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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시편 119편 9절)

  • 침례자 요한의 침례, 성령 침례, 불 침례, 그리고 교회 시대의 물 침례 — 경륜적 구분에 대한 성경적 고찰조회수 : 450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26년 2월 18일 10시 23분 38초
  • 침례자 요한의 침례, 성령 침례, 불 침례, 그리고 교회 시대의 물 침례

    — 경륜적 구분에 대한 성경적 고찰


    서론

     

    침례(baptism)에 관한 성경적 이해는 경륜적 구분을 올바로 적용할 때에만 바르게 정립된다. 침례자 요한의 침례, 오순절의 성령 침례, 마태복음 3장 11절의 불 침례, 그리고 교회 시대의 물 침례는 각각 그 대상과 목적과 성격이 다르다. 이 구분을 무시하면, 요한의 침례를 교회 시대의 침례와 혼동하거나, “불 침례”를 성령 체험으로 왜곡하거나, 나아가 교회의 시작점 자체를 오해하는 신학적 오류에 빠지게 된다. 본 논고는 관련 성경 본문들을 순서대로 추적하여, 침례에 관한 경륜적 전환의 흐름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제1장. 침례자 요한의 침례 — 그 기원과 목적

     

    1. 요한의 침례는 어디에서 왔는가

     

    침례자 요한은 어디에서 침례를 알았으며,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당시 유대 사회에 그러한 회개의 풍습이 존재했는가? 이 질문은 요한의 침례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이에 대한 성경적 답은 명확하다. 요한의 침례는 인간적 전통이나 당시 종교적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사명이었다.

    누가복음 3장 2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니라.”

     

    요한의 사역은 어떤 랍비 학교의 교육이나 종교적 운동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것은 구약의 대언자들이 소명을 받는 방식과 동일하다(렘 1:2, 겔 1:3, 호 1:1).

     

    더 결정적인 구절은 요한복음 1장 33절이다. 요한 자신이 이렇게 증언한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게 하신 분, 바로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성령이 누구에게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 사람이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분이니라, 하셨기에”

     

    여기서 “물로 침례를 주라”는 명령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이며, 요한은 자신을 “보내신 분”(he that sent me)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힌다. 따라서 요한의 침례의 궁극적 기원은 하나님의 직접적 명령이다. 요한이 에세네파 공동체(쿰란)에서 배웠다거나, 당시 유대교의 개종자 침례를 모방했다거나 하는 추측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누가복음 1장 80절은 “아이가 자라면서 영이 강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날까지 광야에 있더라.”라고만 기록할 뿐, 요한이 어떤 공동체에 속했다는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2. 구약의 정결 의식 — 침례의 토대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물로 침례를 주라고 명하셨을 때, 이것은 아무런 토대 없이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 아니었다. 구약 성경에는 이미 물로 씻는 의식적 행위가 여러 형태로 존재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그 개념에 익숙했다.

     

    제사장의 씻음에 관하여 출애굽기 29장 4절은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중의 성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그들을 씻기고”라고 명한다. 출애굽기 30장 19–21절에서는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는 것이 제사장의 의무로 명해졌으며, 이를 어기면 죽는다고 경고한다. 레위기 16장 4절에서 대제사장은 속죄일에 성소에 들어가기 전 물로 몸을 씻어야 했다.

     

    나병 환자의 정결 의식(레 14장), 유출이 있는 자의 정결(레 15장), 죽은 몸을 만진 자의 정결(민 19장), 그리고 나아만이 엘리사 대언자의 명에 따라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근 사건(왕하 5:10–14)에 이르기까지, 물로 씻는 것과 정결함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의식 전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에스겔서 36장 25절은 “그때에 내가 정결한 물을 너희에게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되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너희의 모든 우상들로부터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라고 예언하여, 물로 씻는 것과 영적 정결·회개를 결합하는 개념을 이미 제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율법을 통해 마련해 두신 정결 의식의 토대 위에서, 요한에게 메시아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기 위한 새로운 목적의 침례를 명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에 잠긴다"는 행위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3. 그럼에도 요한의 침례가 독특했던 이유

