수준에까지 도달할 때까지는, 그 목적(end)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나에겐 명령들과 율법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것에서 벗어나 헛된 말다툼에 빠져” 말씀에 보니 어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빗나간다고 했군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신앙을 내던졌다든가, 하나님을 버렸다든가 뭐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만 슬쩍 사랑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벌써 문제가 발생하는군요. 7절에서 10절을 보십시오.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그들은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 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선한 줄 우리가 아노라. 9 이것을 알라. 율법이 만들어진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요, 오직 법을 무시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속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사람을 죽이는 자와 10 음행을 일삼는 자와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는 자와 사람을 납치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위증하는 자와 그밖에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리에 역행하는 것 때문이니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여기 나와 있는 죄들의 목록 중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심한 죄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9절을 보니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려서 예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신데 그렇다면 그분과 나를 비교해 볼 때 저는 결코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저의 모든 행동이 예수님처럼 100% 다 옳지 못하기 때문에 저에게는 어느 정도의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9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불순종한 적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지금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율법대학을 졸업 못하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율법 또는 규례라는 제약이 필요한 것입니다. 9절 말씀을 계속 보세요. 죄인과 거룩치 아니한 자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속된 자라는 말은 어떠세요? 당신은 항상 거룩하고 깨끗하고 청결한 삶만을 살아가고 계신가요? 항상 그렇지 못하다면 어떠한 제한이 필요합니다. 8절에 보니 율법은 적법하게 사용하면 선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저처럼 항상 거룩하고, 깨끗하고, 경건하게 살지 못하는 즉, 혼자 힘으로는 그런 삶을 항상 지속할 힘(능력)이 없는 자들을 그러한 삶 안에 거하도록 울타리를 치는 역할, 그것이 바로 율법의 역할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자”, 아마 “나는 아니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어머니를 죽이는 자” 이것도 아니라 하시겠지요. “사람을 죽이는 자” 이것도... “음행을 일삼는 자” 이것도... 글쎄 거의 아닌데....... “남자와 더럽히는 자” 이것도 아니고, “사람을 납치하는 자” 이것도 아닌데... “거짓말하는 자” 그런데, 이것은 100% 자신 없으시겠죠?
    “위증하는 자” 이것은 100%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100%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나 여러분에게 다 해당되겠군요. 더 나아가 “그밖에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리를 거스르는 것” 이 말을 듣고 나면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전치 못하니까 우리에게는 여전히 율법의 제한 혹은 제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교리는 내게 맡기신 복음 곧 찬송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에 따른 것이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 복음은 우리를 구원시켜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디도서 2장 11절, 12절에 나와 있는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딛2:11)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영광스런 복음은 그 다음 구절입니다.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한마디로 이 말씀대로 아직 못살고 있다면 그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는 율법이 그 목적지(end)를 향해 가는데 도우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로마서 7장으로 가 보십시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든가 율법하에 놓여 있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율법의 바른 용도를 정확히 알고 이를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니 율법이, 너는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욕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 다음 12절과 13절을 보세요.
    12 그런즉 율법도 거룩하고 명령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도다. 13 그러면 선한 그것이 내게 사망을 이루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을 통해 내 안에서 사망을 이루었나니 이것은 죄가 명령을 통해 넘치도록 죄로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복음을 듣고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내 죄로 인해 내가 심판을 받아 영원한 불못으로 가야 할 터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심판 받아 지옥에 가셨습니다. 죄값을 다 치르신 주님, 부활하신 그 주님을 믿을 때 그분께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우리가 구원받은 직후의 모습은 구원받기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육신적이고, 여전히 죄성이 있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데 다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 오셨다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죽으면 지옥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 그래야 되는지는 깊이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그 이유를 점점 깨달아 갑니다. 제가 행했던 많은 것들 가운데 제 생각에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죄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알게 됩니다. 어리석은 생각이 죄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니… 점점 놀라운 이야기들이 등장하는군요.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도 율법은 선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쁜 인간으로 선한 율법을 읽게 하사 자신이 얼마나 나쁜 존재인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으로(구원을 받아 칭의를 얻었으나 아직 실제로 의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영적 어린 아이들) 의로움에 대해 읽고 듣게 되면, 이 사람은 과거 구원받기 전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모습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로 우리가 얼마나 “깊숙한” 죄인인가를 정확하게 직시하여 다시는 우리를 쳐다보거나 바라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도록 하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실 때 그 어떤 인간도 그것을 지켜 내리라고 기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사람으로 회개하고 자기 자신을 포기하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의 선생이랍시며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혹은 “칭의”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7절은 이들을 두고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주장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겁니다. 