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KJB문서

  • 킹제임스성경
  • KJB문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신명기 4장 2절)

  • 70인역이란 무엇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조회수 : 21558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9일 16시 9분 46초
  • 질문: 학자들이나 목사들이 자주 언급하는 「70인역」이란 무엇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

    대답: 「70인역」은 보통 주 예수님 탄생 이전에 72명의 유대 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 성경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누군가가 상상 속에서 꾸며낸 책입니다.

    먼저 「70인역」에 대한 기존의 추측부터 정의해 보도록 합시다. 히브리어 성경(구약, Old Testament)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식적인 그리스어 역본을 만들고자 한 계획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Letter of Aristeas)라 불리는 한 고문서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 편지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역본이 유대인들의 공식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히브리어 성경을 대체할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별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작업이 행해진 가상의 장소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며 번역은 주전 250년경인데 이 시기는 구약 성경의 마감 시기인 주전 397년과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인 주전 4년 경 사이에 있었던 약 400년간의 침묵기간 중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70인역」이 무엇인가에 대해 일반적인 사항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역본은 「셉튜아진트」(Septuagint) 혹은 ‘70인 장로들의 번역’으로 알려져 왔는데 보통 영어로는 LXX로 표기되며 여기서 로마 사람들의 숫자 개념에 따라 L은 50, X는 10을 뜻하므로 이 숫자들을 합하면 70이라는 값이 나옵니다. 그런데 72명이 번역했다는 그 가상 속의 역본을 왜 ‘72인역’(LXXII)이라 부르지 않고 ‘70인역’이라고 부르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이 서신이 이 불가사의한 문서 즉 「70인역」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물인데 그 이유는 주전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은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합니다.

    이런 전설적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대라는 압력을 받게 되자 학자들은 급히 주후 200년 경 오리겐이 지은 「헥사플라」(Hexapla)를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70인역」(LXX)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때보다 거의 45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것이며 신약 성경이 완성된 후 100년도 훨씬 지나서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 역사에서 오리겐이라는 사람이 끼친 해악이 지대하므로 일단 오리겐과 그와 관련된 역사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소수 본문’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진 ‘국지적 본문’(A local text)이었고 거기에서 유세비우스는 대음모자 콘스탄틴 황제의 요청을 수행하기 위해 50개의 성경 복사본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세비우스는 참된 크리스천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순수한 본문을 사용하기 위해 안디옥으로 가지 않았고, 대신에 이집트에 있는 교육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거기에서 ‘학자들의 수정판’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세비우스는 안디옥 대신에 알렉산드리아를 선택했을까요? 그 주된 이유는 그가 이집트 학자인 오리겐을 열렬히 추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리겐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아드만티우스 오리게네스(주후185~254년)는 성경 본문 부패의 장본인입니다. 현재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회사 자체가 로마 카톨릭 교회사이므로 대부분의 신학교 교과서나 참고서들은 오리겐을 가리켜 ‘위대한 크리스천 학자요, 고대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던 신학자’라고 잘못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리겐은 한때 그리스 아테네 철학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이단자로서 판명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께서 ‘창조된 하나님’이었다는 이단 교리를 퍼뜨렸습니다. 이 같은 오리겐의 믿음에 대해 「뉴스탠다드 백과사전」(New Standard Encyclopedia) 제9권은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오리겐의 사상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그의 ‘로고스(Logos) 교리’였다. 이 사상은 요한복음 1장 1-5절과 다른 기독교 저술 안에도 나타나 있는데 특히 오리겐은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로고스란 창조의 신적 원리와 이성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이름이었는데 오리겐은 이 원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적용시켰다. 그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듦으로써 그리스도를 세상에 이성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로고스’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실제로 이 땅에서 사시며 가르치시기도 하셨던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무시하였다. 이 같은 교리는 4세기경의 이단 그룹인 아리우스파의 교리 정립을 위한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다시 말해 오리겐은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고 ‘하나의 창조된 신(神)’으로 믿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땅에 거하셨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오리겐의 저술에는 많은 모순이 있는데 바로 이 같은 사실은 부패한 사본들 속에 들어 있는 모순들을 설명해 주는 열쇠가 됩니다. 간혹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다가도 이내 돌아서서는 그것을 부인하곤 했습니다.

