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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 기도 응답에 관해서 알려주세요! [물음과 답변]조회수 : 8166
    • 작성자 : 김대용
    • 작성일 : 2015년 1월 27일 18시 5분 2초
  • Q : 할렐루야!


    성경에 보면 어떻게 기도하라는 말씀들은 많은 데 반해 언제까지 기도하라는 말씀은 거의 없는듯합니다. 제가 말씀을 잘 모르는 이유로 인해 기도할 때 응답이 내려올 때까지 계속 기도할 수도 없고 언제까지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지킴이를 찾아보아도 기도에 대해서만 나오지 언제까지 하라는 것은 안 나오네요. 전에 순복음교회 조 목사님이 설교에서는 기도할 때 기도 응답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마음에 평안함이 오고 확신이 오고 믿음이 오면 그걸로 응답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 일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양해 바라겠습니다.


    제 마음에 열의에 의해서 신학을 하다가 어떠한 사유로 인해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마음에 열의는 식지도 않고 그러던 중에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보는 게 수많은 목사들 그중에서도 젊은 목사들을 보면 저분들은 벌써 목사가 되어서 저렇게 목회를 하고 있는데 난 나이도 저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데 아직 신학교도 안 나왔고 참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처절하게 울부짖었습니다. 나이는 계속 들어가고 있고 여건도 안 좋아서 신학은 할 수도 없고 제 마음의 소원은 간절한데 주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는지 알게 해 달라고요. 그리고 며칠 후에 말씀을 읽다가 사도행전 9장 10절 “보소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말씀으로 강하게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강하게 말씀을 받은 적이 없어서 30분 동안 울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듯이 매번 말씀으로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기도 응답이 될 때까지 계속 울부짖어 기도 할 수도 없고 해서 말씀에 대해 잘 아시는 성도님께서 언제까지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여쭐게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려고 해도 그것이 흠정역에 있는 교리랑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아니면 성경적인 것인지, 흠정역 성경 말씀에 대해서 잘 아시는 성도님이 계시면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 형제님 반갑습니다.

    한겨울에 감기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보내고 계신가요?


    우선 아랫글과 설교 영상을 읽고 시청해 보십시요.

    특히 ‘그리스도인의 기도’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들어보시면 큰 도움을 받으실 겁니다. 


    1.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

     https://keepbible.com/Study5/View/3Gf


    2. 그리스도인의 기도 

    https://keepbible.com/Study5/View/3La


    소위 '기도 응답'에 관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기에 형제님과 다른 분들을 위해 정동수 목사님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기도’ 후반부의 주요 내용 제가 몇 가지를 부연해서 아래에 글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사야 38장에 있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성경 기록을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병을 고침 받고 수명이 15년이나 연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명이 연장된 히스기야는 유다 왕국을 방문한 바빌론 사신들에게 나라 전체를 샅샅이 공개함으로 말미암아 바빌론에 의한 멸망이 유다 땅에 더 신속히 임하는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사람의 뜻대로 기도에 대한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무한대의 영역에 거하시는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먼지에 불과한 사람의 뜻과 다를 때가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8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9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으니라.(사55:8~9)


    그러므로 우리 안에 간절한 소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어긋날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신약 시대 성도들은 마음에 품은 간절한 소원을 마땅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어리석은 자들처럼 기도의 성취를 감히 하나님께 강요하는 태도를 깨끗이 청산하고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성벽을 다 재건한 후 하나님께 드린 느헤미야의 기도가 좋은 예가 되듯이 구약식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했으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눈에 보이는 세상일에서 내가 형통하게 해 주십시요.”라고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31 또 정한 때에 나무 헌물과 첫 열매를 드리게 하였사오니, 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시옵소서.(느13:31)


    이런 구약식 기도는 다르게 표현하면 ‘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시킨 일을 다 하고 주인에게 그에 해당하는 만큼만의 대가를 구하는 것이 바로 종의 태도이고 종의 입장에서 구하는 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기도의 모범적인 예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사도 바울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의 이 절절한 고백을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7 계시들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게 육체 안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내가 이 일로 인하여 그것이 내게서 떠나가도록 주께 세 번 간청하였더니

    9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고후12:7~8)


    그럼 고린도후서 12장의 이 말씀을 주해해 보겠습니다.

