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9 장 십자가 - 본성과는 반대됨
스펄젼은 총을 수리하기 위해 대장장이에게 갔던 한 시골 농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대장장이는 농부가 가져온 총을 검사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총은 매우 낡았고 다 망가졌으며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상태입니다. 이 총을 어떻게 수리해 드릴까요?” 이에 대해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총의 모든 부분이 다 낡았다면 전부 새로 만들어야겠군요” 그러자 대장장이는 “뭐 하러 전부 뜯어고칩니까, 아예 새 총을 하나 사시는 것이 낳을 겁니다”. 이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군요. 바로 그것이 내가 원하던 바입니다. 내가 총의 모든 부분을 수리하라고 한 것은 새 총을 갖고 싶다는 뜻이었지요. 나는 새로운 총을 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련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의도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즉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드셔서 인간으로 새로운 본성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농부가 매우 어리석은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영적 분별력에 비하면 매우 분별력이 많은 셈이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수리하려는 것이 아니고 옛 인류 전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로 아담에 속한 인류에 대한 완벽한 처방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그리하여 어떤 육체도 그분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리라” 십자가는 우리의 뜻과는 어긋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뜻이 아니옵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지혜와는 반대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지혜는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정과도 반대된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 정욕을 십자가에 달아 버렸느니라”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자긍심과도 모순된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즉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던 그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에 반대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 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4, 15). 이처럼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본성과 모순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확고하고도 변함없는 원칙은 이러하다: “사람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가셨을 때 “도끼는 이미 뿌리에 놓였다.” 옛 아담이라는 나무줄기는 완전히 잘려 나가고 만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 옛 사람이 완전히 파산하였음을 보여 주며 아담에 속한 옛 사람은 사망하였음을 선언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즉 육으로 난 것)을 제거하는 방법이며 이로써 초자연적인 새 생명이 대신 자리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강화”시켜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어 버리시려고 오신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육신적인 행동에 반대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죽은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포도주를 옛 부대에 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새 천을 낡은 옷에 대고 깁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옛 사람의 누더기를 완전히 벗겨 버리기 위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계명은 우리가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모든 도덕적 영적인 유산을 완전히 청산해 버리는 것이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적인 본질이다. “우리의 자아야말로 타락한 인간이 지닌 모든 악의 요소들의 뿌리이며 나무요 가지들인 것이다”(율법).
자아 부인이란 그저 이런 저런 방종을 절제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A.T. 피어슨 박사가 말한 대로 모든 방종 -크고 작은 여러 종류- 이라는 가지들의 뿌리인 자아에 도끼를 대는 것이다. 자기 의, 자기 심리, 자아 추구, 자기 만족, 자기 의지, 자기 방어, 자기 영광 등. 이 뿌리에서 자라나온 수천 개의 가지들 중 그저 몇 개의 가지만을 제거한다 할지라도 또 다른 가지들이 더욱 왕성하게 뻗어 나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따라서 도끼가 자아의 뿌리에 놓일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이 성령의 생명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까지는 “우리의 모든 미덕은 그저 썩은 뿌리에 접붙여진 그럴싸하게 보이는 가짜 가지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 이후에도 옛 자아의 뿌리와 샘물로부터 가끔씩은 옛 모습이 들어나는 것은 어쩐 일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배워야할 때가 바로 이 순간인 것이다. 자 예를 들어보자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옛 아담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로서 “야생포도”를 맺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자로서 그분께로 접붙여진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으로 믿음을 통해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아담의 줄기로부터 차단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살아 계신 포도나무인 그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진 것이다. E. J. 페이스(Pace)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얼마 전 내 고향인 플로리다에서 감귤 농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농장 주인에게 과일을 어떻게 접붙이는지를 보여 달라고 청했다. 그는 나를 묘목원으로 인도했다. 그는 끝에 갓 나온 싹이 난 작은 가지를 묘목에서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그는 근처에 있던 다른 나무쪽으로 가서는 그 위에 칼로 십자가 모양을 파고서 그 안에다 그 어린가지를 능숙하게 집어넣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옛 줄기에서 베어져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신성 안으로 접붙여진 것이다. 이제는 믿음으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이다”라는 사실을 붙들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접붙임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접붙이는 방식은 이러하다. 즉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가지를 이보다 못한 줄기에다가 접을 붙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과는 반대로 죽은 나무에다 접붙여졌다. 참 포도나무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 구속주의 찢겨진 옆구리에 우리는 접붙여진 것이다. 즉 나쁜 열매 맺는 자가 좋은 열매 맺는 분께 접붙여진 것이다. 이외에도 너무도 중요한 “본성을 거스르는” 또 한 가지 요소가 있다. 자연에 있어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가지는 여전히 “종류대로” 즉 원래 가지고 있던 그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보자면 나는 아담 안에서 죽었다. 나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으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따라서 “하나님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이 자연적인 생명은 죽어야하고 “숨”을 거두어야만 한다. 십자가의 형을 받게 된 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제는 본성에 따라 살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십자가는 이 사실을 보여 주며 나는 이에 동의해야만 한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심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생명이 접붙여진 가지인 나를 통해 표출되어야 하며 나의 본성과는 너무도 어긋나는 의로운 생명의 열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분의 본성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에 이르도록 표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에이미 카미카엔씨는 코힐라(Kohila)라는 간호사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 안에 있는 뭔가와 맞닥뜨렸다. 그것은 우리가 난탄(Nan tha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난(Nan)은 나(I)를 뜻하고 탄(than)은 이 대명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아를 포기한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시지 못할 일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난탄(Nan than)은 무척이나 자신에 대해 염려를 한다. 코힐라는 그녀의 탄을 포기하였고 이에 다른 사람을 돕는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시게 되면 그분은 그 생명을 전적으로 장악하셔야 한다. 그분은 “나의 자아”를 완전히 몰아내실 때까지 끝까지 “연좌 농성”을 벌이실 것이다. 십자가는 “내가 아니고.....”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나를 궁지로 몰고 갈 것이다. 자연에 따른 접붙이기와 열매 맺기의 법칙에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너희가 내 안에”라는 고백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먼저 이루어지고 나서야 “내가 너희 안에”가 이루어져 합당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길은 자연의 의지를
가로질러 뻗어 있고;
예수님의 발은 육신이
지배하지 않는 곳을 밟는다네
노예의 족쇄를 뒤로 하니
복된 일이로다.
