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질문: 창조인가요? 재창조인가요? 간극 이론(갭 이론)은 무엇입니까?
대답: 그리스도인이 지구를 포함한 온 우주의 생성에 대해 의문을 갖고 생명체의 기원에 대해 탐구하는 일은 참으로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런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대를 말하고 있지 않으므로 성경 사건들의 연대를 담고 있는 주석 성경들도 창세기의 첫 부분에서는 대개 연대를 빼고 노아의 홍수나 바벨탑 사건부터 연대를 넣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진화론이 나오기 전까지 유대/기독교계는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창세기에 근거하여 지구를 포함한 온 우주의 생성 연대가 6,000년쯤 된 것으로 믿어 왔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까지는 불신자들조차도 흙덩어리에서 생명체가 나와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주 생성에 대하여 진화론자들의 ‘몇 십억 년 주장’과 성경의 ‘몇 천 년 주장’을 조화시켜 보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론은 소위 ‘간극 이론’(Gap theory) 혹은 ‘창조-파멸-재창조 이론’으로 불리는 가설입니다.
이 이론은 19세기 말부터 거의 한 세기 동안 많은 보수 크리스천들이 창조론을 지지하기 위해 채택한 것이었는데 사실 이 이론은 그 당시까지 우주의 생성 연대가 매우 짧음을 보여 주는 과학적 데이터가 부족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 헨리 모리스 박사 등을 중심으로 한 창조 과학자들이 우주의 생성 연대가 수천 년밖에 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하면서부터 이것은 크리스천 서클에서 영향력을 잃게 되었고 지금은 소수의 구세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근본주의 성경 신자들이 더 이상 ‘간극 이론’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피터 럭크맨(Peter Ruckman)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간극 이론’을 마치 확고한 성경 교리로 가르치면서 이 이론을 믿지 않으면 성경 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극단적 포교 활동을 해왔습니다. 또한 그들이 세운 말씀보존학회에서 출간한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창세기 1장 28의 ‘replenish’라는 단어를 ‘다시 채우다’로 번역하여 많은 혼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또한 장로 교단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이단 정죄를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무식한 언행을 일삼고 극단적으로 ‘간극 이론’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마치 ‘간극 이론’이 없으면 성경 해석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온 힘을 다해 이 교리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극 이론’은 영어, 교리, 과학적 데이터 등에서 수많은 허점을 갖고 있는 가정에 지나지 않으며 21세기에는 도저히 그 가능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가설입니다.
역자 역시 1985년경에 미국에서 라킨(Clarence Larkin)의 「세대에 따른 진리」(Dispensational Truths)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며」(Rightly Dividing The Word of Truths, 후자는 「성경 바로 보기」라는 제목으로 역자가 번역하여 도서출판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출간했음.)라는 책을 접하고 어찌나 즐겁게 그 책들을 읽고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특히 라킨이 ‘간극 이론’으로 창세기를 설명하면서 ‘창조-파멸-재창조’ 과정을 묘사하고 성경의 마귀들이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거처를 정하려고 하는 이유가 루시퍼 홍수 때에 지구가 파멸되면서 그들이 몸을 잃은 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을 때 참으로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도 라킨을 사랑하며 ‘간극 이론’을 빼고는 그의 책만큼 성경을 잘 다룬 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럭크맨 역시 라킨에게 큰 영향을 받아서 ‘간극 이론’의 신봉자가 되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럭크맨은 천재이며 다재다능하고 성경에 박식한 사람입니다. 그분이 주장하는 극단적인 요소들 -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는 믿음과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 - 과 또 자유주의자들과 자기 맘에 안 맞는 근본주의자들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것은 - 그의 책의 삼분의 일 정도는 남을 욕하는 것임 - 저도 매우 싫어하지만 그분의 성경 공부 주석이나 다른 책에는 남이 전해 주지 않는 훌륭한 요소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또한 저는 ‘간극 이론’을 확산시킨 매개체 역할을 한 스코필드 성경도 주석 성경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코필드와 라킨과 럭크맨이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여러 문헌을 보았고 영어 사전의 변천 과정을 보게 되었으며 특히 ‘간극 이론’의 폐해가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수용하기로 결심하고 그전까지 유보 상태로 지켜보던 ‘간극 이론’을 내버렸습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럭크맨 세대 - 약 70세 이상 된 세대 - 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간극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미국 크리스천들은 스스로 공부를 많이 하므로 바른 지식이 매우 보편화되어 있으며 그래서 틀린 것은 곧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 한국의 경우는 말씀보존학회의 지대한 공헌으로 말미암아 이미 미국에서 다 사라져 버린 ‘간극 이론’의 끝물을 맛보고 있는 셈입니다.
