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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 영적 균형감조회수 : 7761
    • 작성자 : 김상진
    • 작성일 : 2014년 6월 17일 5시 53분 21초
  •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 대해서 어느 저명한 사회학자는, "화산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문명과 같다"라고 표현 하면서, 그런 문명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사회를 '위험사회'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범죄학자들은, 이 시대를 '인간성 상실 시대'라고 표현들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처럼 '위험사회', '인간성 상실시대'를 국면하게 된 주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극단으로 치우치려 하는 성향 즉, '균형감 상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맥락에서, 우리 기독교도 지금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사회의 극단의 흐름을 타고 영적인 균형감을 잃어버린 채, 마치 부패경쟁을 하듯 추락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출간된 "서초교회 잔혹사"와 같은 제목을 가진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러한 배경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는듯 합니다. 또 이처럼 영적 균형감을 잃어버린 교회는 당연히 영적 균형을 상실한 성도들을 양산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금식을 하고, 말씀을 보고, 설교를 들어도 '영적 균형감'이 상실되어 버린 상태에서는 오히려 그것은 영민한 사탄의 도구로 활용이 되어질 수 있는 아이러니가 발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균형감 즉, 중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중용'에 대해서 먹는 것으로 표현한 바가 있는데, "잘 먹었다는 것은, 단지 입으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먹고 난 뒤에 소화를 잘 시켜 배설을 잘 했는가를 확인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잘 먹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영적인 음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말씀을 잘 먹었다는 것은 많이 읽었다거나 많이 깨달았다가 아니라 얼마나 내것으로 소화를 잘 시켰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제 아무리 우리손에 들린 진리의 성경 "킹제임스 흠정역"이라고 해도 영적 균형감이 상실된 채 지식으로만 알고 자신의 것으로 충분히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로 사탄의 영민한 도구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소유해야 할 것이 바로 '영적인 균형감'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신 28:14>, <수 1:7>

     

    "너는 내가 이 날 네게 명령하는 말 들 중의 어떤 것에서든지 떠나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며 그들을 섬기지 말지니라"<신 28:14>.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심히 용감한 자가 되어 내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모든 율법대로 지켜 행하고 그것을 떠나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수 1:7>.

     

    이와 관련해서 인터넷에서 좋은 글이 있어서, 지나치지 못하고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를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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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균형감

    A. W. 토저

     

     

    1. 도덕적 이중성

     

    사람들의 성격이나 행위는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치려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우리는 흔하게 듣게 된다. 종교 사상가들은 이런 불균형을 인식하고 나름대로 처방을 내렸다. 공자는 “중용(中庸)”을 가르쳤고, 석가는 “금욕주의와 육신의 안락을 피할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나침”과 “부족함”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잡는 것이 덕스러운 생활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도 이런 도덕적 불균형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가 내리는 처방은 “새 철학”이 아니라 “새 생명”이다. 기독교의 이상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종종 더 곤고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를 하나님과 거룩함으로 끌고 가려는 힘과 그를 죄로 끌고 가려는 힘이 자기 안에 병존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육신적으로는 아담의 자녀요 흙의 아들이다. 이런 도덕적 이중성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심리적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가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 5:17>. 그러나 참된 성도 안에는 하나님의 유전자가 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그를 성장시키려고 활동하신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육신과 싸우려고 할 때 그의 전투는 때때로 그로 하여금 금단적인 것들을 행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성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성령님의 활동은 무의식적이거나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하나님의 자애로운 뜻에 순종하여 협력하여야 한다. 바로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다고 나는 믿는다. 그들은 양 극단 중의 하나에 빠지게 된다. 도 어떤 이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성품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뒷짐지고 기다린다. 불가능한 것을 이루려고 애를 쓰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언급한 불균형이다. 우리의 도덕적 반응이 없으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고 절제의 훈련을 하고 하나님의 목적들을 인정하여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으면 영적인 발전은 없다.

     

     

    2. 영적인 기형의 상태

     

    거룩하게 되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가서 결국 영적인 기형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우리는 담대해지려다가 지나쳐서 뻔뻔스럽게 될 수 있다.

    용기와 온유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에게 이 두가지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분이 그분의 적들과 대립할 때, 이 두 가지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 나타났다.

     

    둘째, 우리는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다가 그것이 지나쳐 예의에 어긋날 수 있다.

    솔직하면서도 무례하지 않는 균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발견되었다. 자신은 언제나 숨김없이 솔직하게 다 말해 버리는 성격이라고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 말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불같은 성격의 베드로도 사랑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벧전 4:8 참조>.

     

    셋째, 깨어 있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의심하는 버릇에 빠질 수 있다.

    오류와 싸우다 보니 우리는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의를 품는 경향이 있다. 사탄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이단을 쫒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이단에 빠지도록 유혹하다가 실패할 때 사탄은 우리가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도록 부추긴다.

     

    넷째, 진지해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우울해질 수 있다.

    성도들은 언제나 진지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침울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경건이 아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기쁨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명약이다.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다섯째, 양심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양심의 문제에 지나치게 예민해질 수 있다.

    우선 사탄은 성도의 양심을 파괴하여 비양심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 실패 할 때 그는 반대적인 전술을 써서 신자의 양심을 병들게 한다. 이것은 신자가 양심적으로 너무 예민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까봐 늘 두려워하기 때문에 늘 고민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간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들은 신앙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행동들의 수를 줄여간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일상적인 일들을 수행하는 것조차 두려워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을 “경건의 증거”라고 착각한다.

     

     

    3. 끝맺는 말.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가? 당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개인적으로 만난 자신만의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고, 또 그분의 진리와 그 진리를 체험적으로 사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가? 또한 진리로 성화되는 경험도?.., 그리고 그 충만한 경험으로 인한 평안이 마음에 넘치고 있는가? 이 경험은 아무도 당신을 대신해서 해 줄 수 없으며, 이 경험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참된 성도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출처: 살아있는 이들 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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