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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 그리스도인의 참된 겸손조회수 : 7502
    • 작성자 : 김대용
    • 작성일 : 2013년 11월 21일 13시 38분 5초
  •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니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불리기에 합당치 못하되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9~10). 

     

     

    예수님의 승천 이후 첫 번째 오순절 날에 시작된 예수님의 교회를 이끌었던 사도들 중 바울의 중한 존재감을 의심하는 크리스천은 아마 없을 겁니다. 죽음까지 무릅쓴 세 차례의 선교 여행과 로마서에서 히브리서에 이르기까지 14편의 서신서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으로 기록했고 그 안에 기독교의 원리와 본질을 설명하고 사실상 신약교회의 교리를 확고하게 세운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는 사도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일들을 탁월하게 수행했으며 영광스럽게 쓰임 받았다는 평가가 절대로 어색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59~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알려주며 마치 태어날 때를 놓쳐 늦게 출산한 아기처럼 다른 이들보다 뒤처지고 한없이 부족한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찬란한 빛이 비쳤음을 담담하게 증언합니다. 그러면서 참혹했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합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성장하며 철저한 바리새파의 제자였던 그의 잘못된 신념은 한때 자신을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 사역을 훼방하는 사탄의 창끝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그가 기적이라고 말하기도 부족한 대반전을 통해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의 선두에 서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이런 겸손한 고백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과연 바울이 본을 보인 성도의 참된 겸손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먼저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파악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을 다시 깊이 들여다보도록 하지요. 한편으로 그는 다른 사도들과 복음 사역의 일꾼들보다 더욱 많이 수고했다고 자평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헌신이 얼마나 고되고 험난한 것이었고 평범한 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는가를 주저 없이 얘기하는 솔직함도 보여준 사도였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냐? (내가 어리석은 자처럼 말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더욱 넘치도록 하고 매도 지나치게 맞고 감옥에도 더 자주 갇히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내가 유대인들로부터 마흔에서 하나 뺀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몽둥이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을 당하여 한 밤과 한 낮을 깊음 속에 있었으며 자주 여행하면서 물들의 위험과 강도들의 위험과 내 동포로 인한 위험과 이교도들로 인한 위험과 도시에서의 위험과 광야에서의 위험과 바다에서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 가운데서의 위험을 당하였고 또 지치고 아프고 여러 번 밤을 새우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금식하고 추위를 당하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비록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거짓 사도들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를 보내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라고는 하나 이렇듯 바울은 자신이 했던 수고와 복음 사역에서의 공로를 정확히 알고 세세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사도들 가운데서 자신이 차지하는 비중과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가장 으뜸가는 사도들보다 내가 조금도 뒤지지 않는 줄로 생각하노라(고후11:5).

     

    바울의 이 말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며 거짓 사도들을 경계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라 하더라도 언뜻 보면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니라(고전15:9).”라는 고백과 배치되는 듯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연약함을 지닌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본디 자신의 수고와 공로와 헌신을 외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역할이 공동체 속에서 잊히지 않고 기억되길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런 본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겸손하자고 하는 것은 자칫 공허한 외침과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기 쉽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 앞과 성도들 앞에서 겸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무조건 절제하기 전에 먼저 그 본성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어떤 측면에서 이런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도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미덕인 겸손이 온전한 열매로 튼실하게 열리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좇아가자는 주장이 절대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 내면의 구조와 본질을 정확히 아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자기 내면의 연약함을 깊이 통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구조를 아시며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시는도다(103:14).

