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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신명기 4장 2절)

  • 진리의 순교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과 틴데일조회수 : 16522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2년 10월 23일 13시 19분 9초
  • 진리의 순교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과 틴데일

    제임스 왕(King James)이 제정한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으며 특히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없이는 킹제임스 성경의 출간이 매우 어려웠거나 지연되었을 것이다. 이에 본 부록에서는 「폭스의 순교사화」(Foxe’s Book of Martyrs)의 틴데일 편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영어 성경의 역사와 틴데일의 일생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를 통해 성경을 보통 사람들의 손에 쥐여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의 희생과 노고가 있었는지 기억하고자 한다.

    영국과 영어의 역사

    영어 성경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먼저 영국 민족과 영어의 역사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후 5세기에 로마가 영국 남부에서 군대를 철수하자 브리튼족은 색슨족의 도움을 받아 픽트족과 스코트족의 침략을 막아 냈다. 색슨족은 북부지방에서 승리를 거둔 뒤 돌아갔지만 그 뒤에 영국 남부를 차지하려 했다. 이런 싸움은 거의 150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 동안에 앵글로족, 색슨족, 여러 이교도 등이 고대 영국을 일곱 개의 왕국으로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영국 전체에 복음의 등불이 꺼진 상태였고 6세기 후반에 켄트의 왕이었던 에델베르트(King Ethelbert, 560-616)가 회심한 뒤에야 비로소 다시 복음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 뒤 여러 왕국들은 주변의 좀 더 강한 왕국으로 합병되었고 마침내 주후 827년에 에그베르트(King Egbert, 771-839)는 이 모든 왕국을 하나로 통일하여 통치하였다. 

     

    색슨족이 다스리던 시절에는 덴마크족이 계속해서 영국을 침략했고 여러 지역을 다스렸다. 그러다가 주후 878년에 앨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849-899)은 에딩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기독교 신앙을 전하게 되었다. 그 뒤 150년 동안 영국인들과 덴마크족 사이에는 계속해서 전쟁이 있었고 영국 교회는 캔터베리 대주교인 란프랑코(Lanfranc of Canterbury, 1010-1089)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6-7세기부터 영국에서는 앵글로‧색슨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백성에게 전해 주려는 시도가 있었고 8세기 초반에는 시편과 복음서를 번역하는 일도 있었는데 이때 만들어진 번역본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주후 735년에 비디(Bede, 672-735)는 복음서를 번역했으며 앨프레드 대왕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기를 원하여 스스로 시편을 번역하기도 했다. 10세기 후반에는 앨프릭 대주교(Aelfric of Abingdon)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교회에서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번역했고 이로써 책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뒤 약 400년 동안은 영어 역사에서 참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주후 1066년에서 1150년까지는 색슨족의 언어와 노르만 프랑스어가 같이 쓰였다. 그러다가 1150년 이후에 이 두 개의 언어는 병합되기 시작했고 결국 고대 색슨어가 아니라 절반만 색슨어라는 의미의 ‘반-색슨’(semi-Saxon) 언어로 귀착되었고 그 뒤 1382년에 어느 정도 영어가 정형화된 상태에서 위클리프의 영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순교자 위클리프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전혀 알지 못했고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공통으로 사용하던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 성경’을 본문으로 영어 번역 성경 출간을 시도했다. 그가 번역한 성경은 잘못된 원본으로 인해 완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번역한 성경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 말씀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정죄를 받고 출회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1384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성경을 번역했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번역한 성경은 사람들이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야만 했다. 보통 한 권의 성경을 필사하는 데 열 달 정도가 걸렸고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성경 한 권의 가격이 당시 도서관 사서의 일 년치 봉급 정도나 되었다. 그런데도 많은 양의 성경이 필사되자 마침내 영국 국회는 법령을 제정하여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영국의 아룬델 대주교는 교황에게 ‘저 사악한 위클리프’를 처치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 뒤 1408년에 그의 지휘하에 옥스퍼드 회의가 열려 “어떤 형식으로든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해서는 안 되며 아무도 그런 책을 읽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결정했고 이 결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뒤 약 100년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클리프의 성경을 보거나 소지했다는 이유로 위클리프의 성경을 목에 매단 채 화형을 당하며 순교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와 롤러드파(Lollards)라 불리던 그의 동역자들의 수고로 많은 성경이 필사되어 아직까지 170권이나 남아 있음을 볼 때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성경을 번역하고 필사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에 영어 성경이 평민들의 손에 들어가자 큰 위협을 느낀 교황 요한 23세는 콘스탄스 공회를 열어 위클리프의 성경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미 죽어 무덤에 안치된 위클리프의 유골을 캐내어 불사를 것을 결의했다. 그 뒤 13년이 지나서 이들은 실제로 위클리프의 무덤을 열고 그의 뼈를 캐내어 불사르는 악행을 저질렀다. 이런 박해를 겪으면서도 성경을 보통 사람들의 손에 쥐여 주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손으로 일일이 필사해야만 하는 제약 때문에 원하는 대로 성경을 널리 보급할 수는 없었다.