안식교인들 같은 사람 말입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면서 실은 율법에 나와 있는 것들을 다 지키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 1장과 로마서 7장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임을 확신시키기 위함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 즉 구원받은 성도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제 나는 헌신하겠다. 나는 성령님의 통제를 받아 하나님을 위해서 살리라.” 이렇게 결단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동일한 일이 발생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교회에 착실하게 출석하고, 하나님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라고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해 달라고 간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 앞에 서기는커녕 더 부족한 모습만을 보게 되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도대체 왜 주님께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그냥 내버려두실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우리는 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선하게 될 수도 없고 의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의롭게 될 수도 없는 본질적으로 죄인이란 사실과 우리의 노력으로는 이 진리를 결코 뒤집어 엎을 수 없음을 처절히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존재 목적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을 통해 율법의 목적을 확인해 보십시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訓育)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구원받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깨끗한 삶을 살 거야. 담배도 끊고, 여자들 쫓아다니는 일도 그만두고, 욕설도 중단하고 정말 깨끗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결심합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이 오래 갈 리가 없지요.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셀 수도 없이 많이 반복하고 나서야 자기는 정말 “구제불능”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고 예수님께로 나아와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소서.”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그때서야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이 경우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찌 보면 율법이 이 사람을 학교에 보낸 셈입니다. “둘 더하기 둘은 얼마지요?” “셋입니다.” “틀렸습니다. 다시 둘 더하기 둘은요?” “다섯입니다.” “또 틀렸군요.” 수없이 반복해도 계산을 못하게 되면 이렇게 묻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마찬가지로 율법은 지키려고 수없이 노력해 본 끝에 결국 “다른 길은 없나요?”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성령께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확신시키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문으로 알 수 있듯이 율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확신시켜 주었으므로 그는 오직 유일한 구원의 “길” 되신 예수님께로 나아와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 디모데전서 1장, 마태복음 22장, 그리고 로마서 13장과 요한복음 14장을 살펴보면 거듭나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도 율법이 여전히 해야 할 역할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자신의 의를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 결심이 실천에 잘 옮겨지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두려워서 때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때로는 다른 바쁜 일로 인해서... 결국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맙니다. 물론 2, 3일 혹은 3, 4일은 순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곧 중단하고 말지요. 우리 모두의 경험이 그렇지 않습니까? 또는 육신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 즉 너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과 일치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듣고 결단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텔레비전 코드까지 뽑아버릴 정도로 단호한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일주일도 못 가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까지의 메시지(성령의 열매 1·2·3·4·5)를 듣고(읽고) 나서, “아, 이거구나!” 하면서 “나는 이제부터 육신적인 것을 내려놓고, 단지 하늘나라에 가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온전히 헌신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께서 나를 완전히 통제하시도록 내맡기겠다.”라고 이같이 결단하고 성령께서 통제하시는 그런 삶을 살기로 노력하기 시작한다면,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당신은 반드시 실패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당신이 선행과 노력을 통해 구원받아 보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을 때 느끼는 비참한 느낌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율법(명령, 계명)의 목적은 명령에 복종할 힘을 주는 것이 아니고,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데려 와서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는 완전히 실패한 그것을 주님께 완전히 의지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생명을 얻기 위해 주님께로 나왔듯이, 주님의 통제하심을 얻기 위해서도 스스로의 무기력과 완전한 실패를 주께로 가지고 나아와 그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침례교 정통교리가 아닌 것 같군요…”라고 말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성경적 교리면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이것이 우리의 구원에 관한 언급입니다)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생명만 얻는 것이 아니고 “풍성히” 얻는 것,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죄인으로서 예수님께 나아와 죄에서 벗어나 은혜를 얻어 구원받는 것을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이 아닌 은혜로 살게 되는 비결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해 산고를 겪노라.”(갈 4:19) 이 말씀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언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명령들로부터 자유롭게 될까요? 그것은 율법과 명령이 그 임무를 다하여 목적이 성취되었을 때, 즉 우리가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다 주님께 완전히 의뢰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통제하실 때 바로 그때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십시오. 이때가 언제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당신이 저를 당신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한다면 당신에게는 그때가 이미 다다른 것입니다. 당신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당신의 주변 사람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든 그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해 주신 그대로 대해 준다면 당신은 이미 율법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 거하고 있는 것이므로 율법이나 명령이 더 이상 필요없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게 될 때까지는 여전히 율법과 명령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5절에서 40절을 보십시오.
    35 그때에 그 중의 한 율법사가 그분을 시험하려고 그분께 질문하여 이르되, 36 선생님이여, 율법에서 어느 명령이 크니이까? 하매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은즉 38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39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 40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매달려 있느니라.
