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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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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제 10 장 십자가와 두 가지 본성 조회수 : 7270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7시 49분 59초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10 장 십자가와 두 가지 본성
     
    D.M 팬튼(Panton)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사나운 사람일지라도 수용소에서 혼자서 지낸다면 부드럽고, 온순하고, 조용하며 합리적이고 신사처럼 행동한다. 그는 그 수용소 안에서 자기의 뜻에 따라 자기 방식으로 마음대로 살면서 평안하게 지낸다. 그러나 그 수용소에 훌륭한 신사를 한 사람 들여보내 보라. 그러면 이 사나운 사람의 얼굴빛은 변할 것이고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어느 순간에는 그 침입자에게 대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두 사람은 치열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나와 친한 한 동역자가 이렇게 말했다. “구원받기 전에 나는 내가 성질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 여자 동역자는 늘 자기 방식대로 살면서 아무런 성질을 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에 따라 절제 있는 삶을 살아갔었다. 그녀는 결코 내적 갈등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자 그녀는 타락한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이기심이 독버섯처럼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 그렇다. 육신은 결코 영적인 영역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육신은 회심이 불가능하고, 치료가 불가능하며, 갱생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옛 사람(육신)과 새 사람(거듭난 영)이 존재하게 된다. “첫째 사람” “자연인” 그리고 “정욕에 따른 썩어진 옛 사람”이라는 성경적 표현들은 “아담”안에 있는 우리 즉 우리가 육으로 태어난 때 물려받은 자아를 말한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듭난 사람은 “새 사람”을 옷 입은 것이다.
    믿는 성도로서 나는 “내 안에 (즉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육신적 생각은 사망이며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다”(롬8:7). 육신적 생각은 성령의 일들을 철저히 배척한다. 육신은 단순한 대적이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화해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신은 “하나님께 대한 대적”이므로 화해가 있을 수 없다. 이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가 없느니라.” 그러나 나에게 있어 실로 엄청난 충격은 “내가 육신적이서 죄 아래 팔린 것과 동시에 속사람을 따라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이중적인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거의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느 때인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간에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성경말씀과 우리의 체험에 따르면 이 전쟁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전쟁이요 지독한 내란인 셈이다. 이 전쟁은 외부의 적과 벌이는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인간의 내부에 숨어 있는 “간첩”과의 싸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치열한 전쟁이 그 어느 쪽도 이길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져 버린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또한 패배주의적인 입장을 택한 채 자신들의 매일의 실패를 “옛 사람”에게만 탓을 돌리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일부 성경 교사들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두 인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하는 두 개의 개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된 개체로 존재한다. 새 사람은 선한 천사처럼 완벽하고 온전한 반면 옛 사람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악한 자이다.”(H. Bonar).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오직 하나의 개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의지에 따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두 개의 독립된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다. 다만 단 하나의 인격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측면인 것이다. 모울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몸은 결코 독립된 존재 즉 별도의 인격이 아니다. 만약 우리의 몸이 ‘음모를 꾸민다면’ 그것은 독립된 외부인의 죄가 아닌 나의 죄인 것이다.”
    앞서 우리는 ‘독일인-미국인’이 요청한 알현을 윌리암 황제가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었다. 그 알현이 거부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에 귀화한 사람은 미국인이 되었다.” 황제는 이렇게 답변했던 것이다. “짐은 미국인도 알고 독일인도 알지만 ‘독일인-미국인’은 알지 못하노라” 나는 한 개체로서 한때 “아담 안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아담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 내가 아담 안에 있었을 때 나는 “육신 안에” 있었으며 저주 받고 멸망 받은 상태에 있었다. 그때 나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아담으로부터 베어졌고 십자가에서 생명의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께로 연합하였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왜 못 박힐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치유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써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거듭난 사람들은 이제 ‘아담-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이와 같은 신분이라면 나의 왕께서는 결코 알현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어떤 죄인들은 율법을 피하기 위해 “주의 장막으로 피신하여 제단의 뿔들을 붙들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정당한 보음을 받았다. “너는 그를 나의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일지니라”(출21:4). 마찬가지로 모든 육신은 저주아래 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더 정확히 말하면 못 박혀 있다. I am crucified라고 되어 있는 권위역본의 번역이 얼마나 정확한가?- 역자 주).
    우리는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왕께서 알현하실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두 가지 본성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다가 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육신에게는 더 이상 자비가 있을 수 없다.
