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자유게시판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 종교인의 완벽한 절망 1조회수 : 7334
    • 작성자 : 김대용
    • 작성일 : 2013년 12월 13일 23시 42분 18초
  • 사람은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이 끊임없이 미래를 바라보려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흔히 친구들과 만났다가 헤어지거나 전화 통화를 하다가 끊을 때 대부분 다음에 또 보자.” 혹은 다음에 연락하자.”라고 말하며 미래를 기약하는 것도 이런 성향이 반영된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라면서 항상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꿈꾸고 그것을 위해 달려가는 것을 삶의 의미로 여깁니다. 장성해서 결혼하면 평안하고 안락한 중년과 노년의 삶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자녀들의 미래가 아름답게 펼쳐질 것을 소망하며 삶을 일구어 나아갑니다.

     

    과연 미래가 열려있지 않다면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동차가 주유를 가득하고 달려갈 준비를 모두 마쳐도 사방이 가로막힌 공간에 놓여 있다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듯이 사람에게 미래가 열려있지 않고 닫혀 있다면 그는 삶의 추진력을 상실하고 모든 기능들이 일거에 해체될 것입니다.

     

    성경은 미래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어떤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에게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미래는 소망을 담고 앞날에 대한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는 미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종의 닫힌 미래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치 극심한 근심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살아 있음에도 요즘 난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니야~!”라고 자조 섞인 고백을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부자도 바로 이런 닫힌 미래를 맞이하며 살게 된 사람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람이 감당해야 할 닫힌 미래는 더 이상의 변화나 개선이 허용되지 않고 영원히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9:44). 분명히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인물인 이 부자는 당시 인간에게 허락된 최고의 풍요와 환락을 누리며 살았던 특권층이었습니다.

    그가 입었던 자주색 옷은 당시로서는 왕이나 최고의 권세를 누리는 귀족들이 즐겨 입었던 옷으로 그의 사회적 위치를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8:26, 8:15). 또한,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사치를 즐기고 수돗물을 콸콸 틀어놓듯 돈을 맘 놓고 써도 재산이 줄어들 줄 모르는 엄청난 부자였습니다.(16:19) 심지어 그의 집 대문 앞에는 거의 매일 벌이는 파티에서 남겨진 음식쓰레기로 연명하고자 하는 나사로를 비롯한 여러 거지들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건대 실로 대단한 재력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자는 당시에 살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따르는 멋진 삶을 살던 사실상 당대의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던 부자는 삶을 마감한 후에 영원히 고정되어 변할 수 없는 어떤 독특한 종류의 현실 속에 처하게 됩니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가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16:23~24)

     

    언젠가 지금 광주·전남 지역에 킹제임스 성경을 알리고 바른 신약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한재석 형제님의 설교 중 들었던 여러분은 과연 지금 죽는다면 당장 하나님이 계시는 천상에 올라가 그분을 뵈올 텐데 그때의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육신을 벗고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하실지 생각하고 사시나요?”물론 제 기억에서 추출한 것으로 설교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라는 대략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 설교를 들으며 매우 참신하게 우리가 잊고 있는 부분을 지적해 주셨다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을 반대로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죽은 후에 눈을 떠 보니 지옥의 불꽃 가운데 놓여 있을 때 그 사람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요? 사실 상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솔직한 답입니다. 천상에 올라가 하나님을 뵈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지옥 불꽃 속에 절여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심정도 감히 인간의 평범한 정서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임이 분명합니다. 어쩌면 지옥은 제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사람이 지옥이라는 무자비한 진공청소기의 위협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누리다 삶을 마감한 부자가 그야말로 대반전, 엄청난 뒤바뀜, 상상 이상의 엄혹한 현실을 마주할 때 과연 어떠한 심정이었을지는 짐작이 불가능하고 간접체험은 더욱 불가능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매우 심각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지옥은 대문을 활짝 열고 지금도 쉴 사이 없이 구원받지 못한 혼들을 빨아들이고 있는데 살아있는 사람은 정작 이런 심각한 위기를 뼈가 저리게 느낄 수 없으니 정말이지 이보다 더한 인간에게 닥친 시급한 위기와 위협은 없다고 해야겠습니다.

