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8 장
십자가와 자아
교계에는 수많은 교사, 사역자, 성도, 전도자, 선교사 등이 일하고 있고 성령의 은사들이 이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는 것이 사실이긴 하나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보면” 이러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자아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을지도” 모르며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드러나지 않은 개인의 삶에는 자아라고 하는 어둡고 불길한 세력이 웅크리고 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상처받은 자존심, 까다로운 성미, 탐욕, 사랑스럽지 못함과 같은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는지, 어째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수의 강”을 체험하지 못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비밀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비밀리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사당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섬기는 사당은 다름 아닌 자아라고 하는 사당이다. 그들은 이 사당에서 매일 절을 하며 예를 올린다. 바로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자랑할지 모르나 내적으로는 다른 신을 경배하고 있다. 그들은 동정을 받고 싶고, 응석을 부리고 싶으며, 제멋대로 하고 싶은 자아를 숭배하고 있다. 외적인 십자가, 죄의 형벌에 대한 대가 지불, 대속자의 죽으심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이 십자가가 갖고 있는 놀라운 신비가 지닌 꿈에도 생각지 못할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모른다. 이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삶에 적용될 때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는 전혀 모른다. 우리는 외적 십자가는 물론 ‘내적 십자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내적인 십자가로 역사하셔서 당신을 자아도취로 부터 벗어나게 하사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연합을 이루기까지는 그 어떤 ‘신령한 것’들도 당신에게 참 평안을 줄 수 없다.(F.J. Huegel in Cross of Christ).
하나님께서 내 자아를 거슬러 나를 단련하시니
내 자아는 병든 목소리를 지닌 비겁자로서
평안, 안식, 기쁨만을 열망한다네.
자아, 내 자신을 가장 잘 배반하는 자.
나의 가장 힘 있는 친구요, 치명적인 대적,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나를 방해하는 자.
그러나 나의 자아를 억제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니
그분은 나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벗기실 수 있으며,
멍에를 부수시고 나를 해방시키신다네. - Christina Rossetti-
인간은 하나님 안에 원래의 집과 거처를 갖고 있었으나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아라고 하는 먼 나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빛과 생명이 되셨고 그의 호흡을 제공하셨으며 모든 것의 중심이 되셨지만 그 놀라운 곳에서 빠져나온 인간은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된 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내버렸고 자아가 인간의 왕좌를 차지하고 말았다. 결코 자리를 내놓으려하지 않는 권위와 찬탈자 바로 그가 자아인 것이다. 이제 자아는 인간에게 새로운 그러나 거짓된 중심이 되고 만 것이다. 자아는 해아래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을 사랑한다. 인간의 가장 훌륭한 행위마저도 숨겨진 자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더러운 걸레 같은 것으로 다만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나타날 뿐이다. 그는 자기의 오른손으로 뭔가를 행할 때 자기의 자아 만족이라고 하는 왼손을 의식한다. 윌리암 로(William Law)는 이렇게 말했다. “자아는 타락한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의 뿌리요, 가지요, 나무이다.”
이와 같은 막강한 자아가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말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그분께서는 그 무엇으로도 충격을 받으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이 비극 중의 비극을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거짓된 자아의 충만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인 경배에 의해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칙과 목적을 무너뜨리고 행동하시겠는가? 실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를 펼쳐 보이셨다. 십자가는 실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갈보리는 최초의 인류의 뿌리를 내리친 도끼였다. 여기서 옛사람 아담은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아담이 보좌에 오르게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인류의 새로운 머리로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자발적으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셨다. 그분께서는 자아가 완전히 배제된 사랑의 끈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묶으셨고 우리를 죽음의 깊은 곳으로 그분과 함께 데리고 가셨다. 이 모든 것은 죄의 형벌을 척결하고 우리로 자아 대신 하나님을 선택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 죽음을 택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다시 말해 우리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우리를 죄악 된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오 성도 여러분이여, 사람의 아들께서 죄가 되셨고, 저주가 되셔서 놋 뱀처럼 높이 들리셨다. 십자가 아래에 서 있었던 그의 어머니와 함께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자: “실로 칼이 네 자신의 혼도 찔러 꿰뚫으리라. 이는 많은 자의 마음의 생각(그렇다. 바로 당신과 나의 생각을)을 드러내려 함이라” 어떤 사람은 “어째서 꼭 뱀이어야 하는가? 왜 백합이나 장미는 될 수 없는가?”라고 물을지 모른다. 왕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왜 더 사랑스러운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묘사하시고자 했던 것은 죄악 된 자아생명(self-life)의 저주받은 모습이고 보면 그분께서는 가장 적합한 것을 택하신 것이다. 오직 뱀만이 이 진리를 상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나에게 무서운 빛을 비추었다. 나는 이 빛 앞에 내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 빛은 나의 죄악들만 비춘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내가 행하는 행동(what I did)은 내 자신(what I am)으로 부터 나온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나 즉 바로 자아라고 하는 사실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십자가를 응시해보자.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받아들이도록 하자.