    사실 오리겐은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변개하고는 “말씀(the word)은 한 신(a god)이었다.”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과 ‘신’을 소문자로 쓴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같은 믿음은 참으로 우리 세대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고수하는 그릇된 교리에서 나온 믿음과 동일합니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같은 자신들의 교리를 부패한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요한복음 1장 1-5절과 3장 13절에서 취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오리겐이라는 인물이 자기 자신의 이단교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보편적 본문’을 변개시켜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리겐이라는 인물이 성경 사본의 변개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므로 우리는 그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철학 및 성경 변개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A 오리겐의 삶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부유하게 살던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나이에 교사로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의 삶은 세르베루스 황제의 박해가 있었던 주후 202년경에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순교했고 그의 가정은 가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뒤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도망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오리겐은 18세의 젊은 나이에 클레멘트가 창설한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천재였으며 수많은 책들을 모으고 읽고 저술했으며 또한 영지주의자였던 암브로스의 책들을 소장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교도로서 신플라톤주의를 창설한 사카스 밑에서 공부했고 매우 금욕적인 삶을 살았는데 그 예로 신발도 신지 않고 맨 땅에서 잤으며 스스로 거세(去勢)했던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박해를 당하면서도 그는 개인적으로 매우 용감했고 인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주후 213년에 로마를 방문했으며 그 뒤 알렉산드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어 주후 215-219년 사이에는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로 이주했습니다.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온 그는 주후 231년까지 거기에 거하다가 알렉산드리아의 지도부와의 마찰로 인해 출회되어 영구히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232년에 그는 가이사랴에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에 버금가는 학교를 세웠고 데시우스트라얀 황제의 모진 박해로 인해 가이사랴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B 오리겐의 믿음

    비록 오리겐이 초기의 위대한 교부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마저도 그가 교리적으로는 정통이 아니었음을 인정합니다.

    1. 그는 영지주의적 신념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2. 그는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습니다.

    3. 그는 종종 구약 성경을 신비적으로 해석했고 신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비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에 대해 저명한 학자 피커링은 마쉬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철학에 비추어 볼 때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면 오리겐은 곧바로 문자적 해석을 버리고 비유 해석을 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성경이란 기록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겐 거의 쓸모가 없다.’ 이 말은 곧 자기가 느끼는 바가 바로 성경이 의미하는 바라고 오리겐이 생각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피커링, 「신약 성경본문의 정체」(The Identity of the New Testament Text), 1977, pp. 140, 192).

    4. 그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기록을 부인했고 오히려 영혼이란 영원 전부터 계속해서 존재해온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5. 그는 또한 죽음 이후에 사람의 혼이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좀 더 고차원의 혹은 저차원의 생명으로 바뀐다는 윤회 사상을 믿었습니다.

    6. 그는 또한 보편적 구원을 믿었으며 악한 자들도 형벌을 받은 후에는 즉 연옥에서 고통을 받은 후에는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7. 그는 또한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별이나 달도 혼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8. 그는 결국에는 마귀들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9. 그는 목사를 제사장(혹은 신부)으로 부른 사람들 중 하나이며 주교들이 큰 죄를 용서하는데 한 몫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10. 대부분의 교부들이 성경대로 ‘전천년주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교회가 세력을 확장해서 평화를 가져온다는 ‘후천년주의’를 신봉했습니다.

    C 오리겐의 작품

    오리겐은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 온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평생에 6,000 여 권의 책을 저술했고 초기 교부들이 신약 성경에서 인용한 글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의 50% 정도가 그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의 7명의 중요한 교부들이 신약 성경을 인용한 것 중에서 오리겐의 것이 약 18,000개나 될 정도로 그는 왕성한 저술 활동을 했습니다.

    1. 오리겐의 대규모 작품

    a. 그는 성경의 거의 모든 책에 대한 주석서를 썼다.

    b. 그가 저술한 「제1 원리에 관하여」(De Principiis)라는 책은 조직신학 책이다.

    c. 그가 지은 「셀수스에 반대하여」(Against Celsus)는 변증학 책이다.

    d.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헥사플라」(Hexapla)이다.

