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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부드러움/모든 것을 수용하는 친절한 태도 조회수 : 9863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16분 42초
  • 성령의 열매: 부드러움/모든 것을 수용하는 친절한 태도
     
    우리는 지금까지 성령의 열매에 관해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메시지를 읽지(듣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그분들은 다음 사실을 꼭 명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란 하나님께서 거듭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통해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으로 하나님께 속한 속성들이요 성품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성품은 그 누구에게도 저절로 생길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만약 당신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저는 사랑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이 합당할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거듭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한다면 핑계일 뿐이며 그것도 아주 나쁜 핑계에 불과합니다.
    만약 당신이 “저는 그리 기뻐하는 성격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 당신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면야 우리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겠지만 당신이 새로운 출생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 역시 나쁜 핑계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열매(단수)란 하나님의 자녀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께서 생산해 내시는 “산물”입니다. 우리는 독립침례교회에 소속된 근본주의자요, 성경을 믿는 자로서 그동안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실상은 우리의 육신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애쓰느라 우리 생의 대부분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이 대부분은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들도 해낼 수 있는 종교적 의무이거나 “하나님의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성령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여 차례의 공부를 통해 우리가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각을 여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이러한 육신적 종교 활동 그 이상의 것임을 보여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아담의 육신적 성품으로 애를 써서 하나님을 섬겨보려는 것이 대다수 그리스도인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섬김에는 성령께서 개입하신 흔적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태도와 행동을 통제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우리를 통해 살아내심으로 우리는 복된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갈 5:22, 25).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하시고자 하는바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당신의 말씀을 대할 때 저희를 점검해 주소서.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당신을 필요로 하는지 보여 주소서.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은 부드러움(gentleness)에 대해 살펴보면서 동시에 선하심(goodness)과 믿음(faith)을 건너뛰어 온유함(meekness)도 함께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이는 이 두 가지(부드러움과 온유함)는 성경에서 늘 함께 거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헌신되고 주님을 뜨겁게 섬기는 귀한 주의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남자답게 용기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는 용감함보다는 경건함(하나님다움, godliness)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을 뜨겁게 섬기기는 하나 육신적 성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주의 종들을 대할 때, 그들이 주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증오, 악의, 세속적 행동, 폭력, 분노 및 형제들을 거칠게 대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정당화시켜 주고 눈감아 주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를 섬기기 때문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제가 살아온 동안 만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레스터 롤로프(Lester Roloff)라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그분의 발끝만치도 못됩니다. 저보다는 백배나 훌륭한 분이시지요. 그러나 그분은 음식에 관한한 비성경적 입장을 취하셨는데 그것은 사탄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분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마틴 루터같은 위대한 주의 종도 맥주를 마셨다는 핑계로 맥주 마시는 것을 그렇게 합리화해 버리면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성령의 열매의 특성은 부드러움과 온유함입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제 안에서 이 두 가지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것들은 여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영적인 사람이 되기보다 사내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더 이상 오늘 메시지를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당신을 내어 맡기기보다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면 오늘 메시지는 안 듣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만약 성령님께서 제가 부드럽고 온유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리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계집아이 같다고 놀리거나 유약하다고 조롱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성품의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오늘 메시지는 “남성답고”, “용감하고”, “담대한” 주의 종들에게 특별한 메시지가 될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gentle)이란 단어의 뜻은 “친절하다”(kind)입니다. 남자라고 해서 친절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예의바른 것은 죄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친절과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은 입장이나 방식에 있어 친구처럼(friendly) 대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아무도 당신과 어울릴 수 없고 당신도 아무와 어울릴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너무도 영적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고로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 못한다거나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당신이 육신적이어서 당신의 자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당신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면 회개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은 또한 온유하고(meek), 온화하며(moderate), 엄하지 않고(not severe), 과격하지 않으며(not violent) 오히려 예의바르다(courteous)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사람이 부드러운 사람(gentle-man, 젠틀맨)인지 아시지요? 훌륭하게 태어나 훌륭한 가문에 속한 사람이 젠틀맨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듭났다면 당신은 젠틀맨(부드러운 사람)이 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거듭남이 훌륭한 출생이라면 당신은 당연히 좋은 가문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출생과 훌륭한 가문을 갖춘 우리는 당연히 부드러운 사람(gentle man)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거듭나기 전에 어떤 기질과 어떤 성정을 지녔던지 간에 일단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면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다정한(friendly)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하십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거칠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을지 모르나 거듭난 사람이라면 온화한 성품을 지녀야 합니다. 엄하거나 거만하지 않고 오히려 예의바른(courteous)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몇 가지 구절들을 보여드린 후 온유(meekness)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고린도후서 10장과 디도서 3장, 그리고 디모데후서 2장을 보십시다. 사실 저는 구원받지 못한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에 대해 점점 더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게 끝까지 대해 준다는 것은 정말 힘이 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통제하셔서 저로 세상의 형상에 일치하지 않도록 지켜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는 자들과 꾸준히 착실하게 교제를 갖는다면(하나님께서는 그리하기를 원하시지요) 아마 얼마 안 가서 여러분과 교제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친구처럼 대해 준다는 것이 여러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여러분에게 지속적으로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친구처럼 대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다는 것을 느낄 테니까요.
