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2 장 죄에 대한 승리 비결
한 사병이 상관에게 “제가 포로를 잡았습니다”라고 보고를 했다. 그의 상관은 그에게 “포로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 병사는 “그가 안 오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장교는 “그렇다면 너만 오라”고 다시 명령했다. 그러자 그 병사는 “저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 포로가 저를 못 가게 하거든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죄에 대한 승리의 삶에 있어 이 병사와 같은 꼴이 아닌가 싶어 매우 안타깝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죄의 능력(권능)으로 부터는 어떠한가?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가? 혹시 칭의라고 하는 진리 주변을 맴돌면서 마냥 서성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만 흥얼대면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법적으로 안전을 보장받기위한 칭의만 쟁취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삶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건전한 수준까지 와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포 받은 것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대다수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의롭게 된 후에는 우리자신을 위해 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하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불안하고 동요된 양심은 자주 우리자신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사실로 우리를 괴롭히곤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법적인 위치를 내세워 이미 의롭게 된 사실에 만족해 하곤 한다. 우리는 이미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변호인이 있으니 곧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는 말씀을 잘못 사용해 왔고 또 남용해 왔다(물론 이 말씀 자체는 축복된 진리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진부하고 패배로 가득 찬 그리스도인의 삶 즉 상습적으로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도록 이미 마음을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구원의 대장되시는 분께서 우리로 넉넉히 승리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시며 모든 곳에서 승리를 쟁취하며 포로를 사로잡기를 기대하고 있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삶을 순종에게로 이끌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때 대장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너 혼자만이라도 오라” 그러나 내주하고 있는 죄악된 자아는 “나를 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완벽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 공포에 떨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이 두려워하는 데에는 아주 근거가 없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독자 여러분에게 A.J. 고든 박사의 현명한 충고를 묵상하도록 제안한다.
“성경에 계시된 영적 진리는 자주 두 가지 극단적 주장 사이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죄 없는 완벽한 삶이라는 교리를 이단이라고 부른다면 죄로 물든 불완전한 삶에 만족하는 것은 더 큰 이단이라고 불러야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요일1:8)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낮은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정당화 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거룩하게 되고자하는 열망으로 성화의 가능성을 과장되게 말하는 것이 습관적인 거룩치 못함에 “기분 좋게” 만족하고 있으면서 성화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인 완벽주의자에게 돌을 던지면서 세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본다는 것은 결코 믿음을 세우고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6:1,2).
혹시 독자 여러분 자신은 포로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자아와 내주하고 있는 죄의 희생물 즉 노예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는 아닌가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며 모든 일에 있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은 바울처럼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당신은 깨어 기도했다. 당신은 죄와 싸웠고 자아와 투쟁도 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하는 당신의 노력이 소용없다는 사실에 여러 번 울었다. 어쩌면 당신은 밤새도록 기도하려고 애썼을지도 모르고 “축복을 얻기 위해” “밤새” 기도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당신의 내적인 악에 대해 불쾌해했고, 부끄러워했으며 몰래 울었던가! 그러나 이러한 고뇌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결심들은 한 가닥 가느다란 끈처럼 끊어지고 마는 것을 수차 경험했을 것이다. 자아는 결코 자아를 내쫓을 수 없다. 당신은 이제 죄에 대한 싸움에 있어 점점 더 나약해져가고 있다. 심지어는 당신의 믿음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죄를 포로로 “잡고자 할 때”, 그리하여 그를 데려와 감옥에 넣고 그의 자유를 제거하고자 할 때 당신은 실상 당신 자신이 포로임을 발견하게 된다. 죄와 자아는 당신의 삶 전체에 있어 실제적인 통치자가 되어 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패배인가? 자아의 노력은 실로 어리석고 무용하다! 그러나 여기에 구원의 손길이 있다. 믿음은 종종 절망 가운데서 태어나는 법이다. 우리가 보기에도 지나치게 죄악된 상태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바울처럼 마음을 찢는 고백을 할 것이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낼 것인가?”(롬7:24)
하나님은 계단이 없는 망대시라.
그분의 완전함은 절망을 사랑하네. 무엇이 문제인가? 도대체 왜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근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 승리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을 놓쳐버렸다. James H. McEonkey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초를 깊은 곳에 놓으신다. 죄에 대한 승리는 죽음이라는 깊은 곳에 놓여 있다.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가르치실 때 단 한 문장(간단하고, 충격적이며, 생생한 문장), “죄에게 죽었음”으로 하신다.”