     

    저는 인간의 본성과 한계를 때로 역행하고 초월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하는 신자들도 먼저 자신의 내면의 구조와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나서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특별히 겸손한 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나 실제로는 결정적 상황에서 자신을 내세우고 존재와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크리스천들을 쉽게 목격합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살피지 못하고 더불어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신이 확인되는 과정은 생략된 채로 겸손의 미덕만을 소유하고자 하는 태도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인간의 연약한 본성과 욕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인(全人)을 던져 복음에 잠기며 복음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기만을 간절히 바랬던 바울의 저 위대한 소망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3:8~9).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뼛속 깊이 각인시키고 한시도 잊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의와 존재감을 세우고 싶은 이 타락한 본성을 거슬러 겸손의 자리를 항상 지키고 싶은 사람이라면 바울처럼 전인(全人)이 복음에 잠기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또한, 오직 나의 공로는 없고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에게서 난 의만을 소유한 채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발견되기로 철저하게 작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많은 헌신과 수고를 거듭한 믿음의 사람이 그 어떤 공치사나 답례를 받지 않고도 묵묵히 겸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렇게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먼저 복음 안에서만 자신이 발견되도록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압도하는 거룩하고 고상한 만족,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음의 거룩한 충만함이 자신을 사로잡을 때 저절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겸손을 추구하는 신자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복음 안에서 이루어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이 진리를 잊지 않기로 굳게 결심해야 합니다. 그럴 때 헌신된 하나님의 일꾼은 세상과 사람들의 그 어떤 인정함과 박수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내면을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찬란한 역사를 이루고 기업을 일구며 더욱이 영적 세계에 놀라운 공적을 세웠다고 해도 바울의 위대한 고백처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내가 되었고 이 모든 것이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9~10)”라고 고백할 수밖에는 없는 존재들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본질은 먼지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103:14) 구원받은 충성스러운 일꾼이요, 거룩한 영적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둔 장수라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해야 하는 아버지의 품 안에 안긴 아이일 뿐입니다.

     

    광야에서 네가 보았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듯이 주 네 하나님께서 너희가 걸은 모든 길에서 너를 안으사 너희가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나(1:31)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한 신실한 일꾼도 때로 믿음의 공동체나 사역의 동역자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의 공로를 공적으로 평가받고 싶어 합니다. 또한, 주님의 교회 안에서도 서로의 위치와 역할을 확인받고 싶은 욕구가 존재하는 것은 솔직히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때로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했다고 느낄 때 성도의 내면에는 이런 욕구들이 더욱 솟구쳐 올라옴을 경험하게 됩니다. 제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이것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이런 현상의 해결책은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내면의 왜곡을 치유하는 첫걸음은 나 자신을 가식 없이 솔직히 내어 놓고 복음의 밝은 빛과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내면의 충만함이 없이 무조건 자신의 희생과 공적을 망각하거나 덮어 놓기만을 요구당하면 심한 영적 상실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겸손은 우리의 모든 자랑을 무조건 망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이 말하는 피상적이며 단편적인 미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겸손은 복음 안에 나의 전인이 잠겨있는 상태로 나의 의와 모든 공로와 존재 가치와 간절한 소망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고 확인받기로 작정하고 소망하는 자에게 주어지는(3:9)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높고 높으며 영원에 거주하고 이름이 거룩함인 이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겸손한 영을 지닌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것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들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57:15).

     

    오 사람아, 그분께서 무엇이 선한 것인지 네게 보이셨나니 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6:8)

     

    우리가 자신을 약함과 인간의 욕구마저 숨기지 않고 하나님께 그것까지 내어 보이며 통회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연약하고 상한 마음을 받아주시고 위로하시며 소생시켜 그리스도인의 참된 겸손을 간직할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동안의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도 첫눈이 내리고 겨울이 우리 앞에 살포시 다가왔습니다. 겨울나무가 살며시 잎사귀를 내려놓아 낙엽이 되듯이 내면의 굴절되고 왜곡된 욕구와 나 자신의 의지로만 영적 전쟁을 치르려는 그것마저 내려놓길 원합니다. 주님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채워지지 않은 욕구와 상한 감정과 잡다한 상처까지 품고 있는 부족한 사람도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그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의 존재를 확인받고자 하는 거룩한 열망에 우리 모두가 사로잡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글은 누군가를 교훈하기 위한 목적의 글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하며 제 자신의 결점을 돌아보고 통찰하는 가운데 쌓인 묵상을 나누는 차원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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