    육신과 육신끼리 마주하게 되고 육신적 성품과 육신적 성품끼리 부데끼다 보면 때로는 친절하게 대하지 못할 수도 있고 거칠게 대하거나 서로 반목이 생기기도 합니다. 교제하면서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는 행동이나 말이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예로써 어떤 사람이 당신의 주차장소에 주차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의 좌석을 차지해 버리기도 하지요. 어떤 사람은 당신의 성경을 한쪽으로 치워 버리기도 합니다. 때론 지나친 농담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하고 친구처럼 대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지 않으면 그 교제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가운데 있으면 비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해 담대하지만
    여기를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부드러움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성령의 열매가 온유함과 부드러움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영적 아기들에게 편지를 쓸 때 다름 아닌 바로 이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서 대했습니다. 고린도의 어린 아이들이 하는 그 어떤 유치한 행동도 바울로 하여금 그들에게 온유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지 못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직선적으로 할 말은 했고 틀린 것을 틀렸다고 정확하게 지적했지만 그들을 잘못 대하거나 악한 감정을 품고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바울을 그리스도처럼 되도록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움과 온유함이 이곳에서도 동시에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자, 이번에는 디도서를 보십시오. 3장 1절과 2절입니다.
    1 그들이 명심하여 정사들과 권능들에게 복종하며 행정관들에게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
    여기에도 두 성품이 나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온유를 보이고 부드럽게 대하라고 했지요? “모든 사람”에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럽다(gentle)는 말은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친구처럼 대하며 항상 받아주는 자세를 갖춘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고 형제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습니다. 거칠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는 사람들로 우리 말을 듣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무관심한지 모르세요?”라고 말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친절해야 합니다. “콧방귀도 안 뀌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잘 대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이니까요. 우리는 지금 육신적인 자들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나오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하시기 원하시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온유와 부드러움이 연관되어 있는 다음 구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4절과 25절입니다.
    24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25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여기 보니 우리가 온유하게 대해야 할 대상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잘못된, 형편없는 자들입니다. 25절과 26절을 보십시오.
    25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26 이것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부터 자신을 되찾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마귀의 올무에 걸려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아주 잘못된 자에게 우리는 예의를 갖추어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들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고, 품위 있게 대해 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마저 잘못 행동하면 둘 다 마귀를 섬기게 되는 꼴이 됩니다. 당연히 올바른 사람이 잘못된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만약 올바른 사람이 잘못된 사람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잘못된 방식으로 행동해 버리면, 그야말로 둘 다 엉망이 되어버리는 셈이지요. 누가 부드럽지 못한 사람일까요? 자기 의에 가득 찬, 자기 중심적이고 자만심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온유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 밑에 꿇어 엎드려 우리가 누구인지, 누가 어떻게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어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지를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조금은 더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앞서 부드러움과 온유함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온유란 그저 겁먹은 토끼처럼 조심조심,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모세였다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실상 모세는 백오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금송아지 가루를 뿌린 주스를 마시게 한 사람입니다. 상당히 터프한 사람이었죠. 그러나 그는 온유하였습니다.