    당시 유대 사회에 물로 씻는 관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의 침례가 큰 파장을 일으킨 이유가 있다.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어 “네가 그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대언자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요 1:25)라고 따진 것은, 요한의 행위가 단순한 의식적 세정과는 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첫째,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침례를 주었다. 기존의 의식적 씻음은 레위 율법에 따라 특정 상황(부정함, 제사장 임직 등)에서 행해지는 것이었지, 이스라엘 전체를 향해 “회개하고 침례를 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요한은 이미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침례를 시행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스스로 깨끗하다고 여기는 자존심에 도전한 것이다.

     

    둘째, 요한의 침례는 회개와 결합된 일회적 행위였다. 레위기의 정결 의식이나 유대인의 미크베(의식적 침수 목욕)는 반복적이었으나, 요한의 침례는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로서 한 번 행해지는 결단적 행위였다.

     

    셋째, 요한의 침례는 메시아적·예언적 권위를 수반했다. 요한은 단순한 제사장이 아니라 대언자로서(눅 1:76, “아이야, 너는 가장 높으신 분의 대언자라 불리리라”),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하며 침례를 주었다. 그래서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의 권한의 근거를 따진 것이다.

     

    4. 요한의 침례의 목적과 대상 — 오직 이스라엘

    요한의 침례 사역의 범위와 대상은 요한복음 1장 31절에서 명확히 규정된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그분께서 이스라엘에게 드러나셔야 하므로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노라.”

     

    이 구절은 요한의 침례 목적이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게 하려는 것”(that he should be made manifest to Israel)이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방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를 드러내기 위한 예비적·경륜적 사역이었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요한의 침례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에게 한정된 사역이었으며, 교회 시대의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 아니었다.

     

    또한 요한의 침례는 “회개의 침례”(막 1:4, 행 13:24, 행 19:4)로서,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목적을 지녔다. 이 침례는 아직 그리스도의 죽음·장사·부활이 완성되기 이전에 시행되었으며, 따라서 교회 시대의 성령 내주(內住)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제2장. 성령님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음 — 요한복음 7장 39절

     

    요한의 침례가 오순절 이후의 성령 침례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7장 39절이 제공하는 경륜적 열쇠를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더라.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아직 성령님이 주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이 구절이 밝히는 사실은 세 가지이다.

     

    첫째, 구약 시대와 복음서 시대에 성령님은 특정 목적을 위해 특정 사람에게 임하셨지만, 모든 믿는 자에게 영구적으로 내주하시는 방식으로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둘째, 성령님이 이 새로운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 받으심, 곧 그분의 죽음·부활·승천 이후에야 가능했다.

     

    셋째, 따라서 침례자 요한의 사역 기간 동안 침례를 받은 자들은 오순절에 시작된 성령 침례의 은혜 아래 있지 않았다.

    이 점이 바로 요한의 침례와 오순절 이후 교회 시대의 침례를 본질적으로 구분하는 신학적 근거가 된다. 동시에 이것은 “침례자 요한부터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라는 주장이 왜 성경적으로 불가능한지를 보여 주는 핵심적 증거이기도 하다.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시점에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3장. 침례자 요한부터 교회 시대라는 주장의 오류

     

    1. 그 주장의 내용

    일부에서는 침례자 요한의 사역이 시작된 때부터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와 유사하게,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이미 교회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성경의 경륜적 구분을 심각하게 무시하는 오류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다. 침례자 요한은 신약 교회 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구약 시대의 마지막 대언자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율법과 대언자들은 요한까지였고 그때 이후로는 하나님의 왕국이 선포되어 사람마다 거기로 밀고 들어가느니라.” (눅 16:16)

    이 말씀은 율법과 대언자들의 시대가 요한까지 이어졌음을 선언한다.

    요한은 새로운 교회 시대의 창시자가 아니라, 구약적 경륜의 마지막에 서서 메시아를 예비한 인물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가운데 가장 큰 자”(마 11:11)라고 하시면서도, 동시에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그보다 크다”고 하셨다. 이것은 요한이 구약 질서에 속한 인물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는 위대한 대언자였으나, 교회 안에 속한 자는 아니었다.

