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기쁜소식선교회(박옥수 목사의 기소선)에서 있었던 일-01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7년간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잘하면 천국에 갈 것 같고 못하면 지옥에 갈 것 같아 늘 마음이 무거운 짐으로 눌려 있었다.
철야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도 했으며 방언도 하고 작정 기도도 해보았지만 마음속에 죄 짐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5년 1월에 기쁜소식선교회의 오세호 목사와 신동국 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죄가 정확히 무엇인지 또 복음이 무엇인지를 듣고는 머리로만 알고 있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마음속에서 믿어졌고 성경적으로 바르게 거듭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죄 짐에 눌려 있다가 바른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고 보니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고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교회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그런데 그 구원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1995년도 그해 ‘선교학교’라는 곳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 기쁨이 사라졌고 지금도 기쁜소식선교회에서 지내던 일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1995년도 5월 1일부터 중국에서 제1기 선교학교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선교학교에 들어갈 때에 신동국 목사는 선교학교에서 3개월만 집중 훈련을 받으면 전도인이 되어서 파송을 나간다고 말하였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이 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좋아서 그들이 하는 일을 무조건 좋게 여겨서 우리 교회에서 몇 사람을 데리고 선교학교라는 곳에 들어갔다.
정작 들어가 보니 그곳은 내가 생각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참으로 고된 삶이었다.
우린 새벽에 일어나서 새벽 모임을 가졌고 오전에는 성경 공부를 했으며 오후에는 둘씩 짝을 지어서 전도를 나갔고 저녁에는 또 저녁 모임을 가졌다.
선교학교에 들어간 이튿날 그들은 우리 각자 몸에 지니고 있던 돈을 다 내어놓으라고 하였다.
선교학교에 들어오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받아서 쓰는 훈련을 해야 하기에 집에서 가지고 온 돈을 다 내놓아 선교학교 식비로 지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주머니를 다 털어 몸에 1전도 안 남기고 다 바쳤다.
그때 나만 선교학교에 간 것이 아니라 나의 아내도 함께 갔는데 우리 부부에게는 돌도 넘기지 않은 딸아이가 있었다.
선교학교에 들어가니 전에 나에게 “전도사님, 전도사님” 했던 사람들이 나보고 “똥 전도사”라고 불렀다. 그간 내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전도사가 되었으니 “똥 전도사”라는 것이었다.
구원 받은 뒤에 그간 신학공부를 하고 전도사가 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존심이 상하였지만 “똥 전도사”란 말이 그리 듣기 싫지 않았고 그래서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을 낮추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하기에 “똥 전도사”란 말을 듣는 것이 나를 낮추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선교학교에서는 마음을 낮추는 훈련을 하는 것이 주제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자신들에게 충성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선교학교에서는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 있고 밥을 먹는 시간이 있으며 모임을 갖는 시간이 있는데 1분이라도 그 시간을 어기면 금식을 하게 한다.
그리고 선교학교에 반장이 있는데 그 반장의 기분대로 금식을 시킨다.
반장이 금식을 시켰는데 말대답을 하든지 아니면 순종하지 않으면 한 끼가 아니라 두 끼 세 끼로 금식이 늘어나고 아니면 선교학교에서 추방을 당할 수도 있다.
선교학교의 반장이 마음이 약한 사람이면 그래도 괜찮은데 마음이 독한 사람이 반장을 하면 정말 견디기 힘들다.
주어진 시간을 1분만 지키지 않아도 금식이다. 그런데 밥을 먹기 전에 금식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밥상에 앉아서 밥을 먹으려고 막 첫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려고 하면 반장이 “잠간” 하면서 밥 먹지 말고 금식하라고 한다.
그러면 밥을 떴던 숟가락을 내리지도 못하고 올리지도 못하고 정말 난감하다.
난 처음에는 반장이 하도 이상하게 굴기에 대들다가 금식 벌도 많이 받았고 또 벌로 화장실 청소도 많이 했다.
그런데 참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내 아내 때문이었다.