     
     
     
    여러분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내용들을 다 아시나요? 613가지 명령과 규례들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온 마음과 혼과 생각을 다해 사랑한다면 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로마서에서부터 유다서까지의 내용을 읽어 보셨지요.(이중 어쩌면 빌레몬서 하나는 주님의 다루심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형제 자매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그 말씀 속의 모든 명령들을 다 지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제가 제 자신을 사랑한 것처럼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아내와 간통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돈이라도 훔치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결코 안 할 겁니다. 나는 내게 해가 되는 일을 내 자신에게 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사의 질문에 “사랑”이 그 대답이라고 답변하셨습니다. 문제는 여러분과 저를 포함해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마음을 굴복시키지 않은 채로 그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마음을 굴복시킨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큰 명령은 자연스럽게 지켜질 수 있는 것이지요.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명령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것이 해결책이 아닙니다. 노력을 배가해도 기도를 두 배로 늘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해답은 우리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해 쓴 책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 것 같으니 그렇다면 로마서로 가 보십시다. 저 자신도 세대주의자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것을 인정합니다. 문제는 우리 주변에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눈다는 명분하에 자신들이 싫어하는 말씀들로부터 “피신”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입장을 취하든 저에게는 상관없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생애에 있어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루신 그 방식대로 우리가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아기”에 불과합니다(고전 3장). 로마서 13장 8절에서 10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8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어떤 것을 빚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느니라. 9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너는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어떤 다른 명령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말씀 안에 간략하게 들어 있느니라. 10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8절 끝부분을 보면 사랑하는 자는 그 사실을 인식하든 못하든 간에 이미 율법을 성취했다고 말씀합니다. 9절부터 계속 검토해 보세요. 모든 계명들은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간단하게 이해가 된다고 말씀합니다.A) 사랑이란 말 한 마디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하는지를 간단히 표현할 수 있지요. “저는 ‘사랑’이 뭔지를 잘 모릅니다. 자라 온 가정 환경 때문에… 제 가정에는 사랑이란 없었어요.” 이런 식으로 변명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육신적인 사람이 틀림 없습니다. 다른 사람 탓을 하며 자신의 사랑 없음을 인정 안 하려는 사람, 그 사람의 모습은 육신적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대해 주는 것이 좋은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대해 주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뭔지 모른다는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남편이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방식으로 아내를 대하고, 모든 아내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편을 대한다면 이 세상에는 오로지 행복한 부부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구성원(지체들) 모두가 자신이 대접받기를 바라는 그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한다면 교회 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으로 가 보십시다. 2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가 그와 함께 있게 하리라.
    이 구절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그것이 나와 있군요. 말씀을 지키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반역적인 육신을 강제로 복종시켜 예수님의 말씀과 명령들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택하신 방식은 우리와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과 사랑에 빠지도록 만드셔서 주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다스리시어 그분의 말씀을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지키도록 만드십니다. 자신을 단련시켜 계명들을 지키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영적인 사람인지를 자랑하고 다니는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주님은 전혀 다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주님을 사랑하기에 당연히 말씀을 지키면서도 전혀 자랑치 않고, 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비판하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주님과의 다른 점입니다.
    만약 당신이 육신의 일로써 계명들을 지킨다면 그 결과는 육신적으로 당신은 교만해져 고개를 쳐들고 당신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육으로 난 것은 육에 불과합니다. 육신이 계명에 순종하면 그 결과는 육신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큰 일들을 하고 있는 교회들이 그렇지 못한 교회들보다 쉽게 분열되고 쪼개지는 이유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육신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반면 당신이 주님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면 당연히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일하게 되며 그 결과로 의와 화평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요한복음 14장을 잠시 놔두고 우선 데살로니가전서 3장으로 가 보십시다. 만약 이 메시지를 읽는(듣는) 이 순간, 당신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100%의 모습이 아니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더 배워야 하고, 책망도 받아야 하고, 고침도 받아야 하고, 교회 생활의 여러 규범들을 배우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육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우리의 육신은 제한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껏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계명, 명령, 규범, 규례 등)의 목적은 당신을 육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영으로 인도해서 더 이상 이런 율법들이나 제한들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성숙하게 되도록 하여 모든 율법이 저절로 성취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절에서 13절입니다.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에게 행하는 것같이 너희가 서로에게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고 넘치도록 베풀게 하사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 앞에서 너희 마음을 거룩함에 흠잡을 것이 없게 굳건히 세우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에는 실행하기 어려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되 넘치도록 베풀라는 말씀 말입니다. 제 주위에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정말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자들은 위 말씀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 속에 포함이 안 될까요? 당연히 됩니다. 이점에 있어 저는 여전히 육신적인 셈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고 사랑할 수 없는 까다로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통제하에 제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지금 읽은 말씀(살전 3:12,13)처럼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라.”
    13절을 계속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도록 굳건하게 되는 것이 바울의 기도 내용입니다. 잘 보십시오. 저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곧 주님께서는 저를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시점(구원, 휴거) 사이에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마음을 흠 없이 만들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도록 만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 같은 자의 마음이 흠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신약성경도 충분히 읽지 못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제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지도 완전히 모르고 있는데 말입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만약 제가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내 이웃을 제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저는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생애에서 정하신 목적입니다.