     

    문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받은 구원의 감격만을 기뻐하기에는 주위에 파멸의 길로 행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복음이 널리 퍼져있다고 자부하는 한국 땅에서조차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미처 구원받지 못하고 심장의 박동과 호흡이 멈춰 버리는 비극이 지금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단히 특이하고 충격적인 것은 파멸의 대륙으로 건너가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살아생전에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라고 자부했던 종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가 아브라함을 보고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주저함 없이 부르는 것을 볼 때 그는 순수한 혈통의 유대인이었고(24) 생전에 모세 5경을 읽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구약 시대의 대언자들의 선포를 직접 들었던 사람일 것입니다(29).

    짐작건대 그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에 걸맞게 유대인의 율법과 규례를 배우고 지키며 각종 헌물과 희생물을 부족함 없이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그는 누가 보아도 훌륭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지없이 그가 죽은 후 지옥의 불꽃 속에 절규하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1623절의 고통 중에라는 말의 원어는 고문 등의 극단적 자극으로 인해 발생하는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는 지금 견딜만한 고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여유를 부릴만한 상황이 절대로 아닙니다. 살아있다면 곧 기절해 버릴 수도 있는 극한의 고통을 쉴 사이 없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이런 지옥의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여의도에 위치한 불신자들도 다 아는 한 대형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던 형제님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형제님의 고백은 전에 그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교리와 규범에 빠져 소나무 뿌리를 뽑아낼 기세로 기도에 열중하며 신비한 것을 추구하던 시절에도 무엇인가 은사주의 교회의 모든 모습이 내내 역겹고 불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바른 교회를 찾고 또 찾아 결국 그곳에서 빠져나와 지금의 교회까지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그 교회를 세계적인 초대형 교회로 일군 목사 일가의 범죄와 비리는 낱낱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해당 교회의 교인들은 잠잠하기만 합니다. 매 주일 기독교방송에 방영되는 예배 영상을 보아도 여전히 평안하게 주일예배에 참여하고 문제의 핵심에 위치한 원로 목사가 노구를 이끌고 더듬거리며 하는 그 설교에 아멘을 연발할 뿐입니다. 수십만 명의 교인들 중에 그런 비리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폭로 기자회견을 열고 또는 더 이상 참지 못해 교회를 뛰쳐나가는 등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단 1%도 안 되는 듯합니다.

     

    하나님과 본인 자신만 알 수 있는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뉘라서 함부로 재단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런 명명백백한 비리와 타락을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이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영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생전 모범적으로 멋지게 별처럼 살았다고 자부했던 유대인 부자는 실은 마귀의 자녀요 지옥의 자식이었습니다. 사실 그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것도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세상 누구보다 구원받기에 가장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이었고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말씀을 읽을 수 있었고 살아서 활동하던 구약 시대의 대언자들의 선포를 직접 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풍요로운 생활이 그의 영적 지각을 둔감하게 했지만, 그것이 그가 구원받을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언제든 그의 몸에서 호흡이 멈추기 전까지 회개하고 돌이켜 참믿음을 소유한 자가 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너무도 명료하고 단순한 참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채 많은 종교 행위만을 먼지 같은 유산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나 지옥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영적 문제에 있어 가장 심각한 것 중에 하나가 그 옛날 유대인 부자처럼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의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시급하고도 위중한 문제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여기서도 교묘한 기만전술을 펼칩니다. 사람을 타락시키고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으로 이끌어 가려는 마귀의 집요함은 또 다른 이단의 무리를 통해 이 화급한 문제에 물타기를 시도하곤 합니다.

     

    소위 매우 큰 믿음을 소유했다고 자부하는 어떤 목사는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매우 참신한 화두를 들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미 다 알 듯이 이 사람은 지독한 은사주의자요, 신사도주의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신 속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의를 가져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명백한 행위구원론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구원받지 못한 종교인들에 대한 중대한 이슈를 이런 황당한 거짓 선생을 통해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 철저하게 매장해 버리려는 사탄의 간악한 술책에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도 끝끝내 구원받지 못한 것은 결국 자신의 책임이요, 자신의 선택이었으며 오늘날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종교생활에 빠져 끝내 구원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도 결코 사탄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실은 그들은 자신의 욕망, 고집, 불순종,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 굳어 버린 양심 등으로 인해 스스로 수렁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들이 감당해야 할 대가는 실로 엄청나고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2편 계속 :  https://keepbible.com/Cmn1/View/3zG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텔레그램으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