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1편 : https://keepbible.com/Cmn1/View/3zF
종교생활에 심취해 바른 신앙과 구원의 도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요? 때로 사람은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쉽게 변하거나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친구 중에 교통사고로 뇌에 위중한 부상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과 본인의 노력으로 지금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데 큰 불편이 없을 정도로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죽기 직전까지 갔던 엄청난 사고와 오랜 회복기간을 거치고도 이 친구의 성격적인 단점은 거의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인정하는 그 독특한 아집과 단점들이 그런 큰 인생의 위기를 겪고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얼마나 변하기 힘든 존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심지어 죽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는 정확하게 증명해 줍니다.
이에 그가 이르되, 그러므로 아버지여, 간구하건대 아버지께서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소서.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가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않게 하소서, 하거늘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대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저들의 말을 들을 것이니라, 하매 그가 이르되, 아니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그들에게 간다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 하니(눅16:27~30)
본문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지하세계의 낙원에 있는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 아직 살아있는 있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한 진리를 증언함으로써 그들이 회개하여 지옥의 자식 신세를 면하게 해 주기를 간청합니다. 종교 시스템의 노예로 살다가 지옥에 왔으면서도 여전히 종교의 핵심 요소인 눈에 보이는 것,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즐겨 반응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형제들의 종교성을 타파시키려는 이 부자의 내면에 증식하는 지독한 종교 바이러스는 지옥의 불꽃으로도 박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호흡이 그 육체에 붙어있는 동안 당대 가장 고급스러운 삶의 범주를 누리고 살다가 지옥의 불꽃 속에 절여지는 대반전을 경험하고도 생각의 중심축이 옮겨지지 않은 이 놀라운 현상은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위에 이야기했듯이 지옥의 고통은 인간의 상상력의 범위를 놀랍도록 한참이나 초월하는 영역에 있습니다. 이 부자는 지금 그 초월적 징벌의 세계를 온몸―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이들이 말하는 혼적인 몸(soulish body)―으로 경험하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끝내 지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부패한 사고의 틀을 전혀 벗어버리지 못하는 놀라운 실상을 예수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보이는 것이 있어야 믿을 수 있고 기적적인 일 정도는 일어나야 사람이 변하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대언자들의 선포로는 절대 충분치 않다는 이 전혀 낯설지 않은 하나의 전형적인 신념은 21세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기원이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종교 시스템은 심지어 이 부자를 거슬러 올라가 가인에게까지 다다릅니다(유11).
또한, 이러한 굳건한 일종의 사고방식 즉, 사람의 눈과 감각기관으로 감지되는 현실 세계의 증거들을 통해서만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강력한 주장은 모든 현세적인 축복을 갈망하는 기복적 태도와 사실상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는 이를 정확하게 증명해주고 있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바로 종교 시스템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역사를 타고 흐르는 이 뿌리 깊은 지독한 욕망의 덫이 현실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누렸던 한 사람을 지옥 자식 신세에서 면하지 못하게 붙잡아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종교에 빠진 이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바른 믿음을 규정하고 정의합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못하였느냐? 참으로 들었은즉, 그것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것들의 말들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롬10:17~18).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것으로 장로들이 좋은 평판을 얻었느니라.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히11:1~3).
이와 함께 지옥의 불꽃이라는 초월적 형벌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부패한 사고체계를 허물지 못했던 부자를 향한 아브라함의 통렬한 선포가 위의 말씀들과 얼마나 정교하게 일맥상통하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그에게 이르되, 그들이 모세와 대언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어떤 사람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날지라도 그들이 설득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눅16:31).
지금 이 순간까지도 천국과 지옥의 방문기를 설파하는 거짓 간증자들을 통해 저리도 명확한 성경 말씀은 여전히 모욕을 당하고 멸시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실존했던 인물인 유대인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종교와 복음의 엄청난 간극에 대해서 명료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더불어 끝까지 고집하며 종교인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복음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종말이 어떠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기묘한 것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명확한 계시의 말씀들이 기록된 성경책을 밤낮없이 들고 다니면서도 종교인으로 살다가 파멸해 간 선배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 허다하게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거대한 종교 시스템 속에 기생하는 거짓 대언자요, 거짓 선생들입니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니라.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변질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변질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마7:15~18).