    구텐베르크와 인쇄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약 100년 전에 독일의 멘즈라는 오래된 마을에 요한 구스플레쉬(John Gooseflesh, 1397-1468)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천주교 사제들이 글을 쓰기 위해 사용하는 양피지를 만들어 어려운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요한은 어린 시절부터 칼로 조각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불 옆에서 자기 어머니가 끓이고 있는 자주색 염색 냄비를 지켜보며 나무에다 자기 이름을 조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글씨를 새긴 나무 조각들 가운데 하나가 염색 냄비 속으로 들어갔다. 얼른 그것을 꺼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그 옆에 놓여 있던 양피지에 떨어졌다. 그가 나뭇조각을 집어 올리자 그 양피지에 ‘h’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멘즈의 이 소년은 자기가 살던 옛집에서 그날 일어난 일을 잊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손으로 책을 필사하던 그 당시의 방법보다 더 쉬운 방법으로 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나무 조각을 깎아 그 위에 글씨를 새기고 염색용 잉크를 묻혀 여러 가지 형태로 배열하는 일을 반복하다가 드디어 서양에서 처음으로 인쇄기를 발명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독일의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는  누구나 다 아는 ‘최초의 인쇄기 발명가’로 역사 속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이 일에도 성경을 널리 보급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참으로 묘하게도 주후 1450년에서 1455년 사이에 서양에서 처음으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은 다름 아닌 라틴어 성경책이었다. 

    그리스 문화의 복원

    서양에서 인쇄술이 발명되던 당시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그리스도인들과 터키 사람들 사이에 큰 전쟁이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대부분의 훌륭한 학교들이 몰려 있던 그 도시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어 학자들은 유럽의 각처로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고 이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리스어 신약 성경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으며 그때까지 읽어 오던 ‘구(舊) 라틴 벌게이트’라는 번역 성경 대신 원어인 그리스어로 쓰인 신약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로 인해 점차 사람들은 성경을 모든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한다면 참으로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내 원어에 대한 연구와 인쇄기의 발명 그리고 영어의 정형화 등으로 인해 이런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순교자 틴데일

