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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제 3 장 죄에 대한 승리조회수 : 9248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7시 57분 39초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3 장 죄에 대한 승리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에게 있어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는 사실 즉 죽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죄들은 영원한 죽음에 처해져야 마땅하나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도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말고는 실로 죽은 사람인 것이다. 그분께서는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벧전2:24). 나는 “죄 가운데 죽거나” 아니면 “죄에 대해 죽어야만”하는 존재이다. 나는 아담 안에서는 잃어버린바 된 존재이며 “죄 가운데서” 죽은 자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면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존재이다. 내 죄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내가 받아들였다면 나는 내 자신이 죄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받아들여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죄에 대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십자가에 맡겨진 인생이다. 그 외의 다른 입장을 취한다면 나는 수치스러운 도덕적 모순 가운데 빠진 것이다. 나의 논리적인 위치는 죽음의 위치이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계적인 일도 아니고 법적인 픽션도 아니다. 나는 실제로 사실적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성경의 진리가 그러한 것처럼 이 사실은 나의 마음의 동의를 요구한다.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내 안에 사신다”는 사실은 영광스러운 진리이다. 만약 내가 구원받았다면 이 진리는 더 이상 냉랭하고 생명이 없는 그러한 “여김”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아멘”을 요구하는 진리이다. 내가 그분께서 내 안에 내주하심을 깨닫기 위해 나는 내 자신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길 것을 명령받았다. 이 “여김”은 단순이 믿는 척 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지 않은 사실을 믿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여김”은 일상적으로 이해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살아 있는 믿음을 말한다.
    “여김”(reckon)이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포기(self-renunciation)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여김은 우리가 “자아”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으로 나의 옛 삶을 포기해야 한다. 갈보리의 십자가와 그분의 죽음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음을 근거로 해서 나는 나의 자아가 나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추악한 괴물인 자아에 의해 지배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되느냐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은 그 중심부에 “그러나 내가 아니오”라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내 길을 여전히 고집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자아는 보좌에서 물러나야만 한다. 나는 실로 생명의 새로움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내 옛 생명을 벗어버린다는 근거 하에 가능하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포기하는 심연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셨다면 나도 나의 옛 자아를 그분의 비참한 상태와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만 한다. 사무엘 러더포드의 고백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손을 모아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복종과 결의에 찬 아멘을 받으시도록” 하자. 우리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자아를 포기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것이 주로 가족 안에서 혹은 직장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순복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가정에서의 사역(Home missions)도 좋고 해외 선교(Foreign missions)는 더 좋지만 순복(submissions)은 가장 좋다(해외에서든지 가정에서든지 다른 사람에게 순복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훈련이다). 남편의 엄청난 성질에 순복함으로써 실질적인 승리를 쟁취하는 여자들도 있고 아내들의 바가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승리하는 남자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핸디캡이나 약점을 받아들임으로써 승리를 얻는다. 우리는 흔히 이와 같이 실제적인 복종을 통해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이때 우리의 자아가 포기되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포기 없이 “여기는 것”은 그저 믿는 체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요, 더욱 스스로 애쓰는 것이므로 아무 것도 아니다.
    “여김”은 또한 죄의 거부를 포함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 자신을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로··· 여기라”.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러므로 죄가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말대로 우리는 죄가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이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었고 죽음을 통과하여 죄의 지배 저쪽으로 부활하였기 때문에 죄가 군림하도록 내버려둘 필요가 한층 더 없다. 죄는 그리스도와(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연합된 자들 위에는 요구사항이 없으며 따라서 자신을 성령께 온전히 굴복하는 자들 위에는 “군림할 수”가 없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롬8:2). 그러나 우리가 성령과 어떤 논쟁이라도 갖게 된다면 우리는 죄의 지배를 피할 수가 없다. 이에 관해서 하나님의 영은 분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성경 역시 확고하다. “실족하는” 지체는 사망에 처해져야 한다. 