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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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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제 7 장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조회수 : 7897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7시 53분 14초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7 장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어느 가정에 항상 불화가 있었다. 한 젊은이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들 부부가 보트를 타다가 남편의 실수로 배가 뒤집혔고 부인이 익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사법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 집행이 있기 바로 전날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그와 함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 다음날 사법당국은 그 아들을 사형에 처했다. 잠시 후 마음이 심히 상한 그의 아버지는 이미 생명이 떠나버린 불쌍한 아들의 시신 앞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오! 내 아들아, 내가 내 생명을 너에게 나누어 줄 수만 있다면---. 내가 너에게 생명을 넣어 주어 네가 내가 원했던 그러한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바로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대신하여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을 갖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내가 그분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를 갈망하고 계신 것이다. 이는 나로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함이다. 바로 이를 위해 그분께서는 천사들의 본성을 취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씨로서 나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나와 동일한 육신을 입고서 인간이 되셔서 나를 그분과 함께 사형 틀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그렇다. 그분께서는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나는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다. 이를 두고 바울은 “죄로부터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은 몸에서 죄의 요구와 능력이 다 소진해 버렸음을 보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 “죽음이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죄가 너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었다. 또한 나는 다시 일어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였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죽음의 표시를 부활 안으로 지니고 가셨다. 그분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그분은 부활하실 수가 없었다. 그분은 이제 자신의 전능한 죽음의 능력과 효력을 제공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살고 계신다. 그리고 나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그분께 접붙여져서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첫 번째 아담은 나와 그의 생명의 연합에 의해(유전) 그의 불순종으로 야기된 치명적인 결과들은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나와 그분의 생명의 연합에 의해, 그분께서 죽기까지 보이신 그 순종의 위대한 결과들은 나에게 자동으로 전달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죄에게 죽으셨다. 그분은 죽음으로 죄가 지니고 있던 그 권능의 마지막 흔적마저 깨끗이 지워 버리셨다. 십자가의 조명하에서는 죄는 “더 이상” 군림할 수가 없다. 나는 그분과 연합되어 있음을 생생히 인식하면서 죄의 유혹에 대해 “아니오”라고 해야만 한다. 이 “아니오” 속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내적인 임재로부터 나오는 능력이 담겨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그 어떤 아버지보다도 자신의 생명 즉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그 생명을 나누어 주시기를 갈망하신다. 이 생명은 심한 유혹과 시험 속에서도 죽기까지 순종했던 그 생명이다.
    로마의 법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살인죄에 대해서는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한다고 한다. 이 사형수는 자기가 살해한 자의 시체 얼굴을 마주본 채로 묶여 죽어간다고 한다. 그가 그 시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는 길 뿐이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도 나를 죽음보다 더 강력한 사랑의 줄로 그에게 묶으셔서 십자가로 데려가셨다. 나는 이 십자가에서 그분과 “함께 못 박힌 것이다.” 펜 루이스(Penn-Lewis)여사는 한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는 너무도 충격적인 꿈을 꾸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피를 흘리는 구원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도 추한 어떤 것이었는데 너무도 역겹고 너무도 추잡해서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이처럼 혐오스럽게 했던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얼마 후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는 메시지를 듣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그 추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성령께서 그가 꿈에 본 그 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계시해 주신 것이다”(F.J.Huegel in Bone of His Bone).
    그러나 우리는 죽음과 부활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이 진리를 단지 입술로 고백하거나 확고히 인정한다고 해서 체험할 수 있지는 않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실행에 옮겨보겠다는 결심으로 흉내 내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삶은 그 어떤 모방으로도 살아낼 수가 없다. 오직 성령께서 내가 자아에 대해 죽었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살아 있는 방식으로 역사하셔야만 이 삶은 가능하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새롭고도 확고한 교제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생명을 내 것으로 할 수는 없다. 내가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부인하는 만큼 나는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분의 죽음의 능력에 온전히 내 자신을 항복시킬 때 나는 “그의 부활의 모양”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있다고 상상하거나 십자가에 있기 위해 일하고, 애쓰고, 노력하기는 쉽다. 우리는 자아를 동원하여 우리의 육신에 십자가가 못 박힌 것처럼 상상하고서는 그분의 죽음의 효력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육신의 어리석음이요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십자가는 프로테스탄트에게나 카톨릭에게나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시한 채 그분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아 보려고 애를 쓰며, 그분의 본을 따라 “예수님처럼” 행하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역시 그분과의 진정한 연합을 가져올 수 없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그분과 연합될 수 있다.
