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KJB문서

  • 킹제임스성경
  • KJB문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신명기 4장 2절)

  • 킹제임스 성경의 영광 8장: 본문 문제 11, 요한계시록 22장 19절조회수 : 12099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1일 15시 22분 7초
  • 요한계시록 22장 19절

    And if any man shall take away from the words of the book of this prophecy, God shall take away his part out of the book of life, and out of the holy city, and from the things which are written in this book(영어 킹제임스 성경).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몫을 빼시리라(킹제임스 흠정역).

    이 구절의 초점이 ‘생명나무’가 아니라 ‘생명책’이라는 점을 다루지만 사실 여기의 문제는 그 이상으로 크다.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만들면서 사용한 코덱스 사본 1r은 요한계시록 22장의 마지막 6구절을 놓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라스무스가 라틴 벌게이트를 취하여 거기서 이 구절들을 다시 그리스어로 번역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정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첫째, 만약 에라스무스가 이 마지막 6구절을 공급하기 위해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했다면 과연 라틴 성경의 사용이 여기의 본문을 부패시켰는가? 둘째, 코덱스 사본 1r이 정말로 이 구절을 위해 에라스무스가 사용한 유일한 그리스어 사본이었는가?

    확실히 라틴 벌게이트와 그리스어 공인 본문은 이 마지막 6절에 있어서 유사하다. 물론 이것은 라틴 벌게이트의 기초가 공인 본문과 일치하는 초기 그리스어 사본들이었다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2세기와 3세기 그리고 4세기의 그리스어 사본들의 대다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만 사실 라틴 벌게이트와 공인 본문은 정확하게 같지 않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결론을 보면 공인 본문은 ‘Amen. Nai, erchou, Kurie Iesou’(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라고 하지만 라틴 벌게이트는 ‘amen veni Domine Iesu’(아멘 주 예수님이여 오시옵소서)라고 한다. 공인 본문은 부가적인 확증의 말 즉 ‘nai’(과연 그와 같이)를 포함하지만 비평 본문이나 라틴 벌게이트는 이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만약 에라스무스가 라틴 본문을 그리스어로 재번역했다면 그는 정말로 매우 놀라운 일을 한 것이다. 이 여섯 구절은 공인 본문에서 136개의 그리스어 단어로 구성되며 비평 본문에서는 132개의 그리스어 단어로 구성된다. 이 두 개의 본문을 비교할 때 이 구절들 안에는 단지 18개의 이문만 발견된다. 이 정도의 이문들은 개수와 특성 면에서 볼 때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 두 개의 그리스어 본문 사이에서 늘 발견되는 수준이다.

    예를 들어 바로 그 앞의 요한계시록 22장 10-15절은 동일한 특성을 가진 14개의 본문 이문을 가지고 있으며 요한계시록 21장 3-8절에는 20개 이하의 본문 이문이 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만약 에라스무스가 라틴어를 그리스어로 다시 번역했다면 훨씬 더 많은 이문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개의 본문은 매우 유사하다. 심지어 에라스무스가 라틴어를 그리스어로 재번역했다 해도 그것은 성경의 보존이라는 교리에 아무 관계도 없다. 성경 보존이란 하나님께서 [인간 기록자들을 통해] 자신의 말씀들을 만든 그 순간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그 이후 세대에까지 내내 그 말씀들을 유지하고 보존하신다는 것을 요구한다. 또한 성경 보존은 결코 이런 단어들이 단지 원본의 언어로만 보존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제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 질문으로 인도한다. 에라스무스가 정말 라틴어를 그리스어로 다시 번역했을까? 본문 학자인 호스키어는 에라스무스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대신에 그는 에라스무스가 2049(호스키어가 141이라고 부른 사본)와 같은 다른 그리스어 사본들을 사용했다고 말하며 사실 증거들은 이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다. 사본 2049는 공인 본문에서 발견된 본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22장 19절의 본문 이문도 포함한다. 이것 외에도 우리는 또한 그리스어 사본 296의 증거와 2067 사본의 난외 증거를 들 수 있다.

