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다 보면 끝끝내 거부하는 사람들을 흔히 만나게 됩니다. 특히 평소 알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면 전도 대상자인 상대는 지인에게 매몰차게 거부할 수 없어 나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곤 합니다. 핑계의 내용은 보통 자신이 처한 환경에 관한 것인데 예를 들면 지금은 먹고살기도 바쁜데 다음에 생각해 보겠다거나 요즘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라 조금 한가해 지면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는 말들입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등장하는 갈보리에서 예수님 좌우편에 자리 잡고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범죄자도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구원의 문제를 생각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극한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육체의 파멸 즉 인생의 종말이 이미 확정된 것입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창조된 생명체는 그 생명의 연속성 안에서만 생각하고 활동하며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단절 곧 육체의 파멸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마침표 앞에 생명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최고의 공포 앞에 벌벌 떨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야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이야말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겠지만 어쩌면 이건 생각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그리스도인 입장에서의 단편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 주위에는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순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미담은 쉽게 증폭되기 마련이고 이런 경우는 그 외에 끝끝내 복음을 거부하고 죽어갔던 다수의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말 그대로 예외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죽어가는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면 복음전도자는 그런 사람들만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고 실제로는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순간 오히려 건강할 때보다 마음이 더 딱딱하게 굳어가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옆에 자리를 잡은 두 범죄자도 이런 죽음을 앞둔 보통 사람의 마음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같은 말로 그분을 욕하더라.(마27:44)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을 욕하더라.(막15:32)
성경에는 분명히 단수가 아닌 복수로 두 범죄자 모두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단순히 죽음에 다다르는 고통과 공포만으로는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구원의 길로 돌이켜 회개하고 회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엄청난 기적들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이 거부할 수 없는 표징이 어이없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조롱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35 백성은 서서 지켜보는데 치리자들도 그들과 함께 그분을 비웃으며 이르되, 그가 남들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곧 그리스도이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라, 하더라. 36 또 군사들도 그분을 조롱하면서 그분께 나아와 식초를 바치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들의 왕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 하더라.(눅23: 35~37)
당시 십자가 형벌은 로마제국에 정치적으로 대항하거나 사형을 받아야 하는 중범죄자들에게 행해진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갈보리(골고다) 두 범죄자의 죄목은 강도였습니다(마27:44). 아마도 사형에 처할 정도의 중범죄자라면 살인을 저지른 강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삶은 매우 거칠었고 정상적인 부부간의 애정이나 가족 안에서 누리는 안정감과 화목함과는 거리가 먼 각박한 인생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아직 더 많은 삶의 날수를 누릴 수 있음에도 이들은 이내 결박되고 그 죄목은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아무도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이 없이 모멸과 저주 속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방울의 긍휼도 허락되지 않는 이런 처절한 죽음에 뜻밖에 유일한 위안거리가 생겼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을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구해 줄 메시아로 여겨졌던 예수님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사실 이것은 구약의 성경 기록이 성취되기 위함이었습니다.(사53:12, 막15:28) 어쨌든 강도들의 입장에선 이들에게 집중될 것만 같았던 조롱과 비난의 화살이 모두 예수님께 쏟아졌습니다. 이런 경우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모든 비난을 감수하며 함께 죽어가는 죄 없는 죄수를 동정하게 될까요? 성경은 전혀 반대로 행동하는 인간의 비열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간악한 두 범죄자는 자신들의 죽음 앞에 놓인 예상치 못한 마지막 오락을 놓치지 않고 즐기게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군사들과 함께 동일한 대상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그들이 오롯이 받아야 할 비난을 피하고 그 순간만은 죽어가는 범죄자의 굴레를 벗고 자유인들과 묘한 일체감을 즐기며 추악한 위선의 늪에 깊이 빠져들고 맙니다.
