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KJB문서

  • 킹제임스성경
  • KJB문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신명기 4장 2절)

  • 성경 사본들의 출처는 어디인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8>조회수 : 10609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9일 16시 17분 58초
  • 질문: 처음의 자필 원본에서 복사된 성경 사본들의 출처는 어디인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8>

    대답: 현존하는 성경 사본의 대부분은 두 개의 계열 혹은 군(群)으로 나뉩니다. 이 계열들은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디옥이라는 도시들에 의해 대표됩니다.

    이 세상에는 단지 두 개의 성경 즉 하나님의 성경과 마귀가 변개시킨 성경이 존재합니다. 성경에 대한 견해도 단지 두 가지뿐입니다. 전적으로 완전하다는 견해든지 혹은 불완전하다는 견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사본들의 형태와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볼 때 이 두 성경은 중동 지역의 매우 다른 장소들에서 나오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디옥이 그 두 장소입니다.

    어떤 장소가 우리에게 완전한 성경과 정확한 이데올로기를 주며 또 어떤 장소가 우리에게 마귀의 성경과 부정확한 이데올로기를 주는가를 식별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실 이러한 연구는 성경이라는 한 가지 원천 때문에 아주 쉽게 이루어집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지만 우리는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성경을 우리의 최종 권위로 받아들입니다. 그러하기에 누구나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어떻게 생각하시며 시리아의 안디옥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가 따라야 할 기본 규칙은 보통 ‘첫 번째 언급의 법칙’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대체로 어떤 사람이나 장소 혹은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부분의 문맥이 그 사람이나 장소 혹은 단어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우리는 이집트에 대해 성경이 취하는 태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집트(애굽, Egypt)

    (1) 성경에서 이집트는 창12:10-12에서 제일 먼저 언급됩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이집트로 내려가 거기 머물려 하더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러 들어가려 할 때에 자기 아내 사래에게 이르되, 이제, 보라, 당신은 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 여인은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되 당신은 살려 두리니

    창12:1-3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소위 ‘아브라함의 언약’이라고 알려진 언약이 주어짐을 봅니다. 문자 그대로 그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 세상을 그들의 소유로서 양도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창12:10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국에 있던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12절에는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자기의 아내 사래를 강탈할지도 모른다는 아브라함의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분명히 긍정적인 문맥이 아니지요? 우리는 성경이 이집트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매우 부정적임을 봅니다.

    (2) 출1:11-14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였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작업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어 그들을 괴롭게 하더니 그들이 파라오를 위하여 저장 도시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니라. 그러나 그들이 그들을 괴롭게 할수록 그들이 더욱 번성하고 증가하므로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근심하니라. 이에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더 엄격히 섬기게 하고 고된 노예생활로 회반죽 이기는 일과 벽돌 굽는 일과 들에서의 온갖 섬기는 일에서 그들의 삶을 괴롭게 하니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섬기게 한 일이 다 엄격하였더라.

    사실상 이집트의 통치자였던 파라오(바로)는 15-16절에서 유대의 모든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고 포고합니다.

    이집트 왕이 히브리 산파들에게 말하더니 그들 중 하나의 이름은 십브라요, 다른 하나의 이름은 부아더라. 그가 이르되, 너희가 히브리 여인들을 위하여 산파의 직무를 행할 때에 해산대 위의 여인들을 살펴보아 그것이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릴지니라, 하였으나

    이 구절도 명백히 이집트에 대해 부정적인 것을 암시하지 않습니까?

    (3) 이집트 땅에서 자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여 내신 후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이 이집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말씀하십니다. 2절에서 그분께서는 이집트를 ‘속박의 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곧 속박의 집에서 데리고 나온 주 네 하나님이라.

    이것 역시 이집트에 대한 또 한 번의 부정적인 언급인데 이번에는 이것이 직접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음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4) 신4:20에서 모세는 이집트를 ‘쇠 용광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너희를 취하시고 너희를 쇠 용광로 곧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사 이 날의 너희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 상속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5) 신17:16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미래에 이스라엘이 왕을 갖게 될 때 그 왕이 이집트와 상업적인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위해 말을 많이 늘리지 말며 말을 많이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지 말지니 주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후로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하셨느니라.