     

    2. 요한의 침례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된다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요한 자신이 “그분께서 이스라엘에게 드러나셔야 하므로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노라.”(요 1:31)라고 선언하였다. 요한의 사역 전체는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된 교회 시대의 사역이 아니었다. 바울도 이 사실을 확인한다. “참으로 요한이 회개의 침례로 침례를 주며 백성에게 말하여 그들이 자기 뒤에 오실 분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느니라.”(행 19:4). 여기에서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엡 2:14–16, 3:6). 그러나 요한의 사역 기간에는 이러한 연합이 존재하지 않았다. 요한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사역하였으며, 이방인에게 침례를 준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요한의 사역을 교회 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교회의 정의 자체와 모순된다.

     

    3.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에 교회가 존재했다는 주장의 오류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에 이미 교회가 존재했다는 주장 역시 성경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요한복음 7장 39절이 분명히 밝히듯이,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에는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더라.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아직 성령님이 주어지지 아니하였더라.)”

    교회는 성령에 의해 한 몸으로 침례를 받음으로써 성립하는 것인데(고전 12:13),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

     

    둘째, 예수님 자신이 교회를 아직 미래의 것으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의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에서 “세우리니”(will build)는 미래 시제 표현이다. 교회가 이미 존재했다면 미래 시제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셋째,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었다. 주님 자신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어지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라고 말씀하셨으며, 열두 제자를 보내실 때에도 “이방인들의 길로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마 10:5–6)고 명하셨다. 이것은 교회 시대의 “모든 민족에게 가라.”(마 28:19)는 대위임 명령과 분명히 구분되는 경륜이다.

     

    4. 다니엘의 칠십 이레와 교회 시대의 위치

    다니엘의 칠십 이레 예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교회의 시작과 위치를 혼동하게 된다. 교회의 시작점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다니엘의 칠십 이레 예언(단 9:24–27)의 시간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다니엘서 9장 24절은 “주께서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시에게 칠십 이레를 정하셨나니”라고 시작한다. 여기에서 “네 백성”은 이스라엘이요, “네 거룩한 도시”는 예루살렘이다. 칠십 이레(70주, 490년)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표이지,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칠십 이레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육십구 이레(69주, 483년)는 예루살렘 재건 명령으로부터 메시아가 끊어지는 사건, 곧 십자가 사건까지이다. 다니엘 9장 26절은 “육십이 이레 뒤에 메시아가 끊어질 것이나 그것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예언한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사실은 육십구 이레와 칠십 번째 이레(마지막 1이레, 7년)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점이다. 육십구 이레가 메시아의 십자가 사건에서 끝난 후, 칠십 번째 이레(7년 환난기)가 즉시 시작되지 않았다. 이 간격이 바로 교회 시대이다. 다니엘의 칠십 이레는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이므로, 교회 시대는 이 예언의 시간표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교회 시대는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예언적 시계가 멈춘 기간이며, 교회가 휴거된 이후에 칠십 번째 이레(7년 환난기)가 시작될 것이다.

     

    이 구조는 교회의 시작이 침례자 요한의 사역이나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아니라, 오순절의 성령 침례에서 비롯됨을 확증한다. 육십구 이레가 끝나는 시점(십자가)까지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진행 중이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부활·승천 이후 성령이 임하심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제4장. 오순절 — 교회의 시작과 성령 침례 (사도행전 1장 4–5절, 2장)

     

    1. 주님의 명령과 약속 — 사도행전 1장 4–5절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시고 약속하셨다.

    “또 그들과 함께 모이사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느니라.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너희가 내게서 들었나니 이는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시느니라.” (행 1:4–5)

     

    이 구절에서 주님은 몇 가지 결정적인 사항을 밝히신다.

     

    첫째,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하신다. 아직 그것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미 존재했다면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성령 침례가 아직 임하지 않았으므로, 제자들은 기다려야 했다.

