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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사랑/신약시대 성령의 사역 조회수 : 10132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20분 22초
  • 성령의 열매: 사랑/신약시대 성령의 사역
     
    우리는 지난 여덟 번의 메시지를 통해서 기초를 놓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열매가 지니고 있는 아홉 가지 특성들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5절입니다.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오늘 이 모임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 기도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며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빚으셔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모습들이 되어지도록 도와주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은 먼저 20세기 초에 모로코에서 무슬림(이슬람교인, 회교도)들에게 마을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한 선교사의 간증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을을 방문해 이슬람 신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주님께로 회심시키고자 했던 이 선교사의 간증을 한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복음을 전했을 때는 끼어들거나 방해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반응은 항의와 적대감과 그들 종교에 대한 광신적 옹호였지요. 저는 그들에게 로마서 8장을 읽어주고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성경적 기독교와 도덕성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증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도덕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설교가 진행되자 휘파람을 불거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저의 설교에 대해 할 말이 있거나 질문이 있으면 하시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한 필 사려고 말의 이빨부터 점검하기 시작했소. 잘 살펴보니 이빨은 건강하고 만족스러웠지요. 그러나 이빨이 건강하다고 다리까지 건강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요. 그 말이 다리가 신통치 않다면 그 말은 쓸모없다고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말의 가치는 줄어들 수밖에 없소. 그럼 제 얘기를 들어보시오. 나는 이슬람교도로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금식을 비롯한 모든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있소. 그런데 당신이 와서 나의 도덕이 잘못됐다고 해서 내 종교 전체가 쓸모없다고 하니 그것은 마치 말이 다리가 좀 나쁘다고 그 말 자체가 쓸모없다고 하는 것과 같단 말이오. 아시겠소? 나는 한 인간으로 본능에 따라 살아갈 자유가 있소. 그러니까 내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지요. 이것과 나의 종교와는 무관하단 말이요. 나는 여전히 알라신께 경배를 드리니까요. 알라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기도, 금식, 계명 및 몇 가지 규례를 지키는 것이지 나의 육체를 만족시키는 일과는 상관없지요. 그 일은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 부인이 몇 명 있습니까?”
    “다섯이었지만 네 명은 이혼시켜 지금은 하나입니다.”
    “왜 이혼하셨지요?”
    “그거야 간단하지요. 저는 올해 나귀 두 마리를 내다 팔았지요. 그것은 늙은 나귀를 젊은 나귀로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늙은 여자 대신 젊은 아내를 맞이하려고 이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혼당한 네 여자는 어떻게 되나요?”
    “그거야,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그 여자들을 싸게 샀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젊은 아내가 당신이 늙었으니 새 남편으로 갈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녀는 내가 새로 산 나귀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때를 쓰면서 말을 안 듣고 멍에를 쓰기 싫다고 버티면 채찍으로 때려잡아야지요.”
    저는 이 사람의 논리에 대한 적당한 답변을 생각하면서 복음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복음 증거가 끝났을 때 저는 이 이슬람교도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세상을 사랑합니다. 이 사람은 발끝에서부터 위장이 있는 곳까지 회개했고 입술에서부터 목젖이 있는 곳까지는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주여, 이 자의 회개는 마음(심장)이 있는 곳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짧은 간증이 여러분께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기독교 신앙과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 주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끔찍한 종교가 다 있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기도, 금식, 예배 같은 형식적인 종교의식은 의무적으로 다 하면서도 마음과 삶은 전혀 변화되지 못 했다면 도대체 그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불교가 되었든 이슬람이 되었든 기독교가 되었든지 간에 마음이 변화되지 못한 종교는 쓸모가 없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 중에도 마음과 삶의 변화없이 그저 종교로서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지 않고 겉치레로 종교생활만 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는 기독교 역시 또 하나의 종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면 우리들이 일요일에 교회당에 가서 몇 가지 종교 의식을 치루고 몇 가지 활동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를 별로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지요. 만약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나 태도가 올바르게 바뀌지 않는다면 기독교도 그저 종교에 불과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그저 ‘종교인’으로 살아가다가 죽어서야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줄 뿐입니다.
