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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신명기 4장 2절)

  • 에라스무스는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였나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7>조회수 : 10916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1일 15시 5분 31초
  • 질문: ‘공인 본문’의 편집자 에라스무스는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였나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7>

     

    대답: 후에 ‘공인 본문’으로 알려진 그리스어 본문을 편집했던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당혹하게 만든 인물이었고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이기에는 너무도 형편없는 본보기였습니다.

     

    성경의 본문이나 사본 등에 대해 논의하게 되면 언제나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을 접하게 되며 그때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인본주의자였다.” 혹은 “그는 전형적인 로마 카톨릭 교도였다.”라는 주장을 하곤 합니다. 한 마디로 이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의 요점은 ‘인본주의자’나 ‘카톨릭 교도’가 만든 성경 본문에 기초를 둔 킹제임스 성경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필라델피아 제십장로교회의 유명한 목사이자 성경 무오성에 관한 국제 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보이스(James M. Boice) 목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공인 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해 공공연하게 나쁘게 말하며 ‘공인 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에라스무스가 인본주의자였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을 정확히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공인 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킹제임스 성경의 기초가 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만든 에라스무스가 실제로 인본주의자였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지난 400년 간 온 땅에 퍼져 복음의 빛을 발한 킹제임스 성경 본문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위와 같은 주장을 펼쳐왔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근본주의 대학인 밥존스 대학의 커스터(Stewart Custer) 교수 역시 「킹제임스 성경 논쟁에 대한 진실」이라는 글에서 에라스무스에 대해 동일한 견해를 펼칩니다.

     

    「공인 본문」은 1516년에 로마 카톨릭 인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 성경」과 함께 시작되었다.

     

    비난을 받았지만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 다른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러한 견해 역시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언뜻 보면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런 견해가 이미 역사적으로 정립된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수많은 증거들은 에라스무스란 인물이 ‘로마 카톨릭 인본주의자’를 능가하는 매우 비범한 사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들처럼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해에도 어떤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들이 완전하지 못하고 또 충분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450년이라는 긴 역사의 시간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현존하는 기록들은 여러 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역사가나 기록자의 편견에 따라 한 쪽으로만 해석되곤 합니다.

     

    우리는 결코 에라스무스가 영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역시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문제들 -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다윗 왕과 같은 완전한 사람도 지니고 있던 문제들 -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변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근본주의적 크리스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에라스무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완전치 못한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라 자신이 보고 있는 분명한 잘못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은 것, 이교도들의 학식을 열렬히 동경한 것, 각종 성사, 교황제도, 사제 제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명백한 잘못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 등등.

     

    그러나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를 “로마카톨릭 인본주의자요, 부주의한 성경본문 편집자”로 낙인찍는 것은 참으로 잘못임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에라스무스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 위해 그의 생애와 신학에 대한 서적들을 찾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두 개의 중요한 책들을 찾아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저명한 역사학자 베인튼(Roland H. Baiton)이 저술한 「기독교계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Christendom)이고 다른 책은 1894년에 출간되어 지금은 절판된 프로드(J. A. Froude)의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서신」(Life and Letters of Erasmus)입니다.

     

    우리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 역사적 기록들을 검토했으며 그 결과 소위 복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에라스무스를 부정적인 인물로 내모는 것이 매우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에라스무스에 대해 그처럼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자신들이 신뢰하지 않는 「그리스어 공인 본문」과 관련해서 에라스무스가 처음으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생애와 서신을 통해 그가 결코 비난받을 만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다음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창조된 후 약 6,000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완전치 못한 사람들을 자신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최종 종착지가 어디인가, 즉 천국인가 지옥인가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는 일에서 에라스무스를 선택했는가 선택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논의할 때도, 과연 에라스무스가 구원받은 사람이었는지 혹은 영적인 사람이었는지 하는 것 자체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구약 성경의 발람, 삼손, 솔로몬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 중에서 발람은 구약 성경 보존의 임무를 맡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삼손과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적으로 불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사용하셨으며 특히 발람과 솔로몬의 경우에는 이들을 통해 영감된 성경기록을 이 세상에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 쓰였습니다.