나는 빌라도의 뜰에 모인 군중을 보네.
나는 그들의 분노에 찬 모습을 확인하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그들의 외침소리
신성모독과 함께 소름을 끼치게 하네.
그 외쳐대는 군중 속에서
나도 그 중 하나임을 느낀다네;
그 거칠고 떠들썩한 음성 중에서
나는 내 음성을 확인한다네.
그 신성한 피를 흘리게 한 자는 바로 나였네,
내가 그분을 나무에 못 박았다네,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네,
내가 바로 그분을 조롱한 자였네.
나는 십자가 주변에서 군중들을 보고 있네
고통당하는 분의 신음소리를 조롱하는 소리;
그 역시 나의 음성처럼 들려오니
마치 나 혼자서 조롱하고 있는 것 같다네. -Horatius Bonar-
당신은 이와 같은 고백이 두려운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가? 이와 같은 자아를 떨쳐버리고 싶은가?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은 자아의 모습을 인정하기까지는 자아를 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높이 들린 십자가의 보좌로부터 나는 자아를 먼저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그 자아를 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제 자아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치고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가지만 쳐진 것이 아니고 완전히 몸통이 베어져 넘어진 것이다. 즉 나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모든 과거와 단절되었고 자아 자체와도 단절되었다. 나는 완전히 저주받기로 정해진 자다. 그리하여 어떤 다른 분께서 나를 대신하여 합법적인 처형을 당하셨을 때 나도 처형을 당한 것이다. 나는 그분과 함께 완전히 끝났으며 수치스러운 종말을 맞이했다.
나는 이와 같은 법적인 사형 집행을 진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는 내가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집행서류에 서명을 해야 한다. 내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일은 너무도 무서운 일로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음에 이미 넘겨졌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 사형 집행서에 서명을 해야만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일에 동의해야 하며 그분의 죽음의 능력으로 자아에서 내려와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 실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 죽음에 연합될 때에만 그 능력을 발휘한다. 나는 이 신성한 죽음이 나에게 행동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같은 자아 부인은 한두 가지 악한 행동을 근절하는 것 뿐 아니라 자아라고 하는 나무의 그 뿌리에 십자가의 도끼를 갖다 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아의 가지만을 치신 것이 아니고 나무 밑동을 완전히 잘라 버리신다. 모든 자기의 자기존중, 자기옹호, 자기영광, 치명적인 자기연민 이밖에 수없이 많은 자아의 표출은 자아라고 하는 나무의 깊이 박힌 뿌리에서 뻗어 나온 육신적 가지들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가지들만 친다는 것은 자아라는 생명이 더욱 추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만들뿐이다. 하나의 가지가 잘려 나갔지만 더 추한 바리새인적 가지가 더 왕성하게 자라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겉으로는 멋있게 보일 수 있고 사람들 간에도 높이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뒤 안에서 보자면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자아라는 나무에서 맺힌 쓰디쓴 열매들을 증언하게 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풍성한 소망이 있다. 이는 내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안으로 접붙여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신성한 성품에 동참자가 된 것이다. 나에게 부여된 새 생명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며 자아에게 죽은 생명이다. 자아는 자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께 복종하기만 하면 그분의 전능하신 죽음이 내 안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실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나를 더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나는 자아에 대해 더욱더 완전히 죽게 된다.
누군가가 조지 뮬러에게 그의 사역의 비밀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내가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거의 바닥에 닿기까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은 내가 조지 뮬러, 그의 의견, 선호, 취향, 의지에 대해 죽은 날이요, 세상과 세상의 인정 혹은 비난에 대해서 죽은 날입니다. 나는 심지어 나의 형제들 혹은 친구들의 인정과 비난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그때로부터 나는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으로 드러나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기뻐한다네.
당신의 신성한 완전함 안에서,
또한 절대적인 순복에서 나오는
깊고, 신비로운 기쁨을 맛본다네.
나는 비록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즐거워하네
나의 모든 것을 당신안에서 발견하므로: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라, 영원토록 그리하리:
아멘! 그렇게 되기를 바라옵니다! -Lucy A. Ben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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