     

    둘째, 주님은 요한의 물 침례와 앞으로 임할 성령 침례를 명시적으로 대조하신다.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요한의 물 침례는 이스라엘에게 메시아를 나타내기 위한 과도기적 사역이었고, 성령 침례는 교회 시대를 개시하는 전혀 새로운 경륜적 사건이었다.

     

    셋째, 주님은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을 것”이라고만 말씀하셨지, “불로” 침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사실은 마태복음 3장 11절의 “불 침례”를 다룰 때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넷째,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않아”라는 표현은 이 사건이 임박한 미래에 일어날 것임을 가리킨다. 이것은 곧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다.


    2. 오순절의 성취 — 사도행전 2장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성령님이 강림하신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바의 성취이다.

    “오순절 날이 충만히 찼을 때에 그들이 다 한마음이 되어 한곳에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력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것이 그들 각 사람 위에 앉으매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 (행 2:1–4)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은 이것을 이렇게 진술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매인 자든 자유로운 자든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고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

     

    바로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성령에 의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는 것, 이것이 교회이다. 이 사건이 오순절에 일어났다. 침례자 요한의 사역 때도 아니고,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에도 아니고, 오순절 날 성령님이 임하심으로써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 흐름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다니엘의 칠십 이레 중 육십구 이레가 끝나는 시점에서 메시아가 끊어지신다(십자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다. 성령님이 오순절에 임하신다. 교회가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예언적 시계가 멈추고, 교회 시대가 삽입된다. 교회가 휴거된 후 다니엘의 칠십 번째 이레(7년 환난기)가 시작된다. 이 구조 안에서, 교회의 시작은 오순절의 성령 침례 외에 다른 곳에 놓일 수 없다.

     

    제5장. 요한의 침례의 불충분함이 드러남 — 사도행전 18장, 19장

     

    1. 아볼로의 경우 — 사도행전 18장 24–28절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볼로라 하는 어떤 유대인이 에베소로 왔는데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기록들에 능통하더라. 이 사람이 주의 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아 영이 뜨거우므로 주에 관한 것들을 부지런히 말하고 가르쳤으나 요한의 침례만 알더라.” (행 18:24–25)

     

    아볼로는 열심이 있었고 성경에 능한 자였으나, 그가 아는 것은 요한의 침례까지만이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하나님의 길을 더욱 완전하게”(행 18:26) 그에게 풀어 주었다. 이것은 요한의 침례만으로는 교회 시대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음을 보여 준다.

     

    2. 에베소 제자들의 경우 — 사도행전 19장 1–7절

    이어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은 더욱 결정적이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바울이 위 지방들을 거쳐 에베소로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믿은 이래로 성령님을 받은 적이 있느냐? 하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성령님이 계신다는 말조차 들은 적이 없노라, 하므로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침례를 받았느냐?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요한의 침례라, 하매” (행 19:1–3)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에 바울이 이르되, 참으로 요한이 회개의 침례로 침례를 주며 백성에게 말하여 그들이 자기 뒤에 오실 분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느니라, 하므로” (행 19:4)

     

    그리고 본문은 그 결과를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니라.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그들이 타 언어들로 말하고 대언하였는데” (행 19:5–6)

     

    이 사건이 증명하는 것은 명백하다. 바울은 요한의 침례를 교회 시대의 유효한 침례로 인정하지 않았다. 요한의 침례는 메시아 이전 시대의 이스라엘을 위한 침례였으며, 오순절 이후 교회 시대에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침례를 받아야 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장사·부활과 합한 침례(롬 6:3–4)를 의미하며, 요한의 회개의 침례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 사건은 또한 “침례자 요한부터 교회 시대”라는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박한다. 만약 요한의 사역이 이미 교회 시대였다면, 요한의 침례를 받은 자들이 왜 교회 시대에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하는가? 요한의 침례가 교회 시대의 침례와 동일한 것이었다면 재침례의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재침례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요한의 침례와 교회 시대의 침례가 본질적으로 다른 경륜에 속한다는 것을 성경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제6장. 베드로의 회고적 확인 — 사도행전 11장 15–17절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성령님이 임하신 사건에 대해,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 이렇게 보고한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시되 마치 처음에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같이 하셨으므로 그때에 내가 주의 말씀 곧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을 기억하였노라.” (행 11:15–16)

     

    베드로는 여기서 두 가지를 확인한다. 