요즘 들어 특히 성경에 기록된 선명한 복음, 즉 예수님 외에 구원의 길이 없음을 명확히 제시하면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납니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 그런 현상은 이전보다 점점 더 가중됩니다. 갈보리(골고다)의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과 못 박힌 강도들처럼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한 답도 대책도 없는 현대인들의 이런 행동은 결국 공멸을 기다리는 자포자기의 태도입니다. 마치 이솝우화의 등장하는 덫에 의해 꼬리 잘린 여우가 정상적인 다른 여우에게 꼬리 자르기를 부추기는 심리나 게으름에 시험공부를 못한 학생이 시험문제가 몹시 어렵게 출제되어 모두가 시험을 망치기 바라는 마음과도 맥을 같이 한다고 봐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갈보리에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들이나 못 박힌 두 범죄자는 고작 몇십 년의 차이를 두고 사망에 삼킬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란 점에서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진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 누가 형편이 더 나을 것이 없는 다 같은 공멸할 무리일 뿐입니다. 그들은 인생의 정답을 모른 채 인생의 정답을 알려주시는 분, 그들을 파멸의 문으로 밀어 넣을 사망을 곧 정복하실 분께 마음껏 조롱과 비난을 안기고 있습니다. 실상 자신들의 참모습은 겉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처참하게 죽어가는 예수님의 발아래 놓인 먼지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왜 많은 사람이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그것은 어차피 누구든 정답을 모르니 같이 파멸의 낭떠러지로 떨어지자는 인간의 잠재의식 깊숙이 은밀하게 존재하는 공멸의 심리와 결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는 신앙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종교가 독선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열심히 믿다 보면 어떤 신앙으로나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죽은 사람의 무덤 앞에서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라고 외치기만 하면 사후 세계에 대한 고민은 끝이라는 해괴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결코 타협하거나 섞일 수 없습니다.
사지선다형의 객관식 시험문제는 유일한 한 가지 정답만을 맞추어야 점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틀린 답만 골라 놓고도 자신은 정성을 들여 공부했으니 그 노력 때문에 좋은 점수를 받을 것으로 생각하거나 역시 정답만 피해 갔으면서도 시험에 임한 태도가 진지하고 모범적이기 때문에 정답을 맞히는 것과 상관없이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이라고 무모한 믿음을 밀어붙인다면 시험공부를 전혀 안 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시험지를 찢어 버리고 시험장을 뛰쳐나간 학생과 성적면에서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진리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포악한 삶을 살든 겉으로는 선하게 살지만,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아 보려는 종교생활로 진리를 왜곡시켜 스스로 구원받을 기회를 놓아 버리든 맞이할 결과는 똑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23장 갈보리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치리자들과 로마 군사들 모두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범죄자보다 월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겉으로 드러난 삶의 모습이 아무리 십자가형벌을 당하는 강도들보다 낫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진리를 모르고 함께 망하는 똑같은 파멸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랍게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을 안타까워하며 따라온 사람들을 제외한 다수의 자유자들과 십자가에 매달린 두 범죄자가 포함된 파멸의 무리에서 예상 밖의 의로운 이탈자가 탄생하게 됩니다.(눅23:39~41).
앞서 살펴본 대로 마태복음 27장과 마가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 좌우에 자리 잡고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은 한목소리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3장에서만 한 강도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많은 안티 크리스천들이 이 부분을 가지고 마치 성경이 오류가 있다는 듯 호들갑을 떨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기록된 성경, 특히 사복음서는 각기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마치 파노라마 카메라가 촬영하듯이 종합적으로 정확하게 기록한 오류 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바른 관점으로 못 박힌 한 범죄자의 회심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먼저 두 범죄자에 대한 기사가 가장 많은 분량 기록되어 있고 기록자 누가가 시간의 순서, 즉 차례대로 기록했다는 기록 원칙을 분명히 밝힌(눅1:3) 누가복음 23장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복음서의 기록들을 비교 검토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렇다면 일단 결론은 처음에 십자가에 못 박힐 당시에는 분명히 두 범죄자가 한목소리로 예수님을 욕하다가(마27:44, 막15:32)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후에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 한순간에 둘 중 한 범죄자가 다시 태어나는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포악한 강도질로 인해 십자가형벌로 삶을 마무리하게 된 두 범죄자는 당시 이스라엘의 보통 백성들보다 훨씬 못한 사회적 배려를 받고 성장했을지 모릅니다. 가진 것도 없고 가정 안에서 제대로 된 양육도 받지 못하며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삶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일구어나갈 능력도 갖추지 못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자신의 인생을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트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두 강도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으로 당시 가장 뜨거운 화제의 주인공인 예수님에 대한 소식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 여러 번 소문으로 전해 듣고 혹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장면을 먼발치에서나마 목격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군중들 속에서 직접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각박하고 거칠고 음침한 삶을 영위하던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와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신과는 영 상관없는 딴 세상 이야기요, 여유 있는 사람의 사치스런 노랫가락 정도로 여겨졌을 겁니다.
