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
(신명기 4장 2절)
중세 최고의 지성 에라스무스의 공인 분문과 루터 성경
안녕하세요?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아 여러 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루터의 밧모섬>을 소개하였습니다.
이 책은 세속 역사가가 루터의 삶을 그린 것입니다.
이 책을 읽다가 맨 뒤에 있는 황대현 교수의 루터 이야기 요약을 보고 여러분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목원대 역사학 교수인 필자는 <루터의 모든 책을 불사를 수는 없었다>라는 짧은 글을 통해 종교 개혁의 의미를 잘 요약해서 보여 줍니다.
특히 인쇄술과 루터 성경 번역에 대한 황 교수의 평가는 심히 공정하며 우리 모두가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비해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번역한 신약 성경은 서기 1세기에 신약 성경이 처음 편찬되었을 때 쓰인 언어인 그리스어를 기반으로 해서 당대 최고 지성이었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1516년 새롭게 출간한 ‘그리스어 판본 성경’을 원본으로 활용해 번역한 것이었기에, 천 년이 넘도록 사용되면서 불가피하게 여러 문제점을 안게 된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오류를 피할 수 있었다.”
황 교수는 분명하게 천주교회의 성경인 라틴어 불가타(벌게이트)가 오류를 담고 있었고, 당대 최고 지성인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본문과 여기서 나온 루터 성경이 그런 오류들을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즉 천주교 소수 사본에서 나온 현대 역본들은 오류를 담고 있고 루터 성경, 킹제임스 성경 등과 같이 에라스무스의 공인 본문에서 나온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천주교회에서 비롯된 본문 비평에 영향을 받지 않는 대다수 역사가가 증언하는 바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총신대 총장을 역임한 정성구 박사님도 동일하게 증언합니다.
역사를 바로 인식하고 공정하게 사실을 평가하며 사는 것이 진리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리 할 때 마음의 평안이 하늘로부터 주어집니다.
이 시간에 아무리 마귀가 진리를 대적해도 우리에게는 확고한 진리의 말씀,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있습니다.
루터의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약4:7).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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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모든 책을 불사를 수는 없었다>
황대현 목원대 교수 ㆍ 역사학 2017년은 종교 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루터의 생애나 종교 개혁의 역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학술서와 교양서를 막론하고 다양한 관련 서적들이 속속 출판되고 있다. 독일이나 유럽, 미국과 비교하면 그렇게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우리가, 왜 500년 전에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굳이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것일까?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전 세계에서 9억여 명, 우리나라도 전체 인구의 5분의1 가량이 신자로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탄생시킨 출발점이기에 개신교 신앙의 뿌리로서 한 번쯤 되돌아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단지 신학이나 교회사의 측면에서만 중요하다면, 아무리 500주년을 맞이하는 때라고 해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진지하게 그 사건의 현재적 의미에 관심을 기울일 까닭은 없으리라.
루터가 1517년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논제를 발표하면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독일을 포함한 서구세계 전반에 큰 충격파를 가하며 다양한 측면에서 상당한 변화를 몰고 왔다. 다시 말해서, 종교 개혁은 개신교 프로테스탄티즘의 탄생이라는 차원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다. 이 글에서는 근대 초기 독일사를 전공하는 필자가 판단하기에, 주로 교회사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할 경우 놓치기 쉬운 종교 개혁의 역사적 의의를 두 가지 측면, 즉 인쇄술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소통 기술적 측면과 근대국가 형성이라는 정치적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써 종교 개혁을 좀 더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한다.
1. 인쇄술과 종교 개혁, 그리고 팸플릿 전쟁
1999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라이프』가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에 의해 개발된 활판 인쇄술을 지난 천 년간 인류가 이룩해낸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선정한 적이 있다. 서양에서는 서구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주요 요인으로 인쇄술이라는 기술적 혁신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근대 초기 유럽의 ‘인쇄혁명’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 역사가 엘리자베스 아이젠스타인에 따르면, 인쇄기의 출현은 종교 개혁의 중요한 전제조건이자 이후 종교 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촉진 조건이었다. 다소 지나친 표현이긴 하지만 “(인쇄) 서적 없이는 종교 개혁도 없다”는 교회사가 베른트 묄러의 명제 역시 인쇄술이 종교 개혁에 미친 핵심적인 영향을 강조한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루터 스스로가 인쇄술에 대해 ‘하나님에게서 받은 최후의 선물이자 가장 위대한 은총’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원래 유럽의 변방 지역에 위치한 비텐베르크 대학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신학교수가 교황의 막강한 권력에 맞선 그리스도교 세계의 유명 스타이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책을 팔 수 있었던 최초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인쇄술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1521년 보름스 국회가 루터의 ‘이단적인’ 저서들을 모두 불태우라는 칙령을 공표했을 때 그 결정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당시 루터의 책들은 이미 50만 부 가까이나 팔려나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100년 전인 15세기 초에 보헤미아의 개혁가 얀 후스를 화형에 처했던 것처럼 설사 교황청과 세속 당국이 루터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가 쓴 엄청난 양의 인쇄물을 모두 불사를 수는 없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인쇄술이라는 무기가 없었던 후스의 개혁운동이 실패로 끝났던 전철을 밟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쇄술이 종교 개혁에 일방통행식 영향만 미쳤던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 발명된 지 70년도 채 되지 않은 ‘신기술’이었던 인쇄술 역시 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그야말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 자본주의 사업가의 전형이었던 인쇄업자와 출판업자들은 루터라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작품을 출간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루터의 공개서한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고함』은 초판 4,000부가 금세 다 팔려나가 인쇄업자가 일주일 만에 2쇄를 찍어야 할 정도였고, 1522년 출간된 이른바 『9월 성경』초판은 당시 숙련된 목수의 일주일치 임금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가격에 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ㆍ구약 완역 성경이 출간된 1534년까지 80~85쇄라는 기록적인 증쇄를 거듭했다.