    요한일서 2장으로 가서 더 많은 계시를 받아 보겠습니다. 여기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 그룹의 사람들은 서로 영적 성숙에 있어 그 차이가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해 용서되었기 때문이라.
    여기 보면 어린 자녀가 등장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어립니다. 문제는 35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아직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았음을 알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가 어떻다는 둥, 아내가 말을 안 듣는다는 둥, 형제들이 육신적이라는 둥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면서 도무지 자라고 있지를 않습니다. 이번엔 1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음이요,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저 사악한 자를 이겼음이요,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라.
    중간 부분을 보니 젊은이들이 등장하는데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사악한 자를 이겼다는 말씀이지요. 놀랍습니다. 이어 14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기 때문이라. 젊은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며 너희가 저 사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이라.
    여기에도 젊은이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상당히 잘 자라났습니다.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놀랍지요. 이들 청년들은 그야말로 원기왕성합니다. 성경을 배우고, 암송하고, 마귀를 대적하고, 거리 설교를 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술과 담배, 마약, 간음, 음행을 정죄하며 진리를 위해 투쟁합니다. 정말 뜨거운 열정은 본받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어린 아이들만 있는 교회보다 이런 교회가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아버지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알았다고 합니다. 14절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성숙”한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 즉 영원하신 아버지와 교제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린 자녀들처럼 단순히 아버지를 아는 정도(13절 끝부분)가 아니라 그분께서 어떤 분이심을 아는 분들이지요.A)
    여기 계신 어머님들과 아버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자녀들을 훈육과 책망과 훈련과 바로잡음을 통해 어릴 때는 하도록 “시키던” 일을 30세가 되서는 시키지 않고도 자발적으로, 자동적으로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영적 어린 자녀들에게 성경과 설교와 율법과 교제와 계명들과 규범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행실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 모든 것을 평생 동안 “시켜서” 하도록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점점 성장해서 더 이상 “시킬” 필요가 없이, 즉 성경구절이나 설교나, 책망 없이도 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 누구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5살, 7살 혹은 14살, 20살짜리에게 아무런 제한 없이 무제한적인 자유를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50세가 되고 60세가 된다면 이들에게는 그 어떤 제한을 가할 필요가 없지요. 알아서 모든 일을 해낼 테니까요.
    물론 우리는 율법이 아닌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도 필요 없고, 교회에 갈 필요도 없고, 설교도 필요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생각할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 언젠가 우리도 성숙해서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고 주님의 일을 하되 두려워서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단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게 될 날이 오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께 간절히 호소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우리를 성령에 의해 통제받고 있는 성숙한 사람으로 간주하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영적 성숙은 헌신을 하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한두 번 했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순간부터 이 일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더 이상 율법과 계명이나 명령들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그리한다면 그때가 바로 영적 성숙의 시점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행동할지도 모릅니다. 즉 “오, 나는 성령의 열매 메시지를 들었다. 나는 이제 이 메시지를 붙들고 매일 30분씩 기도하고, 성경도 두 장씩 더 읽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즉시 실패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저 주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고 이 모든 것들을 기뻐하며 즐기십시오. 그저 주님께 마음을 드리시면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제자의 표식”은 복음 전파나 설교가 아니고, 세상적인 일들을 내버리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더 잘 출석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나와 있는 “사랑”입니다. 33절부터 보면 “어린 자녀들아”라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이 어린 자녀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랐던 자들이요 사역을 돕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어린 자녀들아” 하셨습니다. 이들이 어째서 어린 자녀일까요? 그 대답은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제자들은 누가 더 오래 살게 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기(baby) 취급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되는데요, 주님? 저보다 더 오래 살아남게 되나요?” 이런 식의 대화, 어린 아이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그러면 34절을 보십시오.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말씀 그대로 제자들의 표식은 사랑입니다. 제가 예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나를 사랑하면 오, 할렐루야! 우리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아시기에 “명령들”을 사용하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바로 잡음”이 필요할 때가 언제인 줄 아시기에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위해 모든 규범들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하나님의 계획의 마지막 목적지(the end)는 다름 아닌 여러분과 제가 주님께서 명령하지 아니하시더라도 주님께 순종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두 살짜리에게는 “시켜야만” 할 그런 행실들을 30세가 되어서는 자발적으로 알아서 하듯이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자발적으로 행할 수 있을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율법(계명, 명령, 규례, 규범, 규칙)이란 도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 순간이 오는 그때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우리의 생애 가운데 계속 역사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우리로 우리를 향하신바 하나님의 그 숭고하고 고귀한 목적을 잊지 말고 그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신실하게 도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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