아내에게는 젖을 먹는 아기가 있었는데 아이가 우리와 같이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참 힘든 것이었다.
선교학교에서는 아기 엄마라고 따로 대우해 주는 것이 하나도 없다.
밥도 마음대로 배부르게 먹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공기에 딱 한 그릇만 준다.
그런데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가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아무 간식도 못 먹는 상태에서 작은 밥 한공기로 살아야 하니 아내는 늘 배가 고파 있었다.
선교학교에서 저녁 수업까지 다 마치고 우리 부부가 사는 집으로 오면 저녁 11시다.
그런데 잘 먹지 못하는 아내에게 젖이 잘 나올 리가 만무하다.
아기는 젖이 잘 안 나오니 배가 고파서 울어댄다.
그러는 아이를 달래서 재우다 보면 아내는 거의 잠을 못 잔다.
그런데 새벽에 같이 일어나 아기를 둘러업고 선교학교 새벽 수업에 참석해야 한다.
밤새 잠을 잘 못자고 배도 고픈 아내가 수업시간에 졸기도 하고 때로는 몇 분간 수업에 늦게 도착할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힘들게 사는 아내를 수업 시간에 졸았다고, 수업 시간에 좀 늦게 참석했다고 금식을 하게 하였다.
그렇다고 대꾸를 하면 더 엄한 처벌을 받는다.
그때 그것을 보는 나의 마음은 너무 힘들었고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은혜를 입는다기에 또 누구나 다 그런 경과를 거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다기에 또 내가 이 교회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참고 또 참았다.
우리는 선교학교에 있으면서 자주 무전 전도여행을 떠났다.
전도를 가야할 곳을 지정하고 둘씩 짝을 지어서 가는 차비만 가지고 전도를 가는 것이다. 돌아올 차비도 없고 밥을 사먹을 돈도 없다. 무조건 전도를 해야 밥을 얻어먹는다. 무전 전도여행을 다녀온 경과를 들어보면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밥을 못 먹고 굶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잠을 잘 곳이 없어서 다리 밑에서 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전도를 할 적만큼은 정말 좋았다. 선교학교에서 3개월만 훈련을 받으면 졸업을 하고 사역지로 파송을 보내준다고 하기에 선교 학교에 들어갔지만 3개월이 아니라 3년이 되던 해에 비로소 전도인 안수를 받았고 그 해에 파송을 받게 되었다.
내가 전도사 안수를 받을 적에 5명이 같이 전도사 안수를 받았다.
그 해에 박옥수 목사의 동생인 박정수 목사가 중국에 잠시 다녀갔다. 그때 박정수 목사는 료녕성 심양시에 들어와서 고려호텔에 있었다. 그가 이번에 안수를 받은 중국 전도사들을 만나보겠다고 해서 그때 안수를 받은 전도사들이 심양 호텔에 가서 박정수 목사를 만났고 그날 식당에서 박정수 목사가 밥을 사주었다. 점심 메뉴는 개고기 찌개였다.
그런데 그날 점심에 들어온 개고기 양이 엄청 많았다. 우리는 배가 너무 불러서 좀 남기고 그만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박정수 목사가 밥을 사준 목사님 앞에 예의도 없이 어떻게 그만 먹으려 하느냐고 난리를 쳐서 그것을 다 먹느라고 정말 힘들었다. 그날 점심을 먹고 나온 우리는 소화가 안 되고 배가 아파서 너무 힘들었다.
박정수 목사는 박옥수 목사의 동생이기에 대통령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다.
한국에서 중국에 들어와 있는 선교사들도 그 목사 앞에서는 감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그런데 우린 오죽하랴? [다음에 계속]
참고로 기쁜소식선교회의 실상을 알리고자 기존의 멤버였던 성도들이 만든
'기쁜소식선교회를 나온 사람들' 카페를 소개합니다.
또한 기소선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생명의 말씀 선교회(이요한 목사의 생말선)의 실상을
보여 주는 '대한예수교침례회 바로세우기' 카페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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