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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 흠정역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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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편 7절)

  • 번역과 반역 사이에서: 기계적 일치 번역은 안 된다조회수 : 15024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5년 5월 11일 10시 11분 7초
  • 안녕하세요?
     
    성경 번역 후 출판사를 운영하다 보니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이메일을 보냅니다. 지난 며칠 사이에도 서너 개가 왔습니다.
     
    지난주에는 이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한 형제님께서 몇 군데 교정할 곳이 있다고 이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형제님은 미국인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 다닙니다. 그래서 늘 흠정역 한영대역 성경을 보시다가 발견한 몇 가지 의견을 모아서 이번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의견들을 보면서 영어를 그대로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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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보내 주신 교정 요청 의견을 일단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주신 의견 중에는 반영에 어려움이 많은 것도 있습니다.
    제 고민이 늘어갑니다.
    영어식으로는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요.
    그래서 다 그만두고 죽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여하튼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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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형제님은 그 뒤에 자기 의견을 다 반영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면서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따뜻한 위로와 함께 이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알면 알수록 하면 할수록 번역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서문에서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명문을 남겼습니다.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다. 번역은 껍질을 까서 우리가 열매를 먹도록 해주며 휘장을 젖혀서 우리가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준다. 번역은, 야곱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굴려내고 물을 길어 그것으로 라반의 양떼들에게 물을 주었던 것처럼(창29:10), 우물의 뚜껑을 열어 우리가 물로 나가게 해 준다. 참으로 보통 사람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는다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두레박이나 물길을 그릇이 없이(요4:12) 야곱의 그 (깊은) 우물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같고 이사야서에 언급된 사람, 즉 봉인된 책을 넘겨받아 읽을 것을 요구받는 사람과 같을 것이다. ‘원하건대 이것을 읽으라, 하면 그가 이르기를, 그것이 봉인되었으므로 내가 읽을 수 없노라, 할 것이요’(사29:11).
     
     
    이처럼 번역은 글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번역을 통해 글에 생명력을 넣으려면 문맥에 따라 단어들의 뜻을 잘 고려해서 합당하고 적절하게 번역해야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히브리어든 그리스어든 영어든 한 단어가 여러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단어 자체의 기본적인 뜻이 있지만 거기서 파생된 의미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1880년경에 나온 영국 개역성경(ERV)의 실패에 대해 <Manuscript evidence>를 기록한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ERV는 본문도 문제지만 기계적으로 번역해서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글이든 말이든 살아 있으려면 문맥에 맞게 같은 단어라도 잘 번역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독자들이 번역된 글을 잘 이해할 수 있고 비로소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한국인 모두가 영어를 배우다 보니 흠정역 한영대역 성경을 보시고는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잠시 번역의 방법을 소개하려 합니다.
     
    영어로 peac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성경에 429회 나오는 이 단어는 흠정역 성경에 화평, 평화, 평안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왜 모두 평화로 번역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렇게 안 되는 사례가 너무 많습니다. 영어로는 peace 하나로 화평, 평화, 평안 등이 다 표현되지만 우리말로는 안 되므로 각각의 문맥에 맞게 구분해서 번역해야 합니다. 그래야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듯이 합당하고 적절한 우리말 번역으로 독자들을 이해하게 하고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peace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그리스어도 10여 개나 됩니다. 이것을 영어는 peace 하나로 번역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6장에서 대언자는 거짓 대언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얼마 있다가 바빌론 포로 생활을 해야 하므로 그들에게는 실제로 평안 즉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히 잘 있음’이 없는데도 거짓 대언자들은 그들이 평안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런 경우의 peace는 당연히 불안에 대비되는 평안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거짓 대언자들]이 또한 내 백성의 딸의 상처를 조금 고쳐 주고는 평안(peace)이 없는데도 이르기를, 평안하다(peace), 평안하다(peace), 하였도다(렘6:14).

     

    이런 식으로 같은 영어 단어라도 어떤 경우에는 미묘한 차이를 살려 달리 번역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번역이 살아납니다. 사실 예레미야도 그런 의미로 peace라는 단어를 사용했지 ‘평화 협정’을 말할 때의 ‘평화’처럼 ‘전쟁과 대비되는 peace’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영어만 가지고 번역하면 졸역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people이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은 사람들도 되고 한 나라 백성도 됩니다. 특히 히브리어/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people과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인 people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사람들과 백성을 모두 완전하게 people로 번역하였습니다. 미국/영국 사람들은 앞뒤 문맥을 보고 people이 사람들인지 백성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로는 구분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은 문맥과 더불어 English men's concordance 등을 사용해서 바르게 수행될 수 있습니다. 흠정역 성경은 이런 과정을 통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바르게 번역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최종권위를 무시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합당한 말이 아닙니다. 저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무결함을 믿고 그 뜻대로 바르게 번역했을 뿐입니다.
     
    이제 다음의 몇몇 사례를 통해 번역의 미묘함을 살펴보겠습니다.
     
    1. 신10:13 등의 good 과 goodness
     
    12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
     
    여기의 답이 13절입니다.

