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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기쁨/주님의 기쁨 · 즐거이 소리치라 조회수 : 11933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19분 33초
  • 성령의 열매: 기쁨/주님의 기쁨 · 즐거이 소리치라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과 시편 그리고 기타 성경구절들을 통해 기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아홉 번의 메시지를 통해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생산해 내기를 원하시는 것, 즉 성령의 열매에 대해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주님께 내어 맡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주님께서 만들어 내실 수 있는 열매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을 다시 보십시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지난 주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 특성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번 시간에는 두 번째 특성인 기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길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 시간 진심으로 기도하오니 주께서 저희 안에서 행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 주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을 주셔서 저희를 통해 뜻을 이루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시편 88편을 보십시다. 우선 성경 말씀으로 무엇이 기쁨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구절들을 더 살펴보도록 하지요. 기쁨이란 단지 행복한 상태, 기분이 좋은 느낌, 혹은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느낌 이상의 무엇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쁨은 행복의 표현이며, 감사의 표현이고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감격의 표현입니다. 몇 구절만 찾아보겠습니다.
    모든 땅이여, 너희는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시 66:1)
    오 오라, 우리가 주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해 즐거이 소리치자. 우리가 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고 시를 지어 그분을 향해 즐거이 소리치자.(시95:1~2)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께 큰 소리로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를 읊으며 작은북을 여기로 가져오고 흥겨운 하프를 비파와 함께 가져올지어다.(시 81:1~3)
    모든 땅들아, 너희는 주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시 100:1)
    여기서 반복되고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 즐거이 소리치라(make a joyful noise) “즐거운 소리(joyful noise)”로 번역된 이 표현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소리(시끄러움)와 연관시키고 계십니다. 기쁨은 크게 소리 지르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치 미식축구에서 터치다운을 할 때, 또는 야구에서 홈런을 칠 때 광적인 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운동이나 경마, 아니면 음악이 되었건 간에 그것에 몰입해 있던 사람들이 그 상황에 압도되어 외쳐대는 것, 그것이 희락(기쁨)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시면 “저는 사랑스럽게 사람을 대할 줄 몰라요. 좀 무뚝뚝한 성격이라서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우리의 성격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무엇을 행하실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장악하시면 이 세상 사람들이 운동이나 오락에 그처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생각을 지닌 자들과 한패가 되어 운동이든 오락이든 함께 빠져드는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같은 생각을 품은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은사주의자”라고 불릴까봐 두려워서 기쁨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쁨에 관해 말씀하는 곳에는 소리(시끄러움)가 동반됩니다.
    시편 35편 27절 “나의 의로운 사정을 지지하는 자들이 기뻐 외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참으로 그들이 계속해서 이르기를, 자기 종의 형통함을 기뻐하시는 주를 크게 높일지어다, 하게 하소서.” 외치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시편 132편 9절 “주의 제사장들은 의로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기뻐 외칠지어다.”를 보십시오.(이외에도 많은 구절이 있습니다. 한번 찾아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시 132편 9절을 보니 주의 제사장이 나오는데 여러분과 제가 제사장들이 되었다고 베드로전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도들이란 표현 역시 저와 여러분에게 당연히 해당되지요.
    정리해 보면, 성경 말씀에 기쁨이란 반드시 소리, 외침, 시끄러움 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이애미 돌핀즈 팀의 팬들은 모자도 티셔츠도 자켓도 모조리 돌핀즈 마크가 달린 것만 입고, 자동차 번호판에도 범퍼에도 온통 돌핀즈 스티커 투성이입니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 게임이 있는 날이면 운동장에 가서 실컷 소리를 질러댑니다.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 더 큰 기쁨을 얻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보혈로 씻음 받고 거듭나서 하늘나라로 가고 있는 사람들, 같은 영생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들이 예수님 마크나 이름이 쓰인 티셔츠를 입고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습니까? 그러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광신자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혹은 아직 영적으로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육신적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쑥스러워서 사람들의 눈치를 봅니다. 그렇지만 이 점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흥분하여도 큰 소리로 찬양도 못하고, 구원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할렐루야를 외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육신의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어 드려 그분께서 우리를 통제하신다면 우리는 지금보다는 더 많은 찬양을 할 것이고 주님 안에서 더 큰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건전한 교리를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주님 안에서 기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 건전한 교리에 맞게 질서 있고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것들에 마음이 압도되어 흥분하고 소리치며 기뻐할 때 역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팬들이 소리를 질러대며 열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이 다른 모든 일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온전히 자기 팀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때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진정한 “흥분”이 없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몰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시기만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기쁨은 “소리”로 표현될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쁨에 관해 가장 많이 언급이 되어 있는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서는 66장 전체에 걸쳐 기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눈여겨 둘 점이 있다면 그 기쁨은 항상 슬픔과 눈물과 더불어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슬픔, 눈물 그리고 이어 기쁨이 등장합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사무엘상 18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이란 단어가 사무엘상 18장 이전에는 성경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무엘상 18장 5절에서 7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기쁨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5 사울이 다윗을 보내는 곳마다 그가 가서 지혜롭게 행동하매 사울이 그를 세워 군사들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온 백성의 눈앞에서와 사울의 신하들의 눈앞에서 그가 인정을 받으니라. 6 그들이 돌아올 때 곧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살육하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도시에서 나아와 노래하고 춤추며 작은북과 악기를 가지고 기뻐하며 사울 왕을 맞이하는데 7 여인들이 놀며 서로 화답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은 수만이로다, 하니라.
