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동거함이 어찌 그리 좋으며 어찌 그리 기쁜가!
(시편 133편 1절)
성경의 문체 (1) 천년의 한이 서린 신라의 고도 경주를 찾다 (경주 고적 답사기)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짬을 내어 경주를 찾았다. 가는 차편에 무르익은 산야도 구경할 겸 부산 해운대역에서 동해남부선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출발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직도 타는 사람들이 있는지 기차가 가지를 않는다. 나처럼 관광하러 나선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서민들이 여기 저기 몸에 지고 이고 타서는 비비고 들어갈 자리를 찾는다. 이윽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철커덕, 철커덕, 쿵, 쿵, 철커덕 , 철커덕, 쿵, 쿵 어릴 적 수학여행 갈 때 탔던 완행열차 기억이 난다. ………………………………….. ……………………… (2) 드디어 토함산 정상에 오르다 버스가 석굴암까지만 운행하고 토함산 정상까지는 도보로 가야 한다고 해서 석굴암을 둘러본 뒤 짐을 가볍게 하려고 이것 저것 요긴하지 않은 무거운 것들은 배낭에서 꺼내어 버렸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돋아난다. 앞서 가던 사람들 중에서도 연세가 드신 분들은 길 옆에 자리를 펴고 쉬고 있는 분들도 있다. 나는 그래도 아직 초로에 접어들기 시작한 나이라 내친 김에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쉬지 않고 계속 걸어 올라갔다. 이제 막 피로가 쌓여 지치나 보다 하는데 눈 앞에 토함산 산봉우리가 보인다. 여기서 쉴 수가 없어 마지막 힘을 내어 힘들게 정상까지 올라가니, 오! 눈 앞에 탁 트인 하늘과 그 하늘 아래 저 멀리까지 울창한 숲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한 폭의 수려한 그림이 따로 없다. 토함산에 올랐어라 해를 안고 앉았어라 (3) 해외 조기 교육 일화 우리 집이 호주로 이민 온 것은 큰 딸이 5학년 때였습니다. 아이들 영어 습득을 생각해서는 조금 더 일찍 왔더라면 좋았겠다 싶었는데, 다행히 큰 딸이 철이 일찍 들어서인지 부모들 말을 잘 따라서 학교 다녀 와서도 영어공부를 꾸준히 하고, 정확한 발음이 잘 안 되는 단어는 혼자서 짬나는 대로 몇백 번씩 중얼거리며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큰 딸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교 수업도 잘 따라가고 공부도 곧잘 하게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중학교 3학년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제 웬만큼 원어민 발음 가까이 영어를 하게 되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오후에 바깥에 나가서 있던 딸아이가 자기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는 바깥에서 엄마랑 저녁 식사를 하자고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메뉴니 시간이니 장소니 이야기를 하고서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해서는, “엄마, 오실 때 아빠 가지고 와요.” 합니다. 그러고는 뭔가 이상한지 그만 깔깔깔깔 웃습니다. 저는 휴대폰 소리가 커서 다 들렸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 아내가 멋적은 듯이 “얘가 영어가 웬만큼 되니까 한국말을 잊어먹나 봐요.” 합니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이 “혀가 꼬인다”고들 하죠. 두 가지 언어의 개념이 섞이는 때가 있는가 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Come together with Dad.”라고 할 건데, ‘with’ 다음에 사물이 나오면 ‘가지고’라고, 사람이 나오면 ‘함께’라든지 ‘데리고’라고 해야 하는 걸 혼동해서 말이 헛나왔나 봐요. 다행히, 그런 고비를 지나고서 지금은 우리말도 영어도 막힘없이 잘 하고 있습니다. 위의 세 편의 짧은 이야기 중 두 편은 기행문 형식이고, 마지막 한 편은 수필 형식입니다. 기행문 형식의 두 글은 제목을 “~하다” 형식으로 적었는데, 글의 제목으로 흔히들 이렇게 동사 원형을 쓰죠. 글의 내용을 보면, 모두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기술하고 있는데, 읽다 보면 중간 중간에 현재형 표현이 섞여서 나옵니다. (1) 기차가 가지를 않는다, 비비고 들어갈 자리를 찾는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완행열차 기억이 난다 – 처음에는 과거형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아예 현재형으로 가버렸습니다. (2) 이마에서 땀이 송글송글 돋아난다, 쉬고 있는 분들도 있다, 눈 앞에 토함산 산봉우리가 보인다, 울창한 숲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한 폭의 수려한 그림이 따로 없다 – 과거형으로 했다가 현재형, 또 과거형으로 갔다가 현재형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이 글들을 읽으실 때 부자연스럽다거나, 문법(시제)이 틀렸네 하면서 읽으신 분 있으십니까?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시제를 일치시켜야 올바른 글이라고 한다면 모르겠으나, 초등학생들이 글을 배우는 단계가 아니라면 글의 성격에 따라, 또 글의 전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과거의 사실 속에 현재형 시제를 섞어서 쓸 수가 있으며, 이것이 오히려 글의 재미나 몰입도를 높여 줍니다. 그래서, 어법상으로 이런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수사 기법 또는 표현 기법이라고합니다. 과거의 사실을 마치 현재 사실처럼 묘사 또는 표현함으로써 그 글을 읽는 독자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하고, 독자로 하여금 글 속에 몰입하게 하는 기법이지요. “기행문을 쓸 때는 현재형으로 써라.” 작문 교사의 작문 지침입니다.
