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장 16절)
입다의 딸은 죽었는가, 살았는가?
성경 질문을 받아 보면 여러 사람들이 사사기 11장에 나오는 입다의 딸 이야기를 가장 많이 꺼냅니다.
다음 글에서 보듯이 많은 성도들이 개역성경의 영향으로 입다의 딸은 번제 헌물로 주님께 바쳐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한 여러 목사님들은 입다의 딸이 죽지 않았고 평생을 처녀로 지냈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위의 두 견해 중 하나를 지지하며 그 근거를 대 왔습니다. 그것들을 살펴보면 다 그럴듯하고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오늘은 목사로서 성경의 해석 문제를 잠시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로서 성경 해석 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지 않는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결코 인신 제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입다의 딸이 번제 헌물로 희생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 헌물로 바치라고 했으니 입다의 딸도 그의 서원대로 반드시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여 인신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기대했을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그것을 시험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곧 단련시킨다는 말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였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려서 내보내셨을 것입니다(히11:11-19). 그러므로 이런 단회적 시험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신 제사를 요구하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인신 제사에 대해 얼마나 많이 분명하게 말합니까? 그것은 마귀를 섬기는 가나안 족속들의 사악한 행위입니다. 므낫세는 인신 제사를 드린 결과 유다의 패망을 불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입다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입다가 알 수 없는 결과에 대해 자기 임의대로 예상해 버리고 너무 경솔하게 서원했다는 것입니다.
입다는 분명하게 11장 31절에 있듯이 무엇이 자기를 맞으러 나오면 그것(it)을 헌물로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절대 사람을 예상하고 서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근본 속성을 파괴하는 해석을 하면 치명적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입다의 딸이 두 달 동안 산에 올라가 자기의 '처녀 생활' 혹은 '처녀 상태' 혹은 '처녀 됨'(virginity)으로 인해 애곡하였다고 말합니다.
곧이어 성경은 이에 대해 39절에서 분명하게 그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합니다.
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생활로 인하여 애곡하고
39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39절을 잘 보십시오.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입다는 자기 서원대로 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 '그가(입다)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딸) 행하였으니 그 때에 혹은 그 때까지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입다가 자기 서원대로 행함으로써 그 딸이 죽지 않고 처녀로 일생을 보냈다는 것은 문맥을 그대로 따라 나가면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다음에 보면 “그것이 이스라엘 안에서 풍습이 되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일 년에 나흘씩 애곡하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인이 시집을 가지 않는 것은 그 당시에 부끄러운 일이었으므로 여자들이 입다의 딸을 위해 같이 울어 주었습니다.
자, 이 구절들은 그의 딸이 번제 헌물로 바쳐졌다고 생각하고 해석해도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입다는 드디어 그녀를 죽여서 바쳤습니다. 이로써 그의 딸은 처녀로 죽게 되었고 결국 여인들이 매해 그녀를 위해 울어주었습니다.
일단 이렇게 두 가지의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저는 오늘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합당할까 묻고 싶습니다.
입다는 사람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경솔하게 서원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딸이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과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 그분께서 극도로 미워하시는 인신 제사를 드렸을까요? 과연 이런 해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해석이며 사람을 살리는 해석일까요? 그런 무자비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 맞을까요?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소개하면 다른 사람들이 설득될까요?
저는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을 선포하는 목사로서 이런 말씀을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런 해석은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사람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살려주시는 은혜를 나타내도록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분들이 입다의 딸에 관한 기록 등 몇몇 난해 구절에 대한 확신에 찬 답을 얻는 원천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터 럭크맨(Peter Ruckman)입니다. 저 역시 럭크맨 목사를 성경 교사로서 존경하지만 그의 말 전체를 믿지는 않습니다. 저처럼 미천한 사람이 봐도 그분은 틀린 데가 많습니다. 그는 구약 시대와 환난기에는 사람이 ‘믿음 +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국내에서도 이분의 그런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이단 교리입니다. 그런 교리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또 또 구시대의 유물인 재창조를 주장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럭크맨을 떠나 훨씬 온건하다고 평가되는 제임스 낙스에게로 옮겨갑니다. 그러나 낙스도 사람인지라 틀린 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낙스가 훌륭해도 여과없이 틀린 것까지 그의 모든 가르침을 수입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미국 사람의 글이나 말도 각자가 스스로 잘 분별해서 들어야 합니다.