    사실 온유(meek)란 단어는 굉장히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스위스어로는 MIUK이고 덴마크어로는 MYG, 그리고 스페인어로는 MEGO, 포르투갈어로는 MEIGO인데 이 단어들의 첫 번째 의미는 한결같이 “흐르는 액체”라는 뜻입니다. 잠시 후에 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드리지요. 온유하다는 것은 성질이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쉽게 화를 안 내고, 짜증을 안 내는 것을 말합니다. 상처를 받을 때도 잘 참아내는 것이요, 겸손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하나님의 경륜(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제가 만약 돌을 집어 벽에다 내던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되시지요? 그 벽에 돌 자국이 남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벽은 온유(meek)하지 못하니까요. 제가 또 다시 돌 하나를 집어 들어 유리 창문에다 던져보면 깨지거나 금이 가거나 할 겁니다. 왜냐하면 유리 창문 역시 온유하지 못하니까요. 그러나 제가 돌을 집어 연못이나 흐르는 시냇물에다 던져 보면 잠시 후 물은 전혀 변함없는 그대로의 상태가 될 겁니다. 상처를 입히려 하나 손상이 남지 않는 상태, 가격을 해도 변하지 않고 원상복구 되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온유입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께 온유하다면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어떤 일을 허락하시더라도 잠시 동안은 상처가 될지 모르나 곧 바로 원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깊은 상흔이 남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온유하다면, 당신이 제게 상처를 입히거나, 화를 내게 만들거나, 낙심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마음에 그 어떤 자국도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관계가 파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다시 원상복구가 될 겁니다.
    왜 우리는 불평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을까요? 왜 형제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결혼생활이 깨지는 것일까요? 왜 깨어진 인간관계가 회복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모두가 다 우리가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입은 상처를 삼켜버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온유함으로 복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 형제들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 그것은 다름 아닌 온유함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이기에 우리가 성령님께 온전히 내어드리지 않으면 열매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온유란 성질이 온순하고, 부드럽고, 쉽게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고, 상처를 입었으나 잘 참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온유에 대해 다음번 설교에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도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형제로부터 상처를 입고 나의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우편함을 매일 열어보는데 그때마다 그 편지들을 개봉하기 전 꼭 기도합니다. 아니 기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두 종류의 편지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저를 추켜세우는 내용들이 들어 있는 것들로 때론 이것들이 제 마음에 흔적을 남겨 저를 해치고 저로 하나님께 대한 순복과 의지를 내려놓고 무엇인가 된 것처럼 우쭐하게 만듭니다.
    또 한 종류는 제가 일곱 배나 더 뜨거운 지옥에서 불타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편지를 뜯어 보기 전에 기도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으면 “너도 마찬가지야. 아니 더 뜨거운 지옥에 갈 거다.”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입니다. 누군가가 육신 가운데서 저를 육신적으로 만들려고 할 때, 기도 없이는 곧바로 말려들고 맙니다. 어떤 자들은 자기 신분도 밝히지 않은 채 그런 편지를 보냅니다. 제게는 도대체 어느 녀석이 그 따위 짓을 했는지 알아내려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 우편인이 찍혔는지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 자가 누구인지 다 아시고 그 자가 무슨 문제를 갖고 있는지도 다 아시는데 제가 그 자가 누구인지 알아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길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편지는 저의 아담의 성품만 들추어 내고 말 겁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성령 안에서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도 내 마음에 가득 찼던 기쁨과 평안을 한 순간에 앗아가 버리니 실로 대단한 위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받았으나 이런 편지 몇 통으로 마치 구원받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렇게 쉽게 그렇게 빨리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다니… 우리 모두 매 순간마다 겸손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저는 창피하고 또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런 일들이 저를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더 이상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피우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물론 감사할 일입니다. 간음과 마약과 술로부터 해방된 것도 너무너무 감사할 일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더 이상 성질을 안 부리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저의 부드러움을 간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저의 온유가 지속되게 해 주셔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찬양을 드리고 계신지요. 실은 성령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 일을 하시기 원하십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치유프로그램을 통해 마약과 술을 끊도록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독된 여인들도 치유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질을 잃지 않고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야고보서 3장 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지식을 갖추고 지혜로운 자가 누구냐? 그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자신의 행위를 보일지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가 돌아다니며 제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이 온유함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며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요, 땅에 속한 것으로 관능(官能)적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이니
    여길 보니 땅에 속한 지혜, 관능적 지혜가 나오지요. 이것들은 아담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성정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갖게 되는 특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성품과 인격 안에서 죄가 부지런히 오랫동안 일해 온 결과 인간의 모습은 실로 마귀적이 되고 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시기와 다툼과 쓴뿌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아직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부드러우(gentle)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온유하셨습니다. 비록 얼마간의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있다손 치더라도 예수님 같은 모습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지요. 야고보서 3장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러우며 부드럽고 간청을 잘 들어주며…
    여기 끝부분을 보니 부드러움 다음에 “간청을 잘 들어주며”(easy to be intreated)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온유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것이 우리의 인격 문제와 인간 관계를 배제한 채 그대로 있다면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거짓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의바르게 행동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죄와 의와 생활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다 알고 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선하게 대해 주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8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이 나오며 시편 2편 12절에도 아들의 진노가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 그 어디를 살펴보아도 성령의 진노란 말은 없습니다. 참으로 기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성경이 우리에게 명하기를 “성령 안에서 걸으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안에서 걸으라든가 아들 안에서 걸으란 명령은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진노하십니다. 우리의 맏형 되시는 아들께서도 진노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위로자 되시는 성령님께는 진노가 없습니다.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제게 큰 축복이 되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공산국가에 한 여자가 살았는데 그녀는 지하교회의 비밀예배에 참석하려고 가다가 공안당국의 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총부리를 겨누고 어디 가느냐고 묻는 경찰에게 그녀는 순간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 집에 가는 중입니다. 큰 오빠께서 돌아가셔서 그분의 유언을 들으러 가는 중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 경찰은 그녀를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의 큰형님(elder brother, 큰오빠)의 유언(New Testament, 신약),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는 중이니 말 그대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과 저도 그분의 유언(Testament)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그분의 유언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향하여 부드럽고 온유하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7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너희 가운데서 부드러운 자가 되었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다정하게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혼까지도 너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소중하였기 때문이라.