     
    그리스도 없는 십자가 내게 피난처 될 수 없었고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내게 구세주 될 수 없었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당신 안에 안식하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요, 기쁨이며, 모든 것 되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수 있게 되기에 앞서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는 일에 기꺼이 동의하기 전에 자신과의 싸움, 실망, 패배등과 같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자아를 내버리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죄의 사망에 이르도록 아플 때까지 자신을 죄에게 죽은 자로 여기려는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보려고 온갖 방법을 써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다. 자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드디어 자아라는 “시체”에 사로잡히게 된 우리는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외치게 된다. 바로 그때에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내 아들아, 나의 부활의 생명의 영을 너에게 넣어주노니 이는, 네가 ‘진정한 자유를’ 즉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는 내가 네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그러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그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에 의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것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리고 부활안에서 연합되는 것으로 이것만이 그리스도인이 승리의 삶을 사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 삶이야말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이요, 그분의 능력 있는 죽음이 실제가 되는 삶이다.
    한 그리스도인 부호에게 매우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은 아주 품위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 부자는 자기 아들의 미래와 성공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어렸을 때부터 죄 된 삶을 살던 한 소년이 집에 침입해와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며칠 동안 그 아들은 살아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의식을 회복했고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 했던 소년의 모습을 보고서는 그 앳된 모습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 아들은 이 소년을 죄악 된 삶에서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 죄 많은 소년을 집으로 데려오자는 아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소년을 양자로 맞아들여 아들의 형제로 삼기로 했다. 그는 때가 되면 상속을 받게 될 신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이들의 진지한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갖고 있던 악한 습관들은 너무도 뿌리가 깊었는지 그는 계속해서 악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결국 아버지는 더 이상 그를 도울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친 아들은 큰 실망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애를 썼고 그 소년에게 아낌없이 복을 베풀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그 소년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거기서 자기 아들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그림을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그 그림에는 누가 만진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 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 형님, 저는 형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형은 나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해 주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결코 착한 아이가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이 글을 읽은 아버지의 마음에는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한때 죄인이었던 자가 “선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의 노력은 결국 보상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열망한 적이 있는가? “오, 주님, 저는 당신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저에게 너무도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결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주님께 이렇게 고백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거쳤음을 믿기 바란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실을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단호한 믿음의 행위로 다가서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그분과 생명의 연합 관계에 놓으셨으며 그 연합이 실재로 체험되도록 하실 것을 신뢰하하. 당신의 생명을 그분의 생명 안에 던지시고 그분께서 당신의 생명, 당신의 빛, 당신의 승리, 당신의 모든 것이 되도록 하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지금도 살아 계신, 당신의 머리되신 분께서 하늘에 계심을 기억하라. 머리와 지체는 한 몸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와 여러분은 “그분의 뼈 중의 뼈”이다. 이 놀라운 연합을 온전히 붙들라. 당신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수학의 법칙이 무너지고 만다. 일반적으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하나 더하기 하나가 하나이다.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되리라”. 이 신비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것은 위대한 신비라. 다만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또한 그러하시니라”(고전12:12). “온전한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 둘 다를 포함한다”(어거스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나 자신을 둘로 여기는 순간 나는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실제로 관심과 섬김과 관점에 있어 즉 모든 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하나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두 개의 심장을 갖고 있으나 하나의 심장처럼” 박동하는 것이다.
    A.T.피어슨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 드신 경건한 어머니를 얼마 전에 잃은 한 경건한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40년간 저의 어머님의 마음은 늘 하늘에 가 있으셨어요.’ 그 순간 나는 골드 스미스의 아름다운 시구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운 모습으로 치솟은 높다란 절벽처럼
    계곡에서 떠오르다 도중에 폭풍우를 내려놓고
    구름은 그 가슴을 돌아 퍼져가지만
    영원한 햇빛은 그 머리위에 내려쬐네 ”
    지상에 있는 우리의 거주지는 찔레와 가시가운데 놓여 있고 우리의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영원한 햇빛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비추고 있다”는 사실로 자라난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져 있다”. 그분과 나는 하나이며 “그분의 어떠하심같이(저쪽 영광가운데 계심)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요일4:17)
    우리학교 졸업생이 보낸 편지에는 이 놀라운 진리가 잘 예시되어 있다. 여기에 그 일부를 인용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완성된 그 은혜에 의해 내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저는 늘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는 그런 신앙수준에 도달하고자 오랫동안 애써왔습니다. 저는 승리하는 삶을 간절히 원했지만 내가 애를 쓰면 쓸수록 나는 더욱 비참해졌습니다. 저는 기도와 순종과 결단과 서원을 통해 그와 같은 삶을 달성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허사였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의 행위로 죄의 능력으로부터 구원을 받고자 애를 썼던 것이지요. 왜 그처럼 어리석게 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일 때 오직 믿음을 통해 죄의 능력으로부터 해방된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금년 1월에 와서야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나 되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저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분에 의해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달려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나는 십자가로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속박을 결코 털어버릴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내가 십자가를 통해 죄의 능력을 물리치고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소용없었을 때 죽음이 나를 해방시켰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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