    “내가 이 날 네 행복을 위해 네게 명령하는 {주}의 명령들과 그분의 법규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냐?”
     
    우리말로만 읽으면 여기의 ‘행복’은 ‘happiness’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영어로 가서 보시면 ‘good’으로 되어 있습니다.
     
    To keep the commandments of the Lord , and his statutes, which I command thee this day for thy good
     
    제게 이메일을 보내신 분은 아마도 이것을 오역이라고 생각하고 제게 알려주신 것 같습니다. 즉 핵심은 good을 왜 선 혹은 선함이라고 번역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일단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구절을 ‘네 선을 위하여’ 혹은 ‘네 선함을 위하여’라고 번역하면 말이 될까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기는 good이지 goodness가 아닙니다. 즉 good 자체가 명확히 명사로 쓰였습니다.
     
    그러면 good이라는 명사의 뜻을 사전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제 스마트폰에 뉴에이스 영한사전이 있어서 good의 뜻을 보았습니다.
     
    good(명사): 1. 이익, 복리, 이로운 것, 2. 탁월한 점, 장점, 3. 선
    즉 명사 good은 좋은 것, 복된 것, 유익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goo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베(스트롱 번호 2896)를 보니 이 말은 영어 KJB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beautiful, best, better, bountiful, cheerful, at ease, X fair (word), (be in) favour, fine, glad, good (deed, -lier, -liest, -ly, -ness, -s), graciously, joyful, kindly, kindness, liketh (best), loving, merry, X most, pleasant, + pleaseth, pleasure, precious, prosperity(번영), ready, sweet, wealth(재물), welfare(복지), (be) well ([-favoured]).
     
    명사형의 경우 영한사전처럼 영어 KJB의 good은 prosperity(번영), wealth(재물), welfare(복지)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10:13의 경우 ‘네 행복을 위해’, ‘네 복을 위해’, ‘네 번영을 위해’, ‘네 복지를 위해’로 번역하면 우리말로 바르게 번역한 것입니다. ‘네 선을 위해’ 혹은 ‘네 선함을 위해’는 졸역(심하게 말하면 오역)입니다.
     
    욥기 5장 27절, 시편 122편 9절의 good도 같은 경우입니다.
     
    이것을 보라. 우리가 그것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이 사실이니 너는 그것을 듣고 네 유익을 위해(for thy good) 그것을 알라, 하니라(욥5:27).

    {주} 우리 [하나님]의 집으로 인해 내가 네 복을(thy good) 구하리로다(시122:9).
     
    goods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을 ‘선함들’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상품으로 번역됩니다.
     
    2. full, fill 등

    친구끼리 대화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너 배고파?”
    “아니, 나 배불러.”
     
    이런데 우리말 ‘배’가 나온다고 영어 belly, stomach를 생각하면 영어가 안 되지요.
     
    “Are you hungry?", "No, I am full."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번역했더니 어떤 분이 ‘full’을 “찼어”라고 번역하지 않아 오역이라고 한다면 맞는 지적일까요?
     
    full, fill 등은 물론 ‘차다‘가 1차 의미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대화가 오가는 문맥에 따라 그것은 배부름을 뜻합니다. 영한사전에도 당연히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fill: ∼+목/ +목+전+명』
    가득하게 하다, 채우다; ┅에 (잔뜩) 채워 넣다; ┅에 내용을 채
    (아무를) 배부르게 하다; 만족시키다, 흡족케 하다.
     
    마태복음 5장 6절을 보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요,
    Blessed [are] they which do hunger and thirst afte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filled.
     
    아마도 끝의 filled를 “그들이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요”로 하지 않아 유감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나 봅니다.
    그런데 여기의 문맥은 먹고 마시는 것이므로 ‘배부르다’로 해야 맞는 번역입니다.
     
    동일한 말이 마14:20에도 있습니다.
     
    그들이 다 먹고 배불렀으며 남아 있는 조각들을 저들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거두었는데(마14:20)
    And they did all eat, and were filled: and they took up of the fragments that remained twelve baskets full.
     
    물론 여기서도 fill은 ‘배부르다’의 의미입니다.
    이런 경우 fill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코르타조, 스트롱 번호 5526)는 음식을 먹는 데만 사용되었습니다.
     
    반면에 ‘채우다’로 해야만 하는 fill이 있습니다.
     
    또 아무도 새 옷감 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깁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그것을 메운 새 조각이 낡은 옷을 당기어 그 찢어짐이 더 심하게 되느니라(막2:21).
    No man also seweth a piece of new cloth on an old garment: else the new piece that filled it up taketh away from the old, and the rent is made worse.
     
    이 경우 그리스말은 ‘플레이쏘’(스트롱 번호 4130 혹은 4138)이며 뜻은 ‘빈 공간을 채우다, 메우다, 성령님으로 혹은 지혜로 채우다’ 등입니다(눅1:67; 2;40 등 다수 구절).
     