이러한 심리의 상태는 개인의 사회적 신분과 처한 상황이 전혀 다를 뿐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 유대인의 치리자요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에게도 비슷한 양상으로 발견됩니다. 다시 태어남의 진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동문서답하는 니고데모의 모습은 평소 강도질을 일삼으며 스치듯 접한 예수님의 소문과 가르침에 전혀 반응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두 강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각자가 처한 사회적 신분과 상황만 다를 뿐 진리에 응답하지 못하는 잠자는 지각의 상태는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 같은 것입니다.
사탄이 운명을 틀어쥐고 있는 이런 사람의 형편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이어져 내려옵니다. 이것은 마치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과도 같이 자연스럽게 자연인인 인간들에게 계승됩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성장해 나름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가꾸어가지만 정작 가장 시급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모르고 사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 사람들의 형편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읽고 있는 성경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의 모습은 박물관에 전시될 이미 소멸한 삶이 아니라 지금 당장 거리에 나가면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여전히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일상적인 소시민의 모습입니다.
진리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형벌 속에 죽어가고 있는 강도들이 처한 진정한 위기는 처참한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 이후에 맞이하게 될 세계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오늘을 사는 우리도 전혀 개선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유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이 살던 옛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도의 문명사회에 살고 있지만 죽음 이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막연한 기대나 혹은 그저 잊어버리고 사는 것 외에 방법이 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정답을 모르고 속절없이 죽어가던 두 명의 범죄자 중에 회개하고 구원받은 강도는 어떻게 이런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을까요? 먼저 누가복음 23장 32~46절의 기록에 해당하는 사복음서의 다른 기록들을 서로 비교하고 대조해 보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시간인 세시 즉 오전 9시에 갈보리(골고다)에서 예수님과 두 강도가 못 박히며(막15:25) 예수님께서 모든 핍박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눅23:34) 예수님의 옷을 군사들이 나누어 제비를 뽑는 일이 비교적 짧은 시간의 범위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그와 같이 수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조롱하며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이 둘 다 같은 말로 예수님을 욕하는 일이 있은 후 어느 순간엔가 한 범죄자는 회심했습니다. 곧이어 회심자의 청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오늘 낙원에서 재회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때는 여섯 시쯤 즉 정오쯤 되었습니다(눅23:43~44).
이 일 후에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고 해면에 적신 식초를 드시고 그 후에 큰 소리를 외치시고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숨을 거두시는 것이 사복음서를 서로 대조해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갈보리(골고다)에서 발생한 시간 순서상의 일들입니다. 이를 볼 때 갈보리 십자가에 예수님과 두 강도가 못 박히고 둘 다 예수님을 욕하다 후에 한 강도가 회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세시(오전 9시)부터 여섯 시(정오)까지 총 세 시간 정도입니다.
약간 빗나간 이야기지만 한때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며 눈물을 흘렸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가 얼마나 불성실하게 성경을 참고하고 감독과 대본 작가 마음대로 성경 기록을 왜곡했는지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회심한 강도를 이해하기 위해 살펴볼 점은 갈보리에 예수님과 두 범죄자가 못 박힌 후부터 둘 중 한 범죄자가 회심하고 구원받기 전까지 사복음서의 다른 부분에는 나오지 않는 특별한 기록 두 가지가 누가복음 23장에만 등장한다는 겁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하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장면입니다(눅23:34).
