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신명기 4장 2절)
질문: 성경 역본들을 놓고 다투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강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5> 대답: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을 다해 지키는 것 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강조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여러분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1. 여러분 생각에 성실하고 타당하다고 여기는 방법을 이용해서(레 10:1-3을 보십시오) 2.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적 권고들을 가능한 한 엄격히 지키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분께 사랑을 보일 수 있으며 이것은 평생에 걸쳐 이루게 될 수고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을 구분 짓는 표시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가 그와 함께 있게 하리라. 그분을 사랑하는 표시는 곧 ‘그분의 말들’(words)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들(sayings)을 지키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8장 51, 5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는 네가 마귀 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브라함과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말하기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와 같이 사랑은 ‘그분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들’(sayings)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들’(words)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 다시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그건 단지 그리스어 원문의 말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호 애재라! 이런 말은 단지 여러분을 더 깊고 더 치명적인 함정으로 유인할 뿐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성경의 예가 이를 잘 설명할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는 도중 ‘큰 물고기’에게 삼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욘1:17).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큰 물고기’가 ‘고래’라고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현재 유전학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의 가치에 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바로 이 성경 구절에 이르면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분의 입술로부터 나온 말씀을 훔칩니다. 모든 새 역본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고래’를 한결같이 ‘물고기’로 고칩니다. 이 일은 그들이 중학교 생물학 시간에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다.”라고 배웠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보기에 모순을 가진 것 같은 성경 - 그런데 이들의 모순은 그들의 중학교 생물학 교사가 불어넣어 준 지식과 모순이 되는 것이지 성경 자체와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님 - 과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다.”라는 것도 모를 만큼 지식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직면하고는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여 쩔쩔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장 마태복음 12장 40절로 달려가서는 성경 즉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자기의 최종 권위가 되는 책과 예수님 곧 자기의 ‘주님’이시요, 구원자이신 그분의 입술에서 나온 ‘고래’라는 단어를 빼 버립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나오는 ‘고래’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는 ‘ketos’이며 ‘물고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ichthus’입니다. 물론 이것들은 같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0절, 17장 28절 같은 곳에서 ‘ichthus’라는 그리스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만약 원하셨다면 그분께서는 분명히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도 그것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로서 ‘성경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여기서 두 개의 중요한 성경적 진리들을 간과합니다. 첫째로, 그는 요나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비해 두신 ‘큰 물고기’에 의해 삼켜졌음을 간과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담이 단 하나의 생물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창세기 2장 19, 20절에서 나머지 창조물에게 이름을 주기 전에 이미 창세기 1장 21절에서 고래에게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이 풍성히 낸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피조물 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날개 달린 모든 날짐승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사실은 고래가 창세로부터 이미 ‘예정’(창1:21; 욘1:17)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은 성경 교정가들조차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사실이지요. 하나님을 돕겠다는 작은 ‘원조자’가 무시하는 두 번째 진실은,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고래’에서 ‘물고기’로 바꾼 것으로서, 이는 요한복음 14장 23절의 “내 말들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깨뜨리는 것이며 실로 심각한 죄에 해당됩니다. 성경을 ‘정정하는 것’은 마치 흐르는 모래를 밟는 것과 같습니다. 헤치고 나오려고 발길질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그 속으로 더 빨리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NASV, NIV, NKJV와 나머지 새 역본들의 편집자들은 ‘ketos’를 번역하는 일에서도 틀렸을 뿐 아니라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명령 또한 무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 즉 고래를 말씀하시고 여러분의 목사, 부모, 혹은 교수가 다른 것 즉 물고기를 말할 때 여러분은 단호하게 사람의 견해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감싸고 옹호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전적으로 사로잡혀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