    이 같은 변혁의 시기에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그들이 변개한 사본을 단호히 물리치고 개혁자들과 함께 순교하면서까지 영국의 평민들에게 영어 성경을 전해 주고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헌신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평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들고 읽는 일이 훨씬 더 늦추어졌을 것이며 킹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 KJV)과 같은 걸출한 역본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21세기의 현대인들은 성경을 볼 때마다 성경을 보존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고 결국엔 자기 목숨까지 바친 틴데일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었던 틴데일은 주후 1494년, 영국 웨일스 지방의 글로스터셔주의 노스니블리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는 어학과 다른 문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고 특히 성경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성경 연구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 마그달렌 홀에서 지내며 마그달렌 대학의 몇몇 학생들과 동료들에게 몰래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를 들려주었으며 성경의 지식과 진리에 관해 교훈을 주었다. 그의 예의범절과 행동 등이 성경 말씀과 일치했기 때문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참으로 덕스러운 성품의 소유자이며 흠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틈틈이 시간을 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그 학교의 학위를 취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152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옮겨 가서 강사로서 몇 년간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늘린 그는 그 대학을 떠나 자기 고향인 글로스터셔주로 가서 마스터 웰치(Master Welch)라는 기사(騎士)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웰치의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주인인 웰치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 웰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식탁을 같이하곤 했으므로 대수도원장, 집사, 집사장, 그리고 여러 분야의 의사 및 교회의 녹을 먹는 성직자 등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이들은 틴데일과 함께 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특히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같이 학식이 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성경에 관한 여러 가지 논쟁거리와 질문 등에 대해서도 서로 견해를 나누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실제로 그 일을 수행해 온 틴데일은 이때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자기 견해를 간단명료하게 제시하곤 했다. 그들의 의견이 자기 의견과 다를 때면 그는 언제든지 성경을 펴서 그들 앞에서 명백한 성경 구절을 보여 주곤 했으며 이로써 그들의 오류를 논박하고 자기 말을 확증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얼마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서로 의견을 제시하고 논쟁을 하다가 마침내 지쳐서 마음속으로 틴데일에 대한 불평을 품기 시작했다. 일이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진행되자 그 지역의 사제들은 선술집이나 다른 곳에서 함께 모여 틴데일에 대해 비난과 폭설을 퍼붓기 시작했고 그의 말이 이단 교리임을 확증하려 했으며 또 비밀리에 그를 주교의 종교법 고문 및 주교의 관리들 중 몇몇 사람들에게 고소하였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주교의 종교법 고문이 새로 임명을 받고는 여러 사제들에게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틴데일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틴데일이 그들의 위협에 대해 미심쩍어했는지 혹은 그들이 자기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음을 그가 알고 있었는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밝히 드러낸 바와 같이 그는 그들의 은밀한 고소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그래서 거기로 가는 길에서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크게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자기에게 힘을 주실 것을 간구했다.

     

    틴데일이 종교법 고문 앞에 설 날이 오자 그 고문은 그를 심하게 위협하였고 마치 그를 개처럼 취급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는 아무도 고소한 적이 없는 일들에 대해서 그에게 책임을 물었다. 그 지역의 사제들이 거기에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고소하지 않았으므로 간신히 그들의 손에서 벗어난 틴데일은 그 길로 집을 떠나서 다시 자기 주인에게 돌아갔다.

     

    거기에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당시 주교의 고문으로 지내던 한 의사가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틴데일과 잘 알고 있었으며 그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틴데일은 그에게 가서 자기 마음을 열고 성경에 관한 여러 가지 의문점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의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황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당신은 알지 못하는가? 그러나 말조심하게. 당신이 그런 의견을 가진 것이 알려지면 목숨이 달아날 걸세.”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틴데일은 우연히 어떤 신학자와 사귀게 되었는데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매우 학식이 깊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논쟁을 하다가 마침내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대해 그의 견해를 물었다. 그러자 그 위대한 박사는 다음과 같은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하였다.

     

    “성경이란 필요 없소. 보통 사람들이 읽도록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교황뿐이오. 교황의 법 없이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법 없이 사는 게 훨씬 더 낫소.” 

     

    이 말을 들은 틴데일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충만한 채 이 같은 신성모독 발언을 참지 못하고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나는 교황과 그의 모든 법에 도전하며, 만일 하나님께서 목숨을 살려 주신다면 앞으로 몇 년 내에 쟁기를 끄는 소년이 교황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할 것이오.”

     