이 기도는 시간상으로 예수님의 옷을 군사들이 나누어 제비를 뽑기 전에 행해집니다(눅23:34). 사복음서를 비교하면 두 범죄자가 함께 예수님을 욕한 것은 군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기한 후의 일입니다. 이를 통해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욕을 했을 정도로 두 강도 모두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강퍅해 질대로 강퍅해진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다는 말씀처럼(약5:16) 예수님의 기도가 구원받은 범죄자의 회심에 효력을 발휘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많은 갈보리의 핍박자들 중 적어도 예수님께 낙원을 약속받으며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회심자는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회심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 좀 더 깊은 관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화자(話者)의 복잡하게 변화하는 심리를 모두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삶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연인에게 “사랑해~!”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도 그 마음의 복잡한 심리를 따라 분류하자면 100가지 경우는 족히 넘을 겁니다. 성경 기록은 두 강도가 같은 태도로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하지만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은 두 강도의 마음 상태는 이미 그때부터 크게 차이가 나 있었을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그 설명이 기록된 마태복음 13장과 동일한 장면이 기록된 마가복음 4장, 누가복음 8장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길가와 돌밭 혹은 바위와 가시나무들 사이와 좋은 땅 등의 네 가지 종류로 나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좋은 땅을 제외한 3가지 종류의 마음은 모두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경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씨앗이 떨어져 생장하지 못하는 이유나 상황이 조금씩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의 형편은 제각각이고 복잡다단합니다.
구원받는 것은 분명 한순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속에 찌들어 딱딱해진 마음이 허물어지고 단단한 마음의 빗장이 열려 진리를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단순하게 금방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 구원받은 경우가 아니라 장성하여 극히 세속적인 삶을 오랫동안 지속하던 사람의 회심은 복음의 씨앗이 생장할 수 없는 딱딱한 마음 밭의 돌멩이와 가시를 걷어내고 쟁기질을 해서 딱딱하게 돌처럼 굳어버린 밭의 토양을 씨앗이 떨어져 뿌리내릴 수 있는 부드러운 것으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범죄자는 끝끝내 구원받지 못한 범죄자와 비교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삶 속에서 이미 뭔가 큰 차이가 존재했었다고 봐야 합니다. 아마도 누군가 전부터 구원받은 범죄자에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참된 믿음을 지속해서 가르쳐 주었을지 모릅니다. 또 어쩌면 그는 세상의 비정함과 시름에 술을 잔뜩 마시고 비틀거리면서도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복음을 전하는 곳을 가끔이라도 기웃거리며 단순한 호기심에라도 그 가르침을 종종 듣던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회심한 범죄자의 고백처럼 거친 삶을 살고 똑같이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정당하게 십자가형벌에 처한 것은 두 강도 모두 같습니다(눅23:41). 그러나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두 강도의 마음 밭의 상태는 이미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심지어 못 박힌 후 똑같이 예수님을 욕했지만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한 사람은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 복음 앞에 허물어지지 않는 단단한 벽이었고 한 사람은 마치 균열이 일어나며 작은 틈으로 물이 졸졸 새어나가다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강둑처럼 복음 앞에 무너질 준비가 되어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혼이 구원받는 일은 쉽게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인간의 행실이나 노력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소극적으로라도 진리의 말씀에 다가가려는 자세가 평소에 갖추어져 있거나 그 굳어진 마음에 진리의 말씀이 뚫고 들어갈 수 있도록 꾸준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다가올 회심의 기회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실적 위주의 스피드한 전도방식이 얼마나 위험하고 거짓 결신자만 양산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힘을 쏟는 미디어 사역을 통해 바로바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전진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역은 시나브로 열매 맺고 진리로 돌아설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누가복음 23장에만 나오는 범죄자의 십자가상 회심사건 이전에 등장하는 특별한 또 하나의 기록을 살펴봅시다. 그것은 처음에 예수님을 욕했던 범죄자 중 한 명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또다시 맹렬한 어조로 예수님을 욕하는 장면입니다(눅23:39).