    2. 「헥사플라」 : 구약 성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헥사플라」(혹은 ‘6난 성경’)는 여섯 개 난에 여러 가지 언어로 기록된 성경 즉 ‘폴리글롯’으로 오직 구약 성경만을 담고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난마다 각각 다른 구약 역본이 들어 있습니다. 시가서 같은 경우에 그는 서너 개의 다른 번역을 더 추가하여 ‘8난 성경’ 혹은 ‘9난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헥사플라」는 ‘벨과 용’(Bel and the Dragon), ‘유디스서’(Judith), ‘토비트서(Tobit)와 같은 위조된 책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하는 다른 외경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a. 「헥사플라」는 50개로 구성된 매우 큰 폴리오 책으로 그 분량만도 자그마치 6,500쪽이나 된다.

     b. 이 책은 주후 250년경에 완성되었다.

     c. 그는 7명의 속기사들과 7명의 필사하는 사람과 함께 일했다.

     d. 첫째 난은 히브리 본문으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소라 본문과 거의 같다.

     e. 둘째 난은 히브리어 본문을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을 담고 있다. ‘음역’이라 함은 다른 말의 문자를 사용하여 원어 단어의 소리대로 적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그리스어 ‘뱁타이즈’(baptize)는 음역한 것이며 만일 이것들을 번역하면 ‘평화’(peace)와 ‘푹 담근다’(dip)가 된다.

     f. 셋째 난은 아퀼라가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다.

     g. 넷째 난은 시마쿠스가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다.

     h. 다섯째 난은 오리겐의 작품으로 현재 「70인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i. 여섯째 난에는 테오도티온의 그리스어 역본이 있다.

     j. 「헥사플라」는 주후 638년까지 가이사랴의 도서관에 있었으나 그 뒤 모슬렘들의 침략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k. 「헥사플라」는 단지 그 일부분만 복사되었고 특히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은 ‘바티칸 사본’(B 사본), ‘시내 사본’(알레프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A 사본), ‘에프레미 사본’(C 사본) 등에 남아 있다.

    D 신약 성경 본문에 미친 오리겐의 영향

    오리겐은 성경본문 비평가들이 소위 ‘가정하여 수정하는 기법’이라 부르는 기법을 사용하여 종종 신약 성경 사본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 고쳤습니다. 이 기법은 한 마디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본문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오리겐이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일했으므로 그의 작품은 참으로 신약 성경 본문을 망가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신실한 성경학자였던 버건은 다음과 같이 오리겐의 신약 성경 본문 비평의 멋있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기록한 마태복음 19장 17-21절에 대한 주석에서 오리겐은 예수님이 그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켰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 명령이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포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왜냐하면 부자 청년이 ‘이 모든 명령은 제가 어려서부터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했으며 또한 분명히 예수님께서도 부자 청년의 말을 그대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 부자 청년이 자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했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율법 전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자 청년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이라고 대답하시면서 그 부자 청년이 아직 완전하지 못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오리겐은 사실 예수님이 그 부자 청년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 말씀이 원래의 마태복음에는 없었던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시 말해 그는 후대의 어떤 서기관이 이 구절을 집어넣었다고 믿은 것이다.

    위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저 유명한 오리겐이라는 본문 비평가가 자기가 받은 본문에 만족해하지 않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상상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본문에 가감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오리겐보다 더 자유롭게 본문을 수정한 학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로 이런 사람들의 영향으로 부패한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 등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70인역」의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오리겐이 「헥사플라」의 다섯 번째 난에다 스스로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넣은 것이 아니라 단지 「70인역」을 복사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 주장이 정당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 주장이 옳다면 빈틈없는 유다 학자 72명이 외경들을 - 심지어 그것들이 쓰이기도 전에 - 자기들의 작품 속에 첨가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유다 학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때는 오리겐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이러한 위조된 글들을 제멋대로 첨가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계22:18). 이렇게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보면 「헥사플라」의 다섯 번째 난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오리겐의 사역본(私譯本)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유세비우스(Eucebius)와 필로(Philo), 이 두 사람이 그리스어 모세 오경(Greek Pentateuch)을 예로 들면서 이처럼 전설 같은 책의 존재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들마저도 그것을 구약 성경 전체나 혹은 공식적으로 수용된 어떤 역본으로 언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엔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필사본이 하나도 없습니까? 있긴 합니다. 하나의 작은 파편에 불과한 「라일랜드의 파피루스 458번」(Ryland's Papyrus, #458)인데 이것은 주전 1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명기 23-28장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부서진 채 발견된 이 파편들의 존재로 인해 유세비우스와 필로는 “모세오경 전체가 어떤 서기관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그 목적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역사를 알리기 위함이었다.”라는 망언을 한 것 같습니다. 이 파편들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공식적인 그리스어 역본으로서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주전 250년경 그 번역 작업을 위해 선발된 72명의 유다 학자들은 주전 150년에는 실력 없는 미숙한 학자들로 판명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70인역」이 번역된 지 100년 후에는 쓸모없게 되어 다시 새로운 역본이 나와야만 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오리겐의 「헥사플라」, 「라일랜드의 파피루스 458번」 그리고 ‘유세비우스와 필로의 주장’ 등은 변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들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더욱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 첫 번째 모순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자체에서 발견됩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 편지가 아리스테아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썼다는 것을 믿지 않을 뿐더러 아예 어떤 이들은 그 편지의 저자가 사실 필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그 편지의 저작 연대가 ‘기원 전’이 아니라 사실은 ‘기원 후’라는 것을 뜻하며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편지를 쓰게 된 속셈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오리겐의 헥사플라 다섯 번째 난을 「70인역」의 복사본으로 믿게 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 용의주도한 계획은 외견상으로 볼 때 확실히 성취되었습니다.

