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신명기 4장 2절)
짐승의 영인가, 혼인가? 과연 성경은 짐승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는가? 성도들의 믿음과 실행의 표준이요, 최종 권위인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개역: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 흠정역: 누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아느냐? 개역성경은 본문에 ‘짐승의 혼’이라고 적었으나 밑의 난외주를 보면 “여기의 혼은 원래 히브리어로 영임.”이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히브리어가 ‘영’이면 본문에 있는 그대로 ‘영’으로 해야지 왜 ‘혼’이라 했을까? 그 이유는 번역자들의 토착 샤머니즘 사상 때문이었다. 그들은 도저히 짐승에게도 영이 있음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자기들의 사상대로 ‘영’을 ‘혼’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구절의 영은 히브리어 ‘루아흐’를 번역한 것으로 ‘루아흐’는 영, 바람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사람, 짐승과 관계가 있으므로 마땅히 영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전도서 3장 19절에 있듯이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같이 숨을 가졌고 영을 가졌음을 분명히 보여 주며 노아의 대홍수 때에도 사람과 짐승 등 코에 생명의 숨을 가진 육체만 죽임을 당했다(창2:7; 6:17; 7:15; 7:22). 흠정역: 보라, 나 곧 내가 땅 위에 물들의 홍수를 일으켜 속에 생명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를 하늘 아래에서부터 멸하리니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죽으리라(창6:17). 한편 하나님께서는 짐승도 영을 가졌으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말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민수기 22장에서 단 한 번 나귀가 말하는 기사를 영감으로 기록하셨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자 영을 가진 나귀는 곧바로 천사를 알아보고 말을 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구절을 통해 짐승도 영이 있으므로 구원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전도서 3장 21절이 의미하듯이 짐승의 영은 죽어서 소멸되고 만다. 그러므로 짐승은 영을 가졌으나 천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는 상관없이 죽으면 그 영이 땅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지금 ‘루아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전도서의 번역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도서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러면서 전도자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흠정역: 내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노니,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전1:14).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것이 헛되어 영을 괴롭게 한다.”(vexation of spirit)고 전도서에서 무려 10번이나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것을 전혀 달리 표현하고 있다. 개역: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영을 괴롭게 하는 것’과 ‘바람을 잡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루아흐’는 ‘바람’으로도 번역이 되고 ‘영’으로도 번역이 된다. 원어가 동일하므로 이 같은 차이가 생긴데 대해 원어를 탓할 수는 없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성경 번역자가 같은 단어를 문맥에 따라 어떻게 번역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자, 그러면 전도서의 문맥상 어느 번역이 맞을까? 우리는 전도서 기자가 말하려는 요점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번역한 대로,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어 우리의 영을 괴롭게 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결국 전도서 기자는 마무리를 하면서 12장 13절에서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즉, 이 모든 것이 영의 문제지 결코 뜬구름 잡는 것 같이 바람을 붙잡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번역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 주는 번역이라고 믿으며 이런 의미에서 킹제임스 성경이 우리의 최종 권위라고 담대히 말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