     

    또한 이사야서 44, 45장을 보면 하나님의 종이라 불림을 받은 페르시아(바사)의 고레스 왕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가 이교도들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다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라, 하는 자니라(사44:28).

     

    주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민족들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또 왕들의 허리를 풀어 문짝이 두 개인 성문들을 그 앞에 열게 하고 그 성문들을 닫지 못하게 하리라(사45:1).

     

    이사야서 45장 4절을 보면 고레스가 구원받지 못한 인물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고레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나의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

     

    우리가 말씀드리려는 바는 비록 에라스무스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 옳지 못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경 보존을 위한 통로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자료를 통해 독자들께서도 확신하게 되겠지만 우리는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에라스무스가 구원받은 사람이요, 매우 영적인 사람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인본주의자였다.”라는 주장에 대해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려 합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인본주의자’라고 정의 내리는 관점에서 볼 때 에라스무스는 결코 ‘인본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인본주의자’라 하면 사람을 하나님 위에 놓으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인본주의자들은 무신론자요, 진화론자들입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결코 그런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사실 ‘인본주의자’라는 말은 16세기 이후로 그 뜻이 크게 변했습니다. 16세기 이전의 ‘인본주의자’라는 말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점에 대해 영국 ‘트리니태리안 성경협회’(Trinitarian Bible Society)의 브라운(Andrew Brown)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젊어서부터 죽을 때까지 철저한 ‘크리스천 인본주의자’였다. 르네상스 시대와 종교개혁 시대에는 ‘인본주의자’라는 말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무신론적 진화론자’를 의미하지 않았다. 중세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우민정책’으로 인해 말 그대로 암흑시대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인본주의자들은’ 고대문학, 문화, 교육 등에 큰 관심을 갖고서 좀 더 높은 수준의 시민 생활을 추구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스테파누스, 베자, 칼빈 등이 모두 인본주의자였으며 이 같은 인본주의자들의 이상이 기독교의 복음과 합쳐져서 암흑시대를 벗어난 16세기 이후의 서구 문명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명히 에라스무스는 로마 카톨릭 교도였지만 동시에 개혁자였다. 그는 카톨릭 교회의 권리 남용과 심각한 부패에 대해 크게 비판했으나 카톨릭 교회를 내부에서 개혁해야 하며 거기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히 프로테스탄트들과 카톨릭교도들 모두에게 칭송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 중 몇몇은 비록 그 안에 가끔씩 옳지 못한 교리가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영적인 것이었다. 특히 그가 지은 「크리스천 군사를 위한 안내서」는 너무나 유익한 책이어서 영어 신약 성경을 출간한 틴데일이 영어로 옮길 정도였다.

     

    사실 1997년도에 출간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펴 보면 틴데일같이 성경을 연구하고 번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평민들의 손에 쥐어 준 프로테스탄트 학자도 ‘휴머니스트’ 즉 ‘인본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유명한 백과사전 편집자들 역시 그 당시에 고전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들을 ‘인본주의자’로 분류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에라스무스의 행적을 조사하여 과연 그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인본주의자’였으며 동시에 복음을 깨닫지 못한 ‘로마 카톨릭 교도’였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는 1466년(혹은 1469년)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536년에 일흔 살의 나이로 죽었으며 16세기 경 유럽에서 최고의 학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시적 의학술과 함께 전염병이 사람의 평균 수명을 대략 30-40년으로 제한하던 그 당시 그가 그처럼 장수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에라스무스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전염병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형은 삼촌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양육비 부담을 회피하고자 하는 삼촌이 그들을 수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청년시절 에라스무스는 데벤터라는 도시에서 그 당시 최고의 학문을 전수 받게 되었고 그가 지닌 매력과 예의범절 그리고 재치 있는 지혜로 말미암아 큰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그는 확실히 비범한 지능의 소유자였으며 수많은 책을 저술한 작가였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열 시간 걸려서 하는 일을 단 한 시간에 끝낼 수 있었습니다. 대영 박물관내 도서관의 많은 부분이 에라스무스 개인이 저술하거나 편집한 책으로 쌓여 있을 정도로 그는 많은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에라스무스를 논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성경의 기초를 쌓았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매우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형제들 -Brethren of the Common Life - 사이에서 자라났으며…. 그의 평생동안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했다(라이온의 「기독교의 역사」(History of Christianity), p.359).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라이온이 지은 「기독교의 역사」라는 책이 「그리스어 공인 본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온은 에라스무스가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들 안에서 양육을 받아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처럼 성경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종교개혁 이전이나 이후에 로마 카톨릭 교도들에게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에라스무스의 믿음과 영은 천주교보다 성경에 더 가까이 있었습니다.