    틴데일에 대한 사제들의 불평은 점점 더해 갔으며 그들은 끊임없이 틴데일을 향해 원성을 토로하고 욕했으며 그를 가리켜 이단이라 하면서 그가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로부터 많은 시달림과 괴롭힘을 당한 그는 결국 그 지역을 떠나 다른 장소를 찾아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 웰치에게 가서 그의 곁을 떠나도 좋다는 호의를 입게 되기를 간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인이시여, 제 생각으로는 이제 제가 더 이상 이 지역에 머무를 수 없으며 비록 주인께서 그들의 손에서 저를 보호하시려 해도 저를 보호하는 것으로 인해 많은 불명예를 당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 점에 대해 참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주인의 호의를 입게 된 틴데일은 곧바로 런던으로 오게 되었으며, 거기에서도 이전 지방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얼마 동안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 런던의 주교였던 턴스탈(Cuthbert Tunstall, 1474-1559)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또한 턴스탈의 학식을 매우 높이 평가한 에라스무스의 추천의 말을 숙고하면서 만일 자기가 그의 일을 도울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틴데일은 왕의 감사관인 길포드 경에게 자기가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소크라테스의 연설문을 가지고 가면서 그가 자기를 위해 런던의 주교인 턴스탈에게 이야기해 줄 것을 고대했다. 그런데 그는 틴데일을 위해 그 주교에게 편지를 써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주교를 방문할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써서 헬비스웨이트라는 이름을 가진 그 주교의 종에게 편지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뜻대로 세상일을 처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틴데일에게나 자신의 교회에게나 최상의 것이 되지 않음을 보시고 그가 그 주교의 눈에 큰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셨다. 그 주교는 현재 자기 집에 사람이 너무 많아 틴데일을 위해 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런던의 주교에게 거절당한 틴데일은 런던의 부시장 뭄무스의 집에 가서 자기를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는 틴데일을 자기 집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집에서 틴데일은 매우 착실한 사제로서 밤낮으로 연구하며 지내게 되었고 주인의 호의를 입어 잘 익힌 음식만을 먹게 되었다.

     

    이처럼 1년 정도를 런던에 머물면서 틴데일은 이 세상의 행로가 무엇인지 차츰 깨닫게 되었으며 특히 복음 선포자라 불리는 자들의 행실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다. 그들은 교만했고 스스로 권위를 내세웠으며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겉치레는 그들의 다른 행실들과 함께 그에게 큰 불쾌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주교의 집에서 신약 성경을 번역할 수도 없고 또한 영국에서도 그 일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섭리로 뭄무스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그 지역에서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독일로 떠났다. 거기에서 이 선한 사람 틴데일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책임감과 열정에 불타서 어떤 힘든 일이나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그 확실성에 대한 깨달음을 자신의 영국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자기 친구 프리스와 의논하는 가운데 그는 성경이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가난하거나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명쾌히 읽게 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그는 성경이 보통 사람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평이하게 주어져서 그들 스스로 본문의 뜻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진리 안에 굳게 설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일이 그렇게 진행되지 않으면 그들에게 어떤 진리를 가르친다 해도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은 궤변이나 자기들이 고안한 전통 등으로 이 진리를 저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보통 사람들이 성경 본문의 올바른 의미를 찾아낸 경우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본문을 조작하여 본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틴데일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보통 사람들의 눈에 가려진 것, 바로 그것이 교회 내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오랫동안 바리새인들 같은 성직자들이 가증한 행위와 우상 숭배를 행해 왔지만 보통 사람들은 성경이 없었으므로 그것들을 찾아내어 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부패한 성직자들은 전력을 다해 성경 말씀을 짓누르려고 애를 썼으며 사람들이 말씀을 읽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그들이 읽는다 해도 여러 가지 궤변으로 말씀의 올바른 의미를 흐리게 했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이 만든 각종 가증한 것들을 경멸하는 자들을 위협하고 속박했다. 게다가 그들은 본문의 의미와는 다르게 성경을 자기들의 목적에 맞추어 마구 뜯어고쳤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은, 그들이 말한 것이 다 거짓임을 알고 있다 해도 그들의 교묘한 술책을 이길 방도가 없었다.

     