    여기를 보니 바울이 자신을 유모에다 비유했군요. 저런,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피식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용맹스런 주의 군사인데 ‘유모’라니…” 어쩌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장 남자답게 영적 싸움을 싸웠던 남자 중의 남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은 돌로 맞기를 수차례, 수많은 박해에도 아랑곳없이 담대했었습니다. 이와 다르게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 8절 말씀을 보니 그는 너무도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어린 아들, 딸처럼 자상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해치거나 부서뜨리기 윈치 않았으며 바울은 그들이 불쾌해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사랑스러운 관계를 굳게 세워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부드러움과 온유가 부족한 것 때문에 복음이 막혀버린 여러 경우들을 알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형제가 자기 부인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애쓰던 중 어느 찬양집회에 데려가게 되었는데 두 사람 다 청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집회 중에 설교자가 “하나님의 집에서 청바지를 입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라고 소리치며 설교하고 말았습니다. 이 부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이 부부는 그 이후로 교회에 발을 끊고 말았습니다. 이런 예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올바르게 진리를 선포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 여러분의 사랑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런 성과가 없을 것입니다. 책망도 하시고 권면도 하십시오. 말씀대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 여러분의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런 성과가 없습니다. 바울의 성공 비결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직접 우리에 관하여 보여 주되 우리가 어떤 식으로 너희에게 들어갔는지 또 너희가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에 의하면 “그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한 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보여준 삶의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크게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2장 7절과 8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7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너희 가운데서 부드러운 자가 되었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다정하게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혼까지도 너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소중하였기 때문이라.
    바울은 부드러웠고 유모처럼 사랑스럽게 그의 영적 자녀들을 대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종종 성경강연회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초청받은 사람들이 2, 3일 또는 3, 4일 정도 말씀을 들은 후 그 다음 주에도 다시 교회에 찾아오는 것은 성경강연회에서 들은 말씀보다는 이곳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이슈, 성경적 기준, 도덕적 원칙 등도 물론 다루어져야 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가슴에 새기는 것은 그 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사랑과 관심입니다. 오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는 태도로 대접을 받았는데 그 교회를 다시 오겠습니까?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까? 그것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그분께서는 그 어떤 말씀이라도(때론 어려운 것까지도)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저를 지적할 수도 있고, 꾸중할 수도 있고,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하는 동기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근본주의 또는 성경만을 신뢰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들고 “이것이 옳고 저것은 틀렸다.”, “당신은 육신적이다.” 등등 비판과 지적을 잘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혼을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없이 성경구절을 들이대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두 구절만 더 찾고 말씀을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8편과 사무엘하 16장입니다. 우선 시편 18편 33절에서 35절을 보겠습니다.
