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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 피어라, 청춘의 꽃봉오리조회수 : 6986
    • 작성자 : 김대용
    • 작성일 : 2013년 11월 28일 19시 58분 20초
  • 흔히 청년 혹은 청춘을 아직 활짝 피어나지 않은 망울이 맺힌 꽃봉오리에 비유합니다. 저의 청년기는 20대를 고스란히 지내온 90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응답하라~!’ 라는 제목으로 90년대 청춘의 다양한 군상을 다룬 드라마가 추억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90년대도 이제 어엿하게 과거 대접을 받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돌이켜 보면 저의 청년기는 고등부, 청년부를 거쳤던 교회 생활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소위 경배와 찬양 문화가 전국적 열풍을 일으켰던 90년대 초반에는 친구들과 함께 이런저런 찬양집회를 쫓아다니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 애쓰기도 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캠퍼스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유명한 선교단체에서 그들의 뜨거운 열정 속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 하기도 했습니다. 군 전역 후에는 크리스천이면 누구나 아는 대형교회에 출석하며 수천 명이 넘는 청년부와 미국에서 직수입한 첨단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교회 속에서 나를 변화시킬 무언가를 간절히 구하기도 했습니다.


    요즈음 저는 제 나이에 걸맞지 않게도 아직 미혼이기에 청년부에 속하게 되는 호사(?)를 누리며 하나님 앞에 청년의 시기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보내야 하며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친구들과 당시 다니던 교회 지하 기도실에 가서 함께 기도하고 집에 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늦은 밤에 항상 한쪽에서 기도하시던 여자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고등부 같은 학년 친구의 어머니였습니다. 안 들으려 해도 한쪽에서 열성적으로 기도하시던 그분의 기도 내용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대부분 가족, 특히 자녀들을 위한 기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어머니 뜨거운 기도를 받고 자란 제 친구는 그 후 무난하게 결혼하고 자녀도 낳고 무난하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은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는 무난한 것 그 이상의 무엇을 찾아볼 수 없는 교인이 되었다는 것, 바른 성경이나 바른 교리 찾아 고민하는 것은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그저 원만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이 그 친구에 대한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과거 저도 가끔 경험했던 교회 간증집회라는 것을 생각하면 흔히 ‘전도 왕 모 집사’라고 해서 열정적인 전도 혹은 교회에 대한 헌신과 봉사로 유명한 여 집사가 초청되어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역설하는 전형적 모습이 연상되는 건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이런 간증에 흔히 등장하는 것이 자녀 자랑입니다. 대략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기도를 심으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어 자녀들이 세상적으로 이렇게 잘 되었습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의사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전문 직종에 진출해 엄마에게 십일조와 헌금을 많이 하라고 용돈을 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었다는 자랑에 회중들은 이내 아멘을 합창하곤 했습니다.


    과연 그 뜨거운 어머니의 믿음의 기도를 받아먹고 자란 자녀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간증집회에 자주 거론되던 그 많은 잘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금 사회 곳곳에서 리더로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원만한 기독교인이 되었을지 몰라도 비진리와 불법에 항거하고 진리를 위해 손해 볼 수 있는 크리스천이 되지 못한 이들이 간증에 등장하는 복 받은 자녀들 중 허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 되기를 바라는 크리스천 부모들의 열망은 실상 다른 사람들 보기에 그럴싸한 눈에 보이는 복에 대한 갈망이었음을 과연 숨길 수 있을까요?


    코스타(KOSTA)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웬만한 크리스천들은 다 아는 80년대 중반에 시작된 이 단체는 해외 여러 국가에 흩어져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앙 수련회를 진행하는 곳입니다.

    아마도 애초에 이것을 시작한 목사님들의 생각은 해외 유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국내 들어오든 해외에서 자리를 잡든 후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를 점하는 리더들이 될 터이니 이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면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란 포부가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분들의 바람은 얼마나 실현되었습니까? 지금도 이 단체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핵심 운영진이라는 분들의 면면 보노라면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복음을 혼탁하게 하는 이분들이 과연 젊은이들을 이끌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당 홈페이지에서 그 수련회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아도 유학생들이 멀리 타국에서 공부하며 느끼는 고독과 어려움을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과연 이것이 복음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의 반응일까요?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필요들을 채우고 현실 속에 느끼는 여러 고민을 나누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과연 이것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들이 청년들을 양육시켰던 패턴들이 거의 이와 같습니다. 저는 단언하건대, 이렇게 해서는 복음을 위해, 진리를 위해 손해 볼 수 있는 크리스천이 절대로 양육되지 못합니다.