로마서 6장에서 성령께서는 죄에 대한 죽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죄에게 죽은”(2절), “죄에게 단번에 죽으심”(10절),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요”(11절). 우리는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for sins) 죽으신 것뿐 아니라 “죄에게”(unto sin) 죽으셨음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을 때”(고후5:21)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을 철저히 요구하셨다. 그 형벌은 다름 아닌 죽음이었다. 죽음으로 죄의 능력과 형벌은 끝이 났다. 죄의 능력도 죄의 요구도 죽음과 더불어 끝나버린 것이다. 이에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롬6:14)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에게 죽으셨다. 이제 그분께서는 죄가 손댈 수 없고 다가설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원히 살고 계신다. 바울은 이렇게 묻고 있다.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게 죽은 우리가 어떻게 더 이상 그 가운데 살겠느냐?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롬6:1-3). 바울은 우리가 실제로 죽었다고 말하거나 우리가 문자적으로 “죄에게 죽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되는 바를 말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죄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는 성령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다시 말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분과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같은 인간이 되셨을 때 (그렇지 않고서는 그분께서 내 죄의 대가를 담당할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신 것이다. 나는 그분과 일치되었다. 그분께서는 나를 자신과 함께 죽음 안으로 데리고 갔으며 그분의 죽으심은 곧 죄에 대한 나의 죽음이 된 것이다. 그분께서는 나를 십자가를 통과해서 무덤으로 데려가셨다가 죄의 지배가 미칠 수 없고 죄의 능력을 초월하는 무덤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오셨다. 바로 이것이 위대한 기초이다. 성령께서는 당신과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너와 같이 인간이 되셔서 너를 그분께 묶으신 채로(즉 너의 인성 안에 놓아지셔서) 너를 죽음으로 데리고 갔고 죽음으로부터 영광스러운 부활과 죄의 지배로 부터의 자유함으로 이끌어 오셨다. 이 사실을 깨달으라”. 우리의 느낌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이 위대한 사실 즉 죽음과 부활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을 믿어야한다(사실로 여겨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요,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는 산 자로 여기라”(롬6:11). 바울은 죄가 당신에 대해 죽었다고 여기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유의하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승리를 이룩하시는 방법은 죄악된 욕망을 억제함으로써가 아니고 옛 성품을 제거함으로써도 아니며 원죄를 깨끗케 씻으심으로써도 아니다. 하나님의 승리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음 즉 죽음을 통해서이다. 내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여기는 것과 죄가 나에게 죽었다고 여기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자신의 노력, 투쟁, 혹은 축복, 믿어 보려는 마음 등을 통해 죄가 나에게 죽은 것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죄로부터 해방 받고자 한다면 당신의 실제 생명이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당신이 죄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한다.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분 안에 있다는 사실은 “죄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믿으면 된다. 결코 감정을 염려하지 말라. 어떤 특정한 죄가 당신에게 다가올 때마다 당신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죄에 대해 죽었다”라고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이 세상이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면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이 나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게 그러하니라”(갈6:14)라는 사실을 믿으면 된다. 만약 교만 즉 자만이 다가오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는 말씀을 믿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나는 내 자신을 위해 살아서도 안 되고 살 필요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이기적인 교만과 자만심과 스스로를 높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두 젊은 그리스도인 여성이 파티에 초대를 받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가 참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주에 이미 죽었거든요”. 바로 이것이다. 우리 모두도 이렇게 대답해야만 한다. 두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전 주에 침례로 신앙을 간증했다. 그들은 죽었고,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 사람이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윌리엄 황제는 독일계 미국인의 알현 요청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황제는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인이 미국으로 귀환했으면 미국인이 된 것이다. 나는 미국인도 알고, 독일인도 알지만 독일계 미국인은 모른다”라고 선언하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나도 한 때는 아담의 속박 안에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십자가가 나를 죽여 옛 시민권과 생활로부터 나를 잘라내 버린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담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신분을 지닌 채 나의 왕 되신 분을 알현하려고 하면 그분은 거절하신다. 이런 상태로는 옛 사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 받을 수 없다. 더 이상 거룩하지 못한 이중적인 신분을 집어 던지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한 존재임을 선포하자. “죄에게는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하나님께는 산 자”(롬6:11)로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바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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