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입다의 딸은 번제물로 죽었을까요? ● 정동수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입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딸을 죽게 하면서까지 서원을 지키는 인물이 입다라고 배웠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사기 11장 37-39절을 봅시다. 개역: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흠정역: 그녀가 또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게 이 일을 행하시되 곧 나를 두 달 동안 홀로 있게 하소서. 내가 내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나의 처녀 됨으로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 동안 보내니 그녀가 자기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자기의 처녀 됨으로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이 지난 뒤에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오니라. 그녀의 아버지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개역성경은 히브리말에도 없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마음대로 집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다가 처녀 딸을 죽여 번제 헌물로 바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앞뒤 문맥상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39절 끝에 입다의 딸이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그녀는 평생 처녀로 지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전주대학교의 김경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사사기 11:37-40에 대한 한글 개역 성경과 공동 번역 및 표준 새번역 등의 번역문은 번역과정에서 역자가 나름대로의 특정한 해석을 본문에 가미시켜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의도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를 담게 된 대표적인 예이다. 필자는 이 주제를 이미 「그 말씀」 1995년 7월호 (195-200쪽)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우리말 번역본들의 부당성만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사사기 11:37-40에서 우리말 개역과 표준 새번역 공히 입다의 딸이 죽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해석적 입장을 번역문에까지 반영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본문중에 입다의 딸이 죽는다는 표현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고대 역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개역에서는 “죽다”라는 단어를 조그만 글자로 삽입시킨 것이다. 그러나 표준 새번역과 공동 번역에서는 이런 식의 구분도 없이 아예 입다의 딸이 죽은 것으로 간주하여 이 단어를 번역본문 안에 그대로 반영시켰다. 입다가 서원대로 자기 딸을 죽여서 번제로 바쳤을 거라는 해석은 우리 한글 번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 교회 이후 많은 기독교 주석가들은 그만두더라도, 주후 1세기의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 역시 사사기 11장의 내용을 재기술하면서 입다의 딸이 이때 죽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유대 고대사 5권 7장).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한글 번역문에서 히브리어 원문에도 없는 ‘죽는다’는 단어를 세 번씩이나 삽입시키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한글 성경은 이 구절들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사사기 11장을 통하여 볼 때, 어쩌면 입다의 딸이 이때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서원을 이루고자 평생 처녀로 보냈을 가능성도 크다. 성경을 번역할 경우 아무리 그럴듯한 해석이라도 함부로 본문에 그 내용을 삽입시켜서는 안 된다.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습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