저희가 출간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판매되면서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구절이 바로 창세기 1장 28절이었습니다. 왜 거기 나오는 ‘replenish’를 ‘다시 채우다’로 하지 않고 ‘채우다’(충만하라)로 번역했는지 이유를 알려 달라고 하시는 분이 많았습니다. 그 동안 한영대역 성경을 내느라 여유가 없어서 답변을 못했으며 이제는 여러 질문에 대해 합당하게 답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간극 이론’과 ‘replenish’ 등에 대해 설명하려 합니다.
‘간극 이론’의 역사와 변천 과정, 신학적 폐해 등에 대해서는 저의 절친한 친구 제이 볼란(Jay Bolan)이 함께 신학을 공부하면서 변증학 과목의 ‘term paper’로 제출한 논문이 아주 좋은 자료가 되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많은 참고문헌과 함께 이 이론의 폐해 등을 잘 묘사하고 있으므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논문을 번역하면 좋겠지만 아주 쉬운 영어로 쓰여 있으므로 ‘간극 이론’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영어 본문 자체를 홈페이지에 올렸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글에서 ‘간극 이론’이 성립될 수 없는 이유 몇 가지만을 설명하겠습니다.
1. 영어 ‘replenish’에 대하여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좋다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을 보면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민중서관, 동아 출판사 등에서 나온 영한사전을 뒤적여 그 뜻을 찾고 그 구절을 해석합니다. 이렇게 해도 대개 큰 문제는 없지만 성경의 중요 단어들의 경우에는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가 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중서관의 「에센스 사전」이나 한글 워드프로세서에 있는 영한사전에 가서 ‘replenish’의 뜻을 찾으면 첫 번째 뜻이 ‘채우다’이고 두 번째 뜻이 ‘다시 채우다’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다닐 때 ‘re’는 ‘다시’라고 배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뜻을 무시하고 두 번째 뜻이 맞겠거니 하며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도 하지 않고 ‘replenish’는 ‘다시 채우다’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런 사람들과 말씀보존학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저희가 출간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창세기 1장 28절을 대하면 거기에 ‘다시’라는 말이 없으므로 역자들이 큰 실수를 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다시’를 넣은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참으로 바른 번역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킹제임스 성경 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20세기 영어 사전을 가지고 17세기 영어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loaf’하면 우리는 ‘덩어리’하고 생각하지만 17세기의 용례는 ‘loaf’가 그냥 빵입니다. 또한 ‘wheat’은 ‘밀가루’ 혹은 ‘밀’이라고 생각하지만 17세기에는 이 단어의 일차적 용례가 ‘알곡’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3장 12절의 경우 ‘자신의 알곡(his wheat)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로 해야 맞으며 ‘자신의 밀은 모아…’로 하면 오역이 됩니다. 필자 역시 예전에 이런 실수를 많이 범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독자의 질문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17세기 영어 단어의 용례를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영어 사전 중 가장 방대하고 단어의 어근과 기원을 자세히 보여 주며 시대별로 영어 단어의 변천을 잘 보여 주는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을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사전은 어떤 특정한 신학/사상에 물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뜻을 적어 놓았으므로 가장 객관적으로 영어 단어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어 단어의 근원과 변천 과정, 시대별 용례를 파악하지 않고 20세기 영어 사전으로 17세기 초에 기록된 킹제임스 성경을 볼 경우 특별한 구절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큽니다.
그러면 「옥스퍼드 사전」은 ‘replenish’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옥스퍼드 사전의 ‘replenish’ 용례
요약 : 「옥스퍼드 사전」은 두 가지 용례로 ‘replenish’를 설명하면서 각 용례에 대해 처음으로 문헌에 이 단어가 나타난 연도를 보여 줍니다. 어느 사전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사전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뜻이 그 단어의 근본 어의입니다. 「옥스퍼드 사전」은 분명하게 ‘replenish’의 근본 어의가 ‘채우다’임을 보여 주며 그 뜻을 가진 많은 용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용례는 많아서 생략했고 처음 나오는 연도만 발췌했음). 맨 마지막 뜻으로 ‘다시 채우다’가 있지만 이것이 나타나는 것은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된 1611년 이후이고 그 용례도 극히 적습니다.
