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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 위험한 QT조회수 : 9172
    • 작성자 : 김재욱
    • 작성일 : 2013년 9월 6일 17시 5분 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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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T는 Quiet Time, 즉 조용히 묵상하며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경건의 시간'으로 많은 크리스천들이 실천해오고 있다. 성경을 읽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발견하여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므로, 이런 시간은 어쩌면 크리스천에게 필수적인 시간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간은 유익이 많을까, 잃는 것이 많을까... 내 생각엔 안 좋은 점이 많은 것 같다. 물론 말씀 그대로를 읽는 것이 아닌, 거기서 자꾸 다른 뜻을 유추해내고 어떻게든 감동과 적용점을 찾으려 하는 그런 QT를 지칭하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 기업에 다닐 때는 아침마다 조를 짜서 QT를 했다. 그날 주어진 성경의 한 부분을 읽고 서로 나누는 것이다. 같은 말씀이지만 저마다 적용이 다르고 실생활에 어떻게 응용할 것인지 나누며 공감도 하고 서로 배우기도 한다.

    이런 것은 미국 등지에서 많이 하던 것으로, 우리나라에도 이십여 년 전부터 유행처럼 퍼져나갔었다. 당시 미국의 열방대학 등에 연수를 다녀온 직원들은 세계에서 모인 이들과 QT를 나누면서 그들의 '영성'에 작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들이 작은 화분 하나를 보고도 거기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성경 한 구절에서도 자기만의 진지한 적용과 철학을 발견하는 것에 놀라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묵상을 하다 보면,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점점 자기만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개발해 사람들에게 들려주려는 쪽으로 방향이 기울게 된다. 한마디로 사람을 위한 생각, 남을 감동시키기 위한 생각을 개발하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QT의 파트너가 바뀌면 나눌 내용이나 수위나 코드 자체가 바뀌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다 보면 하나님을 통해 나눔을 잘하는 사람만 부각되거나, 신앙보다는 느낌과 감동에 치중하는 모임이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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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인들은 감동을 원하고 신앙인들은 깨달음을 원한다. 그런데 교회에는 종교인이 더 많다. 그래서 마음에 감동을 주는 달달한 이야기를, 성경 강해나 영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질책보다 선호한다.

     