    이곳에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적들로부터 구출해 주심을 기뻐하며 소리 높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에스라서 3장 10절에서 13절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0 건축자들이 주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옷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의 아들들 레위 사람들은 심벌즈를 들고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주를 찬양하되 11 그들이 돌아가면서 주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함께 노래하였으니 이는 그분께서 선하시며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긍휼이 영원하기 때문이더라. 주의 집의 기초가 놓였으므로 온 백성이 주를 찬송하며 매우 큰 소리로 소리를 내었더라. 12 그러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아버지들의 우두머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 곧 첫 번째 집을 보았던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 이 집의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크게 통곡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뻐서 크게 소리를 내니 13 이에 기뻐서 내는 소리와 백성의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이 구분하지 못하였더라, 백성이 크게 외치는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더라.
    여기를 보아도 기쁨이 넘쳐 소리를 지릅니다. 여기저기서 시끌벅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 마을(플로리다, 딜랜드 시)에서는 언제 그런 시끄러운 소리나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홈팀이 터치다운을 할 때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에스라 3장의 굉음은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완성하고 기뻐 외치는 소리입니다. 느헤미야 12장 43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그날에 그들이 큰 희생물을 드리고 기뻐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크게 기뻐하게 하셨더라. 아내들과 아이들도 기뻐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기뻐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더라.
    여기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이 모습이 결코 육신적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쁨을 넘치게 주신 결과일 뿐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육신적인 시끄러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너무도 크게 감동시키셨기에 마음속의 기쁨이 입으로 터져 나온 것뿐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는 성경 말씀처럼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흘러 넘쳐 우리의 입으로 그 기쁨이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43절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크게 기뻐하게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멀리 멀리까지 들리도록 시끌벅적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응원하는 마이애미 돌핀스 팀이 상대팀 진영에 터치다운시키는 모습을 보면,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쳐대며 기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모임을 갖고 있을 때, 마귀의 팀에 속한 사람들은 그 기쁜 모습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14절부터 23절까지입니다.