    한국 교회들은 그동안 청년들에게 무엇을 심어 주었습니까? 진로와 취업, 결혼 등 미래가 불안정하기만 한 청년들의 심리를 파고들어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과거 교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바로 비전(vision)입니다. 하나님의 비전 혹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비전 등을 모토로 내세워 뭔가 원대한 가치를 청년들에게 던져주고 그것을 좇아 쉼 없이 달려가면 그 끝에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그야말로 막연한 기대감을 심어주는 전략이 불안한 미래를 안고 사는 젊은 세대를 교회에 붙잡아두는 한국 교회의 방법론이었습니다.


    주로 미국에서 검증된 최신 프로그램의 도입과 교회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유지하는 것에 효과만점인 각종 대외 선교활동, 은사주의의 부스러기들, 집 안에 들어서는 순간 받은 감동이 먼지처럼 사라지는 특성을 지닌 현란한 찬양 문화 등 정말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지 않고 철저하게 세상에 물든 청년들이 입맛만을 맞추는, 더 나아가 담백한 입맛을 가지고 있던 청년들조차 자극적인 영적 양식에 익숙하게 만들어 버리는 교육이 바로 한국교회가 청년들에게 행했던 교육입니다.

    마땅히 진리의 보금자리로서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가르쳐야 함에도 많은 청년들을 모을 수 있다는 장점만 있다면 MSG가 잔뜩 들어간 프로그램도 전혀 마다치 않고 도입했던 모습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배와 찬양 문화가 그야말로 한국의 크리스천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허리케인보다 더한 광풍으로 감싸 안았던 90년대 초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엄청난 행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경배와 찬양문화를 선도하던 모 선교단체에서 주최하는 ‘올네이션스’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세계적인 규모의 행사였습니다. 그 시절 모임을 주최하던 목사가 “88 올림픽 이후 이곳에 이처럼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합니다.”라는 감격스러운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당시의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당시 그 단체를 이끌던 하 모 선교사님이 그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선교사로 헌신할 청소년, 청년들은 일어나십시오, 거룩한 생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청소년, 청년들은 일어나십시오.”라는 외침에 회답해 눈물을 흘리며 일어났던 그 수많은 젊은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정말로 액면 그대로 당시 그런 거룩한 가치에 헌신한 청년들이 진정성이 있었고 그 후 잘 양육되었다면 지금 한국의 교회들이 영적 기상도가 이렇게 암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원만하게 가정을 꾸리고 직장을 갖고 교회 집사로서, 평범하고 성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는 30~40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저와 함께 90년대 청년기를 거쳐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때로 2,000억 원 넘어 들여 지은 웅장한 교회 건물 안에서 안식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또 일부는 그렇게 교회를 이끄는 리더들에게 항거해 마치 세상에 이 교회밖에는 갈 교회가 없는 양 분리되어 나올 생각도 못하고 끊임없이 아옹다옹하기만 합니다. 그들은 또한 전임자가 물러난 후 새로이 담임을 맡은 40~50대의 젊은 목사들이 이전보다 더욱 악하게 교회를 이끌어도 대형교회 교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꿋꿋하게 버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쉽고 자연스럽게 기성세대에 편입되어 진리로 인한 심각한 고민보다 현실에 순응하며 그 속에서 안식하는 요령을 터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너무도 바쁘게 땀 흘리며 살아가다가 주일 하루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유일한 낙이요 자부심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 바른 신약교회가 도대체 무엇이며 무슨 가치가 있는지 알지 못하고 알 생각도 전혀 없는 그저 원만한 기독교인 일 뿐입니다.


    저는 감히 확신하건대, 90년대 중·고·청년부를 거쳐 온 대부분 한국의 30~40대 크리스천들의 가장 대표적인 현재의 모습들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오 청년이여, 네 젊은 때를 기뻐하라, 네 젊은 시절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들로 걸으며 네 눈이 보는 대로 걸으라. 그러나 이 모든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너를 심판 자리로 데려가실 줄 너는 알라. 그러므로 슬픔을 네 마음에서 제거하며 악을 네 육체에서 치우라. 어릴 때와 젊을 때는 헛된 것이니라(전11:9~10).