    요한일서 4장과 5장을 보겠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이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면 비록 우리가 무슬림과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방법으로 기도하고, 다른 날을 지키더라도 내 직장 동료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인 나와 무슬림인 다른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도 그 자도 아내를 무시하고 막 대하는 건 똑같다면 말입니다. 서로 자기 종교가 옳다고 주장해 봐야 제 삼자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삶에서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본인은 하늘나라로 가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언행을 보고 다른 죄인들도 믿고 하늘나라에 같이 오기를 바라신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을 보십시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조심하십시오. ‘사랑은 하나님이시라.’가 아니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입니다. 하나님은 계명(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리가 아닙니다. 규례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일 뿐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사랑이십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 보니 사랑은 전혀 느낌(feeling)이 아닙니다. 사랑은 감정(emotion)이 아닙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 하나님은 자기를 희생하셨습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닌 우리 죄인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신 이 하나님이 곧 사랑이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7절입니다.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만약 당신이 킹제임스성경을 갖고 계시지 않다면 이 구절은 없을 겁니다.A) 우리 모두는 성령께서 거듭난 성도들 안에 들어오셔서 내주하고 계신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실히 배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거듭난 우리들 안에 내주하시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저는 그렇게 사랑이 많은 편이 못 됩니다.”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변명하지 마시고(하나님의 사랑이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니) 회개하시는 것이 더 나으실 겁니다. “저는 사실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해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십시오. “저는 원래 무뚝뚝하거든요.” 이렇게 변명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그 성격을 뛰어넘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면(성경은 그러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렇다면 ‘성령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사랑이 내 안에 거하고 있음도 분명합니다. 이제 내 안에는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희생하는 거룩한 사랑이 내주하고 있고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그 사랑이 가능합니다. 만약 당신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당신도 동일한 사랑과 그 사랑을 행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뜻 깊은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저기, 낙스(Knox) 목사님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테이프를 통해 좋은 설교를 듣고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젊을 때 구원받았는데요, 지난 9년 동안 저는 하나님과 멀리 지냈습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를 가지 않느냐고 하면 저는 늘 ‘저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냥 놔두세요. 알아서 할게요.’ 이런 식으로 응수하곤 했었습니다.(우리가 자주 언급하던 그런 그리스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원받은 후 주님께서 데리러 오시는 휴거 때까지 자기 맘대로 사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어느 날 일터에서 상사 한 분이 당신의 설교 테이프 몇 개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 중 세 번째 테이프를 듣는 순간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타이타닉 영화에 대해 그것은 죄인의 반역과 음행과 권위에 대한 도전을 다루고 있는 영화로 그 영화 속의 두 젊은이는 마귀에게 혼을 팔아버린 자들이라고 했지요. 사실 저는 그 영화가 사랑 이야기(love story)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저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세상적이었나 짐작이 가실 겁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내리치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제가 포르노에 가까운 영화를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요. 저는 그 순간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와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화를 건 이 형제가 사랑은 섹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음행도 아니고 육체적 쾌락도 아닙니다.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하나님의 책망을 수용하고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다시 주님을 향한 삶을 살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 형제는 비록 구원은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돌이킨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무슬림들처럼 사는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육신이 원하는 쾌락을 좇아 사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내어드릴 때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아내가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아내를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남편이 신사답지 못하고 존경스럽지 못한 때에도 남편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무도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지 않으려 할 때에도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랑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당신으로 하여금 저의 ‘모든 것’에 대해 다 알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저를 위해 희생적으로 사랑을 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때론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육신적인 태도를 자주 취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성령께서 나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단 말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유익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나의 위로자이십니다. 나의 고난 가운데 도우셨지요.” 