     

    첫째,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믿는 유대인들에게(물론 이들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임) 임하신 것이 “처음”이었고, 이제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성령 침례가 주어졌다. 

     

    둘째, 이것은 주님께서 요한의 물 침례와 대조하여 약속하신 바로 그 성령 침례의 성취이다.

    여기서도 사도행전 1장 5절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고만 인용하며, “불로”라는 언급은 전혀 없다. 이 사실의 중요성은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룬다.

     

    제7장. 마태복음 3장 11–12절의 “불 침례” — 심판의 불이지 성령의 불이 아니다

     

    1. 본문

    “참으로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강력하시므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노라.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 곧 손에 키를 들고 친히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하게 하사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넣으시되 껍질은 끌 수 없는 불로 태우시리라, 하니라.” (마 3:11–12)

     

    이 구절에서 침례자 요한은 세 종류의 침례를 언급한다. 자신이 시행하는 물 침례, 메시아께서 시행하실 성령 침례, 그리고 불 침례이다.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성령님으로와 불로”가 하나의 침례인가, 아니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침례인가?

     

    오순절주의자들은 이것을 하나의 침례로 보아, 오순절 날의 “불”(행 2:3)과 연결하여 “뜨거운 성령의 불을 받는 체험”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 해석은 문맥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이다.

     

    2. “불 침례”가 심판의 불인 이유

     

    첫째, 바로 다음 절(12절)이 불의 의미를 정의한다. 요한은 11절에서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라고 말한 직후, 12절에서 그 불이 무엇인지 즉시 설명한다. “손에 키를 들고 친히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하게 하사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넣으시되 껍질은 끌 수 없는 불로 태우시리라.” 알곡은 믿는 자들이고, 껍질(쭉정이)은 믿지 않는 자들이다. 불은 알곡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껍질에게 임하는 심판의 불이다. “끌 수 없는 불”(unquenchable fire)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예외 없이 심판과 지옥의 불을 가리킨다(막 9:43–44).

     

    만약 불 침례가 성령 침례와 동일한 축복의 경험이라면, 바로 다음 절에서 왜 불이 심판과 소멸의 의미로 사용되겠는가? 12절은 11절의 “불”에 대한 요한 자신의 해설이며, 그 해설은 분명히 심판이다.

     

    둘째, 요한의 청중을 구별해야 한다. 마태복음 3장 7절을 보면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게 하더냐?”라고 말한다. 요한의 메시지에는 두 부류의 청중이 있었다. 회개하고 믿는 자들과,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다. 요한은 메시아께서 이 두 부류에게 각각 다른 것을 시행하실 것을 예고한 것이다.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 침례가 임할 것이요(알곡을 곳간에 모음),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 침례가 임할 것이다(껍질을 끌 수 없는 불로 태움).

     

    “성령님으로와 불로”에서 접속사 “와”(and, καί)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한 사람이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두 부류의 사람에게 각각 다른 것이 임한다는 뜻이다. 12절의 알곡과 껍질의 대조가 이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확증한다.

     

    셋째, 마태복음 3장 전체의 문맥이 심판이다. 3장 10절에서 요한은 이미 이렇게 선포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 3장 12절에서 다시 “껍질은 끌 수 없는 불로 태우시리라.”라고 반복한다. 요한의 설교 전체에 관통하는 주제는 메시아의 오심과 함께 수반되는 심판이다. 이 문맥 안에서 “불로 침례를 주시리니”를 축복의 성령 체험으로 읽는 것은 문맥에 대한 심각한 무시이다.

     

    3. 사도행전 1장 5절과 11장 16절의 결정적 증거 — “불”이 빠져 있다

    이 해석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사도행전 1장 5절과 11장 16절이다.

