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시니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명기 6장 4-5절)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한 사람들.
히브리라는 말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먼저 적용되었으며(창14:13) 오래 산 족장들 중의 마지막 사람인 헤벨(혹은 에벨)에게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창10:25). 그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자신의 6대 후손들보다 더 오래 살았으며 아브라함의 죽음 이후에도 얼마 동안 이삭과 야곱의 조상 중 유일한 조상으로 살아남아 있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의 자손’이라는 말과 대비되어 이방인들에게 잘 알려진 유대인들의 명칭이다. 유다에서 나온 유대인들이라는 명칭은 후에 유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왕하16:6).
유대인 선도 참조(72).
유대 민족의 창시자인 아브라함은 유랑하는 목자로서 많은 소와 양을 가지고 있었지만 영구히 거할 처소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물과 초장을 따라 여기 저기 이동하였으며 유랑 목자로서 갈대아의 우르에 살다가 하란으로 옮겨가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후손에게 영원토록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도 여전히 그런 식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고 그의 아들과 손자인 이삭과 야곱도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야곱의 아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고 기근의 때에 자기 가족을 이집트로 불렀다. 여기서 큰 민족을 이룬 뒤에 그들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불순종으로 인해 첫 세대는 죽고 모세도 죽었다. 그 뒤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모든 지파에게 배분해 주었다. 이때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두머리들과 재판관들과 부족의 치리자들의 통치를 받으며 사무엘 시대까지 이르렀다.
그 후에 왕정이 시작되어 사울이 초대 왕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이 그의 뒤를 이었으며 그의 가족은 바빌론 사람들의 침략이 있기까지 유다 왕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르호보암 시대에 통일 왕국은 분열되어 북쪽의 열 지파는 이스라엘 왕국을,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은 유다 왕국을 형성하고 서로를 대적하며 지내게 되었다. 이 두 왕국은 결국 많은 거주민들이 아시리아와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감으로써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70년 동안의 바빌론 포로 생활이 끝나고 히브리 사람들의 일부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짓고 민족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먼저 마카비(마카베오) 시절에는 시리아에 근거를 둔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그리고 후에는 로마에 의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결국 로마 사람들은 주후 70년 티투스의 지휘 하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그 뒤에 예루살렘이 재건되었지만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수립되기까지 유대인들은 독립 민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땅의 모든 민족들 사이로 들어가 타국인으로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히브리 사람들의 통치 체제는 신정(神政) 통치인데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모든 권력을 발휘하시며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군림하시는 체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치 체제는 모세와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재판관들과 왕들과 대제사장들 하에서 여러 차례 변천 과정을 겪었다. 이렇게 외적 통치 체제는 변천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군주로 여겨졌다. 모세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의 진영 한가운데서 왕으로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언제나 조언을 주시고 새로운 법들을 제정하며 모든 위기 상황에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셨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신정 통치 체제였다. 여호수아와 재판관들의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그분의 통치가 이어졌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움직였던 영으로 충만하여 주님께 모든 것을 묻고 행하였으며 재판관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지도자로서 히브리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재판관이요 대언자인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근심에 쌓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이 신정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삼상8:6-7). 하나님은 백성의 요구를 수용하셨으나 여전히 주권을 행사하시고 모든 백성의 순종을 요구하셨다.
히브리 사람들의 종교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족장들 시대에 그들은 직접적인 계시에 따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하였으며 기도와 희생 예물을 통하여 그분께 경배하고 우상숭배와 무신론을 배격하며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의 봉인으로 할례를 베풀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은혜와 믿음의 빛을 허락하는 법규들을 따랐다. 그들은 모든 민족들이 바라는 메시아를 고대하면서 그분이 자기들의 소원을 성취해 주실 것을 믿으며 살았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와 요셉 같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바른 전통을 지키려 한 사람들의 종교였다. 모세 시대 이후에 히브리 사람들의 종교는 좀 더 구체적이 되었고 예식과 날과 명절과 희생 예물 등을 정확하게 하나님께 드렸다. 이 시대의 경륜은 앞으로 올 완전한 것들 즉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생명과 불멸을 가져와 빛에 이르게 할 것들의 예표요 그림자였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이집트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우상숭배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래서 모세의 기적들과 우상을 피하라는 강력한 율법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진영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스런 표적 등도 그들의 가슴 속에 간직된 우상숭배 성향을 제거하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들을 체험하고도 곧바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였고 사울과 다윗도 그들의 강한 성향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공중 앞에서 감히 하지 않는 미신적인 행위들을 몰래 사적으로 실행하였다. 그들은 산당에서 희생물을 바쳤고 점치는 자들과 마술사에게 물었다. 심지어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솔로몬조차 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그는 페니키아와 모압과 암몬 사람들의 거짓 신들을 위하여 제단들을 세우고 자기 아내들이 그런 것들에게 경배 드리는 것을 허용했으며 또 스스로 그것들을 동경하였다(왕상11:5-7).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의 대부분이 이와 같은 연약함을 보였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에 금송아지 숭배를 도입하였고 이것은 너무 깊게 뿌리를 내려 완전히 박멸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나라를 빼앗긴 채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상숭배 참조. 포로 생활 이후에 그들은 더 이상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부패해서 하나님을 떠났고 영광의 주님을 거절하고 죽이면서 자기들의 죄의 잔을 가득히 채웠으며 그 결과 나라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1948년에 나라로 부활하기까지 약 2000년 온 세상으로 떠돌아다니는 저주의 백성이 되고 말았다.
그들이 이렇게 나라 없이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도 다른 민족과 달리 유대인이라는 정체를 유지한 것은 하나님의 가장 큰 기적의 하나라고 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I. 유대인들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가장 먼 나라인 중국과 티베트에까지 퍼졌으며 페르시아와 북인도 등과 같이 여행자들이 다닌 모든 곳에 들어갔다. 또한 아시리아 사람들이 포로로 끌고 간 지역에도 여전히 그들의 후손들이 있고 아라비아와 이집트와 아프리카 전역에도 많이 있다. II. 그들이 거주한 모든 지역에서 그들은 혐오거리로서 경멸과 박해의 대상이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재앙과 악한 일의 근원으로 여겨졌다. III. 이 모든 곳에서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만의 특징인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준수하며 속죄일을 지키고 토요일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고 어떤 형식으로든 유월절을 지켰다. IV. 그들에게는 여러 분파가 많아서 어떤 이들은 랍비들의 전통과 탈무드에 명기된 것들을 굳게 지키고 다른 이들은 이런 것을 다 거부하며 성경의 규례만을 준수한다. V. 그들의 대부분은 유대가 자기들의 땅이며 예루살렘이 자기들의 수도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디에, 얼마나 오랫동안 정착하든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팔레스타인 땅을 회복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경의 예언에 따라 결국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성전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