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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 왕하 2:23-24 생각조회수 : 8167
    • 작성자 : 김용묵
    • 작성일 : 2013년 4월 19일 12시 42분 0초
  • 주전 800년대이던 먼 옛날, 북왕국 이스라엘은 아합 왕과 악녀 이세벨의 치하에서 영적으로 최악의 막장으로 치달았고, 국내에 이제 ‘주’(여호와)의 대언자란 완전히 씨가 마르지 않았나 여겨지고 있었다. 게다가 수년간 절망적인 기근까지 겪으면서 국가는 가히 멘붕 직전이었다.
     
    바로 이때 엘리야라는 걸출한 대언자가 나타나서 각종 이적들을 행했으며, 일당백도 아닌 수백 명의 우상· 거짓 대언자들을 갈멜 산에서 “떡실신”시켰다. (아니, 사실은 기근 자체부터가 엘리야가 동족의 영적 각성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사주한 일이기도 하다. 약 5:17 참고)
     
    그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남긴 뒤 회오리바람을 타고 혼자 홀연히 승천했다.
    엘리야의 승천 소식은 대언자 업계(?) 내부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에서 큰 이야깃거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후 엘리사가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는 벧엘로 가던 길이었는데 수십~수백 명의 어린아이들이 도시에서 떼거지로 몰려와서 엘리사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성경에는 “너 대머리여, 올라가라”라고 점잖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뉘앙스는 ‘올라가라’가 아니라 ‘꺼져라’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건 엘리야의 승천에 대해 빈정대면서 “당신이 그 이름도 유명한 엘리사냐? 네 스승이 실종이나 돌연사가 아니라 승천했다고 그러는데, 그럼 너도 한번 올라갈 테면 올라가 보시지(그리고 영영 사라져 버리지?) ㅋㅋㅋ” 정도의 뉘앙스이다. 엘리사가 진짜로 대머리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악담에 엘리사는 의분하여 아이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이에 대해서는 어쩌면 왕하 1:10, 눅 9:54의 심상을 참고하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녀석들, 감히 하나님의 행적을 모독하다니. 네놈들은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숲에서 커다란 암곰 두 마리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 아이들 중 무려 42명를 붙잡아 사지를 찢어 분질러 놓고 사망 아니면 중상을 입혔다. 주변은 피바다로 변하고 아이들의 비명과 신음 소리에 아비규환이 됐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 엘리사의 저주 한 마디에, 사상자 수로만 따지면 1994년의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비슷한 급의 재앙이 터졌다(사상자 49명, 그 중 32명 사망).
     
    곰은 성경에서 어떤 이미지로 묘사되는 동물인가?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은 개인 1인을 동물의 공격으로 벌하실 때는 사자가 주로 동원되는 편이었다. (왕상 13:24와 왕상 20:36가 대표적인 예) 그러나 사자가 아니라 곰의 직접적인 ‘어택’이 성경에 기록된 건 저 장면이 유일하다.
     
    성경은 사자와 곰을 거의 같은 레벨로 인간과 가축에 해를 끼치는 무서운 맹수로 인정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윗의 말(삼상 17:34-37)부터 시작해서 잠 28:15, 애 3:10, 암 5:19를 보면 되겠다.
    거기에다 성경은 특별히 새끼를 빼앗긴 암곰의 전투력에 대해 이례적으로 주목하는 편이다(잠 17:12, 삼하 17:8, 호 13:8). 그 전투력이 현장에서 저런 엄청난 살상력으로 드러난 게 아닐까 싶다.
     
    사상자만 42명이었을 정도이면 그때 엘리사가 얼마나 유명인사였으며, 아이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이 떼거지로 엘리사에게 몰려들었을지부터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비좁은 장소에서 엘리사가 코너에 몰려 있었고 곰이 군중의 뒤를 아무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덮쳤다면 그 사람들은 미처 달아나지도 못하고 몰살당하는 게 가능은 했겠다.
     