우리의 자아를 뒤로하니
수의와 무덤만이 남아있네!
-Ter Steeegen-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근거하여 접붙여진 어린 가지의 고백을 들어보자. “저는 저의 혈통에서 잘려졌습니다. 저는 이전의 모든 관계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저는 옛 가문으로부터 철저히 축출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옛 것들에 대해 죽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살고 있으며 - 저는 여전히 작은 야생가지일 뿐입니다- 여전히 내 자신일 뿐입니다. 저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고 있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제 안에서 다른 분의 생명이 살고 있기에 제가 맺은 모든 아름다운 열매는 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른 분의 생명이 맺은 열매이며 이 생명은 계속해서 저의 옛 생명을 거슬러 위대한 농부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고귀한 열매를 저를 통해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이와 같은 원칙들을 끊임없이 거스르게 됩니다. 이에 대해 F.J. Huegel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아에 매여 있고 뒤덮여 있고 얽혀 있고 충만해 있어서 우리의 영적인 본성이 하나님 안에 중심을 두려면 우리의 옛 성품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깊은 사랑의 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인 것이다. 십자가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거칠게 대한다. 즉 옛 생명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죄가 우리를 씻긴다거나 옛 성품을 뿌리 뽑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종종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자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프랜시스 데 살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진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또한 아무런 어려움도 가져다주지 않는 거룩함을 얻는다는 것도 환상이다. 이와 같은 피상적인 거룩함은 인간의 본성과 매우 잘 어울릴 것이다. 우리는 성결에 이르는 비결만 발견한다면 쉽고 빠르게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 인생동안 십자가가 놓여야할 옛 모습이 우리의 본성 안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계속해서 찾아내야만 한다. 만약 독자 여러분께서 자아와 죄에 대해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자아의 부산물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다면 여러분의 취향, 선택, 선호하는 것 등에 분명한 갈보리 십자가의 표시가 찍혀야만 할 것이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모든 요소에 십자가의 죽음의 표시가 찍혀 있어야만 한다. 자,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선택위에 그분의 십자가를 표시하시도록 기도하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여 오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를 표시하소서.
자아가 엿보이는 그 모든 요소위에
당신의 상실의 표식을 찍으소서
우리가 보기에는 가장 고귀한 것 위에
죽음의 표시가 이곳저곳에 놓이게 될 때
우리 모두 기이히 여기지 않고 이것이
기도의 응답임을 인정하리이다.
-Army Carmichael-
그러나 “내가 아니고”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일생 내내 장례를 치르는 사람처럼 우울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스럽고 영원하신 분, 만물의 창조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그분”께서 나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그분의 성전을 삼으시고는 내가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신다”는 고백을 실제로 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는가? 그분께서는 “내가 사니 너도 살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라는 신비한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인 것이다.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있는 것이다. 실로 생명과 사랑과 자유의 영광스러운 연합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그분과 함께 살아났고 그분과 함께 일으켜 졌으며 그분과 함께 앉혀졌다. 나는 영원하신 분 안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생명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것”이다. J Gregory Mantle은 이렇게 말했다.
“퍼트셔 골짜기에는 작은 개울의 바위 위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곳에는 뿌리를 뻗은 흙도 없었고 영양분을 흡수할 흙도 없었다. 이 나무는 오랫동안 성장을 방해받았고 건강하게 자라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식물이 갖고 있는 놀라운 본성에 의해 근처에 있던 좁은 다리를 통해 수염뿌리를 건너 쪽으로 보냈다. 그리고서 실개천 건너 쪽 둑에 있는 옥토위에 뿌리를 박았다. 나무는 수액과 자양분을 빨아들여 급속히 건강하게 성장했다. 이 작은 다리가 나무에게 생명을 제공했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는 자에게는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만약 우리의 생명의 뿌리가 부활하신 주님께 놓여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 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는가? 그리하여 쓰라린 체험을 맛본 적은 없는가? 우리는 열매를 맺기 위해 애써 봤고, 노력해 보았고 기도해 보았고, 애통해 보았다. 그러나 이 모두가 허사였다.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명의 흐름은 불순물과 뒤섞여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동기들을 통해 혼탁해지고 만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충만함이 있음을 알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이것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가 고백했듯이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나는 뿌리 안에 풍성한 충만함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나의 보잘 것 없는 가지를 뿌리에 박을 수 있는 지가 문제이다.” 이와 같은 절망의 극에 달할 때 결국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감사드리는 것은 완전히 신성하고 능력 있는 생명이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참된 살아있는 힘을 찾으려면 나와 나의 생명에서는 하지 말라.
이는 자아는 자신만을 사랑하며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함이라
씨가 뿌려진 땅에서 열매를 구하듯이
살아있는 생명을 찾되 죽임당한 생명으로부터 구하라
그리고 나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서둘러 그 생명에 치명타를 가하라.
그리하면 상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에서 무한한 보물을 발견케 되리니
씨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디서 새로운 부활의 싹이 발견되겠는가?
-T.C. Uph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