     

    당시 바울이 가지고 있던 “육체 안에 가시”에 대해 어떤 성경 주석가는 갈라디아서 4장 13~14절과 함께 비교해 볼 때 그것은 분명히 육신의 질병이며 아마도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아 맞아 죽다 살아난 후(행14:19~20) 뇌를 다친 바울이 얻게 된 ‘간질병’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사도로 선택받아 신약 성경의 가장 많은 부분의 기록자가 되었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지역교회를 세운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열정적으로 강단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순간적으로 몸의 통제력 상실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부르르 떨며 청중들 앞에서 쓰러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설교하던 바울 자신에게는 그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이었을까요.


    물론 바울이 말한 “육체 안의 가시”가 간질이었는지 안질이었는지 아니면 질병이 아닌 자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에게 대단히 치명적인 고통과 고민을 안겼던 무엇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는 것에도 큰 장애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치명적 고통에 대해 다른 사람도 아닌 바울 자신이 세 번이나 간절하게 떠나가기를 하나님께 구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답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고후12:9) 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당혹스러울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분량 이상으로 주어진 은혜와 사역의 성과를 통해 자칫 교만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고 따뜻한 배려라는 것을 바울은 정확하게 간파합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육체 안의 가시”는 더 이상 가시가 아니요, 마치 진주조개가 아픔을 참고 품은 모래가 보석이 되듯이 고난이 주는 믿음의 훈장이며 영적 전쟁터에서 자신을 지키는 무기임을 깨닫고 고린도후서 12장 8절의 저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


    우리는 연약하므로 때때로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되고 장애가 되는 어떤 것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과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와 별개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십니다.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는 바로 이런 명확한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초연하게 하나님께만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감사함으로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약식 기도의 자세, 즉 종의 기도를 청산하고 신약 시대 성도의 기도,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나서 소위 ‘기도 응답을 받았다.’라는 말은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기도 응답’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각종 신비로운 체험을 했다는 은사주의 시스템과 이미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래 의미가 왜곡되어 전달될 가능성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일부로라도 이런 표현은 쓰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라고 하거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일이 해결되었다.’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간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기도에 있어서 절대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원리를 적용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그에 따른 기도의 핵심은 그 믿음과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분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존중하고 존귀하게 여겨드리며 두려워하고 그분의 말씀에 경외감을 느끼며 떨려고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으면 일을 하는 것, 밥 먹는 것, 길을 걷는 것, 숨 쉬는 것, 잠자는 것 등 온종일 생활하면서 행하는 모든 것이 기도와 예배가 됩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8장 28절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도외시하고 종일 불안과 초조함에 떨며 사람의 무릎이 낙타의 무릎이 될 정도로 오랜 시간 기도에 열을 올려 하나님을 감동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얼마나 많이, 오랫동안 기도했느냐 하는 양(量)의 요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그 마음에 합한 기도를 했는가 하는 질(質)의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사람이 자기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이 되리로다.(잠28:9)


    사람이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 무어라 가르쳐 주는지와 그 안에 담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저 자신의 소원을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혹은 온종일 무릎이 낙타의 무릎이 되고 목에서 무쇠솥을 긁어내는 소리가 날 때까지 기도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열정적인 기도는 도리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됩니다.


    다시 한 번 신약 시대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빌립보서 4장 6~7절을 통해 살펴봅시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대해서 간절한 기도로 우리의 소원하는 것들을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하나님께 알려드려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구약 시대 성도들의 자세와 별로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제 7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졌습니까? 그 기도에 대한 100%의 분명한 응답이 약속되어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기도를 통해 자신의 욕구 채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사람에게 7절의 답은 마치 동문서답처럼 여겨질 겁니다. 그러나 바로 이 말씀이 신약 시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기도에 대해 분명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만사형통이나 소위 조지 뭘러식의 반드시 문제를 해결 받는 특급 기도 비결을 통한 바로바로식 응답이 아닙니다.


    약속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는 문제가 해결되든 아니든, 내가 간절히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혹은 해결 받는 것이 연기가 되었든 그런 모든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통해 나의 영과 혼을 충만하게 채우고 나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로만 고정하도록 견고하게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기도 생활을 통해 맛 볼 수 있는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탁월한 설교를 매우 모자란 실력을 통해 글로 풀어 놓은 부족한 답변이나마 부디 필요한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형제님께서 물어오신 기도에 답변은 이것으로 갈무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답변은 형제님의 글을 통해 제가 느끼고 알려드리고 싶은 몇 가지와 함께 정리해 다음에 다시 별도의 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답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 안에서 항상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 질문하신 분은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해 익명으로 하였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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