이렇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나’에게 유익을 가져온 것입니다. ‘나’가 아닌 ‘너’에게, ‘다른 사람(남)’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신 성령님 이야기는 왜 없는 것일까요? “성령께서는 나의 구원의 보증이 되시고 나를 인치셔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보장하셨습니다.” 훌륭한 신앙고백이고 역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역시 ‘나’에게 유익을 가져온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할 때 우리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마저 ‘우리 자신’의 유익에 관해서만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를 통해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실 유익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여기 보니 사랑의 영을 주께서 주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영(spirit)은 대문자가 아닙니다. 즉 성령님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순절날(사도행전 2장) 두려움 많고 나약한 자들 위에 임하셔서 그들을 능력있는 자들로 만드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건전한 생각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건전치 못한 생각과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던 우리들이 거듭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통제하시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생각이 건전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통제하시면 그처럼 무뚝뚝하고 무심하던 자도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로마서 5장 5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
    여기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사랑을 넓게 부으셨나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사랑을 넓게 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남들’을 사랑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내어드리면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과 역대기하 24장, 그리고 사도행전 7장을 보십시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에 관해 공부해 오면서 우리 자신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에 관해 배웠습니다. 이제부터 그것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과  28절, 그리고 35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듣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눅 6:27, 28)
    오직 너희는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리니 그분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시니라.(눅 6:35)
    여기 보니 하나님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가끔 참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글쎄,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어떤 경우에는 정말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할인마트나 주유소에 갔을 때,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을 때, 제가 손을 내밀고 있는데도 제 손 위에 얹어주지 않고 테이블 위에다 올려놓고 가져가라고 할 때, 이럴 때면 저는 정말 참지 못합니다. 몹시 화가 납니다. 손 위에 얹어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저의 육신은 그 사람에게 결코 친절하게 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처럼 자그마한 일에도 “참질” 못합니다. 여러분을 화나게 만드는 일들도 여러 가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일들이 발생하게 되면 결국 우리도 그런 사람들에게 똑같이 “거칠게” 대해 버린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무슬림이나 불교 신자나 다른 그 어떤 종교를 가진 자들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님께서 내주하고 계시다가 그런 일이 발생하는 순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만 드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런 자들에게도 인자하고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종교인들과의 다른 점입니다. 물론 거듭나도 “육신적”이면 종교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역대기하 24장 20절에서 22절을 보겠습니다.
    20 하나님의 영께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에게 임하시매 그가 백성 위에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주의 명령을 범함으로 형통하지 못하느냐? 하시나니 너희가 주를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니 21 그들이 그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왕의 명령을 따라 주의 집 뜰 안에서 그를 돌로 쳐서 죽였더라. 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베푼 친절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주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것으로 인하여 벌을 주시옵소서, 하니라.
    이 말씀의 끝부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보시고 이 일로 벌을 주시옵소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의 이 저주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요. 누가 이를 두고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손에는 손, 그러므로 “나를 죽이는 자를 죽여 주시옵소서”라는 저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응수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이 우리에게 행한 대로 응수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반면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해 있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죽여 주소서, 주여.” 이런 식으로 응수하지 않고 “주여, 이 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반응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에서 53절입니다.
    51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않은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행하는도다. 52 대언자들 중에서 너희 조상들이 핍박하지 아니한 자가 누구였느냐? 그들은 의로우신 분의 오심을 미리 보여 준 자들을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분을 배반하여 넘긴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나니 53 너희가 천사들을 통하여 제정하신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 내용을 보니 앞서 본 역대하 24장과 같습니다. 즉 살인죄를 저지른 자를 다루고 있지요. 계속해서 54절에서 60절입니다.
    54 그들이 이것들을 듣고 마음이 상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똑바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56 이르되,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하매 57 이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들의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도시 밖으로 그를 내던지며 돌로 치니라. 또 증인들이 자기들의 옷을 사울이라 하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그가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하더라. 이 말을 하고 그가 잠드니라.