    (6)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11:8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비난하시면서 그곳을 소돔과 이집트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의 죽은 몸이 그 큰 도시의 거리에 놓이리니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하며 그곳은 또한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이상과 같은 간략한 연구는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살펴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성경이 이집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우리는 성경에서 알렉산드리아가 단지 네 번 언급되며 네 번 모두 나쁜 의미로 언급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1) 알렉산드리아는 행6:9에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그때에 리베르티 사람과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자들의 회당이라 하는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벌이더니

    스데반과 변론하며 실제 그를 죽였던 무리들 가운데는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2)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행18:24에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볼로라 하는 어떤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 기록들에 능통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매우 열심이 있었으나 복음에 관해 잘못 알고 있었던 아볼로라는 이름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알지 못한 채 그는 에베소에서 침례자 요한의 침례에 대해서만 가르쳤습니다(행18:25, 19:3). 아볼로는 그때까지도 [신약시대의] 구원을 받지 못했으며 그가 개종시킨 자들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후에 아볼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의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었으며(26절) 그 이후에야 비로소 그의 메시지가 완전해졌습니다(28절). 그러나 이처럼 두 번째 언급된 곳에서도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잘못된 성경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3)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세 번째와 네 번째 언급 역시 매우 비슷합니다. 사도행전 21장에서 체포되고 카이사르에게 변론을 요구한 후 바울은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로마로 보내집니다(행27:6).

    거기서 백부장이 이탈리아로 항해 중인 알렉산드리아의 배를 만나 우리를 거기에 태우니라.

    (4) 로마로 항해하는 도중 바울이 탄 배는 폭풍우로 인해 가라앉게 됩니다. 멜리데라 하는 섬에서 석 달을 보낸 후 그는 또 다른 배를 타고 죽음을 향한 길로 보내집니다. 바울을 죽음으로 몰고 갈 이 두 번째 배는 어디서 왔을까요?

    석 달 뒤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의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기호는 카스토르와 폴룩스더라(행28:11).

    위에서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언급하고 있는 성경의 네 군데가 다 알렉산드리아에 대해 부정적임을 알았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성경의 판결이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100년경에 아테네로부터 철학과 교육을 받아 들였고(행17:16) 그 이후에 세상 철학과 학문의 중심지로 알려졌음에 주목해야 합니다(골2:8). 거기에는 철학자 판테누스(Pantaenus)가 설립한 성경 학교가 있었습니다. 판테누스는 성경을 모두 철학적으로 그리고 알레고리 즉 비유로 해석했습니다. 철학적이라 함은 그가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진리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또한 성경을 알레고리(비유)적으로 봄으로써 그는 아담, 노아, 모세, 다윗 같은 사람들은 단지 유대인들의 시(詩)에나 존재하는 인물이고 실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와 후에 오리겐(Origen)에 의해 그 학파의 우두머리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그의 회의론을 공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순수한 복사본들’을 받는 즉시 자기의 뒤틀린 사상과 병행하도록 성경 사본을 개조한 사람은 교육과 철학이라는 두 개의 마취제에 미혹된 오리겐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성경 비평 학자들의 아버지이며 눅24:40, 행8:37과 요일5:7 같은 구절들을 삭제해 버린 필사본들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경은 완전하며 오류가 없다.”고 단숨에 말한 뒤에 곧바로 “성경에는 실수들과 오역들이 있다.”고 진술하는 알렉산드리아 철학 즉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근본주의 학자들이 앵무새처럼 되풀이되는 부패된 철학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부패한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에다 맨 처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바로 이 실성한 이데올로기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경 신자들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부패되었으므로 마땅히 폐기처분시켜야 하며 또 “성경에 오류가 있으므로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 철학 역시 매우 교활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본주의 산물이므로 마땅히 배격해야 합니다.

