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성령의 열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우리의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
빌립보서 3장과 로마서 8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곱 번의 메시지를 통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령의 열매란 믿는 성도가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 맺어 보려고 하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 안에서 생산해 내시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의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성품을 우리 삶에서 표현해 보려고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함을 그간의 우리의 체험이 입증해 줍니다. 이는 우리의 지체 안에 성령님의 뜻과 목적을 대적하는 또 다른 본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성경에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명칭이 있습니다. 아담, 죄, 죄의 활동, 혹은 단순히 육신이라고도 합니다. 이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지니게 된 것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죄성은 우리가 거듭나서 갖게 되는 신성한 본성을 대적합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거듭난 성도의 삶에서 그 성도를 통제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이끄실 때 안에서 영적인 전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성령님과는 반대로 거듭난 성도로 하여금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 아직도 이 전쟁에 대해 모르고 있다든가 여러분 안에 그런 전쟁을 겪어보지 못 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구원받지 못했으며 지옥을 향해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아무런 영적 갈등을 느끼지 못하거나 이 세상의 죄에 참여코자 할 때 아무런 저항도 못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성도는 당연히 육신과 성령 간의 갈등을 알고 있고, 성령께서는 육신적 활동에 대해 안에서 항의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죄를 짓는데 있어 아무런 갈등도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진노의 자녀요,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최종 목적지는 불행하게도 지옥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 사람 안에는 거듭난 영적인 사람, 즉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새사람은 그 사람 안에서 구세주를 따르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비록 자주 실패를 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주님을 따르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르고자 할 때 우리 안에 그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 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 보니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 다음은 “목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목적이 무엇인지는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9절을 보면 예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예정에 대해 잘못 알고 계신 분이 있을 것 같아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정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네 구절을 잘 읽어 보면 예정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와 관계있는 것이지 구원받지 않은 죄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죄인이 하늘나라로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말은 성경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이란 구원받은 사람의 최종 모습이 어떻게 될 것인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갈 것인지 지옥으로 갈 것인지는 전혀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 사상은 그렇게 주장할지 모르나 성경은 그런 예정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정이란 내가 구원받은 후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모습으로 변화되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빌립보서 3장을 통해 나의 인생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될 것인지 아니면 짐이 될 것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의 인생이 기쁨이 될 것인지 슬픔이 될 것인지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세워놓으신 목적에 내가 동의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나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드시려고 일하고 계신다면, 이 목적에 따라 내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키기 위한 나의 모든 행동, 생각과 결정은 인생을 훨씬 더 단순하고 즐겁게 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나는 성령님과 동의하에 올바른 교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생각, 행동, 결정 등이 육신이나 자아나 세상을 향하게 되면 나는 즉시로 갈등과 고통, 그리고 문제에 둘러싸이게 될 것입니다. 이유는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성령님의 역사를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데 있어 부모들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성령의 열매 6번] 올바른 부모를 가진 사람이라면 부모님께서 시키신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명령을 기쁨으로 즐겁게 수행할 수도 있고 때론 억지로 괴로운 마음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숙제가 되었든 심부름이 되었든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라면 우리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 협력하면서 기쁨으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을 거역하여 협력도 안하면서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결국은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이루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이든 목적지에는 도달할 것이고 목표는 달성될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이 시간에는 어쩌면 여러분과 상당히 비슷한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회교도나 불교도나 힌두교도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여러분 대부분은 술주정뱅이 집안 출신도 아닙니다. 지금 보니 여러분들 중 상당수가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다녔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이방종교나 죄악으로 얼룩진 과거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주님께 와서 구원받고 나서도 “없애버려야 할” 옛 생활이 별로 없겠지요. 