    33 그분께서 내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시고 나를 높은 곳들에 세우시며 34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내 팔이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도다. 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부드러움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대단한 사람이지요. 사자를 손으로 찢고 골리앗을 눕힌 사람으로 터프하고 사내 중의 사내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니 다윗을 크게(위대하게) 만든 것은 다윗의 용맹함이나 담대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부드러움(thy gentleness)이었다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거칠고 터프하고 사나운 성정대신, 친절하고 부드럽고 온유하며 예의바른 마음을 주셔서 그것으로 자신이 위대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자도 곰도 거인도 다 때려잡을 수 있었던 용사인 다윗은 자신 앞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사울을 동굴 안에서 능히 내려칠 수 있었으나 그는 사울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복수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잔인하게 대하지도 않았으며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앞에 두고 그는 하나님의 부드러움 가운데 더욱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과 부하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기를 거절했던 나발이라는 사람을 쳐 죽이려 했었습니다. 자신을 무시한 자에게 격분하여 즉시 죽이려고 했었는데 다행히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의 지혜로운 대처로 잔인한 살인은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이처럼 바뀌어 있으니 실로 놀랍기만 합니다. 사무엘하 16장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에, 보라, 거기서 사울의 집에 속한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나오니 그는 게라의 아들이요, 그의 이름은 시므이더라. 그가 앞으로 나오면서 올 때에 계속해서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니 그때에 온 백성과 모든 용사들은 왕의 오른편과 왼편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다윗에게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만약 돌을 맞는 당사자가 온유(앞에서 말씀드린 액체 상태의 물을 기억하십시오)하지 않다면 당연히 자국이 남고 상처가 남을 것입니다. 또한 여기 보니 다윗은 강력한 힘을 지닌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7에서 10절을 보십시오.
    7 시므이가 저주하며 이같이 말하니라. 너 피를 흘리는 자여, 너 벨리알의 사람이여, 가거라, 가거라. 8 주께서 사울의 집의 모든 피를 네게로 되돌리셨도다. 그를 대신하여 네가 통치하였으나 주께서 왕국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리는 자이므로 네 재난 속에 빠졌느니라, 하니라. 9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이르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원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매 10 왕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으니 그가 저주하게 하라, 그런즉 누가 이르기를,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겠느냐? 하고
    말씀을 보니 시므이의 비방과 조롱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아비새라는 장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합니다. 부드러움과 온유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태도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이런 처지에 놓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일이 우리의 삶에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아비새처럼 행동합니까, 아니면 다윗처럼 행동합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아비새의 태도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부드럽고 온유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고 이번 일도 그 중 하나이니 주께 모든 것을 맡기었다.” 이것이 그의 온유한 태도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11 또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보라, 네 속 중심에서 난 내 아들이 내 생명을 찾거늘 이제 이 베냐민 족속은 얼마나 더 그리하랴? 주께서 그에게 명하셨으니 그를 내버려 두고 그가 저주하게 하라. 12 혹시 주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주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하니라. 1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가 그의 맞은편에서 산비탈로 따라가며 그가 갈 때에 그를 저주하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13 왕과 그와 함께 있던 온 백성이 피곤하였으므로 거기서 기운을 차리니라.
    다윗은 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도 기운을 차렸다(refreshed)고 되어 있습니다. 거짓 비방을 받고, 아들이 배신하고, 그때까지 성취해 온 모든 명성과 명예가 하루 아침에 무너졌으며 게다가 시므이라는 자가 저주를 퍼부으며 돌을 던지고 있던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유지한 채 목적지에 도달했고 기운을 차렸으니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에 놓였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 시므이처럼 똑같이 상대방에게 저주를 퍼붓지는 않을까요? 아마도 두 사람 다 육신적인 모습을 한 채 서로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께서 내 마음을 통제하셔서 내 삶을 이끄신다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주의 뜻이니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주여, 주 안에서 다시 기운을 내도록 도우소서.” 상황이 어떻게 되든, 다른 사람에게 어떤 취급을 당하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든, 혹은 억울한 비방을 당하든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의 영을 지켜내고 기운을 차릴(refreshed) 수 있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이곳에 와서 주의 자녀들을 만나고 함께 찬송하고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복된 교제와 시간을 갖게 되면 돌아갈 때쯤에는 우리가 당한 모욕이나 배신감이나 상처를 되새기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회복해서 기운을 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것이 자신을 위대하게(great)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자를 죽이고 곰을 죽인 것이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운 것이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부드러움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부드러움, 바로 그것이 다윗의 본노와 격정과 복수심과 성질을 통제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절함이 우리의 육신을 극복하는 그 순간은 실로 위대한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다윗도 다 남자답고, 담대한 분들이었습니다. 남자답고 담대하게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선하고 좋은 일이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해 예의를 갖추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오래 참는 것이 “남자다움”의 결핍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 길이 바로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이 걷도록 원하시는 그 길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버지,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혼란스럽습니다. 그저 성경을 손에 들고 외쳐대고 지적하고 비판하며, 때로는 교만하고 오만한 모습까지 용납되고 있습니다. 주님, 그러나 우리를 통제하사 담대함 가운데서도 부드럽고 온유한 자들로 빚으소서. 주여 저희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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