    아마도 청년에 대한 구절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구절 중 하나가 위 전도서 11장의 구절일 겁니다. 이 두 구절에는 청년들의 특징이 함축되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역동적으로 미래를 위해 도전하며 마음에 열망하는 것들을 소유하고자 달려가는 시기가 바로 청년의 때입니다. 때로는 세상이 제공하는 향락에 몸을 내어 맡기는 것이 이 시기의 특권인 듯 행동하는 것이 우리 주위에 흔한 젊은이들의 모습이고 솔직히 상당수의 크리스천 청년들이 이런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90년대 청년들에게 통했던 교회들의 구호와 프로그램의 효력도 이제는 서서히 그 수명을 다해가는 듯합니다. 세상의 유혹은 더욱 강렬하게 조직화하며 자극적이 되어 가는데 교회들은 세상과 대항하고 그 흐름에 역행하기는커녕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에 호응해 따라가던 그 발걸음조차 이제는 힘겨워 보입니다. 그나마도 이곳저곳 심지어 지방에서 상경한 청년들까지 몰려들던 대형교회의 청년부마저도 아주 조금씩 위축되고 그 위상이 추락하여 갈 때쯤이면 정말 한국 기독교는 암울한 쇠락의 시대로 본격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요즘 독립침례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독립침례교회의 청년부도 당연히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사람의 본성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향해 분리되어 온 귀한 지체들임이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여기도 사람의 속성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나타나는 곳이며 역설적으로 독립침례교회 청년부를 경험하며 왜 이전 일반 교회의 청년부 담당 사역자들이 그런 현란한 프로그램과 세상의 시스템을 청년부에 도입할 수밖에 없었는지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의 욕구와 열망을 충족시키지 않고는 그들을 모을 수 없다는 일반적 원리를 청년부 사역자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20대 중반의 몇 년을 보냈던 서빙고의 한 대형교회는 청년들의 주일 예배장소 중 하나로 홍대의 유명 클럽을 선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청년 유흥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해서 세상 속으로 침투하는 사역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욕망의 카니발의 벌어지던 장소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행한다는 것은 사실 치기 어린 의욕에 불과합니다.

    겉으로 참신함과 진취적인 것을 추구하는 한국 교회들의 청년부 문화의 극단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사용해 청년들을 모으고 그런 행위들이 효과를 발휘하고 그것을 또 다른 교회에서 벤치마킹을 하며 복음이 빠진 속된 부흥기법만 난무하는 청년부가 곳곳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는 단순하고 명료하며 담백한 복음만을 가지고는 청년들에게 다가가기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 보입니다. 더불어 이유 없는 반항이 아니라 이유 없는 기독교 안티들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늘어나고 복음은 이전보다 더욱 젊은이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전도서 11장 9~10절은 세상의 관념으로 보았을 때 청년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권면을 합니다. 노년에나 생각해야 할 인생의 마감과 그 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청년 시절부터 묵상하라는 선명한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교회들은 청년들에게 세상의 관념에서 보아도 거부감이 없는 교훈만을 주고 양육해 왔습니다.

    미래에 대한 도전, 진취적 기상, 열정적 헌신, 창의적인 활동, 심지어 세상에 나가 높은 고지를 정복하라는 ‘고지론’까지 모두 도전하고 쟁취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크리스천 청년들은 세상에 나아가 건실하고 훌륭한 사회인으로서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청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면 매우 큰 문제입니다. 보이는 것들의 가치를 초월하는 영존하는 가치를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전도서 11장의 교훈을 교회에서조차 청년들에게 가르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진정 암울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청년들이 추구해야 할 불변의 가치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도 보존되는 영존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고전3:12~15, 고후5:10) 더불어 몇십 년의 짧은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쇠락하는 인간의 청춘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허무할 뿐이라는 단적인 선언이 명료한 진리임을 잊지 말고 살아야겠습니다.(전11:10)


    효율성을 자랑하는 세상의 기법으로 부흥하는 교회들의 청년부가 그 위세를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성장하는 청년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허약하고 헐벗은 초라한 영적 상태에 처한 중년이 될 뿐임을 우리는 지난 세월의 교훈 속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은 담백하고 깨끗한 복음의 위력으로 청년들의 삶을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신념을 결코 양보하지 않을 때 숫자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진리의 횃불이 청년들의 내면에서 활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말씀을 수호하고 많은 교회들의 그릇된 행위들을 정확히 분별하며 바른 교리 안에 굳건하게 서서 좁은 길 가기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들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세상은 점점 암울해져 가고 이전 시대에 없던 인면수심의 젊은이들마저 곳곳에서 출몰한다는 삭막한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시대의 영적 상황이 암담할수록 더욱더 세상의 가치가 아닌 영존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진리로 인해 청춘의 꽃봉오리를 활짝 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청년들이 일어나는 참된 부흥이 이 땅 곳곳에 허락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에 따라 자기 길을 조심함으로 하리이다. 내가 온 마음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오 내가 주의 명령들에서 떠나 방황하지 않게 하소서. 내가 주께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속에 숨겼나이다. 오 찬송을 받으실 주여, 주의 법규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입의 모든 판단들을 내 입술로 밝히 드러내었으며 모든 재물을 기뻐하는 것 같이 주의 증언들의 길을 기뻐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훈계들을 묵상하고 주의 길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내 자신이 주의 법규들을 기뻐하고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119: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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