    사도행전 1장 5절에서 주 예수님은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말씀하셨다. “불”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사도행전 11장 16절에서 베드로는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라고 인용했다. 역시 “불”에 대한 언급이 없다.

     

    두 구절 모두 “성령님으로”만 말하며, “불로”를 완전히 생략한다. 만약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성령과 불”이 하나의 침례라면, 주님 자신이 오순절 성령 침례를 약속하시면서 왜 “불”을 완전히 빠뜨리셨겠는가? 베드로도 왜 오순절 사건을 회고하면서 “불”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겠는가?

     

    이것은 “불 침례”가 성령 침례와는 완전히 별개의 것, 곧 심판의 불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성령 침례는 믿는 자의 축복이고, 불 침례는 믿지 않는 자의 심판이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오순절을 약속하실 때 “불”을 언급할 이유가 없으셨던 것이다.

     

    4. 사도행전 2장 3절의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에 대하여

    오순절주의자들이 불 침례를 성령 체험으로 연결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사도행전 2장 3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것이 그들 각 사람 위에 앉으매” (행 2:3)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불같은 혀”가 아니라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cloven tongues like as of fire)이라고 정확히 번역한다. 이 표현에서 핵심은 “~처럼”(like as of)이라는 비유적 표현이다. 실제 불이 그들 위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갈라진 것들이 불의 혀와 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시각적 묘사이다. 이것은 성령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표적이었을 뿐이며, 본문은 그들이 “불로 침례를 받았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본문이 기록하는 것은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행 2:4)라는 것이지, “불로 충만하여”가 아니다.

     

    더욱이,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주님 자신이 오순절 사건을 예고하실 때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을 것”(행 1:5)이라고만 하셨지, “불로”라고 하지 않으셨다. 베드로도 이 사건을 설명할 때(행 11:16) “성령님으로”만 언급했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 3절의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은 성령님의 강림에 수반된 가시적 표적이었을 뿐, 마태복음 3장 11절의 “불 침례”의 성취가 아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의 불 침례는 12절이 분명히 해설하는 바와 같이 “끌 수 없는 불”로 태우는 심판이며, 이것은 오순절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임할 최종적 심판을 가리킨다.

     

    제8장. 에베소서 4장 5절의 “한 침례” — 성령 침례이지 물 침례가 아니다

     

    1. 본문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 (엡 4:5)

    이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한 침례”는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이것을 물 침례로 해석한다. 그러나 문맥과 논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 “한 침례”는 성령 침례를 가리킨다.

     

    2. “한 침례”가 성령 침례인 이유

    첫째, 에베소서 4장 4–6절의 문맥을 살펴야 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모든 믿는 자를 하나로 묶는 영적 실체들을 나열한다. “너희를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여기 나열된 것들 — 한 소망, 한 몸, 한 성령, 한 주, 한 믿음, 한 침례, 한 하나님 — 은 모두 보편적·영적 실체이다. 이 목록 안에서 “한 침례”만 물리적 의식인 물 침례라고 보는 것은 문맥의 흐름과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믿는 자를 하나의 몸으로 연합시키는 침례는 물 침례가 아니라 성령 침례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이 이를 확인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매인 자든 자유로운 자든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고”

     

    둘째, 논리적으로 “한 침례”가 물 침례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한 침례”가 물 침례이고, 이것이 모든 믿는 자를 하나로 묶는 본질적 요소라면, 물 침례를 받지 않은 자는 이 연합에서 배제된다는 결론이 된다. 더 나아가,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지 않고 세례(뿌리기)를 받은 사람은 “한 침례”를 받지 않은 것이 되므로,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되는가? 이것은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성경의 근본 교리(엡 2:8–9)에 정면으로 모순된다. 물 침례의 형식(잠기기 혹은 뿌리기)에 의해 구원의 유무가 결정된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셋째, 물 침례는 외적 행위이다. 외적 행위는 사람마다 형식이 다를 수 있고,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형태로 시행되어 왔다. 그러나 성령 침례는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는 것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예외 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모든 믿는 자를 “한 몸”으로 연합시키는 “한 침례”는 인간이 시행하는 물 침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성령 침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에베소서 4장 5절의 “한 침례”는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성령 침례, 곧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한 몸 안으로 넣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킨다. 물 침례는 이 영적 실체에 대한 외적 고백이요 순종의 행위이지만, 모든 믿는 자를 하나로 묶는 “한 침례” 자체는 아니다.