그러면 「옥스퍼드 사전」만 그런가, 아니면 18-19세기의 다른 사전도 그런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1차적 참고자료인 「옥스퍼드 사전」 다음으로 참고할 가치가 있는 사전은 미국 영어 사전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웹스터 사전」입니다. 웹스터는 매우 독실한 신자였으며 그가 1828년에 출간한 영어사전 초판은 미국 영어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된 이후로 200년 동안 영어가 정착되면서 과연 웹스터 시대의 사람들은 ‘replenish’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웹스터 사전」 초판(1828년 출간)은 특히 단어의 뜻을 설명하면서 그 뜻에 해당하는 킹제임스 성경 구절을 주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참으로 매우 유용합니다.
1828년 웹스터 사전 초판의 ‘replenish’ 용례
요약 : 「웹스터 사전」(초판)은 ‘replenish’가 창세기 1장 28절에 있는 것처럼 타동사로 쓰일 때 그 뜻이 ‘채우다’임을 분명히 보여 주며 더욱이 ‘채우다’는 뜻을 가진 이 단어의 용례를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1장 28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동사로는 ‘이전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있지만 창세기 1장 28절은 타동사이므로 그 뜻을 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한 단어에 대한 사전의 정의가 항상 변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기존에 쓰던 것과 다른 의미로 한 단어를 많이 쓰기 시작하면 사전은 당연히 그 세대 사람들이 그 단어로 의미하는 바를 나타내려고 새로운 뜻을 사전에 담기 시작합니다. ‘replenish’ 역시 이런 변천 과정을 겪었습니다. 다음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replenish’의 뜻을 보여 주자 ‘간극 이론’을 추종하는 한 분이 ‘1913년도에 나온 웹스터 사전’을 제게 보여 주면서 거기의 첫 번째 뜻이 ‘다시 채우다’(1. To fill again after having been diminished or emptied; to stock anew; hence, to fill completely; to cause to abound.)로 되어 있다고 하면서 아주 기뻐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1828년에 나온 「웹스터 사전」 초판과 「옥스퍼드 사전」의 용례를 보여 주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1913년도 경에는 ‘replenish’라는 단어가 ‘다시 채우다’의 뜻으로 많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크리스천들이 진화론과 맞서기 위해 창세기 1장 28절의 ‘replenish’를 ‘다시 채우다’로 해석하기 시작했고 사회가 그와 같은 의미를 수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채우다’와 ‘다시 채우다’가 둘 다 쓰이고 있으며 우리의 영한사전들 역시 ‘채우다’를 먼저 놓고 그 뒤에 ‘다시 채우다’의 의미를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어 사전을 통해 얻은 결론은 무엇입니까?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된 1611년경에는 ‘replenish’가 ‘다시 채우다’로는 쓰이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채우다’로만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어 사전의 용례만 이것을 뒷받침할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그 안에 ‘내장 사전’(a built-in dictionary)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문맥에서 쓰인 단어들을 조사하여 비교해 보면 한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게일 리플링거가 지은 「킹제임스 성경의 언어」(The Language of the KJB)라는 책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창세기 1장 22절과 28절을 비교해 봅시다.
이 두 구절은 같은 문맥에서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or replenish)…”라는 동일한 구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22절은 ‘fill’이니까 창조이고 28절은 ‘replenish’이니까 재창조라고 말할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똑 같은 문맥이며 심지어 히브리어도 두 구절이 동일합니다. 이 같은 성경의 ‘내장 사전’을 통해서도 우리는 28절의 ‘replenish’가 22절의 ‘fill’과 같음을 성경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만이 주는 ‘내장 사전’(Built-in dictionary)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replenish’라는 단어는 영어 사전의 용례로 보나 성경 ‘내장 사전 기능’에 의한 용례로 보나 그 뜻이 ‘채우다’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은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충만히 채우라’는 뜻이며 뒷부분을 개역성경처럼 ‘땅에 충만하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땅에서 번성하고 또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뒤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주님께서는 역시 창세기 9장 1절에서 똑같은 단어들을 사용하셔서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 영어 ‘become’의 용례
‘간극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세기 1장 2절의 첫 부분 즉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에 나오는 ‘was’가 상태를 나타내는 ‘was’가 아니라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became’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었다.”가 아니라 “땅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게 되었다”로 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창세기 1장 2절이 루시퍼의 반역으로 인한 파멸을 나타내며 이때에 땅이 저주를 받아 형태가 없고 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최종 권위인 킹제임스 성경이 ‘was’라 말하지 ‘became’이라 말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원어로 돌아가야 된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그래서 ‘was’에 상응하는 원어가 ‘became’으로 번역된 창세기 19장 26절을 들고 나와 창세기 1장 2절이 사실은 상태를 나타내는 ‘was’가 아니라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became’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이처럼 고무줄처럼 늘이고 싶은 대로 늘일 수 있는 그런 것일까요?
