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사도행전 2장 38절 등에서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가?
결코 아니다!
신약 성경의 전체 주제는 사람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2:8-9).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도다(롬5:1).
그런데 성경에는 마치 행위(특별히 물 침례나 세례)가 있어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구절이 몇 군데 있습니다.
1. 마가복음 16장 16절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그냥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믿는 것과 구원 사이에 침례를 받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물 침례가 되겠지요.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걸려 넘어져서 앞의 ‘믿고’를 읽지 않거나 신경을 쓰지 않고는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이 구절의 뒤에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침례를 받고 안 받고’가 후반부에는 빠져 있습니다.
분명히 마가복음 16장 16절에는 물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믿고”가 들어 있습니다.
이 구절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믿음, ② 침례, ③ 구원
성경 전체와 이곳의 요점은 ① 믿음, 이 하나가 ② 침례와 ③ 구원의 근거이지 ① 믿음과 ② 침례, 이 두 개가 ③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이후에 침례를 받는 것과 구원이 뒤따라옵니다.
이런 구절을 접할 때 우리는 통합적으로 성경을 보고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당연히 구원을 받고 구원에 대한 증언으로 물 침례도 받을 것입니다.
한편 이것은 마태복음 28장 19-20절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민족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물 침례를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람이 물 침례 받으면 구원을 받을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가르침을 받아 믿음을 갖게 되어 구원받은 사람들만 침례를 받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마16:16, 마28:19-20에 함축되어 들어 있습니다.
2. 사도행전 22장 16절
바울과 관련된 구절을 하나 더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나니야의 말입니다.
이제 네가 왜 주저하느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 침례를 받고 네 죄들을 씻어 버리라, 하더라(행22:16).
여기도 뒷부분만 보면 침례를 받아 죄들을 씻는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라는 주요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부르면 그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믿음과 회개가 다 들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이 구절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② 침례, ③ 죄들의 사면
성경 전체와 이곳의 요점은 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 하나가 ② 침례와 ③ 죄들의 사면의 근거이지 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② 침례, 이 두 개가 ③ 죄들의 사면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이후에 침례와 죄들의 사면이 있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침례를 받는 것 이 두 가지를 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대하면서 신약 성경의 구원관이라는 차원에서 전체 문맥에 맞게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3. 사도행전 2장 38절
이와 관련해서 사도행전 2장 3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Then Peter said unto them, Repent, and be baptized every one of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or the remission of sins, and ye sha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Ghost.
여기도 자세히 보지 않고 대충 보면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침례교회의 여러 선한 목사님들 중 어떤 분들은 왜 이렇게 번역해서 물 침례를 통해 구원받는 것처럼 만들었느냐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이것이 올바른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도 세 가지가 나열되어 있습니다.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이 구절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회개, ② 침례, ③ 죄들의 사면
실제로 그리스어 구조를 보면 “회개하라”가 주동사로 되어 있고 “침례를 받아"라는 보조 동사로 되어 있으므로 죄들의 사면이 “회개하라”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두 구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① 회개(물론 믿음이 동반된), 이 하나가 ② 침례와 ③ 죄들의 사면의 근거이지 ① 회개와 ② 침례, 이 두 개가 ③ 죄들의 사면의 근거가 아닙니다.
즉 회개하고 나서 그 뒤에 침례와 죄들의 사면이 뒤따라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회개 + 물 침례’가 죄들의 사면의 근거가 아닙니다.
이런 구절들을 대하면서 신약 성경의 구원관이라는 차원에서 전체 문맥에 맞게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행2:38을 오역이라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죄들의 사면으로 인해(죄들의 사면 때문에)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얼핏 보면 이것이 침례교 교리에 맞는 것 같지만 그리스 말이나 영어의 구조와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for the remission of sins’라는 구는 신약 성경에 총 5회 나오며 동일한 그리스어 ‘에이스’(eis)가 ‘for’로 번역된 4구절, 즉 마26:28; 막1:4; 눅3:3; 행2:38을 보면 여기의 ‘for’가 모든 곳에서 동일하게 ‘위하여’의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어와 원어를 무시하면서 침례교 교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입니다.
대개 피터 럭크만과 그의 추종자들(대개는 킹제임스 성경의 이중 영감을 믿는 사람들)이 ‘죄들의 사면으로 인해’라고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그런 식으로 번역하려면 다음처럼 해야 더 정직한 것입니다.
죄들의 사면으로 인해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러나 이렇게 하면 구원 교리가 깨지므로 안 됩니다.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죄들의 사면이 있다고 하면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죄들의 사면으로 인하여'로 하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죄들의 사면으로 인하여'로 하려고 예수님을 슬쩍 집어넣어 해석합니다.
그러나 38절에는 '너희 각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므로 여기에 예수님을 넣으면 안 됩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즉 ① 회개, ② 침례, ③ 죄들의 사면, 이 세 가지는 모두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① 회개, ② 침례만 개개인에게 해당되고 ③ 죄들의 사면은 예수님이 하신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들을 대할 때 가장 좋은 선택지는 그리스어, 영어 등에 있는 것처럼, 지금 흠정역 마제스티 번역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번역하고 이런 구절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을 가지고 물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누가 주장하면 잘 설명해 주고 그래도 믿지 않으면 그런 분에게서 조용히 물러나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오해될 수 있는 성경의 증거 세 가지를 보여 주어도 안 믿기로 작정한다면 그 이상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특정 교리나 교파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문맥에 벗어나게 번역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알면서도 그리하면 그것에 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대적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노라(고후13:9).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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