    이런저런 것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 선한 사람 틴데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성경을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하여 고국의 단순하고도 평범한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끼치려 하였다. 처음에 그는 독일의 함부르크로 갔다. 그러나 영국의 주교들과 사제들은 정탐꾼들을 고용하여 그의 일을 방해하였고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그가 성경을 인쇄하는 일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그는 신변에 큰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한편 쾰른에 인쇄소가 있었으므로 그는 그곳으로 가서 자기의 성경을 인쇄해 줄 인쇄공을 찾아냈다. 그는 영국의 주교들과 사제들이 이 작업이 끝난 것을 알면 자기를 체포해 갈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숨을 건지려면 빨리 도망가라는 제보가 그에게 들어왔다. 술에 취한 인쇄공으로부터 그의 신약 성경이 거의 인쇄될 단계에 있다는 것을 듣게 된 로마 카톨릭 사제가 그를 체포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간신히 원고들을 챙겨 루터가 살고 있던 보름스로 도망갔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주후 1525-1526년경에 자신의 영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였다. 그때 그는 두 종류의 성경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크기가 컸고 다른 하나는 작았다. 이렇게 한 이유는 영국의 성직자들이 큰 성경들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작은 것들은 찾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이 성경들을 영국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는 큰 통이나 짐짝에 옷가지나 밀가루 등과 함께 성경들을 숨겨 마치 다른 상품처럼 꾸며 영국으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성경들이 영국에 들어와 판매되었는데 이를 알게 된 성직자들은 항구를 조사하여 성경을 찾아냈고 찾는 족족 불태워 버렸다. 한편 런던의 주교인 턴스탈과 모어 경(Thomas More, 1478-1535)은 너무나 화가 나서 틴데일의 영어 성경을 ‘거짓되고 실수가 많은 번역’이라고 폄하했으며 또한 그의 역본을 없앨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데 그 당시 포목상이던 패킹턴이라는 사람이 턴스탈 주교와 함께 앤트워프에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틴데일을 사랑하여 그 주교에게 반대로 말을 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하던 주교는 어떻게 하면 틴데일의 신약 성경을 다 사들여 불태울 수 있을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이에 대해 패킹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주여! 주교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여기 있는 어떤 상인보다도 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네덜란드 사람들과 틴데일에게서 성경을 사들여 여기에서 판매한 외국 사람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교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그것들을 사들이기 위해 많은 돈을 쓸 것입니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차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교께서 지금까지 인쇄된 것 중에서 판매되지 않은 것을 다 차지할 수 있게 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 말을 들은 주교는 이제야말로 이 일을 끝장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에게 말했다. 

     

    “패킹턴 선생, 부지런히 이 일을 수행하시오. 그 성경들을 구해 주시오. 비용이 얼마가 들든지 다 지불하리이다. 나는 그것들을 다 모아 성 바울 십자가 광장에서 불사를 것이오.” 

     

    이 일 뒤에 패킹턴은 틴데일에게 가서 이 모든 것을 알려 주고 서로 협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런던의 주교는 틴데일의 남은 성경을 모두 입수했고 패킹턴은 주교로부터 감사의 말을 들었으며 틴데일은 큰돈을 얻게 되었다.

     

    그 뒤에 틴데일은 동일한 신약 성경을 한 번 더 수정한 뒤 다시 인쇄해서 이전의 세 배나 되는 양을 영국으로 보냈다. 런던의 주교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패킹턴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했다. 

     

    “외부에 그토록 신약 성경이 많이 돌아다닌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가 그것들을 다 사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 패킹턴은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저는 그 당시 구할 수 있는 성경을 다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후에 더 많은 성경을 인쇄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활자와 인쇄기를 가지고 있는 한 이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쇄기까지 다 사들이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 같

    습니다.” 

     

    이 같은 대답에 주교는 웃고 말았고 그 문제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틴데일을 도와주던 콘스탄틴은 그 당시 영국의 종교법 고문이던 모어 경에 의해 특정 이단 교리에 대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모어 경은 그에게 물었다. 

     

    “콘스탄틴! 내가 묻는 질문에 솔직히 답변하기 바란다. 그러면 네가 고소당한 다른 모든 혐의에 대해 내가 호의를 베풀 것을 약속한다. 바다 너머에 틴데일과 조이와 다른 일당이 있는데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어. 너는 그 사람들 중 하나이니 돈의 출처를 알고 있을 것이다. 청하건대 그들을 돕는 자가 누구인지 내게 말하도록 해라.”

     

    이에 대해 콘스탄틴이 대답했다.

     

    “내 주여,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겠나이다. 우리를 도운 사람은 런던의 주교입니다. 그가 신약 성경을 불태우기 위해 우리에게 엄청난 돈을 주었습니다. 그 돈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유일한 후원금이며 위로금입니다.” 

     

    그러자 모어 경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역시 사실이군. 왜냐하면 주교가 그 일을 하기 전에 내가 주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말했으니까.”