‘간극 이론’이 성립되려면 창세기 1장 2절이 주어와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는 동사 술어로 구성된 ‘동사구’(verbal clause)가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그 구절은 주어와 명사 술어로 구성된 ‘명사구’(noun clause)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이런 ‘명사구’는 상태를 나타내지 시간의 변화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명사구’는 어떤 용례로 쓰일까요?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런 ‘명사구’의 용례가 매우 많이 나오므로 그런 용례들을 찾아보면 창세기 1장 2절의 ‘명사구’가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런 형태의 ‘명사구’는 어떤 행동이 잠시 멈추어진 것을 의미하며 보통 ‘이접적 구절’(disjunctive clause)이라 불립니다.
먼저 ‘이접적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창세기 1장의 용례를 통해 살펴보고 그 뒤 성경의 다른 용례들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1장 1-3절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절에서 하늘과 땅(지구)을 창조하셨으며 3절에 들어가면서 다른 일을 하시기 전에 2절에서 땅(지구)의 상태가 어떤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이접적 구절’은 성경에 매우 많습니다.
예 1: 창2:11-14
여기서는 둘째 강에 대해 말하기 전에 하윌라 땅의 금에 대한 설명이 있으며 이런 ‘이접적 구절’ 다음에 곧바로 둘째, 셋째. 넷째 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첫째 날, 둘째 날,…여섯째 날의 일을 설명하기에 앞서 단순히 1장 2절에서 지구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 2: 삼상4:14-16
여기서도 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기에 앞서 엘리의 상태가 어떤지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예 3: 욘3:3-4
여기서도 요나가 다음 행동을 하기에 앞서 니느웨의 상태를 설명하는 ‘이접적 구절’이 나옵니다. 특별히 창세기 1장 2절의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와 요나서 3장 3절의 “Nineveh was an exceeding great city”를 유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들은 바로 전 구절에 나오는 것들 -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는 땅, 요나서에는 니느웨 - 의 상태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요나서 3장 3절의 ‘was’를 취하여 ‘became’으로 해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니느웨는…큰 도시가 되었더라.”로 되며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로 창세기 1장 2절을 상태로 받아들여야지 - ‘was’를 그대로 ‘was’로 - 존재하지도 않은 시간의 간극을 도입하기 위해 시간의 변화로 - ‘was’를 ‘became’으로 -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3. 영어 ‘without form and void’의 용례
‘간극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형태가 없고 비어 있다’(without form and void)가 루시퍼의 반역으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로 지구가 파멸되어 형태가 없고 공허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이접적 구절’을 이해하면 이런 주장을 쉽게 일축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형태가 없고 비어 있다’(without form and void)는 아직 땅(지구)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땅(지구)에 식물, 동물, 물고기, 새, 사람 등을 채워 넣지 않았으므로 땅(지구)이 비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지구가 아직 육지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고 모든 것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뜻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간극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곧장 이사야서 34장 11절과 예레미야 4장 23절 등으로 달려가서 반론을 펴려고 하지만 이 두 구절은 문맥상으로 보아 분명하게 주의 날의 심판을 가리키며 그들이 원하는 것 즉 루시퍼의 반역으로 인한 창세기 1장의 가상적 파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파멸은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으며 그들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4. 간극 이론은 성경의 교리와 배치된다.
‘간극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창세기 1장 2절과 3절 사이에 수십억 년이 넘는 시간이 들어 있을 수 있으므로 진화론자들의 주장과 성경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엄청난 시간의 간극을 도입하여 성경이 소위 과학이라 불리는 헛된 것에 맞도록 타협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들은 많은 화석들이 창세기 1장 2절의 루시퍼 홍수 때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곧 창세기 1장 2절 이전에 이미 식물과 동물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김기동 목사를 추종하는 베뢰아 파는 이때의 사람들은 영이 없는 존재들로 바로 이들이 네안데르탈인 등의 원시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베뢰아 파 중 많은 이들이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하고 옹호합니다. 왜냐하면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 그들이 주장하는 이중 아담론의 근거를 멋있게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창조의 여섯째 날에 창조된 아담은 루시퍼의 반역으로 인해 생성된 화석 더미 위를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하게 식물과 동물이 창세기 1장 2절 이후에 창조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화석이 형성되려면 반드시 생물체가 죽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 12절은 무어라 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이 세상에 사망이 임한 것은 첫 사람 아담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전에는 결코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화석이 생성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간극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담 이전에 다른 종족(Pre-Adamic race)이 살았다고 말하며 이들이 루시퍼 홍수 때 다 죽어 마귀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로마서 5장 12절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모든 인류의 조상은 첫 사람 아담이며 그가 죄를 지음으로 사망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행17:26). 그런데 ‘간극 이론’은 성경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교리를 조장하므로 매우 위험합니다.