이것을 소중히 여기거나 심지어는 이를 놓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 물론 복을 위해 기도하고 정결한 마음을 위해 울부짖는 것은 실로 좋은 일이나 하나님께서 “끊어버리라” 그리고 “뽑아버리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런 식의 행동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모든 악으로부터 끊으셨다. 그분께서는 이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제는 네가 죄와 관계를 끊을 차례니 죄가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나님과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 그러한 양심을 갖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나는 내 자신을 낮추고 “공개적인 수치”에 내 자신을 맡겨야 했었는가?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동료, 혹은 나의 주일학교 수업, 혹은 나의 교회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체험할 수 있다. 나는 아무도 불쾌하게 하지 않았으며 성령께서 그러한 상황에서 나로 하여금 그분께 복종케 하시기 위해 나에게 간청하신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해서 무시당하셨고, 자원해서 내게서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모든 교만을 소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경멸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 스스로를 낮추도록 하자. 만약 내가 내 죄를 수치스러운 위치에 놓지 않는다면, 그 죄를 없애기 위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모든 것을 끊을 수 있는 갈보리의 능력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나는 십자가와 아무런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은 셈이다. 죄의 고백은 죄의 거부를 의미한다. 우리가 십자가와 조화를 이룰 때만이 죄의 능력은 부서진다. 그러나 십자가는 숨기는 곳이나 죄를 덮어버리는 곳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죄와 관계를 끊고 죄를 드러내는 곳이며 죄책을 담당하는 곳이요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장소이다.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십자가의 모든 결과를 따르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나에게서 죄를 제거하시려고 죽으셨다면 죄를 붙들고 있기보다는 죽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를 제거 할 만큼 죄에 대해 충분히 싫증내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죄로 가득한 우리 자신이 “죽음에 이르도록 싫증”이 날 때까지, 죄에 굴복하고, 피 흘리고, 우리의 쇠사슬을 껴안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표리부동함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하며 이중적인 마음을 내던져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질투가 많은 연인이시다. 그분께서는 모든 성도가 다 해방 받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당신을 위해 생성된 능력을 맛보도록 하시기 위해서라면 당신을 수치와 절망으로 몰아가는 데 주저하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은 주님의 이러한 교훈을 순종을 통해 그분의 친절로 배우든지, 불순종으로 인해 그분의 징계에 의해 배우든지 간에 어쨌든 배워야만 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칼이 당신을 죄와 자아에 묶고 있는 모든 묶음을 하나하나 끊어내실 것이다. 부, 건강, 친구 등도 당신으로부터 그 칼에 의해 끊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당신의 내적인 자아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당신의 기쁨도 떠나가 버릴 것이다. 안팎으로 얻어맞고, 깎이고, 불타고, 분쇄되고 나서야 당신은 비로소 “무시무시한 침례” 가운데서 당신만을 위해 살아가던 죄악된 모순으로부터 드디어 해방될지도 모른다. 그때서야 당신은 비로소 갈보리의 십자가의 승리와 파멸에게 자아를 내어놓을 준비가 될 것이다(준비가 되다 혹은 각오가 되다 라는 표현이야말로 축복된 말이 아닐 수 없다. - 이것은 어쩌면 “달콤한 강요”일 것이다). 오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능력이여! 어떻게 우리가 이 능력을 대항하여 지탱할 수 있겠는가? 갈보리에서 생성된 모든 능력이 이제 당신의 손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F.J. Huegel은 그의 책 “그의 뼈 중의 뼈”(Bone of His Bone)에서 라듐과의 접촉이 불가피한 연구소(실험실)에 고용된 젊은 여성의 이상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여인들은 그 공장에 들어가자 자신들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죽을 것이다. 그녀들은 얼마 간의 기간이 지나자 만 달러씩을 보상으로 받고 그 실험실에서 나오게 되었다. 의사들은 라듐과 접촉하며 일했던 소녀들을 검사하였고 X레이에 의해 생명을 소멸시키는 이상한 불이 그녀들의 뼈에서 불타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엄청나게 집중된 힘이 그 여자들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훨씬 더 집중된 힘이 갈보리에서 발생했다. 저 하늘의 라듐이 인간의 죄와 수치라고 하는 커다란 암 덩어리 위에 집중되었다. 라듐은 죽이는 일을 한다. 하늘 아래 이 집중된 힘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없다. “십자가는 죽이는 일을 한다. 자신을 갈보리에 노출시킨 사람은 곧바로 숨겨진 어떤 불이 그의 뼈 안에서 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 그렇다면 이 엄청난 힘에 대해 내편에서 제한을 두지 말도록 하자. 죽음을 다루고, 생명을 주며, 치료하는 광선이 나의 가장 은밀한 삶에 침투하여서 그 숨겨진 불이 나의 가장 깊은 존재의 모든 뼈들 안에서 타오르도록 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라듐이 계속해서 내 안에서 적용되도록 하자. 이것은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치료법에 내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되고 가식적인 자아에 진실로 지쳤다면 - 만약 나의 마음이 해방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갈망”으로 타오르고 있다면 - 나의 영혼이 생명수의 샘을 마시고자 갈증을 일으키고 있다면, 갈보리의 충만한 메시지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의 충만함으로 당신에게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기쁨으로 거듭 거듭 말하노니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래서 지금 현재 못 박혀있고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자 안에서도 그분이 사신다) 그분께서 부활의 삶(자신의 죽음) 즉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사는 그러한 삶을 사시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죽음은
    그분의 죽음으로 내 것으로 여겨진다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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