     

    자, 그럼 ‘인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온 에라스무스의 성경관이 어떠했는가를 그 자신의 말을 통해 살펴봅시다.

     

    나는 매우 연약한 여인이라도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스스로 읽고 깨닫기를 바라며…그런 말씀들이 모든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사람뿐만 아니라 터키 사람이나 이슬람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또한 쟁기질하는 소년이 쟁기질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옷을 짜는 사람이 옷 짜는 기계소리에 맞추어 이 말씀들을 흥얼거리며, 여행하는 사람이 이 말씀들을 통해 여행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기를 바란다…우리는 다른 공부를 한 것으로 인해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올 때 성경 말씀을 읽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 귀한 말씀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으셨다 다시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여 주며, 그분이 바로 우리 옆에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Famine in the Lord」, Norman Ward, p.38)

     

    이와 같은 진술문은 결코 16세기에 살았던 ‘천주교 인본주의자’의 확신이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성경 말씀을 전해 주려는 매우 고귀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에라스무스의 가장 훌륭한 점은 보통 사람들을 향한 그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엄격히 ‘계급화 된 사회’에서 그는 일반인들의 손에 성경을 쥐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제롬의 라틴어 역본」이 로마 제국이라는 철저한 계급 조직의 명령에 의해 번역된 데 반해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라틴어 역본」 과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그 당시 일반인들의 손에 쥐어 주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로 번역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성경이 단지 향기를 내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가 번역한 성경을 집에서 읽는 자마다 그것으로 인해 큰 유익을 얻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농부, 재단사, 여행자, 그리고 심지어 회교도들조차’ 손에 성경을 잡고 읽는 것을 보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다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후에 그는 자신의 상급 동료들이 놀라 자빠지도록 심지어 ‘석공과 매춘부와 포주들’까지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장성한 후에 그는 카톨릭 교회의 어거스틴파 사람들이 가장 좋은 장서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파에 속하게 되었으며, 1492년에는 공식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어거스틴파 교도들의 기준에 따르자면 참으로 유별난 데가 많았습니다. 그는 교회 축제일 전야의 철야 기도를 지키기를 거부했고, 금요일에 고기 먹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으며 사제로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로서의 역할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비록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의 몸을 구속하고 있었으나 그의 영과 혼은 그런 틀에서부터 벗어나 언제나 자유로웠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많은 작품을 썼으며 그 안에서 자기가 속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조리와 무분별한 행동에 대해 반기를 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교황의 권력과 사제단, 그리고 수도승들의 허랑 방탕함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승들이 돈을 만지지는 않지만 술과 여자에 대해 성실하지 못함을 성토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성직자들의 내연 관계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소위 ‘이교도’라 부르는 자들을 다루는 잔악성에 대해 공격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공연한 사악함에 대항하여 저술한 「야만인들에 대하여」(Against the Barbarians)라는 제목의 소책자는 실제로 이런 것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그의 많은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한편 그는 율리우스 교황을 비롯한 여러 교황의 독재를 계속해서 비난했습니다. 그는 종종 교황 율리우스가 이끄는 ‘성전’(聖戰)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전쟁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율리우스’(교황)가 율리우스(카이사르) 역을 얼마나 잘해내고 있는가!”란 유명한 말 역시 그가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게다가 그는 ‘로마 교황의 이 같은 독재는 기독교를 좀먹는 해충’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에서 교황좌(座)를 제거해 버릴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교황이 지옥에 간 것으로 묘사한 신랄한 풍자의 글이 익명으로 배포되었을 때 그 글을 지은 사람이 에라스무스라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비난을 잠재울 양으로 천주교 지도자들은 그에게 추기경직을 수여하려 했지만 그는 그 같은 노골적인 뇌물을 거절했습니다.

