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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 마태복음 12장 40절의 ‘고래’와 큰 물고기조회수 : 18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6년 11월 6일 13시 31분 9초
  • 마태복음 12장 40절의 ‘고래’와 큰 물고기


    요나의 표적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주지 않겠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배 속에 있었던 것같이 그렇게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마 12:40)


    영어 킹제임스 성경도 “in the whale’s belly”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개역개정)라고 번역한다. NIV도 “a huge fish”, ESV도 “the great fish”라고 옮긴다. 같은 말씀인데 한쪽은 ‘고래’라 하고 다른 쪽은 ‘큰 물고기’라 한다. 이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정확하게 옮기느냐의 문제이다.


    요나서의 ‘큰 물고기’와 예수님의 ‘고래’


    먼저 요나서를 보자. 요나서는 요나를 삼킨 것을 ‘큰 물고기’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주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그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더라.”(욘 1:17)


    킹제임스 성경도 요나서에서는 ‘큰 물고기’라고 번역한다. 히브리어 본문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는 ‘고래’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번역이 오락가락한 것이 아니라 두 본문이 실제로 서로 다른 단어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생물들의 이름을 짓기 전에 이미 큰 고래들을 따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셨다.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이 풍성히 낸, 움직이는 모든 살아 있는 창조물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 창조하시니라.”(창 1:21)


    요나서가 ‘큰 물고기’라고만 기록한 그것이 바로 이 고래였음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직접 밝혀 주신 것이다. 구약이 넓게 말한 것을 신약에서 주님께서 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케토스’와 ‘익투스’


    신약 성경의 그리스어에는 물고기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로 ‘익투스’(ἰχθύς)가 있다. 예수님께서 “혹은 그가 생선을 구하면 그에게 뱀을 주겠느냐?”(마 7:10)라고 하실 때의 ‘생선’도, 베드로에게 “처음 올라오는 물고기를 잡으라”(마 17:27)라고 하실 때의 ‘물고기’도 모두 익투스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요나를 삼킨 것은 익투스가 아니라 ‘케토스’(κῆτος)이다. 케토스는 고래와 같은 거대한 바다 짐승을 가리키는 말로, 평범한 물고기를 뜻하는 익투스와는 다른 단어이다. 영어에서 고래학을 ‘시톨로지’(cetology), 고래류를 ‘시테이션’(cetacean)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케토스에서 나온 말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익투스를 쓰지 않고 케토스를 썼다. 성경이 이렇게 단어를 구별해 놓았는데, 그것을 다시 ‘큰 물고기’로 옮기면 본문이 일부러 해 놓은 구별을 번역자가 지워 버리는 셈이 된다. 게다가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큰 고래들을 물고기와 따로 기록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2장 40절의 케토스를 ‘큰 물고기’로 번역한 것은 단어의 구별도, 성경 전체의 용례도 살리지 못한 틀린 번역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 구별을 그대로 살려 케토스는 ‘고래’로, 익투스는 ‘물고기’로 번역했다. 이것은 킹제임스 성경만의 독특한 선택도 아니다. 영어 성경 번역의 출발점인 틴들 성경과 그 뒤의 제네바 성경도 이 구절을 이미 “the whale’s belly”, 곧 ‘고래 배 속’이라고 번역했다.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고래는 포유류이고 물고기가 아니므로 요나서의 ‘큰 물고기’와 마태복음의 ‘고래’가 서로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생물 분류를 성경에 억지로 들이대는 것이다. 성경 시대의 히브리어에서 ‘물고기’는 물속에 사는 생물을 넓게 가리키는 말이었고, 고래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요나서는 그것을 물속 생물이라는 넓은 이름으로 불렀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어떤 생물이었는지를 정확히 밝히셨다. 두 기록은 서로 부딪치지 않는다.


    또 요나서는 주께서 그 생물을 “이미 …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고 말한다(욘 1:17). 사람이 고래 배 속에서 사흘을 지냈다는 것이 자연의 이치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사건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이 일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기적이었다.


    사본이 아니라 번역의 문제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의 ‘케토스’는 사본에 따라 달라지는 단어가 아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바탕이 된 공인 본문이나 현대 역본들이 따르는 비평 본문이나 모두 이 자리에 케토스가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차이는 사본의 차이가 아니라 번역의 차이이다.


    실제로 현대 영어 역본 가운데에도 NASB는 이 단어를 “the sea monster”(바다 괴물)로 옮겨 평범한 물고기와 구별한다. 같은 그리스어 본문을 놓고도 어떤 번역은 단어의 구별을 살리고 어떤 번역은 지워 버린다. 킹제임스 성경은 원문의 단어 하나하나를 존중하여 옮겼기 때문에 이 구별을 지켜 낼 수 있었다.


    고래 배 속의 요나와 예수님의 부활


    요나의 표적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요나서 2장은 요나가 “지옥의 배 속에서” 부르짖었다고 기록하고(욘 2:2), 요나 자신이 “주께서 내 생명을 썩음에서 끌어 올리셨나이다.”(욘 2:6)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시편도 같은 말을 쓴다.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시 16:10)


    요나서와 시편은 똑같이 ‘지옥’과 ‘썩음’을 말한다. 시편 16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듯이, 필자는 요나서의 이 표현도 요나가 고래 배 속에서 실제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것을 말한다고 이해한다. 요나가 살아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요나가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그만큼 더 온전하게 보여 주는 표적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요나 사건을 실제로 일어난 역사로 말씀하셨고, 요나를 삼킨 그 생물까지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셨다. 요나가 고래 배 속에 밤낮으로 사흘 동안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계시다가 다시 일어나셨다.


    맺음말


    ‘고래’와 ‘큰 물고기’는 작은 차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이 물고기와 고래를 구별하고, 마태가 평범한 물고기가 아닌 다른 단어를 기록했다면, 번역자는 그 구별을 그대로 옮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단어도 헛되지 않다. 킹제임스 성경이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고래’라고 번역한 것은 원문의 단어를 정확하게 지켜 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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