구약 성경은 유대인들의 책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유대인도 재창조 같은 것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유명한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책 등을 보아도 인류의 기원은 구약 성경 창세기에 있는 대로 지금부터 6,000년 전으로 정확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고대 유대인 역사’(Antiquities of the Jews)를 보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9장 6절에서부터 38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유대인들을 구원해 주신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창조 같은 것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유대인들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지적하려 합니다. 한국의 ‘간극 이론’ 지지자들은 창세기 1장 12절에 있는 ‘was’라는 단어를 인용해서 재창조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씨가 이미 ‘그 속에’(in itself) 있었으니 재창조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문맥에서 벗어난 억지 주장입니다. 여기의 ‘in itself’는 ‘열매 속에’를 뜻하지 ‘땅 속에’를 뜻하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에 ‘was’가 쓰인 것은 시제를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즉 맨 앞에 ‘brought forth’가 과거로 되어 있으므로 시제를 맞춘 것이며 특히 여기의 ‘was’는 이탤릭체로 되어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바로 앞 구절을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grass,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yielding fruit after hi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똑 같은 구절인데 여기는 시제를 맞추기 위해 ‘is’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여기의 ‘is’ 역시 이탤릭체입니다. 이것은 곧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말이 통하도록 ‘was’나 ‘is’를 첨가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가지고 ‘간극 이론’을 지지하려고 하면 물이 새나갑니다. 결코 물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한편 출애굽기 20장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극 이론’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 구절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를 가리킴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는 같은 저자인 모세가 기록한 것이며 이 두 책의 하루는 모세가 살던 시대의 하루 즉 지금의 24 시간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결코 창세기 1장 2절과 3절 사이에 엄청난 심연의 기간이 있었고 죽음이 이미 존재해서 화석이 형성되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끝으로 우리 주 예수님 역시 분명하게 창조를 지지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혼하는 문제로 그분을 시험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분명하게 창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6절에서 분명하게 ‘창조의 시작부터’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이것은 창1:27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간극 이론에 따르면 창1:27은 ‘재창조 이후의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 그들 - 아담과 이브 - 를 창조한 때가 바로 ‘창조의 시작’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신학을 위해 예수님의 말씀도 거역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성경을 신뢰하면 이런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 ‘재창조’라는 말이 나옵니까?
이 모든 것은 19세기말 진화론의 거센 물결에 대항하기 위해 좋은 의도로 근본주의 신자들이 성경을 재해석함으로써 생긴 큰 오류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결코 스코필드나 라킨이나 럭크맨 혹은 반하우스 같은 구시대 ‘간극 이론’ 지지자들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국내에서 말씀보존학회를 구성한 극단주의자들의 획일적 해석으로 시퍼렇게 멍든 킹제임스 성경의 입지를 다시 세우고 성경이 잘못돼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김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스코필드나 라킨 같은 분들을 말씀보존학회 사람들 같이 쌍욕이나 하는 추잡한 사람들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들은 삶에서 선한 간증이 있었으며 거듭난 사람으로서 훌륭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럭크맨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쓸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만일 럭크맨이 말씀보존학회의 무식하고 비열한 언행을 알았더라면 그 역시 그들을 지독히 멸시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증거를 보여 주어도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내 신학 즉 럭크맨 주의에 근거해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신학에 앞서 성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뜯어 고쳐서 자기의 주장을 펴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곧장 잘못을 고치고 성경을 수용하는 것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의 바른 태도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면서 “성경을 100번 이상 읽은 럭크맨이 그렇게 믿는데 나는 10번도 못 읽었으니 그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반 동안 직접 모신 사람입니다. ‘말씀’(The WORD)이신 분, 바로 그분을 따라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를 따른다면 말이 됩니까? 성경이 객관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보고 자기 의견을 거기에 맞추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구의 생성 연대가 매우 짧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은 매우 많습니다. 본 사이트에 들어와서 ‘창조와 진화’난에서 ‘지구의 생성 연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형제/자매님에게 하나님의 인도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