     

    온 유럽은 수도승들의 무지와 사제들의 미신 등을 적나라하게 밝혀 놓은 에라스무스의 저서들로 인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요동했다…이에 교황은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주어 그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으나, 자신의 양심과 타협할 수 없었기에 그는 이 같은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했다.

     

    그가 이 같은 교황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했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며 여러 가지 기록들은 그가 자유롭게 남아서 성경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번역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거부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라스무스는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나 학자나 인쇄공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를 버리려 하지 않았다(「 기독교계의 에라스무스」, p.103),

     

    완숙한 지경에 다다른 학자 에라스무스는 그 시대의 별이었으며 그 명성으로 인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유복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국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다.

     

    한편 에라스무스는 천주교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천주교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라틴어 신약 성경」은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와 너무나 달라서 사람들은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신약 성경」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를 드러내 놓고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번역이 옮음을 보여 주는 각주들을 만들었으며 이런 각주에는 부패한 카톨릭 사제들을 겨냥한 뾰족한 가시들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에라스무스가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들을 비난했습니다. 그가 제롬의 역본을 반대한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어 사본이 4세기경에 오리겐 등에 의해 개악(改惡)되었음을 간파했고 제롬의 역본이 4세기초에 기록된 알렉산드리아 필사본인 ‘바티칸 사본’에 기초를 둔 것임을 알았습니다.

     

    한편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주장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경 구절들을 제롬과 달리 번역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롬은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을 “고해성사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번역했는데 반해 에라스무스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라.”고 달리 번역했습니다. 어느 번역이 맞는지는 독자 여러분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또한 성경 비평 학자들과 인본주의 학자들이 그 신빙성을 의심해온 마가복음 16장 9-20절과 요한복음 8장 1-12절 말씀을 충실히 옹호한 사람이었습니다.

     

    밀러(Andrew Miller)라는 역사학자는 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 밑에서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모든 지적 능력을 동원하여 참으로 힘든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편집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16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라틴어 신약 성경」과 함께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났는데 그가 만든 「라틴어 신약 성경」에는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의 오류들이 수정되어 있었다.

     

    사실 이 같은 작업은 그 당시에 아무라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 사방에서 그의 작품을 공격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도대체 왜 그는 종파분쟁을 일으키는 그리스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신성하고 전통적인 라틴어를 간섭하려 하는가?’라고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여 말하였다. ‘도대체 누가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 에 수정을 가하여 그것을 향상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 당시에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 역본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매우 큰 범죄로 여기는 것들 중 하나였다 (「Miller's Church History」, Andrew Miller, Bible Truth Publishers, 1980, p.696).

     

    한편 에라스무스의 성경 주석 역시 카톨릭 교회의 왜곡된 모습에 대일격을 가했습니다.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에라스무스가 일하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저서들과 「그리스어 신약 성경」 출간은 곧장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이라는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람입니다. 이 같은 그의 업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며 더더구나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나 ‘로마 카톨릭 교도’가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로마 카톨릭 교회가 힘을 잃게 되었고 그 결과 지난 400년 간 온 세상에 선교사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또한 이 같은 놀라운 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을 일으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편집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다섯 판에 걸쳐 출판했습니다. 그것들은 주후 1516년, 1519년, 1522년, 1527년, 그리고 1535년에 연속해서 나왔습니다. 첫째 판의 번역 및 출간 작업은 1515년 3월 15일에 시작되었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516년 3월 1일에 출간되었습니다.

     

    그 당시 바젤에는 프로벤이라는 인쇄업자가 있었는데 그는 스페인 학자 스투니카가 저술하여 1514년에 시메네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인쇄되었으나 1522년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출간된 「컴플루텐시안 폴리글롯」이라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출간되기에 앞서 자신이 처음으로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라스무스를 고용하여 그 일을 하게 했고 결국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컴플루텐시안 폴리글롯」보다 먼저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출간된 첫 번째 판은 그리스어 본문과 라틴어 역본이 동시에 들어간 두 가지 언어로 구성된 성경 즉 ‘디아글롯’이었습니다.