    또한 부가적으로 요한계시록 22장 16-21절에서 에라스무스가 필사한 그리스어 본문은 공인 본문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과 일관성을 반영한다. 이것은 그 구절들이 다른 그리스어 사본들로부터 필사되었으며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재번역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의 공인 본문은 비평 본문의 ‘dauid’(David)과 달리 ‘tou dabid’(the David)라고 기록한다. 영어는 이 두 개를 동일하게 다윗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지만 [역자 주: 한국어도 마찬가지임] 그리스어 본문은 분명히 다르다. 흥미롭게도 요한계시록 3장 7절에도 동일한 것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 공인 본문은 요한계시록 22장 16절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이름 전에 정관사를 사용했지만 비평 본문은 다윗의 이름 전에 정관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요한계시록 22장 16-21절에서 에라스무스의 본문에는 몇 개의 특이한 철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거기에는 정상적인 그리스어 ‘erchou’(오다) 대신에 ‘elthe’(오다)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 사본을 필사하였으며 그 구절을 라틴 사본에서 그리스어로 재번역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그 당시 가장 위대한 학자들과 사상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와 몇몇 다른 언어들에 유창했다. 그는 ‘오다’에 대한 평범한 신약성경 그리스어 단어가 ‘elthe’가 아니라 ‘erchou’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요한계시록 22장 7절과 12절 그리고 심지어 20절에서 ‘오다’를 뜻하는 ‘erchou’를 사용했다. 에라스무스가 이처럼 평범한 단어 형태를 멀리하고 22장 17절에서 특별히 ‘elthe’라고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더욱이 22장 17절에서 ‘오다’에 대한 라틴어는 22장 20절에서 사용된 ‘veni’와 동일한 라틴어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에라스무스가 실제로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코덱스 사본 1r’이 아닌 다른 그리스어 사본을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서 ‘생명나무’가 아니라 ‘생명책’이 맞는 단어임을 보여 주는 본문들의 증거가 많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본문은 소수의 그리스어 사본들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라틴 증거들 사이에서 독점적인 본문이다. ‘생명책’이라는 구절은 또한 구 보하이르어 역본(Bohairic)의 본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암브로스(주후 379년), 바키리우스(주후 4세기 말), 프리마시우스(주후 552년) 그리고 하이모(주후 9세기)의 저서에서도 발견된다.

    이제 우리는 또한 내적 증거를 생각해야 한다. 생명나무라는 구절은 구약성경에 7번 나타나고 신약성경에 3번 나타난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이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으며 에덴동산에 있던 이 나무가 영원 속에서 다시 나타날 것을 알게 된다. 이것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이 생명나무로부터 자신들의 몫(혹은 부분을) 빼앗긴다.”는 생각은 성경 기록과 합치되지 않는 것 같다. [역자 주: 성경의 용례로 볼 때 생명나무는 보상의 개념을 가진다.]

    한편 생명책이라는 구절은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7번 나타난다(빌4:3; 계3:5; 13:8; 17:8; 20:12, 15; 21:27). 각각의 경우에 우리는 생명책이 이름을 포함하거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며 또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몫을 빼시리라.”는 구절은 성경적인 본문과 매우 일치한다. [역자 주: 성경의 용례로 볼 때 생명책은 보상보다 더 원천적인 것 즉 생명 자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거룩한 도시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곧 생명책에서 이름이 빠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의 문맥은 생명책이 옳음을 보여 준다.]

    이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 경고는 매우 불길하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요한계시록에만 적용하지만 사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 기록 전체에 해당된다(신4:2; 잠30:6). 이 구절을 이 장에서 논의된 구절들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사본의 전달 과정에서 누군가가 본문의 어딘가에 더하거나 거기서 삭제했음이 확실하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학문은 숭고하고 고귀한 것이다. 그렇지만 학문이 주 하나님의 권위를 침범하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숭고하지도 않고 고귀하지도 않다. 결국 성경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최종 학자인 하나님에게 달려 있지 인간 학자들에게 달려 있지 않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텔레그램으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