     

    영어 신약 성경을 6판까지 출간한 뒤에 틴데일은 계속해서 구약 성경 번역에 착수했으며 1530년에 모세오경 번역을 마쳤다. 이와 동시에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계속 읽어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매우 경건하고도 학문적인 서문을 작성했다. 

     

    한편 1535년에 커버데일은 틴데일의 신약 성경과 모세오경에 근거하여 자신의 번역본을 만들고 나머지는 스스로 번역하여 신구약 성경 전체를 담은 최초의 영어 성경전서를 앤트워프에서 인쇄했다. 이 성경전서가 영국에 들어갔을 때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온 영국 민족의 눈에 얼마나 큰 빛을 가져다주었는지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처음에 틴데일은 영국을 떠나 독일로 갔으며 거기에서 루터와 학식 있는 다른 사람들과 회의를 했다. 그 뒤 그는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다시 네덜란드로 가서 대부분의 시간을 앤트워프에서 보냈다. 틴데일의 경건한 책들 특히 그가 번역한 영어 신약 성경은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자마자 해외로 퍼져나갔으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큰 유익을 주었다. 그러나 경건치 못한 사람들 곧 일반 백성들이 자기들보다 더 현명하게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진리의 빛으로 인해 자기들이 행한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적지 않은 동요를 일으켰다.  

     

    그때 틴데일은 이미 구약 성경의 신명기를 번역했으므로 독일 함부르크에서 이것을 인쇄하려는 생각을 품고 함부르크행 배를 탔다. 그러나 네덜란드 해변에서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그는 모든 책과 저작물과 필사본과 돈과 시간을 잃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배로 함부르크에 갔는데, 거기에는 약속한 대로 커버데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는 모세오경 전체를 번역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1529년 부활절에서부터 12월까지 경건한 과부인 엠머슨 부인의 집에 머물면서 이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당시 그 도시에 땀을 많이 흘리게 하는 병이 돌자 그는 함부르크에서의 일을 급히 끝내고는 다시 앤트워프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서 보통 사람들의 말로 된 영어 신약 성경을 널리 퍼뜨리려고 하셨을 때 틴데일은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성경을 번역하면서 서문을 통해 만일 자신의 번역에서 잘못이 발견된다면 학식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수정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기록했다. 다시 말해 그는 지식이 있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자기의 번역에서 수정해야 할 부분을 발견하면 예의를 갖추어 부드럽게 자기들의 학식을 반영하고 수정할 부분을 고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겸손하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그 책이 널리 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그 성경 안에 수천 개의 이단 교리가 있으며 따라서 그 책은 수정할 필요가 없고 완전히 파기해야만 한다고 큰소리로 주장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고, 어떤 이들은 평민들이 자기들의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했으며, 어떤 이들은 성경이 평민들 모두를 이단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상의 통치자들을 이용하면서 틴데일의 성경을 통해 사람들이 왕에게 반기를 들 것이라고 모함하기도 했다.

     

    틴데일은 창세기 앞에 있는 서문에서 몇몇 사항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자기의 번역본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그다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저 위대한 책인 성경을 번역할 수 있다고 상상하면서 자기가 번역한 성경을 그런 억측으로 비교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 또한 그는, 그들이 자기가 번역한 성경의 모든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고 만일 인쇄상의 실수로 거기에 ‘i’ 라는 글자가 없는 구절을 발견하면, 무식한 사람들에게 이것이야말로 큰 이단 교리라고 당당하게 말했음을 보여 주었다.

     