     

    한편 두 번째 판은 첫 번째 판을 조금 개정한 것으로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판은 소위 ‘사도 요한의 쉼표’라 불리는 요한일서 5장 7절의 말씀을 삽입시킨 것으로 인해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5장 7절은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라는 것으로 이 구절은 모든 알렉산드리아 본문에서 삭제되었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명백한 구절입니다.

     

    비록 자신이 수집해서 소장하고 있던, 주후 15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량의 비(非) 그리스어 자료들에서는 요한일서 5장 7절의 본문이 들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첫 번째 판과 두 번째 판에는 요한일서 5장 7절 말씀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신약 성경 본문에 이 구절을 포함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권위를 입증해 줄 만한 최소한의 그리스어 필사본도 없이 이 일을 했다가는 큰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번째 판에서와 같이 자신의 두 번째 판을 출판할 때 요한일서 5장 7절을 포함하는 그리스어 필사본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그 다음 판에 이 구절을 반드시 포함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실 그가 편집한 첫 번째 판과 두 번째 판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나오자 카톨릭 교회에서는 요한일서 5장 7절이 들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그는 15세기경의 사본을 찾아내게 되었고 자기가 약속한 대로 이 구절을 신약 성경에 포함시켰으며 그 뒤 이 구절은 영원히 「그리스어 공인 본문」에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킹제임스 성경에 남아 보존되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구 라틴 벌게이트」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와 고대 ‘왈덴시안들의 성경’, ‘테플 성경’ 등 10 여 개의 증거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증거들의 특징은 이들이 한결같이 비잔틴 계열이 아니라 라틴 계열이라는 점입니다. 영지주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분파의 철학에  심취한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저술한 알렉산드리아 본문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으나 삼위일체를 인정하여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확증한 니케아 종교회의의 결과를 따른 라틴 계열의 기독교계는 처음부터 「구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하면서 이 구절을 지지했습니다. 결국 영지주의자들과 아리안주의자들이 성경 본문을 맹렬하게 공격해서 요한일서 5장 7절의 말씀을 없애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비잔틴 계열이 아니고 라틴 계열의 사본 및 역본들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셨습니다.

     

    오늘날 킹제임스 성경의 이 구절을 반대하는 소위 ‘근본주의 학자’라 하는 사람들은 에라스무스가 새로 발견한, 요한일서 5장 7절을 포함하고 있는 두 개의 필사본이 에라스무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릇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서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에라스무스 당시에도 옹호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에라스무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너무나 짧은 기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실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며 16세기 최고의 그리스어 학자였다는 점을 이해하면 이 같은 비난은 사실 그 근거를 잃게 됩니다. 또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기원이 오래 되지 않은 몇 개의 사본들에 근거해서 성경 본문을 만들었으므로 그의 작품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다음의 표는 그가 사용한 사본들을 보여 줍니다.

     

    에라스무스가 사용한 사본들

     

     

     

    사본 번호

     

    사본 시기

     

    신약 성경 부분

     

    비고

     

    1

     

    11세기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비교용

     

    2

     

    15세기

     

    사복음서

     

    본문으로 채택

     
           2ap

    12/14세기

     

    사도행전, 서신서

     

    본문으로 채택

     
          4ap

    15세기

     

    사도행전, 서신서

     

    비교용

     
           1r

    12세기

     

    계시록

     

    계시록만

     

     

     