흔히 서양 역사에서 종교 개혁은 기성체제에 반대하는 선전ㆍ선동에 인쇄술을 활용한 최초의 운동으로 평가받곤 한다. 특히 종교 개혁 초기에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의 사상을 널리 알리고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정식 제본되지 않은 가철본 형태의 얇고 저렴한 소책자(Flugschrift)가 독일어로 제작되어 대량 유포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가들은 종교 개혁 시대에 소책자를 활용해 벌어졌던 여론전을 ‘팸플릿 전쟁’이라고 부른다.)
비록 이 새로운 종류의 인쇄물이 처음 등장한 것은 15세기였지만, 소책자가 진정한 대중매체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다양한 소통방식을 활용해 특정 지역이나 계층에 국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여론을 창출했던 ‘종교 개혁 공론장’(라이너 볼파일) 속에서 개신교 진영의 핵심적인 투쟁수단으로 부상하면서부터였다. 독일 종교 개혁기 소책자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한스-요아힘 쾰러의 추산에 따르면, 종교 개혁 시작 첫 해인 1517~18년 사이에 소책자의 제작은 무려 530퍼센트에 달하는 높은 증가세를 보였다. 또 16세기의 첫 30년 동안 출간된 소책자의 총 발행량을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전체 인구수와 비교해보았을 때 대략 주민 한 사람당 소책자 1부가 돌아갈 정도로 방대한 양이 시중에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2. 루터의 성경번역과 문체혁명
소책자가 종교 개혁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 독일 개신교인들의 신앙생활의 준거점으로 작용하며 문화적 측면에서 독일어 문어체의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던 것은 역시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었다. 레스턴은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사실, 즉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 최초의 독일어 성경이 아니었다는 점을 제대로 짚어주고 있다. 『9월 성경』이 출간될 무렵 신성로마제국에는 이미 18종에 달하는 서로 다른 독일어 판본의 성경이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독일어 성경들은 중세의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Vulgata) 본을 번역한 것이어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에 난해한 측면이 많았다. 아직 표준 독일어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 지역 방언으로 씌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널리 확산되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에 비해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번역한 신약 성경은 서기 1세기에 신약 성경이 처음 편찬되었을 때 쓰인 언어인 그리스어를 기반으로 해서 당대 최고 지성이었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1516년 새롭게 출간한 ‘그리스어 판본 성경’을 원본으로 활용해 번역한 것이었기에, 천 년이 넘도록 사용되면서 불가피하게 여러 문제점을 안게 된 [천주교회의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오류를 피할 수 있었다.
게다가 번역자 루터가 당시 치열한 논란의 중시에 서 있었던 유명 인사였다는 사실 이외에도, 그가 번역작업을 수행하면서 되도록 현학적인 표현은 피하고 대신 가정주부와 시장의 보통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끔 문장을 쉽게 풀어썼기 때문에 루터 성경은 다른 독일어 성경들과는 달리 여러 지역에 널리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루터 성경이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게 되면서 그가 번역할 때 사용한 중동부 지역의 고지(高地) 독일어는 부부 지방의 저지(低地) 독일어와 다른 방언들을 제치고 점차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는 향후 표준적인 독일어 문어체의 발전에 기본 토대를 제공했다.
루터의 성경번역이 가져온 파급효과는 비단 독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루터의 시도에 자극 받아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도 자국어 성경 번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로 영국의 윌리엄 틴데일(틴들)은 신약 성경을 영어로 번역할 생각을 갖고 일부러 루터를 만나기도 하였으며, 실제로 1526년 출간도니 틴데일의 영어 성경은 당시 자국어 성경 출판을 금지하고 있었던 영국이 아니라 독일의 보름스에서 처음 인쇄되어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