매달린 범죄자 중의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23:39)
이 부분은 분명히 두 강도가 함께 예수님을 욕했던 장면과(마27:44, 막15:32) 다른 장면입니다. 앞의 두 기록은 두 범죄자가 함께 욕을 했고 누가복음 23장 39절은 한 범죄자가 욕을 하고 곧바로 회심한 범죄자의 반박이 이어지기에 강도들이 같은 말로 예수님을 모욕한 이후에 일어난 일로 봐야 옳습니다.
40 다른 하나는 되받아서 그를 꾸짖으며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고(눅23:40~14)
구원받은 범죄자의 마음의 변화가 그의 말을 통해서 드러난 성경 기록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회심한 범죄자가 정확히 어느 순간 구원받았는지를 추론하는 것은 성경에 지나친 상상력을 가미해야 하기에 다소 위험하고 불필요한 시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자신의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져 가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줄기차게 예수님을 비난하는 모습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합니다.
이미 정당한 판결로 삶의 종언이 확정된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핍박자들과 합세하여 의로우신 분을 욕하고 조롱하며 그것을 삶의 마지막에 주어진 위안인 듯 착각했던 자신의 지독한 위선을 또다시 예수님을 비난하는 다른 범죄자의 모습을 통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더불어 남의 것을 빼앗고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아무 가책도 느끼지 않던 시절 어디선가 들었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떠올랐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도 의연하게 핍박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시는 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예수님의 신적인 위엄 앞에 압도되었을 것이며 점점 몸의 한계를 절감하며 자신의 생명이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너가고 있음을 직감할 때쯤 그 모든 요소들이 합력하여 위대한 복음의 권능이 그의 영과 혼을 강타했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 즉 다시 태어남은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사탄 마귀가 설치해 놓은 거짓과 위선이 가득한 세상에서 마귀의 자녀로 오랜 세월 살던 딱딱한 마음의 소유자가 변화되어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기까지는 여러 요소가 합력하여야 하고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로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맑은 정신과 이성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는 지각(understanding)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양한 지식을 축적하고 IQ 등 두뇌의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절대 아닙니다. 박사나 지식인들 중에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음의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44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여전히 너희와 함께 이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말들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 되어야 하리라 한 말들이 이것들이라, 하시고 45 그때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눅24:44~45)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다른 이방인들이 그들의 헛된 생각 속에서 걷는 것 같이 걷지 말라. 18 그들은 지각이 어두워졌으며 그들 속에 있는 무지함과 그들 마음의 눈먼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엡4:17~18)
제아무리 다양한 지식을 축적한 지식인이라도 타락한 세상과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본 모습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지각이 열리지 않았고 어두워져 있는 상태라고 명확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미담과 달리 지각이 어두워진 상태로 생사를 넘나들며 정신마저 혼미한 중환자가 복음을 듣고 회심할 가능성은 성경을 보더라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적다고 봐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유족의 마음을 어렵게 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뉘라서 한 사람이 구원받고 못 받고를 확정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퇴화하고 어두워진 지각이 열릴 가능성이 그나마도 많은 맑은 정신 상태에 놓인 사람이 구원받기가 비교적 수월하다는 바른 원칙을 제시하는 차원으로만 이해해 주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혀 회심한 범죄자도 앞서 살펴본 대로 여섯 시쯤(정오)이 되기 전에 구원받았으며(눅23:43~44) 이후에 예수님께서 차차로 기진하시며 숨을 거두신 것을 고려하면 회심자 또한 극심한 십자가형벌의 고통 중이지만 아직 지각을 발휘할 수 있는 또렷한 의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 시간은 일반적으로 육체와 이성이 생생하게 또렷한 상태로 살아 움직일 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생 마음대로 세상을 즐기다 죽어가는 침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는 악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죽을 날과 시를 모르는 인간의 형편과 더불어 생각할 때 불가능에 가까운 소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죽음의 침상에서 구원받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그런 미담은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마귀가 사람들의 구원의 기회를 박탈하기 위해서 쳐 놓은 함정에 불과합니다. 건강할 때, 이성이 생생하게 살아서 작동할 때, 누구에게나 바로 그때가 구원받을 수 있는 적기임이 분명합니다.