    육신은 성소에 다가설 수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그를 나의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일지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다가설 때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상태로 다가서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왕을 알현할 수가 없다. 십자가는 우리와 옛 사람 사이의 영원한 분리를 선포한 것이다. 오직 이와 같은 자세로 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그분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한 번 들어 보도록 하자. 유대인과 힌두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들의 친척들은 이들을 파문시키기 위해 그들의 장례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그들을 완전히 축출해 버렸다는 것을 공포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장례식이후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우리는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부터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이 장례식이 끝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지막 작별 키스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를 가로막고 서서 “당신은 저 죽은 개 같은 녀석에게 키스하려고 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나를 자신에게 붙들어 매시고 나를 저주받은 나무로 데려 가시고 무덤에다 내려 놓으셨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나와 나의 “옛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신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죽은 개”에게 키스하기 위해 되돌아간다면 내 영혼의 신랑에게 얼마나 모욕을 드리며 실망시키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나의 사형 선고문에 엄숙하게 서명을 하고 영원한 장례식을 지낼 때이다!
    얼마 전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설교했을 때 이 설교를 들은 한 멋쟁이 친구가 이렇게 평을 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아니 그렇게 못됐단 말이야!!” 이에 대해 한 성도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질투나 공허감이나 교만 같은 것으로 괴로워한 적이 없단 말이오?”(이와 같은 것들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적이 있지요” “그렇다면 이런 일을 당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이에 대해 그는 “오! 그거야 주님의 보혈이 담당하는거지요.” 라고 너무도 쉽게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이 가련하고 자기 만족에 물든 청년에게는 죄가 아직은 “심히 죄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에게는 주 예수께서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편리한 도피처이며 그분의 보혈은 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든 책임을 면케해 주는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자, 이제 로마서 5장에서 다루는 칭의와 로마서 6장에서 다루는 성화와의 밀접한 관계를 면밀히 주목하기 바란다.
    로마서 5장이 신앙 생활의 기초라고 한다면 로마서 6장은 그 후에 이어진 신앙 생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롬5:2). 그러나 로마서 6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안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더 이상 그 가운데 살겠느냐?”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우리와 아담 그리고 우리와 죄와의 모든 관계는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죽으심으로 나의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 “갈보리의 죽음”이라고 하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음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이룬 나로서는 그 십자가의 죽음에 완전히 연합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나의 법적인 위치이다.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해서 나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과는 하나 됨을 누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Huegel).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에 얻게 된 나의 지위인 것이다.
    의롭게 된 성도가 회심 직후부터 자신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충분하지만 실제로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즉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배울 때까지는 광야 길에서 헤매게 된다(로마서 7장). 그러나 우리가 진정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고백을 하게 될 때면 비로소 우리는 열매 맺을 수 있는 순종의 삶이라고 하는 축복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로마서 8장에도 아직 싸움은 남아 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에서처럼 가련하고 비참한 싸움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가장 비극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이곳에는 “나”와 “자아”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로마서 8장의 영적 싸움은 바울의 승리의 모습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이 그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육신을 따라가는” 길이 있다. 반면 다른 쪽에는 “성령을 따르는 길”이 놓여 있다. 가장 승리를 잘 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항상 이 두 가지 길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 따르면 성령의 법에 따라 해방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제 “성령을 따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택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택을 하는 주체는 우리 각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좇아 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커다란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졌던 옛 채무는 이미 청산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에서 경고와 더불어 격려를 덧붙이고 있다.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은 것으로 처리하면 살리라.” “너희가 죽을 것이나”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즉 “죽게 된 것이다.” “죽음의 길에 서 있는 것이다” 혹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리라” 등이 그것이다. 정욕에 이끌려 사는 자들에게 경고하면서 야고보가 말했던바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처해 있다. 즉 육체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영혼을 파멸로 몰고 가야 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셋과 브라운은 그 유명한 주석에서 “만약 우리가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육신과 전쟁은 교착상태에서 지속되는 전쟁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상대방의 생명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결투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간 후(이 사건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상징한다) 그들은 열매로 가득한 땅으로 들어갔을 뿐 아니라 치열한 전투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들 앞에 놓인 딜레마는 “만약 너희가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너희를 죽이고 말 것이다”였던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은 육신과 성령과의 전쟁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엄연한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권면의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자 한다.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죽이면 이란 단어는 죽음에 처한다는 것이요 몸의 행실이란 저주받은 가나안적인 육체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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