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창세기 2장 7절: "생령인가, 살아 있는 혼인가?" 서론 – 혼(soul)을 ‘생명’ 또는 ‘생령’으로 번역하면 왜 문제가 되는가? 창세기 2장 7절은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말해주는 구절로서, 인간론과 구원론의 기초를 놓는 가장 중요한 말씀 중 하나이다.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이 구절은 "호흡하는 혼(living soul)"이라는 의미를 가진 "네페쉬 하야"(נפש חיה)로 끝난다. 하지만 개역 성경은 이를 "생령"으로 옮겼고, 일부 현대 번역본은 더 나아가 "생명이 되었다"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이러한 번역은 단어 하나 차이처럼 보이지만, 성경의 인간 이해, 구원론, 그리고 성육신의 교리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치명적인 오역이다. 히브리어 '네페쉬'는 호흡하는 생명체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에서 파생되었고, "혼(soul)"으로 가장 흔히 번역된다. 구약 전체를 통틀어 네페쉬는 짐승, 사람, 심지어 시체까지 살아 있거나 한때 살아 있었던 생명체 전체를 가리킨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이를 '영'으로 해석해 ‘생령’이라 번역했으며, 이는 혼과 영을 뒤섞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혼과 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번역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기록된 아담과 예수님의 비교에서도 명백하게 오류로 드러난다. 창세기 2:7의 원문과 그 구조 히브리어 원문에서 창 2:7은 매우 구조적으로 짜여 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네샤마)을 그의 코에 불어넣으셨고, 그 결과 사람은 ‘네페쉬 하야’, 즉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혼’은 여기서 감정과 지성과 의지를 갖춘 전인격적 존재로서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짐승에게도 사용된다. 바다의 생물이나 공중의 새도 '네페쉬 하야'로 불리며, 이는 네페쉬가 결코 '영적인 존재' 또는 '불멸의 혼령'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단어는 따로 있으며 그것은 ‘루아흐’이다. 혼(soul)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성경은 혼이 살아 있는 인격체 자체임을 명백히 증언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7장 37절에서는 바울과 함께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276 혼"이라 불린다. 이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숫자를 셀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 시편 107편 18절에서는 혼이 음식을 싫어하고 죽음에 가까이 이른다고 한다. 이는 혼이 단순한 정신이 아니라 감정과 생리 기능까지 가진 인격체임을 보여준다. 혼은 빵을 먹고, 두려워하며, 침례를 받고, 구원을 얻는다. 따라서 혼을 단순한 ‘영적 기능’이나 ‘의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성경은 혼과 영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언급한다. 이사야 57장 16절에서는 "이는 영과 또 내가 만든 혼들이 내 앞에서 쇠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분명히 혼과 영을 서로 다른 실체로 구분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 명확한 구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하여 신약에서 재확인하는 말씀이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살아 있는 혼’은 헬라어로 프쉬케(ψυχή), ‘살려 주는 영’은 프뉴마(πνεῦμα)이다. 개역 성경은 이 절에서 프쉬케를 '산 영'이라고 번역함으로써 혼과 영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 원문에서 프쉬케는 언제나 혼을 뜻하고, 프뉴마는 영을 뜻한다. 둘을 동일하게 번역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된 대조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께서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시고 말씀하셨는데, 인간 번역자가 이를 마음대로 섞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표현의 또 다른 문제점 창세기 2:7을 ‘생명이 되었다’로 번역할 경우, 혼이 아닌 어떤 ‘기능’이나 ‘에너지 상태’로 해석될 위험이 생긴다. 이로 인해 사람은 단지 호흡하는 유기체로 축소되며, 성경이 말하는 ‘혼’이라는 전인격적 존재 개념이 사라진다. 예를 들어 민수기 19장 13절에서는 죽은 시체를 ‘죽은 혼’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혼은 죽은 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일 ‘혼’을 ‘생명’으로 번역하면, 이 구절은 ‘죽은 생명’이라는 모순된 문장이 된다. 실제로 성경은 혼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한다. 수 10:28에서는 여호수아가 한 도시 안의 모든 혼을 칼로 멸했다고 한다. 만약 혼이 추상적이거나 비물질적 존재라면, 어떻게 칼로 그것을 죽일 수 있겠는가? 베레아 이단의 잘못된 교리의 뿌리 한국 교회 안에 광범위하게 퍼진 이단인 베레아(성락교회)는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을 구별하여, 창 1장의 사람은 ‘영 없는 짐승 인간’이고 창 2장의 아담이야말로 최초의 ‘영을 가진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설은 바로 창 2:7을 “생명이 되었다”거나 “산 영이 되었다”고 번역하는 데서 출발한다. 즉, 창세기 1장의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체였고, 창 2장에서 비로소 ‘영이 들어가서’ 영적 인간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두 단계로 창조하지 않았다. 창 2:7은 ‘혼’을 지닌 인격적 인간의 창조이며, 이는 단회적이고 완전한 창조 사건이다. 이러한 이단 교리는 귀신론과 점술, 내적 치유라는 이름의 미신적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교회를 혼란케 하고 있다. 예수님의 증언과의 충돌 누가복음 24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영은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아담이 ‘산 영’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담에게는 살과 뼈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2장 21~23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기록한다. 이는 아담에게 살과 뼈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영’이 아니라 ‘혼’이라는 해석이 맞다는 증거이다. 결론 – 혼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성경의 언어적, 문맥적, 신학적 흐름을 종합하면, 창세기 2장 7절은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고 번역해야 옳다. 개역 성경의 “생령”, “생명”은 문맥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교리적 오류를 낳으며, 이단적 주장에 악용될 소지가 크다. 혼은 단지 감정이나 의식이 아니라, 전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창 2:7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지으신 몸에 하나님의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인격체, 곧 혼이 되게 하셨다는 의미다. 성경의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교리와 신앙의 기초를 이룬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혼’을 혼이라 부르고, ‘영’을 영이라 부르는 성경적인 언어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이를 바르게 나누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킹제임스 흠정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