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경건의 양식

  • 경건의삶
  • 경건의 양식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제 4 장 십자가와 세상조회수 : 9086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7시 56분 12초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4 장 십자가와 세상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옛 고대 세계가 십자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십자가를 로마 시민 앞에 보이지 않도록 하고 그들의 생각과 눈과, 귀로부터 그 이름이 들리지 않도록 하라”. 이처럼 2000년 전에는 십자가에 관하여 아무런 영광의 후광도, 아름다운 역사적 연관서도, 영웅적 희생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어떠한가? 아무나 십자가를 들먹거리는 세상이 아닌가! 심지어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십자가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상한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사의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20세기말을 맞이한 오늘날도 십자가는 멸시의 대상일 뿐이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극심한 수치와 경멸의 장소가 되기를 그만두자마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셈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 당시에는 제자들은 범죄자들, 살인자들 및 반역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형틀로 행렬을 벌이며 가는 것을 자주 바라다보았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처형)은 너무도 악명 높고,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것이기에 옛 시대에 십자가에 대한 보편적이고 깊은 혐오감은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성경은 십자가에 대해 결정적인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라”(갈3:13). 이 말씀은 십자가가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해 가차없이 극에 달한 증오심을 표현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바로 십자가였다. 십자가에서 이 교만한 세상은 단번에 그들의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이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세상이여, 그리스도에 대해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내놓아 보거라! 이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외쳐댔다. “··· 처단하소서, 처단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소서”(요19:15). 친구여, 속지 말라. 비록 비수가 이 세상의 옷 밑에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비수는 여전히 있다.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니다. “한 시대 혹은 한 영혼 혹은 한 그룹의 영성을 참으로 측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이 ‘세상’이란 단어에 대해 얼마만한 혐오감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다”(D.M. Panton)는 이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리이다.
    “세상”이란 단어를 정의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성경은 “세상의 통치자”(요12:31)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풍조(course)”(엡2:2)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신”(고후4:4)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세상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반대(원수)되고(고전2:12), 이 “세상의 형체”(fashion)는 사라져간다. 또한 이 세상의 지혜는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전2:8).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고 말씀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세상은 이때 자연인의 삶과 전 과정을 말한다. 이 마지막 표현 즉 “세상에 있는 것들”(things)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이 책을 읽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혹시 단 한 가지라도 세상적인 것을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세상의 물건은 무엇인가? 당신은 아마 젊은이들이 춤과 쇼와, 연극을 사랑하는 것을 비난할지 모른다. 사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당신은 어떠한가? 정치, 예술, 과학, 돈, 야망, 사회적 인정, 혹은 사업에서의 영향력 등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은 젊은이, 중년, 그리고 노년에 따라서 그 내용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모두에게 치명적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죽였고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야망, 열정, 자랑, 인기, 쾌락 그 밖의 수많은 유혹거리들이 십자가와 모순되며 “아버지의 사랑”을 배제한다. 사도 요한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말라” 라든가 “세상을 지나치게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단순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선포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이 세상의 세 가지 뿌리를 정의내리고 있으며 이 세 가지는 전설에 등장하는 세 개의 금사과 이야기처럼 우리를 미혹한다(아틀란타는 이에 미혹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2:16). 이기적인 사람은 이 세 가지 형태의 욕망(정욕)으로 인해 만족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십자가에서 내려와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 육신을 애정과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하였느니라”(갈5:2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를 지배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분을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그러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정과 욕심들이 얼마나 우리 주위에 많은지! 그러나 이 세상의 영이 어찌나 교활하고 속임수에 뛰어난지 자연적인 타고난 지성으로는 그것을 포착해 낼 수가 없다. 그것은 너무도 유혹적인 마술 같고, 마법같이, 우리마음을 쉽게 사로잡는다. 이 세상적 사고방식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의 종교생활의 체질 깊숙이 그 암세포의 뿌리를 심어놓았다. 그것은 마치 치명적인 문둥병이면서도 고통을 동반하지 않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뼈를 갉아먹는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집의 뼈대를 먹어 치워버릴 하얀 개미와 같다. 그것은 바로 지성숭배주의의 온상이요, 현대주의의 시녀이다. 그것은 속에서부터 도려 나오는 스파이로서 십자가의 영을 쫒아 내버려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다.
    J. Gregory Mantle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몇 년 전에 천연 자석인 한 산에 대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산은 엄청난 흡인력을 가지고서 그 영향력 범위 내에 들어오는 모든 쇳조각을 엄청난 힘으로 끌어당겼습니다. 그 지역의 연안을 항해하는 배들은 닻과 체인 그리고 쇠로된 막대기들이 이끌리는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산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거의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약간 기울어짐을 느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흡인력은 점점 더 커져서 결국 엄청난 속도의 증가로 배는 점점 더 산 쪽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배의 모든 볼트와 못이 배의 기둥과 갑판에서 빠져나가 산에 달라붙고 말았고 결국 배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파선하고 말았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를 바위로 이끌고 가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간증을 파괴시키는 교묘한 형태의 세상적인 것들 몇 가지를 제시해 보도록 하자. 세상적인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의 찡그린 모습에 대한 두려움, 반면에 세상 사람들의 호의와 아첨은 얼마나 달콤한지! “시간을 사서 얻는” 대신 보잘것없는 취미에 허비해 버리는 부당한 사간들! 우리는 때로 이것을 휴식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상당히 세상적인 것들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잃어버린 사람에게 “복음”을 줄 수도 있는 그때에 세상뉴스에 느슨한 마음을 지닌 채로 동참하는 우리의 느긋함. 사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들로서 고난을 견뎌내기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의 부드럽고 작은 “세상”이 우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 늦게 야식을 먹으며 허영에 찬 농담을 늘어놓고 싶은 욕구, 이것 때문에 우리는 다음날 아침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데 필요한 시간을 낭비해버린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전신갑주를 입지 못한 채로 세상을 만나러 나갈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비밀스러운 내적인 세속성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며, 개인의 선택으로 결정해 버리는 많은 것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성경적 원칙이 아닌 대중의 의견, 혹은 어쩌면 종교적 의견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것 저것을 용납해 버리는지!(비록 그것이 악의가 없거나 혹은 사랑스러운 것일지라도) 그렇게 되면 세상이 쉽게 틈을 탈 수가 있게 된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당하는 것을 얼마나 적게 특전으로 여기는지!
    -어떤 세상적인 편안함들로부터 오는 커다란 만족감을 얼마나 우리는 기대하고 있는지!
    -우리는 좋은 것들과 화려한 것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그러한 것들을 포기하기를 우리는 얼마나 꺼려하는지!
    -우리는 괴짜로 보이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우리는 얼마나 쉽게 유행에 무릎을 꿇는지! 그 스타일이 합리적이거나 옳거나 혹은 품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유행이기 때문에 따르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그런데 종종 유행은 비합리적이고 품위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너무도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다르게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품위 없이 보이기를 원한다. 욕망이라는 옛 임금이 “그것을 하라”고 말하자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백부장의 종이 채찍이 무서워 순종하듯이 순종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자신을 처리할 때까지는 거짓교리, 현대주의적인 사역, 가련한 교회치리, 혹은 교회 안에서의 부패한 실행들에 대해 놀랄 필요가 없다. 우리가 파산하는 모든 뿌리는 세상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William Law는 이렇게 잘 표현하였다. “이단들 중의 이단은 세상적인 영이다. 오늘날 기독교회들의 타락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는 그 모든 것을 세상적인 영에서 비롯된다고 말해야만 할 것같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텔레그램으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