    보통 사람들에게서 성경에 대한 지식을 빼앗으려는 영국 성직자들의 악랄한 계략은 너무나도 지독했다. 사실 이들의 임무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번역하는 것도 견딜 수 없었다. 틴데일이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이 같은 시도는 세상을 어둠 속에 가두어 둔 채 헛된 미신과 거짓 교리로 자기들의 야망과 탐욕을 만족시키며 또한 자기들의 명예를 왕이나 황제보다 더 높이면서 백성들의 양심 위에 올라앉아 사람들을 다스려 보려는 그들의 교만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침내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왕의 동의를 얻어 냈고 서둘러서 주후 1535년경에 틴데일이 번역한 신약 성경의 확산을 금한다는 선언문을 작성하여 포고했으며 이 일에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더 나아가 틴데일을 자기들의 그물로 사로잡아 그의 생명까지 빼앗으려고 했다. 그들이 어떻게 이 악한 계획을 실행했는지 이제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런던의 등기소에 모인 주교들과 모어 경은 앤트워프에 있었던 것들을 다 가져다 놓고 틴데일에게 속한 모든 것을 열심히 찾아내어 조사했다. 그들은 틴데일이 어디에서 누구를 접대했는지, 그의 집은 어디에 있고 그는 키가 얼마이며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떻게 휴식을 취하는지 등을 조사했다. 부지런히 캐내어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뒤에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업적을 확고하게 할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앤트워프에 있던 틴데일은 한 영국 상인의 집을 지키는 일을 하던 포인츠라는 영국 사람의 집에서 거의 1년 동안 기거했다. 한편 1535년 5월, 그곳에 필립스라는 영국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아주 잘생긴 사람으로 신사처럼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이유로 그곳에 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때 틴데일은 상인들과 함께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하러 오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 이 기회를 통해 필립스는 그와 친숙해지게 되었고 틴데일은 곧바로 그를 크게 신뢰하게 되었으며 자기가 머무는 포인츠의 집으로 그를 데려가기도 했다. 또 그와 함께 한두 차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틴데일은 그와 깊은 친분을 맺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를 포인츠의 집에 거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한편 틴데일은 필립스에게 자신의 책들과 자신이 연구하는 것들 중 비밀에 속한 것들을 보여 주었다. 참으로 틴데일은 이 배신자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인츠는 그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필립스와 알게 되었느냐고 틴데일에게 물었다. 그러자 틴데일은 그가 정직한 사람이며 매우 학식이 있고 유익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틴데일이 그에게 그처럼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본 포인츠는 아마도 필립스가 그의 친구들 중 하나의 소개로 틴데일과 가까워졌으리라 생각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필립스는 앤트워프에서 약 삼십이 킬로미터 떨어진 브뤼셀의 법정에 갔으며, 거기에서 다시 앤트워프로 오면서 황제의 변호사인 검사장과 다른 관리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때부터 삼사일 지난 뒤 포인츠는 앤트워프에서 약 이십구 킬로미터 떨어진 읍에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사업을 하게 되었다. 

     

    한편 포인츠가 없는 동안 필립스는 그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에게 틴데일이 안에 있는지를 물었다. 그 뒤 그는 다시 나가서 브뤼셀에서 자기가 데려온 장교들을 집 근처 거리와 문 근처에 배치했다. 정오쯤에 그는 다시 돌아와 틴데일에게 가서 사십 실링을 빌려 달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침에 이곳과 메클린 사이에 있는 통로를 지나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소.” 

     

    이에 틴데일은 사십 실링을 그에게 빌려주었다. 권모술수가 판치는 세상 속에서 틴데일은 참으로 쉽게 사람을 믿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이에 필립스는 틴데일에게 이렇게 말했다.

     

    “틴데일, 오늘 저녁에 내 집에서 식사를 함께 합시다.” 

     

