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늑대 무리는 새끼 양육을 매우 중시합니다. 무리 중에서 새끼를 생산할 수 있는 늑대는 오직 수컷 알파와 암컷 알파만이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우수한 종자의 생산과 효율적인 관리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암컷 알파늑대는 적게는 3마리에서 많게는 9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게 됩니다. 암컷알파는 새끼를 낳으면 10주 동안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며 보살피다가 그 이후에는 무리에게 새끼 양육을 맡깁니다.(무리가 있을 경우) 이때 ‘베이비시터’의 역할은 주로 조직에서 서열이 가장 낮은 늑대이거나 늙은 늑대가 담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꼭 그들에게만 새끼 양육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파 늑대를 비롯하여 모든 늑대가 새끼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생후 6개월 까지 공동으로 보호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전수해주는 등 그들을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다면 왜, 늑대 무리는 새끼양육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음 세대가 잘 성장해야 조직이 건재해지고 조직이 건재해져야 다른 늑대 무리나 동물들로부터 자신들의 영역을 지켜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늙어도 무리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보험용도라고나 할까요? 이처럼 늑대들은 우리 사람들처럼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자신들의 무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가꿉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은 다름 아닌 바로 새끼늑대 즉, ‘다음 세대’ 입니다.
한 때는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이 땅에 무죄한 피를 흘려가며 신앙을 모범으로 전수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아야 했고, 칼에 자신들의 목을 내놓아야 했으며, 심지어는 거꾸로 박혀진 못 위를 걸어가면서까지 순교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주님을 향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등 따습고 배가 부르니, 오히려 세상을 능가하는 흉내를 내며 기복주의와 권위주의를 도구삼아 ‘샤머니즘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사들은 스스로가 샤만(무당)이 되어, 예수님은 단지 천국티켓을 자비로 베풀어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성령님은 복 빌어주고 귀신 쫓고 병이나 고쳐주면 되는 그런 싸구려 신(神)정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눈 팔고 있는 사이 우리 기독교의 ‘구원’ 설교는 구원파에게, ‘재림’ 설교는 다미선이나 제칠일안식교 등에게 빼앗겨버렸습니다. ‘죄’는 도덕설교로, ‘의’는 윤리 설교로 대체시키고 있으며, ‘심판’은 신천지를 비롯한 각종 극단 종말주의자들의 전유물로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한 성령님의 가르침을 이단이나 사이비들에게 다 빼앗겨 버린 채 교회들은 교리가 아닌 비전이라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상상 속에서 허망하고 어두워진 마음으로<롬 1:21> 교회를 세우기에 급급하며, 혹시 이단으로 오해나 받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 성도들을 다른 교회에 빼앗기지나 않으까? 하면서 잔뜩 주눅이 든 전당포가게 쯤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동성애’ 뿐만 아니라, ‘종교일치운동’까지도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실정이며, 자신들의 능력 과시를 위해서는 성도들의 형편은 어떠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들을 미혹하여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교회(바벨탑) 건축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므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 <요 16:8-11>
이처럼 지금의 기독교는 탐욕이라는 우상을 숭배<골 3:5>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는 일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온데간데없고, 말씀보다 전통을 중시하는 풍토가 만연하게 되어 그 전통이 말씀보다 위에 있게 함으로써 전통이 마치 진정한 신앙의 유산인양 두 눈에 힘을 주며 전수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세대들은 전통이 진리인줄로 착각하며 더 이상 온전한 하나님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다음 세대들은 더 이상 무엇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 할 턱이 없습니다. 오직 이 화려한 세상에서 그들에게는 물질주의가 제공해주는 쾌락만이 유일한 삶의 낙(樂)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며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함과 같으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며 또 그와 같은 다른 많은 일들을 행하느니라.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잘 저버리는도다.<막 7:7-9>
며칠 전에 아내로부터 자녀 교육에 열정이 남다른 고등학생 아들을 둔 엄마의 푸념에 관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지극정성으로 아이는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엄마가 외출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는데, 믿기지 않는 장면이 눈앞에 벌어져 숨이 턱하니 막혔다고 합니다. 전교 1등을 한다는 자신의 아이가 여자애를 집으로 데려와서 학생신분으로써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현장에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 아이를 보내고 나서 아들에게 너 어쩌려고 그러느냐며 야단을 쳤는데, 아이의 변명이 더 숨이 막힐 일입니다. “엄마, 저 전교 1등이에요. 저도 스트레스는 풀어야죠.”