    킹 제임스 성경은 이들이 어린 아이들(little children)이었다고 말한다. 즉, 시쳇말로 ‘초글링 개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소리이다. 요한일서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수신 대상도 little children이고, 예수님께서 내게 오는 걸 막지 말라고 하신 대상도 동일하게 little children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사랑스러운 어린아이라 해도 어떤 배경에서 자라느냐에 따라서 벌써부터 저렇게 징그럽고 표독스럽고 못돼먹게 변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싸잡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신성모독적으로 조롱할 정도였으면, 그 당시에 ‘주 하나님’에 대한 영적 권위가 얼마나 밑바닥에 곤두박질쳐 있었겠는지도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의 개독안티들을 뺨치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저주에 응답하셔서 일벌백계를 내린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영어 성경 역본은 하나님께서 곰을 시켜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을 끔찍하게 죽였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는지 표현을 교묘하게 바꿨다. 딱 초글링 급인 아동 대신, 최소한 청소년이나 청년 정도는 되는 lad, youth라는 표현을 쓰고, tear도 maul로 바꿔서 표현의 수위를 크게 낮췄다. 사지를 완전히 찢고 분지르는 치명상 대신, 그냥 생명에 지장이 없는 정도의 타박상· 골절상만 입히는 느낌이 든다.
     
    행위 구원을 조장한다거나 예수님의 ‘피’를 삭제하거나 지옥을 삭제하는 것 같은 교리적인 변개에 비해 심각성이 덜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다뤄질 뿐이지, 사실 성경 변개 내역 중에는 너무 잔인해 보이는 부분을 제멋대로 완화한 것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대상 20:3이다. 다윗이 이방 민족들을 연장으로 잔인하게 처형했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는지, 그 연장으로 강제 노역을 시켰다고 말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하긴, 성경 변개자들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인본주의 박애주의 정신이 너무 투철한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더러 가나안 민족들을 전부 학살하고 진멸하라는 명령조차도 하나님의 야만성과 잔인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면모로 보인다. 성경을 비판하는 불신자들 앞에서 차마 말을 꺼낼 수 없는 흑역사인 것이다. 하물며 다윗이나 엘리사 같은 우리 진영 ‘아군’이 이교도들을 톱으로 잘라 죽이고, 어린애들을 사지를 찢어 죽였다니, 이 어찌 납득이 되겠는가?
     
    그래서 주 하나님의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고 보정해야겠다는 충정이 지나친 나머지 단어 뜻을 변개하고 번역까지 변개한 게 아닐까 싶다.
    이 글의 주제가 성경 변개 쪽은 아니니, 이 주제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다만,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알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라면, 그렇게 제멋대로 변개되고 윤색된 성경 역본으로부터 오히려 더 답답함과 안타까움과 불쾌함을 응당 느끼리라 본인은 생각한다.
     
    성경에서 비교적 충격적이고 마이너한 에피소드에 속하는 왕하 2:23-24 하나만 갖고도 얘기가 꽤 길어졌다.
    모세가 아들들에게 할례를 안 했다가 하나님께 살해당할 뻔한 이야기,
    자기를 때리라는 대언자의 요청을 거부했다가 사자의 공격을 받고 죽은 사람 이야기,
    예수님의 체포 현장에서 아마포 한 장만 달랑 두르고 그분 뒤를 따르다가 아마포를 버리고 줄행랑을 친 청년 이야기 등,
     
    성경에는 이런 시시콜콜한 게 왜 기록되었을까 싶은 이야기도 많이 있다.
    철도로 치면 시골 간이역 같은 짤막한 이야기들도 다 인간에게 필요하니까 하나님께서 기록으로 남겨 주셨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당장 적용 가능한 교리를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이런 이야기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도 적지 않은 유익과 교훈을 얻었다는 간증이 많이 나눠졌으면 좋겠다.
     
    * 여담이지만 현행 맞춤법에 따르면 she bear는 ‘암콤’이 아니라 ‘암곰’이 바른 표기이다. 그런데 개역, 공동, 표준새번역 등 1990년대에 나온 거의 모든 한국어 성경들은 개역성경의 영향을 받았는지 ‘암콤’을 답습하고 있다. ‘아니요/아니오’만큼이나 성경이 미묘하게 비표준어를 사용하고 있는 예인 것 같다. 흠정역은 진작부터 바르게 ‘암곰’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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