마지막 글은 기행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과거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느라 글을 쓰다보니 저도 모르게 현재형으로 써진 부분이 있습니다. [“엄마, 오실 때 아빠 가지고 와요.” 합니다, 그러고는 뭔가 이상한지 그만 깔깔깔깔 웃습니다, “~ 한국말을 잊어먹나 봐요.” 합니다]처럼 저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글이 써지고, 읽으시는 분들도 했습니다, 웃었습니다, 했습니다로 쓴 것보다 더 현장감있게 읽게 됩니다. 마치 옆에 함께 있어서 보는 것처럼요. 이렇게 과거 사실인데 현재형으로 썼다고 해서 그 글을 읽는 독자가 현재 사실인가 보다 하고 읽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집에서 TV로 영화를 볼 때, 큰 것일수록 더 실감나게 보며, 비싼 돈을 내고 영화관에 가서 대형 TV를 보면서 웅장한 사운드를 들으려고 하는 이유도 모두 현장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눈 앞에서 펼쳐지는 영화 화면의 스토리를 현재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비록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생생하게 눈 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현실처럼 느낄 지언정, 그 장면들이 과거에 영화 촬영장에서 찍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이치를 모르고 “과거 사실을 현재 사실로 기술했으니 잘못한 거다 고쳐라” 이러면 정말 갑갑한 노릇이죠. 이러한 원리로 성경 번역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고어체를 사용하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보다 생생한 현장감과 경우에 따라서는 장엄함을 전달하려고 수사 기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래 성경 말씀 마 3:13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은 과거 사실이지만 시제를 과거로 해서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셨거늘”로 하면 잘못된 우리말 표현입니다. 14절도 “요한이 그분을 말리며 이르되,”가 올바른 우리말이지 “요한이 그분을 말렸으며 일렀으되,”로 하면 안 됩니다. 마태복음 3장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살펴 보겠습니다.
여러분, 위의 두 가지 번역을 각각 차분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럽고 보다 실감나는 번역입니까? 제가 읽어 보니 (2) 번 번역은 너무 부자연스럽고 지나간 과거 이야기가 되어서 현실감도 안 나고 우리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1) 번 번역을 읽으시면서 그 내용이 현재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아셨습니까 아니면 과거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아셨습니까? 현재 사실이라고 생각하신 분은 아무도 안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시제와 과거 시제를 교차 사용(시제 교체 기법)하고 있기 때문이죠. 문장은 원활하게 하면서도 뜻은 손상을 주지 않는 뛰어난 표현 기법입니다. 한 가지 더 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양치는 하지 않고 대신 가글만 하고 세수는 간단하게 하고서는 버터 바른 빵 한 조각만 먹고 전철 타지 않고 택시 타고 사무실로 갔습니다. 영어로 바꾸어 표현해 보겠습니다. → Because I got up late this morning, I did not brush my teeth, but just gargled with water instead of it and washed my face quickly, and ate only a piece of bread and butter, and went to my office not by subway but by taxi. 이 영어를 다시 시제를 정확히 살려 우리말로 직역 형식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 나는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양치를 안 했고 그 대신 물로 가글만 했고 빨리 세수했고 버터빵 한 조각만 먹었고 전철을 탔지 않고 택시 탔고서 사무실에 갔다. 번역도 잘 되지 않네요. 아무튼 영어가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고 해서 모두 과거로 바꾸어 번역하면 우스꽝스런 우리말이 됩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우리말의 특성을 살려서 시제를 융통성있게 사용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방금 든 예는 하나의 문장에서는 마지막 말만 시제를 살려 주고 이전의 동사나 형용사는 현재형으로 사용해야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시제를 언급하는 말이 한 마디만 있어도 그 문장 안에 사용된 말들이 그것과 동일한 시제이라는 것을 금방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문장에서 이런 식으로 시제를 언급하듯이, 한 문단이나 일정한 범위의 글 안에서도 시제를 파악할 수 있는 언급이 있으면 독자는 그것으로 다른 말들의 시제도 손쉽게 파악하고 글을 이해하기 때문에 영어처럼 낱낱이 시제를 맞추어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은 우리말의 ‘시제 생략 기법’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말 사전에서 ‘공부했다’라는 단어를 표제어에서 찾으면 그런 말이 나올까요? 안 나옵니다. 대신 ‘공부하다’만 나옵니다. 영어 사전에서도’studied’를 표제어로 찾으면 안 나옵니다. 대신 ‘study’만 나옵니다. 이른 바 ‘동사 원형’만 나오지 현재형이나 과거형이나 미래형이 표제어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동사 원형으로 말을 하면 잘못된 표현이 됩니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나는 어제 열아홉 시간 공부하다.”라고 하면 그 친구가 이상하다고 볼 것입니다. 일상 언어에서는 동사 원형에 시제를 나타내는 어미를 붙여서 쓰지요. 과거 시제로는 “나는 어제 열아홉 시간 공부하였다.”처럼 쓰고, 현재 시제로는 “나는 지금 밥을 먹다.”라고 하지 않고 “나는 지금 밥을 먹는다.”라고 씁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에는 동사 원형을 쓰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밥을 먹다 말다 하니?”처럼 쓸 때도 있고, 이 글의 첫 번째 기행문 (1)의 제목처럼 “천년의 한이 서린 신라의 고도 경주를 찾다”라고 쓸 때도 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을 “~ 경주를 찾다”라고 동사 원형을 썼다고 해서, 미래형인가 아니면 현재형인가 하면서 고민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당연히 과거를 이렇게 멋스럽게 혹은 뭔가 그럴듯하게 썼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다.”가 현대 문학 작품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한다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가 고어체를 채택한 동일한 표현인 것입니다.
성경의 문체 계속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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