    14 하늘의 왕국은 마치 먼 나라로 여행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그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어떤 사람과 같으니 15 그가 하나에게는 오 달란트를, 다른 하나에게는 이 달란트를, 다른 하나에게는 일 달란트를 주되 각 사람에게 그의 개별적인 능력에 따라 주고 곧 여행길을 떠나니라. 16  이에 오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오 달란트를 더 만들고 17  이 달란트 받은 자도 그와 같이 하여 이 달란트를 더 벌되 18  일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돈을 감추었더라. 19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계산하니 20  이에 오 달란트 받았던 자는 오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주께서 내게 오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소서, 내가 그것들 외에 오 달란트를 더 벌었나이다, 하매 21 그의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것에 신실하였은즉 내가 너를 많은 것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으리니 너는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 하니라. 22 이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주께서 내게 이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소서, 내가 그것들 외에 이 달란트를 더 벌었나이다, 하매 23 그의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것에 신실하였은즉 내가 너를 많은 것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으리니 너는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 하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들을 상기해 보십시다. 성경에서 최초로 기쁨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원수인 거인(골리앗)과 그의 졸개들을 대항하여 단 한 사람을 통해 승리를 안겨 주셨을 때였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원수들을 물리친 것이었지요. 두 번째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서 등장하는데 이때는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로부터 해방되어 고국으로 안전하게 되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했을 때로 “주의 기쁨(the joy of the Lord)”이란 용어가 느헤미야서에서 두 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읽은 마태복음 25장에는 이스라엘의 왕께서 재림하실 때A) 다시 “주의 기쁨”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 보니 기쁨이란(성경적 의미에서)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이 땅에 평강의 왕국을 재건하시게 될 때 왕과 백성이 마음으로 느끼게 될 감정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주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주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께서 이 땅에 돌아오셔서 자기 왕국을 세우실 때 주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동일한 그 기쁨을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도록 주시기 원하십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이미 하나님의 왕국 안에 놓으셨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하늘의 처소에 그분과 함께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물리적인 영역에서 실제로 누렸던 모든 것들을 여러분과 저는 영적인 영역에서 오늘 이 순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하고자 하는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기만 하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 유대 백성이 왜 크게 소리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의 모든 원수들이 패배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수들도 이미 패배 당했습니다. 왜 유대 백성이 소리치고 있습니까? 이는 곧 이 땅에 평화가 정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 안에 이미 평강이 임해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주님은 그들에게 모든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기뻐 소리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하신 약속들을 성취하지 않으셔났요? 그들은 자신들의 소망이 실현되었기에 소리를 지르며 기뻐합니다. 우리 역시 소망을 성취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상에 있는 영적인 복들로 이미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때 주님과 그분의 백성이 느끼는 뜨거운 감격, 그것이 주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저의 마음 안에 매 순간마다 열매로 생산해 내시고자 일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니 주님께서 이 땅에 돌아오실 때 “외치는 소리”(shout)와 함께 오신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쁘시면 그리하시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극히 일부)은 휴거를 생각하면 흥분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피값으로 우리를 사신 그분의 흥분은 어떠하실까요? 보통 결혼식 때 보면 신부는 조금 긴장해 있는 게 보통인 반면 신랑은 기쁨에 들떠 흥분되어 있습니다.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그리 흥분된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만 신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도 큰 기쁨에 몹시 흥분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 그 기쁨을 보고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참으셨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 기쁨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분이 돌아오셔서 그분과 그분의 백성이 새로 세워지는 왕국을 보고 흥분하게 될 그날처럼 여러분과 제가 매일 아침 그렇게 흥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의 한 가지 특성인 기쁨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하루하루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년왕국을 상속받을 그때의 기쁨과 흥분을 맛보는 날들이 되기를 주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 특성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면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쁨에 대해 살펴보니 아직 ‘게임’은 시작도 안 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번 우리 모두 솔직해 보십시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은 것으로 인해 너무도 감격스러워 하며 흥분했던 마지막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글쎄요, 저는 사실 구원으로 인해 매일 기쁜데요...”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얼마만큼 기쁜지 솔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온몸이 전율될 만큼 기쁘신가요?
    사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 푹 빠져 지내다보면 하나님만 빼고 모든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입니다. 물론 최후의 보루는 여전히 남아있지요. “나는 구원받았다.” 맞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구원 받았으니 하늘나라로 갑니다. 문제는 그 구원이 현재의 삶에 무슨 유익을 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도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왕이신 주님이 동문을 통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될 때 기뻐하는 만큼이나 우리의 구원으로 인해 흥분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요한복음으로 가서 한번 확인해 보십시다. 16장 13절입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들을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여기 보면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영께서 구원받은 우리 모두 안에 이미 와 계신 것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보니 그분께서는 “다가올 일들”에 대해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들이 아니고 미래의 일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6장 14절에서 16절을 보십시오. 매우 중요합니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서 받아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라. 15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분께서 내게서 가져다가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다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이 구절을 읽고 우리는 이것이 주님의 재림에 관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신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분과 함께 3년 반을 같이 동거동락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어떻게 여러분과 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너무 똑똑해서 그런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앞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앞으로 있게 될 것들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슬피 울며 애통할 터이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또 너희는 근심할 터이나 너희 근심이 기쁨으로 변하리라.