    안디옥(Antioch)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 안디옥은 알렉산드리아가 처음 언급되는 사도행전 6장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알렉산드리아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나타납니다.

    (1) 사도들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집사’(deacons)로 알고 있는 ‘사역을 돕는 자들’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이 그 직분을 맡아야 하는가에 대해 3절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성령님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오직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리라, 하니라.

    그 뒤 행6:5에서 일곱 사람이 선택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쁘게 여기고 믿음과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유대교 개종자 니골라를 택하여

    첫 번째 집사들 가운데 한 명인 니골라가 안디옥 사람이었음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이 단순한 일치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집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니골라만 그 고향이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또한 안디옥이 성경에서 처음 언급된 곳에 알렉산드리아가 언급된 것도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고 같은 구절에서 안디옥은 긍정적인 견지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는 부정적인 견지에서 처음 언급되었음을 아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안디옥에 대한 몇 개의 적절한 보기들은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의 중심지로 안디옥을 선택하셨음을 증거해 주는데 이것들은 물방울 같은 증언으로 시작해서 대홍수 같은 증언으로 그 끝을 맺습니다.

    (2) 안디옥은 행11:19-21에 나타납니다.

    이제 스데반으로 인하여 일어난 핍박으로 말미암아 널리 흩어진 자들이 멀리 베니게와 키프러스와 안디옥까지 여행하며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선포하더니 그들 가운데 키프러스와 구레네 출신의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그리스말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주 예수님을 선포하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므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핍박을 피해 도피한 크리스천들 중 한 무리가 자기들이 도피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을 봅니다. 안디옥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연 사건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21절은 하나님의 영께서 안디옥에서 힘있게 일하셔서 상당수가 구원받았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초의 이방인 대각성 운동이 바로 안디옥에서 일어났음을 보게 됩니다.

    (3) 행11:22-24에서 우리는 ‘위로의 아들’인 바나바(행4:36)가 안디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보기 위해 안디옥에 파견됨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 이 일들에 관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의 귀에 들어가매 그들이 바나바를 보내며 그가 멀리 안디옥까지 가게 하니라.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즐거워하며 모든 사람에게 권면하여 그들이 마음에 작정을 하고 주께 붙어 있으라고 하니라. 바나바는 선한 사람이요, 성령님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더라. 많은 사람들이 주께 더해지더라.

    (4) 행11:25-26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때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떠나서 그를 만나매 안디옥으로 그를 데려오니라. 그들이 만 일 년 동안 그 교회와 함께 모이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더니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니라.

    첫 번째로 우리는 바나바가 젊은 개심자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행9:26-27에서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바울의 개종을 변호해 주었던 이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열심 있는 한 젊은 개종자가 다소에 가서(행9:30)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는 것을 보고 슬퍼하였습니다. 사울을 찾아낸 뒤 바나바는 그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알렉산드리아로 데려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신약 교회의 영적 수도인 안디옥으로 그를 데려갔습니다. 사실 바울이 위대한 바울이 된 것은 다 이 경건한 노성도의 친절한 행동 덕분이었습니다.

    (5) 행11:26에서 우리는 거듭난 신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 불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자들이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 부를 때마다 안디옥의 우리 영적 선조들과 영적인 연대감을 갖게 됩니다. 안디옥과 크리스천의 관계는 플리머스록과 미국인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6) 27-28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북쪽에 있는 안디옥으로 보내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무렵에 대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렀는데 그 중의 한 사람 곧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일어나 성령을 통해 온 세상에 두루 큰 흉년이 들 것을 표적으로 보여 주더니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그 일이 이루어지니라.

    유대인들의 중심지 예루살렘은 이제 영적으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몇 해 전에 행1:8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고향인 그곳을 떠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7) 행11:29-30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안디옥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흉년을 당하게 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보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제자들이 저마다 자기 능력대로 유대에 거하던 형제들에게 구호금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또 그것을 실행하여 구호금을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맡겨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그러나 이 구절이 하나님의 신약 교회의 본거지에 대해 성경이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곳은 아닙니다.