파멸이 다가오는 순간 놀라운 반전을 일으키며 구원받은 범죄자에게 십자가 위에서 처절한 마지막 고통은 분명히 구원받는 것에 촉매로 작용하여 자신의 존재를 바로 보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평소에 그가 들어 마음에 축적하고 있던 복음이 생각나고 바로 옆에서 죽음의 고통 중에도 자신을 조롱하는 핍박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며 더불어 끝까지 악한 모습으로 위선의 오락을 맛보기 위해 예수님을 조롱하는 또 다른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의 처참한 모습이 그의 잠자던 지각을 깨우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그는 지각이 열린 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두려운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은 저지른 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 죄인일 뿐이고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분이심을 확신했습니다(눅23:40~41). 이미 그의 고백 안에는 복음이 진하게 들어있습니다.
이제 회심한 강도의 저 겸손하고도 위대한 청원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으로 들어오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매(눅23:42)
그는 이미 주님을 자신의 영과 혼과 몸의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개역과 개역 개정 성경은 회심자의 고백인 ‘주여’를 ‘예수여’라고 표기하며 구원받은 강도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회심자의 고백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예수님을 욕하던 그의 모습은 엄청난 반전을 통해 오직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를 간구하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범죄자는 이 말을 고백하기 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여 이미 구원받았고 43절에 예수님께서 낙원에 대한 약속을 말로 들려주시지 않았더라도 낙원에서 예수님과의 재회가 확정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숨 쉴 힘조차 떨어져 가는 극심한 고통 중에도 이미 구원받은 강도에게 지극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로마 황제는 범죄자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고 십자가형 집행을 면하게 해 줄 수는 있어도 감히 사람이 죽은 후에 구원받은 사람들의 대기 장소요 지금은 지하 세계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셋째 하늘로 옮겨진(고후12:1~4, 엡 4:8~10) 낙원을 약속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온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이미 죽어가는 범죄자에게 낙원을 약속할 권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나는 살아 있는 자라. 전에 죽었으나, 보라, 내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노라.(계1:18)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오직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소유하신 분이고 멸망하는 죄인에게 영존하는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며 온 우주에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님만이 사람에게 낙원을 약속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 중 한 명이 구원받은 과정을 성경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 세상 어떤 존재도 죄인 즉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신이 죄인임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죄인으로 태어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지구가 절반으로 쪼개져도 죄인이 구원받을 수 없고 광대한 우주가 종이쪽처럼 휘말려도 죄인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에 먼지만큼도 이바지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그만큼 힘들고 창조된 존재가 창조된 존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나를 통하지 않고는 창조주 하나님께 다가서지 못한다고 확실하고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온 우주에 오직 한 분 구원자이신 예수님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죽는 순간 구원의 열차에 올라타겠다는 소망은 엄격히 말해 망상에 불과합니다.
죽은 이후에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지금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현실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고작 몇십 년 잘 먹고 잘살기 위해 노력하며 죽을 때까지 어떻게든 병들어 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는 것 외에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 즉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할 수 없는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직 죄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죄 없는 피로만 속죄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확고하게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구원받을 기회는 항상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어릴 때 또한 장성한 이후에라도 모든 지각이 바르게 작동할 수 있는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고 있을 때가 구원받기 훨씬 수월합니다. 구원받으려는 사람이나 사람들을 전도해서 구원이 이르게 하려는 복음전도자나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이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아이를 훈련시키라. 그리하면 그가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너희는 주를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사55:6)
갈보리에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자리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들은 세상의 시작부터 끝날까지 태어나서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딱 두 종류로 정확하게 구분되고 분리될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하고 파멸 곧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 호수에 던져질 사람들입니다.
우주가 쪼개지는 것보다 더한 반전을 경험하며 파멸의 낭떠러지 맨 끝에서 간신히 건져 올려진 구원받은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를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그는 죄악에 찌든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교훈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로 한사람이라도 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아 삶의 마지막 날 이루어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세상 그 어떤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영예로운 약속의 수혜자들이 갈수록 늘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 9:27)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2: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