    언젠가 좋은 메시지를 전하기로 유명하다는 한 교수이자 목사가 우리 교회에 온 적 있는데, 명성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 메시지는 심각할 정도로 부실했다. 그에게는 성경이나 성경적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큰 박수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인도의 구루 오쇼 라즈니쉬 정도에게 들을 수 있는, 재미있으면서도 깨달음(?)을 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이야기꾼이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입술 위 인중 부분의 패인 골은 태어나면서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이건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하시면서 입을 다물도록 꾹 눌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국이 생긴 것이고, 아기는 그 비밀을 발설하면 안 되기 때문에 어려서는 말을 못하는 것이고, 자라면서 그 약속을 잊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동화 같은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따지자는 게 아니고, 듣는 사람들도 그렇게 듣지는 않겠지만, 이런 이야기에는 심각한 교리적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요소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범죄와 피의 부패 이후로는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그가 자기 신분을 바꾸지 않으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인중의 유래(?)에 관한 이 이야기를 실제로 믿는다면, 이미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로 태어나 그 사실을 서서히 잊어버리기는 해도 어차피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이런 생각은 사람의 생각에 참 듣기 좋은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현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인간의 희망사항은 중요하지 않다. 종교다원주의는 어차피 우리가 무엇을 믿든지 같은 절대자를 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심지어 배교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몰라도 구원받는다 하니, 이런 듣기 좋은 이야기와 무척 비슷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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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는 천동설이 정설이었다가 지동설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지동설이 정설이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또 미술에서 주된 피사체를 배치할 때 정 중앙에 놓기보다는 화면의 약간 옆에 배치할 때 더 구성미가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하나님이 지구를 중심이 아닌 약간 옆에 놓으셨나 보다'면서, 굳이 지구가 중심일 필요가 있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런 것은 큐티는 아니고 작은 깨달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귀납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글을 쓰는 사람이나 설교자 등이 범하기 쉬운 실수이다. 남들이 하지 않은 독창적 이야기를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 사람은 새로운 논리를 창작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 자꾸만 생각의 반경을 넓히다 보니 열린 자세로 세상을 보게 된다. 까다로운 진리나 타협과 양보가 없이는 풍부한 예를 들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논할 여지가 그만큼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자기를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고, 점점 더 빠져나올 수 없는 비논리와 두루뭉술함 속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참된 진리가 없고 바른 분별력이 없으면 파워풀한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의 좁은 길로 가면 모든 것이 닫히고 답답할 것 같지만 그 안에 참 자유가 있고 더 넓은 세상이 있다. 반대로 넓은 길은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는 불안감과 많은 행인들 사이에서의 혼동, 그리고 건질 것 없는 비진리의 홍수 속에서 참된 자유를 잃는 일이다.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 사실은 논란이 많고 대다수 크리스천들도 지동설을 과학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느 누구도 상대적 운동을 하는 우주를 비교 대상으로 하지 않는 상태에서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다. 오히려 천동설의 증거가 더 많다. 무엇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지구가 모든 것의 중심이며 전혀 흔들리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다. 세상의 이치로 성경의 진리를 입증하는 일은 보조수단이 되어야 하며, 신중해야 하는데, 말씀을 믿지 않고 과학을 믿으면 틀린 것을 옹호하기 위해 엉뚱한 묵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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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T의 폐해 사례를 만들어내는 이런 실수는 논리적인 사람보다 감상적인 사람들이 자주 하는 것 같다. 성경과 기독교는 명확한 논리를 기본으로 하고, 그 이후에 은혜와 감동과 스토리가 있는 것인데, 명확함은 간과하고 감상적인 묵상만을 좇는 습관은 성경을 이해할 때도 그대로 드러나 제1의 의미를 알기도 전에 부수적인 것만 찾아 느끼려 하고, 누구에게 준 말씀인지 파악도 하기 전에 무작정 자기 것으로 소화하려고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는 제대로 된 깨달음이나 개념 파악이 어렵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지식이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첫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느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자꾸 느끼려 하면, 어떤 날은 한없이 자비롭다가도 어떤 날은 무섭고, 무관심하며, 심지어 어떤 날은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분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내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고 계시된 것을 이해하면서 먼저 알게 되고, 그 후에 서로 알게 되며, 관계를 맺는 것이다.

    또한 성경에 없는 것을 자꾸 찾으려 하면 세상 논리와 학문이 동원되면서 궤변을 말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다. 물론 성경 안에서만 말할 수 없을 때도 있고, 그러다 보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바른 전제를 통해 말해야 한다는 생각과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신학자는 참신한 자기만의 해석을 시도하고,

    목사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호소력 있는 메시지를 구하며,

    크리스천은 주변에 함께 나눌 감동을 찾는다.

     

    이 모두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본질과 목적에 집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보다 스스로가 드러나는 결과를 낳게 되고, 이런 일을 지속하다 보면 진리에서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한국 교회를 망친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한 가지가 QT이다. 성경은 읽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초신자 때부터 혼자 묵상하며 자기만의 하나님을 찾다 보니 절대적인 기준과 절대자 하나님의 속성은 사라지고, 각자 느끼는 기준과 개인적인 모습의 하나님만 남아, 기독교는 그때그때 다른 '상대주의적' 종교가 된다.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이런 방식의 접근이 계속되면, 교리는 교훈이 되고, 좁은 길은 넓은 길이 되며,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요령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묵상이 가능하려면 먼저 말씀을 읽고 언어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 하나님의 최소한의 경륜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는 된 다음에 하는 것이 좋다. 어설픈 QT는 초보운전자가 고속도로에 나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사 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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