    맞습니다. 그는 주로 두 개의 사본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사본의 개수나 시기가 아니라 그 사본이 어느 계열에 속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온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본들을 수집하여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더욱이 카톨릭 교회의 사제였으므로 카톨릭 교회가 수집한 수많은 사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바티칸 도서관에 ‘바티칸 사본’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본은 이미 1481년에 바티칸 도서관에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약 성경 사본에 두 종류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사본을 ‘바티칸 사본’과 일치하는 사본과 비잔틴 계열의 사본으로 분류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윌켄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또한 얼마든지 ‘바티칸 사본’을 참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로마에 있는 봄바시우스라는 교수와 계속해서 서신을 교환했기 때문이었다. 그 교수는 에라스무스가 원하는 부분의 본문을 보내 주었다. 한편 1533년에 에라스무스에게  ‘바티칸 사본’의 여러 부분을 보내 주면서  ‘바티칸 사본’이 ‘공인 본문’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이 아니고 카톨릭 교도인 세풀베다였으며 그는 ‘바티칸 사본’ 본문을 그에게 보내 주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바티칸 사본’이 위 표의 1번 사본과 같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무시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가 ‘바티칸 사본’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존시켜 주신 본문이 어떤 것인가를 확신했으며 그 같은 확신에 따라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편집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프로드가 지은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서신」을 통해 에라스무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온 세상 사람들이 원어로 된 신약 성경 즉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자신의 새로운 라틴어 역본과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으며 지성인들을 일깨워 성경 말씀이 실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풍금이 내는 소리같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 했다.

     

    마침내 이 작업은 끝이 났고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과 라틴어 역본이 인쇄되었으며 기독교가 전하는 생생한 사실들과 그리스도와 사도들, 그들의 역사, 생애, 가르침 등이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나게 되었고 온 세상이 이로 인해 크게 놀라게 되었다.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신도들은 온 세상을 변화시킨 성경의 기독교와 교황, 추기경, 종교재판, 각종 거짓신화로 가득한 천주교를 서로 대조 비교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일은 영적으로 볼 때 엄청난 지진이 발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스스로를 고자로 만드는 사람들에 관한 마태복음 19장 12절에 대하여 :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독신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을 하려는 유혹을 받거나 혹은 그런 서약을 하도록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서약을 한 사제들은 창녀에게 갈 수 있는 허가를 받게 되며 단지 아내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에 얽매이게 될 뿐이다. 또한 그들은 첩을 둔 채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해서 아내를 두게 되면 화형에 처해진다. 따라서 자기 자녀들을 독신 사제로 만들려는 부모들은 그들이 어릴 때에 거세를 시켜서 탐욕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성경기록관과 바리새인들에 관한 마태복음 23장에 대하여 : 만일 동정녀 마리아의 우유가 돈을 벌기 위해 전시된 것을 성자 제롬이 본다면 무어라고 말할까? 어떤 이들은 ‘여기에 성 프란시스의 모자가 있다.’고 하며, ‘저기에 동정녀 마리아의 겉옷이 있다.’고 말하며, 혹은 ‘성자 앤의 빗이나 캔터베리의 성자 토마스의 신발이 있다.’고 말한다. 사제들과 수도승들의 침묵과 위선을 통하여, 또한 일반 백성들의 무지를 통하여 이런 일들이 -즉 회칠한 무덤같이 겉만 번지르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주교들조차도 이런 멋있는 쇼에 일조를 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포고령을 통해 이런 불법들을 승인하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저기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마태복음 24:23의 말씀에 대하여 : 나는 직접 내 눈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볼로냐에 있다가 로마로 간 것을 보았다. 그는 행렬의 맨 앞에서 마치 그리스도처럼 당당하게 행진해 갔다. 과연 베드로가 믿음으로 온 세상을 정복했던가? 아니면 무기나 군대나 혹은 다른 전쟁하는 기계들을 사용하여 온 세상을 정복했던가?

     