종교인, 특히 거짓 대언자의 처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마태복음 7장 21절~23절의 말씀도 개역 성경의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오히려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거짓 선생들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는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7:21~23)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마7:23).”라는 말씀은 제아무리 기적적인 은사를 뽐내고 세상도 부러워할 만한 찬란한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예수님께서 결코 안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구원받은 적이 없는 거짓 대언자들은 나쁜 열매를 맺는 변질된 나무요,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까지 가로막는 종교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숙주일 뿐입니다.
이렇듯 파멸의 길로 이끄는 거짓 대언자들에게 사로잡힌 종교인들 중에 상당수는 대단한 지성인이며 매력이 넘치는 인기인이고 권세가이며 모략이 넘치는 전략가들입니다. 그들은 복잡한 수식을 척척 풀어내고 인간들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를 뚫고 들어가 유연한 처세로 세상에 우뚝 서고 화려한 논리가 탑재된 말솜씨로 청중을 장악하며 고매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둔하고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명료한 복음의 정수를 깨닫지 못해 수시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나 정작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딤후3:7).
종교인은 여전히 철학, 선행, 고행, 희생, 헌신, 자선과 심지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도, 헌금, 예배, 침례, 유아 세례, 각종 성사 등의 종교 행위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도달하고 구원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의 바람과 달리 사람의 모든 행위와 의는 누더기와 같다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갔나이다(사64:6).
심지어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모 교단의 어떤 교회는 그 이름이 ‘종교’라고 한다니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묘한 것은 그 교회의 담임 목사가 특별히 지난 WCC 부산총회 준비에 열심을 보였다고 하니 교회의 이름과 무언가 통하는 면이 있기도 합니다.
WCC 부산총회 준비가 한창이던 때 그것을 지지하는 한 교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왜 WCC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사악한 단체인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물론 그 교인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일쑤였습니다. 대화가 진행되며 제 말에 논리적으로 더 내세울 것이 없어지자 이 교인은 비로소 명언(?) 한 마디를 남깁니다. “당신이 뭘 그렇게 잘 알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장담합니까? 그렇게 당당하다면 WCC 총회를 추진하는 목사님들보다 더 유명해지고 권위가 생긴 다음에 와서 말을 하세요.” 이렇듯 종교인들의 기준은 성경이 아니라 세상이 부여한 권위요, 눈에 보이는 것들이며 시대의 대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심연에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만족하게 하려는 비뚤어진 욕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버려진 음식쓰레기로 연명하던 거지였던 나사로가 낙원의 거주자가 된 모습을 지독한 회한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부자처럼 종교인에게도 생전에 가슴 시린 추억이 있고 소박한 즐거움에 미소 짓던 순간이 있습니다. 그들도 뜨거운 피를 가졌고 연인과 함께 절절한 사랑을 나누었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자녀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다시 오지 않는 흘러간 청춘을 추억하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합니다. 그들도 세월 속에서 파편처럼 흩어지는 이런 모든 삶의 조각들의 소중함을 알기에 자기 나름대로 종교 시스템 속에서 영존하는 생명을 얻어 보려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마지막은 명백한 파멸입니다. 종교인이 감당해야 할 미래는 철저하게 닫힌 미래일 뿐이고 원상회복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종교 시스템에 발목이 붙잡혀있는 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제발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거짓 선생의 덫을 벗기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만족하게 하는 그 자리에 안주하면 당신의 그 모든 소중한 삶의 조각들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당신의 두 눈과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함과 분노와 저주와 자포자기일 것입니다.
유대인 부자처럼 교회 안에서 일생을 복음을 모르고 종교생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절망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만드신 사람의 상상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그야말로 완벽한 절망입니다. 부디 종교인이 감당해야 할 완벽한 절망, 그 혹독한 미래에서 속히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거니와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다시는 보상도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들을 기억하는 일이 잊혔기 때문이로다. 또한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이제 사라졌나니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어떤 일 중에서 그들이 차지할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전 9:5~6)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는 사람마다 불로 절여질 것이요, 희생물마다 소금으로 절여질 것이기 때문이라. (막9:48~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