    (8) 복음 선포를 위해 온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결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습니다(물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 대신 안디옥에서 자신의 충성스런 종들을 찾으셨습니다.

    이제 안디옥에 있던 교회에 어떤 대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의 루기오와 사분영주 헤롯과 함께 양육받은 마나엔과 사울이라.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한 뒤 그들을 보내니라(행13:1-3).

    따라서 ‘크리스천’이라는 명칭이 안디옥에서 유래된 것같이 성경에 언급된 첫 번째 전도 여행 또한 안디옥에서 나왔음이 명백합니다. 이 위대한 임무를 완수하고 나서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에 보고서를 보내거나 그 도시를 관광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안디옥으로 되돌아왔을 뿐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버가에서 선포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을 향해 떠나니 이곳은 그들이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그들을 맡겼던 곳이더라. 그들이 도착하여 교회를 함께 모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또 그분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되풀이하여 말하고 거기서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머무니라(행14:25-28).

    안디옥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두 번의 언급을 살펴보면 안디옥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9) 행15:23-27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에 관한 결정 사항을 통지하기 위해 두 명의 대표를 안디옥에 보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들 편에 이같이 편지하니라. 사도들과 장로들과 형제들은 안디옥과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들에 속한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우리가 들은즉 우리에게서 나간 어떤 자들이 말로 너희를 혼란에 빠뜨리고 너희 혼을 뒤엎으며 이르되, 너희가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하나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명령을 준 적이 없으므로 한 마음으로 모여서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택한 사람들을 너희에게로 보내는 것을 좋게 여겼나니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유다와 실라를 보내었으니 그들도 너희에게 같은 것들을 입으로 전하리라(행15:23-27).

    임무를 마친 후에 유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라는 안디옥에 남기로 하였고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의 선교 동역자로서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0) 물론 두 번째 전도여행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행15:40이 설명해 주는 대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안디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안디옥의 어떤 매력적인 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의 중심부로 그곳을 선택하셨을까요? 안디옥은 로마, 아테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처럼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그 스스로를 이방종교, 이방학문과 이방철학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안디옥이 위에서 언급된 도시들이나 심지어 예루살렘과도 달리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세계의 거의 정확한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고 동서 무역로의 교차 지점에 세워졌다는 점에도 비중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심지어 안디옥은 오론테스 강을 경유한 항구도시임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의 본거지로서의 활발한 기능을 위해 매우 중요한 속성들입니다. 아마도 바울 서신들의 자필 원본들의 대부분이 안디옥에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2세기에 루시안(Lucian)이라는 한 제자가 안디옥에서 성경학교를 세웠습니다. 루시안은 이교도 철학을 불신하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의 학파는 성경의 신성과 권위를 찬미했으며 성경을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상징적 비유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므로 안디옥은 성경 필사본의 바른 계열의 기원 도시일 뿐 아니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데올로기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마음은 선하나 ‘알렉산드리아식’ 교육을 받은 수많은 목회자들이 안디옥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을 높이고는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성경이 완전할 수 없다.”는 알렉산드리아식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식 확신 때문에 그들은 시편 12:6-7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 완전한 성경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옳지 못한 태도로 옳은 책(성경)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들의 이집트 선조들이 행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들과 개악들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도록 예정되었음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 성경의 충고를 무시하고도 실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 솔로몬은 이집트를 멀리하고 말(horse)을 늘리려고 이집트에 내려가지 말라(신17:16)는 성경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왕상3:1에서 그는 이집트 왕 파라오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왕상10:28에서 그는 이집트에서 말을 사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상11:3-4에서 우리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돌아섬을 보게 됩니다. 5-8절에서 그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9-43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말을 사기 위해 이집트에 내려가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찌 감히 그곳에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도 이집트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무시하고서는 일들을 잘 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습니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텔레그램으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