도대체, 지금 이 시대에서 말하는 우등생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공부만 잘 하면 우등생일까요? 정말로 암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갈수록 더 심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2012년 4월에 전국 16개 시․도에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면서, 학생들이 임신ㆍ출산ㆍ성적 지향 등의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5조), 복장ㆍ두발 등 용모에 있어 개성을 실현할 권리(12조) 등이 시행됨에 따라 중고등학생들이 임신을 해도, 건전치 못한 옷을 입어도 처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 강요 금지(16조) 조항도 마련되어 있어서 부모들이 교회를 가자고 강조해서도 안 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학문은 철학(philosophy, 哲學) 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문의 목표는 ‘의(義), 정(正), 지(知)’ 즉, 신(神)에 대한 의로움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바르게 사는 도(道)에 대하여, 인간(人)의 본질에 대한 지식(知識)을 가르치는 철학 교육이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도 그러한 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교육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생산자(경제), 군인(국방), 철인(정치)를 만들기 위해 ‘플라톤주의’에서 기인한 프러시아의 교육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나라에 노동자 생산을 위한 교육제도를 이식시켰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의 교육은 ‘의(義), 정(正), 지(知)’라는 이념 대신에, 인간의 세 가지 심적 요소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나타내는 ‘지정의(知情意)’에 대한 교육철학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특히, 여기에서 정(情)은 주체로서의 자기(自己)를 강조하는 개념으로써 즉, 인본주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1910년에 지정의(知情意)론에 의해 비판 받았던 ‘지덕체(智德體)’ 이론이 아이러니 하게도 지금의 교육 이념으로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의 세대들은 ‘정의(正義)’가 무엇인지조차 배울 수도 없고 강조되지 않은 비본질적인 교육 즉, 지식만을 위한 교육으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우월주의’가 우리 사회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면서 아이들은 더 이상 신에 대한 두려움도, 바르게 사회를 살아갈 수 있는 질서도,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실체 없는 교육의 늪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생각하는 사고력의 단절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고 있는 듯함). 그래서 앞에서 전술한 학생(전교 1등 한다는 고등학생)처럼 ‘죄’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조차 없는 세대들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소년 범죄율이 전체 범죄의 6.8%를 넘어선 적이 없었으나 2012년에 이르러 8.3%를 넘어섰고 그 중에서 강력 범죄 발생 율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현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더욱 악해져 가는 사회 환경)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다음세대(자녀)들을 양육해야 할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적만 좋은 우등생 자녀로 만들든지 아니면, 비록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말씀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믿음의 자녀로 성장하도록 돕든지 말입니다. 물론, 학교 성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우등생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며 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출발선상에서 만큼은 이 둘 중 어느 한 가지에 분명한 목표(우선순위)를 두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부모들의 몫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된 성도들이라면, 선택이라는 자율성을 뛰어 넘어 의무감으로 우리의 생각을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대표적인 속성이 ‘거룩’이시기 때문입니다<수 24:19, 삼상 2:2, 6:20, 욥 6:10, 시 71:22, 잠 9:10, 30:3, 사 5:16, 5:24, 10,20, 호 11:12, 요 17:11, 딤후 1:9, 요일 2:20, 계 4:8, 6: 10, 15: 4 ..,>.
늑대들은 더 나은 늑대가 되기 위해서 교육을 시킵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더 사회적이고, 더 조직에 충성하고, 더 무리들을 아끼고, 더 질서를 존중하고, 더 사냥을 잘 하는 등.., 한 마디로 ‘더 늑대다운 늑대’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지요. 모든 동물이 그렇듯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늑대들은 사냥만 잘 한다고 해서 우등생으로 인정해주지는 않습니다. 결코 그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늑대는 사회를 구성하며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장 중시합니다. 그 핵심은 ‘헌신’이고, ‘배려’입니다. 자신의 이익만 탐하는 늑대는 절대로 높은 서열에 이르지 못하며 오래지 않아 무리에서 퇴출을 당하고 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늑대는 아주 철저하고 냉정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교육도,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통해서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완전한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히 6:1>. 그 첫 걸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성품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의 구별됨. 즉, 거룩함을 겸비한 사람의 예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요 4:24>, 그러한 사람을 다윗처럼 마음에 맞는 자<행 13:22>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많은 늑대들이 살았지만, 인간들의 왜곡된 지식으로 모두 멸종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도 왜곡된 교리와 전통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전수된다면 다시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들과 같이 올바른 크리스천을 찾아볼 수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나마 이 땅에 신앙의 양심에 따라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들과 선조들의 피. 그리고 그들의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왔다던 이 인천 땅에 다시금 바른 성경 『1611 킹제임스흠정역』을 허락해주셨고, 이를 통해서 이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올바른 교리를 전수해줄 수 있는 기회가 마지막으로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값진 일입니까? 그러나 더 이상 감격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닙니다. 우리 손에 들린 올바른 성경을 통해 올바른 교리를 할머니/할아버지가 그리고 부모들이 듣고, 읽고, 깨달아 삶과 가정에서 다음 세대(자녀, 손자)들에게 바르게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이자 사명이므로 하루 이틀 미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오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 일을 하고자 할 때, 이 마지막 때에 믿음의 선조들처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칠천 명이 우리 가운데서 불 일듯 일어날 것 이라고 확신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시간은 바로 ‘오늘’ 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바른 교리의 복음이 가정에서 삶에서 다시 되살아나 ‘다음 세대가 이 세대보다 주님을 더 잘 믿는 세대’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나니 곧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모든 무릎과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모든 입이니라, 하시니라.” <열왕기상 1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