    만약 아리스테아스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난관에 부딪혔을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첫 번째 난제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대표적인 학자 6명씩을 선발하기 위해 어떻게 그가 열두 지파의 위치를 알아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차례의 전쟁 패배와 포로생활을 통해 뿔뿔이 흩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12지파의 경계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하나하나 구별할 수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만일 그가 12지파를 식별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 72명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런 번역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 모든 유대인들은 성경기록을 취급하는 공식 책임자가 신17:18; 31:24-26과 말2:7에서 입증되듯이 레위 지파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머지 11지파의 어느 지파도 감히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런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대인들이 그들 주위의 이방 민족들과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안식일 성수, 깨끗케 하는 세세한 율법 조항들과 고유의 여러 가지 법들을 고유한 전통으로 삼아 왔습니다.

    이와 더불어 히브리인들이 자기들의 언어를 계승하는 일에 열심을 낸 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이방 민족들과 자기들을 구별되고자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중국이나 인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기 자녀들에게 히브리어 외에 다른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이디오피아의 팔라샤 유대인들(Falasha Jews)은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유대인들의 언어를 이어받았다는 증거로 히브리어를 간직하고자 힘쓰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 나라의 여타 부족들과 구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유대인들 즉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는 민족이 자기들의 유산인 히브리어를 버리면서까지 지극히 거룩한 재산인 성경을 이방인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기꺼이 번역하려 했다.”는 학자들의 이러한 모순된 이야기를 믿을 만큼 순진하십니까? 그런 가정은 지극히 불합리하며 우스꽝스런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나오는 많은 구약 인용 구절들이 「70인역」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거죠?

    그들이 알고 있는 「70인역」이란 바로 오리겐의 「헥사플라」의 다섯 번째 난을 가리킬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약 성경의 인용 구절들은 절대로 「70인역」혹은 「헥사플라」에서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 있는 구약 성경 인용 구절들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방식을 통해 구약으로부터 자유롭게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그분께서 누군가 꾸며낸 「70인역」에서 단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의문이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왜 학자들은 「70인역」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박할 수 없는 이러한 진실에 대항하면서 이 거짓된 「70인역」의 존재는 그처럼 쉽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그 대답은 슬프지만 단순합니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만도 수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될 뿐더러 학문연구 수단으로 충분히 정통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합니다. 이와 비교할 때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어로 된 구약 성경의 공식 역본이 존재했다면 성경 비평가들은 히브리어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고충을 겪지 않아도 되고 단번에 성경 비평학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세 배로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런 얄팍한 근거를 토대로 「70인역」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교만과 탐욕에 기초를 둔 행위일 뿐입니다.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비평가들은 「70인역」 같은 위조문서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총애하는 「70인역」이 히브리어 본문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역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서는 “어떤 역본도 원어와 같은 권위를 갖지는 못한다.”라는 이유로 그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걸까요?

    이러한 학자들의 일구이언을 통해 우리는 ‘원어들을 학습한 적이 없는 사람들’ 즉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 위에서 자신들의 학자적 위치를 고수하고 스스로 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교만한 학자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만일 여러분이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려 한다면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텔레그램으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