    여기 보니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는 기쁨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산고를 겪으면 자기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거니와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세상에 사람이 난 기쁨으로 인해 다시는 그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여기 보니 “산고”란 말이 나오는데 구약성경 그 어디를 봐도 여인의 산고가 언급된 곳은 전부 “유대인의 환란(고난)”에 대한 것입니다. 계시록 12장에 보니 드디어 아이가 태어납니다. 22절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너희에게 근심이 있으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아무도 너희에게서 너희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환란 기간 중 극도로 고통을 겪고 슬픔을 당하다가 드디어 구출되어 영광 중에 오시는 왕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 때에는 모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기쁨일지 상상이 가십니까? 그런데 그런 기쁨을 오늘 이 순간 여러분과 제가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구원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데리러 오실 때 저도 그런 기쁨을 맛볼 것을 확신합니다.” 이렇게 말하실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고 그런 기쁨을 오늘 이 순간 성령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갖게 해 주시고자 한단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형제님, 형제님은 제가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사는지 모르시죠? 아시면 기뻐하란 말씀은 못하실 겁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겪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한복음 16장 22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너희에게서 너희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 이 기쁨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그 기쁨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기뻐할 그런 큰 기쁨을 성령께서 제 안에 열매로 맺어주시면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어떻게 대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기쁨은 결코 빼앗길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기쁨”이란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여기 보니 “나의 기쁨”(즉 주님의 기쁨) 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의 기쁨(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기쁨입니까? 주의 기쁨입니다. 그것이 누구 안에 머무르게 됩니까? “너희” 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쁨은 소위 “긍정적”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쁨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신나는 음악과 더불어 일어나 멋진 상상들을 하면서 “오늘은 놀라운 날이 될 거야. 오늘은 하루 종일 행복할 거야. 하하하... 아멘, 할렐루야!” 그래 놓고는 출근하려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려는 순간, 밧데리가 다 나가버린 걸 알자 기쁨이고 행복이고 모두가 다 같이 날아가 버리는… 그런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기쁨은 조금만 상황이 나쁘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런 “기쁨”을 누리다가 순식간에 기쁨이 사라진 경험을 여러번 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주님의 기쁨이 머물러 있다면 어떻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노라. 그 누구도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노라. 네가 비록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으나 그때까지의 모든 것은 내가 책임을 지겠노라. 내가 네게 나의 기쁨을 주노니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을 수 없노라…” 그렇습니다. 이 기쁨을 당신이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나이다.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니이다.
    13절엔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것들을 말하옵는 것은 그들이 내 기쁨을 자기들 안에서 성취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기쁨을 제자들 안에서 성취(fulfilled)하게 함이라고 되어 있군요. 성취란 단어는 “가득(fully) 채워 주신다”(filled)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가 땅으로 재림하실 때 갖게 될 기쁨만큼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그 정도의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이와 같은 중보를 하고 계십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다(충만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의 통제하에 놓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께서 해 주신 것들에 대해 흥분하고 감격하여 소리치며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육신적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A)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히 통제하실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입니다. 어떤 분은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시대는 영적 환경이 너무도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이렇게 생각이 든다면 성경 한 구절을 더 찾아보십시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서 7절 말씀입니다.
    5 이는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고 권능과 성령님과 큰 확신(確信)으로 이르렀기 때문이니 우리가 너희를 위해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고난 속에서 성령님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따르는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믿는 모든 자에게 본이 되었느니라.
    여기 보니 많은 고난 속에 놓여 있는 성도들이 성령님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고(6절) 되어 있습니다. 많은 고난 속에 놓여 있었으나 이 고난에 점령당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님의 기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에 의해 점령된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께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껏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스포츠축제(월드시리즈, 월드컵 등)나 록 콘서트(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에서 “광분”하는 모습에 대해 비판하거나 조롱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과 영웅들로 인해 흥분하고 광적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을 다음에 보게 될 때는 비판이나 조롱대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내가 구원받은 그것으로 인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복으로 복 받은 그것으로 인해 나도 그들처럼 “미친 듯”이 감격하고 흥분하여 소리를 질러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이 시간 그런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도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그렇게도 기뻐할 수 있건만(우리는 그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영생과 축복과 소망으로 인해 더욱더 기뻐 날뛰고 소리쳐 기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꼭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늘 아버지시여! 제 삶에는 행복한 순간도, 기분이 괜찮은 때도, 그리고 좋은 느낌으로 가득 찬 순간들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주님, 그런 것들은 육신적인 것들로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아버지시여, 내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기쁨입니다. 넘쳐 흘러 주체할 수 없는 감격과 흥분과 외침이 가득한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행하신 것들과 행하고 계신 것들과 행하실 것들로 인해 기뻐하게 하소서. 이 일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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