    앞서 살펴본 스가랴나 지금 살펴본 스데반 두 사람 다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또한 두 사람 다 진리를 선포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성령께서 내주하지 않은 채로 죽으면서 그의 원수를 저주한 반면에 스데반은 내주하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며 기도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이 두 부분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가져왔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기질의 차이도, 성격의 차이도 아닙니다. 두 사람 다 단호하게,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 한 사람의 영은 성령님에 의해 통제를 받아 자신에게 이를 갈며 저주하고 죽이려는 자들에게 저주가 아닌 용서로 대응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히브리서 12장 2절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고 오직 결승점(Finish line)에 서 계신 주님을 푯대로 해서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에 그를 통제하고 계셨던 성령께서는 스데반을 통해 스데반을 부당하게 대하고 있던 자들에게 선하게 대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스데반보다 더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스데반은 당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제시했습니다. 남자 중의 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담대하고 용감한 행동 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어져 있었고 성령께서는 그의 영을 온전히 통제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스테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죽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스데반이 높은 부르심의 푯대를 붙잡은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열왕기하 1장과 누가복음 9장입니다. 한번 솔직히 생각해 보십시다. 당신은 스가랴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스데반의 모습입니까? 아마 저나 여러분이나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이상 당연히 스가랴의 방식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육신 안에는 당연히 그런 기질이 들어 있습니다. 그대로 맞대응 해 주어야 속이 시원할 것입니다. 열왕기하 1장에도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실 저는 이 사건 기록을 너무도 “흐뭇해” 하면서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아마 지나치게 이 사건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열왕기하 1장 1절에서 12절을 보십시오.
    1 그때에 아합이 죽은 뒤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니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던 자기의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使者)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내가 이 병에서 나을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보라, 하니라. 3 그러나 주의 천사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이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라. 엘리야가 떠나가니라. 5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매 왕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지금 돌아왔느냐? 하니 6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가서 너희를 보낸 왕에게 돌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사람을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라, 하더이다. 7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를 만나려고 올라와 이 말을 너희에게 고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긴 사람이더냐? 하니 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하매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하니라. 9 그때에 왕이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오십인대장이 엘리야에게로 올라가더니, 보라, 엘리야가 산꼭대기에 앉았으므로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0 엘리야가 오십인대장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살랐더라. 11 왕이 또 다시 다른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2 엘리야가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살랐더라.
    원수들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물리치는 모습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 명의 군인과 장교를 불살라 버리는 장면… 오! 너무나도 너무나도 통쾌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래보았으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그럴 대상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요.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는 우상들을 보면서 다 엎어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몬타나에 있는 마리아 동상을 무너뜨리면 얼마 동안이나 감옥에 가야할지까지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온갖 이단 종파들도 하나님께서 통쾌하게 심판해 주셨으면 한 적도 많았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이 여러 번 들더라는 것입니다. 두 번 씩이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으니 102명을 화장시킨 셈이지요. 엘리야는 하나님의 심판에 얼마나 통쾌해 했을까요? 13절과 14절을 보면 드디어 세 번째로 찾아온 자들이 벌벌 떨면서 무릎 꿇고 간청을 합니다.
    13 왕이 다시 세번째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보내므로 세번째 오십인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에게 간청하여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내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의 눈앞에서 귀히 여기소서. 14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난번의 오십인대장 두 명과 그들의 부하 오십 명씩을 태웠사오니 그런즉 이제 내 생명을 당신의 눈앞에서 귀히 여기소서, 하매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얼마나 흐뭇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54절을 보겠습니다.
    51 그분께서 위로 올려져서 영접 받으실 때가 이르매 친히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얼굴을 고정하시고 52 자기 얼굴 앞에 사자(使者)들을 보내시니 그들이 가서 그분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니라. 53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듯한 얼굴이므로 그들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매 54 그분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이르되,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같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저들을 멸하도록 우리가 명령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거늘
    여기 보니 야고보와 요한은 구약성경의 엘리야 사건을 상기시키며 주님께 자신들도 그렇게 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55절과 56절입니다.
    55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56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그들이 다른 마을로 가니라.