    고린도전서 14장 19절에 있는 ‘알지 못하는 언어’에 대하여 : 그들(사제들 및 수도승들)은 현재 우리 교회에서 ‘알지 못하는 언어’로(즉 라틴어로) 찬트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지난 여섯 달 동안 사람들이 그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는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단 한 차례도 전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마땅히 자신들의 죄를 회개해야할 사람들이 그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를 냄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헛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6절의 헛된 논쟁에 대하여 : 신학자들은 죄의 형태에 대해 논하는 일에 전혀 피곤해 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이 죄가 영혼을 좀먹는 것인가? 아니면 영혼에 흠이 되는 것인가? 등을 논한다. 도대체 한 마디로 죄를 미워하라고 단순히 말하면 되지 않는가? 유명하다는 신학자들이 겨우 이런 일에 대해 논의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다루는 주제들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다. 기독교를 가르친다고 공언하는 이 신학자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디모데전서 3장 2절 말씀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감독의 직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격을 나열했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살인, 근친살인, 근친상간, 해적행위, 동성연애, 도둑질 같은 것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결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금 수많은 사제들이 있지만 그들 중 동정인자들은 거의 없다. 수많은 사제들이 욕심에 빠져 심지어 근친상간 등을 행한다. 따라서 욕정을 참을 수 없는 자들은 합법적으로 아내를 얻어서 살 수 있게 하여 이처럼 더러운 오염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들은 그 당시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원리 등에 대해 숙고한 뒤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의 각주에 적은 기록들입니다. 이것들 중 어떤 것들은 신약 성경 첫 판부터 기록되었으며 나머지는 판이 갱신되면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위의 글은 결코 만평이나 논쟁거리를 담은 소책자에 실린 글이 아닙니다. 이런 기록들은 신약 성경 본문과 함께 기록된 것으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기독교와 이 같은 기독교를 대신한 로마 카톨릭 주의의 미신을 비교하고 비난하려는 목적으로 그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것입니다.

     

    그는 천주교의 의식과 예식, 신학, 철학, 사제들의 인격 등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그들의 참상을 온 세상에 밝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주교와 신부와 수도승들은 심판대로 끌려와 교황이 출간을 허락하지 않은 책 즉 모든 책 중에 가장 거룩한 책을 통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그의 책처럼 열광적으로 팔린 책은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만 순식간에 수 만 부가 팔렸을 정도였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의 여우에 불을 붙이자 불이 순식간에 번져 나간 것처럼 에라스무스가 일으킨 경각심의 불은 온 유럽으로 번져나갔습니다.

     

    후에  ‘공인 본문’으로 알려지게 된 그리스어 본문의 기초가 된 본문을 편집했던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당혹하게 만든 인물이었고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이기에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본보기였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바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와 더불어 그 교회의 신조들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구원은 각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 문제이며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구원에 대한 로마 카톨릭 주의의 방식에 대해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교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판을 치니 복음을 설명할 시간조차 없을 지경이다.

     

    그러면 에라스무스가 말하고자 했던 복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그분의 피가 우리의 구원을 인치셨습니다.

     

    그는 교회의 어떤 의식도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는 회개한 강도가 간 길이 바로 “낙원에 이르는 길”이며 단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세상이 내게 대하여, 내가 세상에 대해 못 박혔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현시대의 ‘인본주의자들’이 에라스무스의 글과 같은 것을 쓸 수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시대의 ‘인본주의자들’은 그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에라스무스는 결코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대 역본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를 ‘인본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는 결코 오늘날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도 아니며 또한 무지에 갇힌 로마 카톨릭 교도도 아니었습니다.

     

    당신들은 베드로나 바울을 기쁘게 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본받으라. 그렇게 하는 것이 로마에 열 번 순례 여행을 다녀오는 것 보다 더 나을 것이다. 당신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그리스도의 형상을 존중히 여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복음서에 기록해 주신 것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일이다. 당신들은 소위 예수 그리스도의 겉옷이나 수건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해서는 크게 흥분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는 꾸벅꾸벅 졸고 있지는 않은가? 나무 십자가를 집에다 갖다 놓고 기뻐하는 것보다는 그분을 믿는 것이 훨씬 더 나음을 잊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기 입술을 예수님의 입에 댄 가룟 유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유품 등은 결코 당신의 구원과 상관이 없다. 한마디로 당신들의 소유와 관심과 염려를 모두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두어야 한다. 그분은 자기를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지 않았으며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

     