     

    제9장. 논리적 결론 — 경륜적 구분과 교회 시대의 침례

     

    이상의 성경 본문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논리적 흐름이 도출된다.

     

    첫째, 침례자 요한의 침례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명받은 것으로서(요 1:33, 눅 3:2),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된 과도기적 사역이었다(요 1:31). 이 침례는 회개의 침례로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켰으며(행 19:4),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시대(요 7:39)에 시행되었으므로, 교회 시대의 성령 침례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요한의 사역을 교회 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요한의 침례가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된 것이었다는 사실과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동시에 무시하는 오류이다.

     

    둘째,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에 교회가 이미 존재했다는 주장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으며(요 7:39), 주님 자신이 교회를 미래 시제로 말씀하셨고(마 16:18), 주님의 지상 사역은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마 15:24, 10:5–6). 다니엘의 칠십 이레 예언의 구조도 이를 확증한다. 육십구 이레가 메시아의 십자가에서 끝나고, 교회 시대가 삽입된 후, 칠십 번째 이레(7년 환난기)가 뒤따르는 구조 안에서, 교회의 시작은 오순절의 성령 침례 외에 다른 곳에 놓일 수 없다. 다만 교회가 예수님의 것이고 유기체(organism)이므로 사람처럼 예수님 시대에 교회가 수태가 되어(conception) 오순절에 출생했다고(birth)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오순절은 교회의 시작이자 경륜의 전환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을 것”(행 1:5)이라 약속하셨고, 이것이 오순절에 성취되었다(행 2장). 이제 모든 믿는 자가 믿는 순간 한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게 되었다(고전 12:13). 이것이 에베소서 4장 5절의 “한 침례”이다.

     

    넷째, 오순절 이후 요한의 침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사도행전 19장은 이를 분명히 보여 준다. 요한의 침례만 받은 자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침례를 받아야 했다. 이것은 요한의 침례가 교회 시대의 침례를 대체할 수 없음을 증명하며, 동시에 요한의 사역이 교회 시대가 아니었음을 재차 확인해 준다.

     

    다섯째, 마태복음 3장 11절의 “불 침례”는 성령 침례와 별개의 것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의 불이다. 12절의 “끌 수 없는 불로 태우시리라”가 이를 정의하며, 사도행전 1장 5절과 11장 16절에서 “불”이 완전히 빠져 있다는 사실이 이를 최종적으로 확증한다. 사도행전 2장 3절의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들”은 성령 강림의 가시적 표적이었을 뿐, 마태복음 3장 11절의 불 침례의 성취가 아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이 “불 침례”를 뜨거운 성령 체험으로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을 무시하고, 주님 자신의 말씀과 베드로의 증언에서 “불”이 빠져 있다는 결정적 증거를 외면한 결과이다.

     

    여섯째, 에베소서 4장 5절의 “한 침례”는 성령 침례이지 물 침례가 아니다. 만약 이것이 물 침례라면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지 않고 세례를 받은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되므로,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엡 2:8–9)에 정면으로 모순된다. 모든 믿는 자를 하나의 몸으로 연합시키는 “한 침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성령 침례이다.

     

    일곱째, 교회 시대에는 성령 침례와 물 침례가 모두 존재한다. 성령 침례는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으로,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에 합하게 하신다(고전 12:13). 이것이 “한 침례”(엡 4:5)이다. 물 침례는 이미 믿고 성령 침례를 받은 자가 그리스도의 죽음·장사·부활에 동일시되었음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순종의 행위이다(롬 6:3–4, 행 8:36–38). 물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첫 번째 순종의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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