    따라서 번역자는 같은 영어 단어 fill이라도 각각의 문맥에 맞게 ‘배부르다, 채우다, 메우다’ 등으로 구분해서 번역해 주어야 합니다. fill을 다 ‘채우다’로 해도 뜻은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졸역이 됩니다.
     
    비교적 영어에 능숙해 영어 성경을 즐겨 보시는 분들이 간혹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영어는 절대 원어를 넘지 못합니다. 영어는 원어를 정확하게 번역했을 뿐입니다. 혹시 여러분 주위에 어떤 사람이 영어로 원어를 교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거든 속히 그에게서 도망가야 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영어만능주의 사고에 빠져 있는 사람은 마치 성경 해석에 있어 항상 원어를 들먹이며 자기 마음대로 영해를 일삼는 신학자와 목사들 못지않게 오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영어의 역할은 성경의 단어, 시제, 단복수 등을 원어의 단어, 시제, 단복수 그대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표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절대 영어로 원어를 고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지극히 합당한 원칙에 관련된 모든 질문에 그때그때 일일이 답하지 못하는 저의 사정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같은 영어 단어라도 원래 뜻이 다르면(이것은 문맥을 보면 알 수 있음) 구분해 주어야 바른 번역임을 이번 기회에 분명하게 인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즉 여러 원어(배부르다, 채우다, 메우다)가 하나의 영어 단어(flll)로 쓰였고 그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길 때는 각각 문맥에 맞게 서로 다른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해 주십시오.
     
    이런 것을 파악하지 못한 채 흠정역 성경에 (이런 식의) 오류가 수천 개나 된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합당한지는 현명한 독자들이 판단할 것입니다.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하나의 영어 단어를 두 개의 우리말 단어로 번역한 경우입니다. 이 경우 역시 번역자는 그 단어의 본래의 뜻을 온전히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가적인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레위기 27장을 보겠습니다.
     
    맹세로 봉헌된 자 곧 사람들 중에서 맹세로 봉헌될 자는 결코 속량하지 못할 것이며 반드시 죽일지니라(29).
     
    None devoted, which shall be devoted of men, shall be redeemed; [but] shall surely be put to death.
     
    ‘맹세로 봉헌된’에 해당하는 영어를 보시면 단순히 devoted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역자가 ‘맹세로’를 자기 마음대로 집어넣었다고 항의하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번역자라면 계시록 22장 18절의 저주를 잘 알고 있으므로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단어를 첨가하지 못합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22:18),
     
    그렇다면 왜 ‘맹세로’가 들어갔을까요? 영어 devoted와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맹세로’의 뜻을 내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devoted는 영어 성경에서 단 7회 사용됩니다(레27:21, 28 2회, 29 2회, 민18:14, 시11:38). 옥스퍼드 사전을 보면 devoted는 ‘Vowed; appropriated or set apart by a vow’(맹세에 의해 할당된 혹은 구분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맹세로 봉헌된’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감을 가지고 성경을 기록한 모세의 의도가 전혀 살아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도 ‘아주 바친 자’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참고로 21절을 보시면 devoted의 용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밭이 희년이 되어 나갈 때에는 맹세로 봉헌된 밭으로서 {주}께 거룩할 것이므로 그 밭의 소유권이 제사장의 것이 되리라.
     
    여기서 devoted된 밭은 ‘주님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맹세로 봉헌된 밭’이며 그래서 그것은 거룩한 밭 즉 거룩하게 구별된 밭입니다. 2절이 이를 설명합니다.
     
    29절 같은 경우도 이를 강조하기 위해 맨 앞에 none이라는 강세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28절에는 every라는 강세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즉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데서 ‘맹세로’를 빼면 이 성경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본래 주시고자 하는 의미를 살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봉헌된 것은 얼마든지 있지만 이 경우는 특별하게 전적으로 주님을 위한 용도로만 봉헌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살리기 위해 ‘전적으로’가 들어가는데 이것은 절대 번역자가 임의대로 첨가한 것이 아니라 영어 devoted와 히브리말 케렘(스트롱 번호 2764) 즉 ‘맹세로 운명이 정해졌음’을 나타내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번역입니다.
     
    오늘은 잠시 번역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부디 이 글을 통해 흠정역 성경 번역의 원칙을 잘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은혜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합당하고 적확하게 번역해 나갈 수 있는지 그 이해를 깊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희는 흠정역 성경이 결코 무오하다고 말하지 않으며 다만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번역을 잘못하면 반역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저희는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 사이트 공지를 통해 부탁드렸듯이 앞으로 성경을 보시다가 교정 의견이 생기면 언제라도 기탄없이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이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추후에 교정판이 필요한 시점이 되면 주신 의견들 가운데 합당한 것들은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흠정역 성경 번역에 관한 문제를 공개적으로 사이트에 올려 논쟁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양심이 연약한 지체들의 믿음을 파괴시키는 일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자원해서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러한 성원이 지금의 흠정역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앞으로도 하나님과 모든 성경 신자들 앞에서 더욱더 겸손한 자세로 이 사역을 유지해 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패스터 정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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