    그러자 틴데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마침 내가 저녁 먹으러 가는데 당신도 함께 갑시다. 그곳 사람들은 당신을 환영할 것입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틴데일은 필립스와 함께 나갔는데 포인츠의 집에 드나드는 길은 길고 입구가 좁아서 두 사람이 함께 지나갈 수가 없었다. 틴데일은 자기 앞에 필립스를 가게 하려 했으나 필립스는 자기의 배려심을 보이기 위해 틴데일을 자기 앞에 가게 했다. 그래서 그렇게 큰 키가 아닌 틴데일이 앞에 갔으며 키가 크고 잘생긴 필립스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는 이미 문 양쪽에 장교들을 배치해 놓았고 이들은 입구에서 누가 나오는지 볼 수 있었다. 틴데일 뒤에 선 필립스는 자기 손으로 틴데일의 머리를 가리켜서 장교들이 데려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었다. 틴데일을 감옥에 가둔 뒤에 장교들은 그처럼 단순한 틴데일을 보고 큰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고 포인츠에게 말했다. 그들은 틴데일을 황제의 변호사에게 데려갔으며 거기에서 그는 식사를 했다. 그 뒤 검사장이 포인츠의 집에 와서 틴데일의 소유물 곧 그의 책들을 포함한 모든 것을 가져갔다. 이로써 틴데일은 앤트워프에서 약 이십구 킬로미터 떨어진 브뤼셀 근처의 빌보르드 성(Castle of Vilvoorde)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홀로 남게 된 틴데일은 변호사와 검사를 제공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자기가 스스로 답변하겠다고 말하며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또한 자기를 고소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복음을 선포했으며 성안에서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만일 그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겠느냐는 진술을 했다. 마침내 심문이 시작되었고 많은 변론이 있었지만 아무런 변호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죽을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칙령으로 아우그스부르크 집회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주후 1536년 10월 6일, 그는 빌보르드 성에서 사형 집행 장소로 끌려 나와 화형대에 손발이 묶인 채 화형을 당했다. 이들은 그를 화형시키면서 불로 인해 고통이 증가하기 시작할 때에 그의 목을 졸라매어 그가 사망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형대에서도 놀라운 열정을 가지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

     

     

    처형장의 틴데일

     

     

     …제 물품들을 여기로 되돌려 보내 주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우선 따뜻한 모자가 필요합니다. 극심한 추위로 인해 저는 머리에 심한 고통을 겪고 있고, 계속되는 감기로 고통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감옥에서 이 증세가 매우 악화되었습니다. 또한 따뜻한 웃옷이 필요합니다. 현재 제가 입고 있는 것은 너무 얇습니다. 또 제 각반을 기울 헝겊 조각이 필요합니다. 제 외투는 다 닳았고 셔츠 또한 그렇습니다.…또한 제가 바라는 것은 저녁에 초가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기가 너무나 지루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바라는 것은, 저의 히브리어 성경과 히브리어 문법책, 그리고 히브리어 사전을 가질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저의 시간을 히브리어 성경 연구로 보내기 위함입니다.…겨울을 나기 전에 제게 어떤 다른 결정이 내려진다 할지라도 저는 인내하며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할 것입니다. 그분의 영께서 늘 각하의 마음을 인도하시길 기도하고 바라옵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한 죄로 체포되어 1535년 겨울 빌보르드 성에 감금되었던 틴데일이 라틴어로 써서 성주 앞으로 보낸 편지로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의 친필 기록> 

     

    감옥에 있었던 약 1년 반 동안에 그가 간수와 그의 딸과 그의 다른 가족들을 회심시킨 것을 보면, 그의 가르침이 얼마나 능력이 있었고 삶이 얼마나 성실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가 번역한 신약 성경이 이단 교리들로 가득 찼다며 대적들이 심하게 트집을 잡았으므로 틴데일은 친구 프리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게 될 그날에 하나님께서 증언해 주시기를 바라노니 나는 결코 내 양심을 거슬러 하나님 말씀의 단 한 음절도 바꾸지 않았으며, 땅 위에 있는 모든 것 즉 명예와 쾌락과 재산을 내게 준다 해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

    틴데일이 죽은 뒤 2년 만에 이 같은 그의 기도가 이루어져 1538년에 영국의 헨리 8세는 각 교구의 교회에 그레이트 성경을 비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뒤 ‘커버데일 성경’, ‘로저스 성경’, ‘매튜 성경’, ‘태버너 성경’, ‘크랜머 성경’, ‘비숍 성경’ 등의 이름으로 여러 영어 성경이 출간되었으나 사실 그 내용은 틴데일이 번역한 것과 거의 같았다. 또한 그의 번역은 1611년에 출간된 ‘킹제임스 성경’에 70-80% 이상 그대로 반영되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쥐여 주려 했던 틴데일의 숭고한 정신은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으로 이어졌고 18, 19세기 전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로도 이어져 우리 민족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구할 수 있으므로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느끼지 못하고 있다. 부디 이 작은 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위클리프나 틴데일 그리고 롤러드파 사람들과 왈덴시아파 사람들 같은 선구자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아 올바른 성경을 지키고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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