    답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을 멸하려는 것은 주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행동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은 오히려 자신을 희생시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영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들어오셔서 하고자 하시는 그것입니다. 희생을 동반한 사랑, 이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야고보와 요한처럼 우리를 방해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엘리야의 불”로 심판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제는 더 이상 그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불살라 버리고 싶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구원시키고자 원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자들은 불살라 멸하려 했으나 주님은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어 그들로 영생의 축복을 받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시편 55편과 누가복음 23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들고 계신 “사랑의 막대기”가 다름 아닌 우리 주변의 사람들임을 깨달은 바 있습니다. 다윗은 구약성경의 인물 중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시편 55편을 보니 다윗 역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시편 55편 1절부터 보겠습니다.
    1 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것에서 떠나 숨지 마소서. 2 내게 주목하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원망하는 중에 애곡하며 소리를 지르오니 3 이는 원수의 목소리와 사악한 자의 학대로 인함이니이다. 그들이 불법을 내 위로 던지며 진노하여 나를 미워하나이다. 4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프며 사망의 두려움들이 나를 엄습하였나이다. 5 무서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눌렀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 내게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내가 멀리 날아가 안식하리로다. 7 보라, 그때에 내가 저 멀리 다니다가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 내가 빨리 도망하여 거센 폭풍과 태풍에서 벗어나리로다, 하였나이다. 9 내가 도시 안에서 폭력과 분쟁을 보았사오니, 오 주여, 그들의 혀를 멸하시고 찢으소서. 10 그들이 밤낮으로 성벽 위에서 도시를 두루 다니니 도시 한가운데 해악과 슬픔이 있으며 11 사악함이 그것의 한가운데 있고 속임과 간교함이 그것의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나이다. 12 나를 모욕한 자가 원수가 아니었으니 원수였더라면 내가 참을 수 있었으리로다. 나를 향하여 자기를 높인 자가 나를 미워한 자가 아니니 나를 미워한 자였더라면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로다. 13 오직 그것은 곧 너니 나와 동등한 자요, 나의 안내자요, 내가 아는 자로다. 14 우리가 서로 다정히 의논하고 무리를 지어 하나님의 집으로 걸어갔도다. 15 사망이 그들을 붙들어서 그들이 산 채로 지옥에 내려가게 할지니 사악함이 그들의 거처들에 있으며 그들 가운데 있도다. 16 나로 말하건대 나는 하나님을 부르리니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9절과 15절, 그리고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은 주님을 부르고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갈 것이나 악인들, 원수들은 다 지옥으로 보내시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인간의 이 마음을 우리 중 그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23장입니다. 가롯 유다를 기억하시지요. 친구이셨던 예수님을 배반한 자입니다. 베드로도 친구이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는 맹세하여 저주까지 했습니다. 요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다 버렸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부인당하고 배반당하신 예수님은 어떠셨나요? 33절부터 읽겠습니다.
    33 그들이 갈보리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범죄자들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있더라.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고
    여기 보니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와는 사뭇 다른 기도를 원수들을 위해서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여러분과 저는 거듭나 구원받았고 하늘나라에 갑니다. 우리는 스가랴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훌륭한 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엘리야, 다윗처럼 하나님의 훌륭한 일꾼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는 구약성경에 입증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여러분과 제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해 계시고 이로써 우리는 스가랴, 엘리야,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넓게 부어지지 못했으나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성령님에 의해 그 사랑이 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나요? 저와 여러분의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시며 그 성령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거하고 계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내놓을 만큼 큰 사랑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그 사랑을 보이심으로 여러분과 저를 스가랴보다도, 엘리야보다도, 다윗보다도 더 나은 자들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배운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을 기억해 보십시오. 실로 “높은” 부르심이지요. 여러분 중에는 “저는 그런 수준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안 되겠는데요.”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그 용서의 기도가 다름 아닌 스데반의 입술에서 어떻게 흘러나올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하신 성품과 사랑이 스데반을 통해 표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도 표출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쓴 뿌리와 원망과 불평과 억울함과 분노, 이 모든 것들을 내던지고 오직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내어드리면 우리 마음을 통해 그분의 사랑이 흘러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마음을 내어드리면 하실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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