성경 해석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에 럭크맨과 낙스 그리고 라킨을 무조건 추종하면 필패하게 됩니다.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판단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해석, 사람을 살리는 해석을 취해야 합니다.
묘하게도 대개 뛰어난 사람들은 보통사람이 이상하게 혹은 신기하게 여길 만한 성경 해석을 종종 내놓습니다.
1년 전쯤에 제가 요한복음 11장 33-35절을 가지고 “성도가 울면 예수님도 우신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https://www.cbck.org/BoardRedirect/sermon/438
3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녀가 우는 것과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고 34 이르시되, 너희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와서 보시옵소서, 하매
35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이르되, 보라, 그분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고
33-36절을 읽어보시면 누구라도 그 성도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도 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튜 헨리 등의 주석을 보면 다 그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보시고 같이 울어 주시는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그래서 그분을 믿는 것 아닙니까? 이런 것이 정상적인 해석입니다.
그런데 럭크맨 추종자들은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럭크맨은 예수님이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 등을 사랑하셨기에 그들의 고통을 보고 우신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누가복음 19장 41-42절로 독자를 끌고 갑니다.
41 그분께서 가까이 오사 그 도시를 보시고 그 도시로 인해 슬피 우시며
42 이르시되, 적어도 이 날 즉 네 날에만이라도 너 곧 네가 네 화평에 속한 일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리요! 그러나 지금 그 일들이 네 눈에 숨겨졌도다. 그는 지금 나사로의 무덤에 있는 그 유대인들이 자기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예수님이 슬퍼서 우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는 이런 사실을 설명하면서 AD 90년부터 1990년까지 1,500명의 주석가와 교사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분개해 합니다.
한번 독자들께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 합니다. 심지어 '성경 해석의 왕도(王道)는 문맥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과 전혀 동떨어진 누가복음 19장을 연결하는 파격적이고 대담한 해석은 럭크맨 혹은 낙스 같은 천재(?)나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데서 위대한 영해 즉 비유 해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독자들은 럭크맨의 학식에 넘어갑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럭크맨 추종자들이 그것이 럭크맨의 해석이 아니라 자기 해석인 양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독자들은 그 추종자들이 엄청난 지적 괴력의 소유자로 알게 됩니다.
아닙니다. 그런 추종자의 이상한 해석의 뿌리는 대부분은 럭크맨이나 낙스, 혹은 라킨입니다. 다만 그 출처를 솔직하고 당당하게 밝히지 않기에 독자들은 자 그 사람이 큰 능력자인줄 알 뿐입니다.
저 역시 부족한 사람이지만 사람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이성을 가지고 모든 사람의 말과 글을 판단해서 합당한 것들만 취하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목사들의 글이나 설교를 접할 때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해석이 나오거든 럭크맨의 것일 가능성이 많음을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럭크맨은 훌륭한 분입니다.
저는 럭크맨의 주석을 다 아마존에서 구매해 전자책 킨들에 담아 늘 봅니다.
그런데 그분은 많은 진리를 보여주면서도 과도하고 이상한 해석도 많이 합니다.
라킨도 마찬가집니다. 그의 재창조 등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의 글이 다 성령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낙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천재들의 글을 보고 읽게 되면 늘 조심하셔야 합니다.
대개 크리스천 천재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탁월한 지적 능력으로 좋은 열매를 수확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에 때로 자기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도가 지나친 상상력과 파격적 사고로 매우 엉뚱한 성경 해석과 가르침을 내놓기도 합니다.
감히 보통 사람은 이런 용기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재이기에 이런 대담함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때로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참 감사하게도 이러한 극단적 파격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맑은 정신을 가지고 보면 그 옳고 그름을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다가 그만 도를 넘어 그릇된 성경 해석에 빠지는 천재 그리스도인이나 그 천재의 지적 능력에 매료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건전한 판단력까지 상실한 추종자들이나 모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집중했기에 이런 일들이 생깁니다.
또한, 이런 분들에게서 얻은 소스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자기 스스로 굉장한 해석을 하는 것처럼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는 럭크맨 추종자를 늘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물론이요,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부디 목사들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사람을 살리는 성경 해석을 하면 좋겠습니다.
샬롬
패스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