    리는 죽음과 육신과 세상과 사탄에 대해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들의 사면과 이생에서의 백 배의 결실 그리고 그 이후의 영생을 약속하셨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가? 우리의 선한 공로와 행위 때문인가? 결코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은혜로 인함이다. 그분께서 우리의 의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안전하다. 그분께서는 우선 아담의 타락을 이겨내시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자신의 피로 우리의 구원을 인치셨으니 이 모든 것은 대언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증거에 의해 확증된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같은 확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령님의 인치심을 주셨다. 벌레만도 못한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칭의가 되시며, 승리가 되시고, 소망이 되시며, 안전이 되신다. ‘우리에게 한 아이가 났으니…’ 라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것이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의 병을 고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 바로 이분께서 우리를 위해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었다가 부활해서 승리하신 것이다. 또한 그분은 지금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이 같은 역사적 고증들을 통해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도가 아닌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에라스무스의 마음과 영혼을 보고 듣게 되며 또한 하나님을 배격하는 ‘인본주의자’가 아닌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로서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비록 로마 카톨릭 주의의 범주 안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성경을 믿은 신자요, 개혁자였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 시대의 가장 성경적인 무리로 여겨진 ‘재침례교도들’(Anabaptists)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는 이미 1523년경에 그들을 ‘재침례교도’라 불렀고 심지어 그 스스로도 종종 ‘16세기의 유일한 재침례교도’라고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에라스무스가 ‘근본주의’(fundamental)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에라스무스가 프로테스탄트였음을 증명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는 1535년 바젤로 다시 돌아가서 프로테스탄트 친구들과 함께 거하며 로마 카톨릭 교회와는 아무런 연관도 맺지 않고 지내다가 그 다음 해에 죽었습니다. 특히 카톨릭 신자라면 죽을 때 반드시 받아야 하는 ‘종부성사’도 거절한 채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Dear My God!)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으며 바젤의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이 선구자 에라스무스의 시신을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 안치하였고 그 역사는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라스무스는 1536년 7월 11일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결코 ‘충실한 카톨릭 교도’의 삶과는 동떨어진 프로테스탄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프로테스탄트 성향 및 기질로 인해 그가 받게 된 가장 큰 찬사는 그가 죽은 지 23년 후인 1559년에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황 바오로 4세가 에라스무스의 저작물을 모두 금서 목록에 올려놓은 일이었습니다.

     

    성경이 평범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손에 들려 읽혀지기를 원했던 그의 순수한 소망을 아신 하나님께서 일반인들을 염두에 두고 번역된 영어 성경 즉 킹제임스 성경의 기초로서 에라스무스가 저술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들 “에라스무스가 품은 알을 루터가 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 말에는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은 에라스무스의 성경, 그의 저서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주의의 협박에 저항하는 그의 태도로 무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루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나의 운명이 그의 운명과 연관된다 하더라도 나는 할 수 있는 한 루터의 편입니다.” 그는 루터를 위해 여러 편의 글을 썼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행위가 아닌 은혜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그의 의견에 전심으로 동의했습니다. 또한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루터를 이교도로 선포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거절했습니다. 만약 당대 최고의 석학인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공격하기 위해 그의 펜의 힘을 사용했더라면 교황과 그의 하수인들이 할 수 있었던 힘없는 압력보다도 더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의 확신에 따라 그들을 옹호했고 단지 루터의 예정설을 믿지 않았기에 이 점에 대해서는 펜과 잉크로 종교 개혁자들을 비난했습니다.

     

    한편 에라스무스가 만든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개정한 편집자들 역시 프로테스탄트 성경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어 신약 성경」판을 만들어 내는 일에서 에라스무스의 뒤를 따른 사람들은 에라스무스와는 달리 완전히 카톨릭 교회와 결별한 철저한 성경 신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박해를 받으며 카톨릭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완전히 개정되어 ‘공인 본문’이 나오게 되었고 이 ‘공인 본문’을 기초로 해서 -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이 아니고 -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를 ‘인본주의자’니 혹은 ‘로마 카톨릭 교도’니 하며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것은 결국 에라스무스를 통한 마르틴 루터, 요한 칼빈 등의 ‘종교 개혁’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요한 웨슬리, D.L. 무디, 요나단 에드워드 등 프로테스탄트 부흥을 가져온 이들이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고증을 통해 이제 우리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성경]본문을 편집하는 동안 에라스무스는 그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같은 확신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고대 및 중세를 통해 신약성경 본문을 안전하게 보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인쇄해서 중세 이후의 사람들에게 주려 하실 때에도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으셨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을 믿는 성도들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할 확신인 것이다. 우리는 결코 에라스무스나 베자나 틴데일이나 혹은 제임스 왕이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처음에 완전한 성경을 주신 그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완전히 보존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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