어려서부터 교회생활을 해 왔을 테니까요. 마약중독에 빠진 적도, 알콜중독에 빠진 적도, 간음이나 음행을 저지른 적도, 우상 숭배를 해 본 적도 없이 비교적 깨끗한 과거를 등에 업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서 3장을 보니 여러분처럼 종교적 분위기에서 비교적 깨끗하게 살았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좋은 과거마저도 육신에 속한 것이라면 육신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믿기 전에 좋은 종교적 배경을 가졌다거나 그런 연유로 우상을 섬긴 적도 없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적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나쁜 배경을 지녔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거나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나쁜” 육신이든 “좋은” 육신이든 육신은 육신에 불과합니다. 불교적 육신, 도교적 육신, 이슬람적 육신이나 장로교적 육신, 침례교적 육신이나 똑같은 육신일 뿐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저희를 가르치사 주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빌립보서 3장 3절을 보겠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 구원받은 사람은 세 가지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첫째요,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는 것이 둘째입니다. 참으로 선한 것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세 번째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10살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13살 때 이미 주정뱅이가 되어 18세까지 술독에 빠져 지내다가 요양시설에서 22세에 구원받은 사람이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는 말씀을 읽게 되면 그는 당연히 그 말씀에 수긍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찾아주셔서 구원받기 전에는 실로 형편 없었습니다. 저는 제 육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회복의 절실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술을 입에 대본 적도 없는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교회에서 자란 사람, 평생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서 지내온 사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술 마시고 죄 짓는 육신이 나쁘다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교회 다니고 종교생활을 하는 육신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 짓는 나쁜 육신이든 “선행”을 하는 좋은 육신이든 모두 다 육신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기 전 못된 삶을 살았었기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니다. 반면 어떤 그리스도인은 착한 삶을 살다가 구원받았으므로 오만합니다. 술주정뱅이가 구원받으면 그는 더 이상 술주정뱅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자라난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교만합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둘째는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셋째는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육신이 선한 것이나 좋은 것을 하더라도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성전에 가서 기도하던 두 사람이 기억나십니까? 한 사람은 고개도 못 든 채 “하나님, 긍휼을 베푸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했지만 또 한 사람은 고개를 쳐들고 “나는 저 사람처럼 죄인이 아닙니다.”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사람을 보시고 저 사람은 겸손하니 내가 사용할 수 있으나 두 번째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하니 잘못된 사람이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어 4절을 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것은 “선한” 혹은 “좋은” 육신입니다.
나 역시 육체를 신뢰할 수도 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여기 보니 여러분과 비슷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육체를 신뢰할 만한 사람,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 다닌 사람들, 어려서부터 엄마가 들려주는 성경을 듣고 자라난 사람들, 학교도 가기 전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줄줄 외던 사람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늘 교회에 다녔고 술집에는 한 번도 안 갔던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결혼 전에 순결을 지켰고, 댄스홀에는 얼씬도 안 해 본 것, 이 모든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중에는 다소 출신 사울보다 더 종교적이거나 더 헌신했던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께서는 이 사울이라는 사람보다 더 자기 자신의 육신을 신뢰할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견해가 아니라 성경을 기록하신 분의 의견입니다. 즉 육신을 신뢰하고자 한다면 바울만큼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육신은 훌륭한 육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5절에 보니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유대 민족 간의 특별한 언약의 징표입니다. 그는 그 징표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며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축복을 지닌 사람입니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고 합니다. 다른 지파들이 배교했을 때 진리를 고수하던 지파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함은 모든 히브리인들 중 최고의 히브리인이란 뜻입니다. 누가 가장 뛰어난 사람인가? 회당에 가서 한번 물어보십시오. 바울입니다. 누가 가장 뛰어난 성경 지식을 갖춘 사람인가? 랍비에게 물어보십시오. 대답은 바울입니다. 마치 미국 역사상 누가 가장 뛰어난 웨스트 포인트맨인가 물으면 누구나 주저 없이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이라고 하듯이 이스라엘의 모든 회당에 가서, 누가 가장 뛰어난 성경학도인가 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다소 출신의 사울”이라고 대답합니다.
계속해서 5절을 보니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전부 사실입니다. 율법에 관해 전혀 흠이 없는 사람,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저를 포함해 그 누가 아무리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서 자라났다고 할지라도, 신약성경에 관한 한 흠이 없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겁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보다 더 엄격합니다. 그 구약성경에 있는 모든 사항을 다 지킨 사람이라면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울의 가족, 친구, 지인, 선생님, 이웃, 동료 그 누구에게 물어볼지라도 한결같은 답변을 얻게 됩니다. 흠 없는 사람이란 답변 말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육신입니다. 그러나 육신은 육신일 뿐입니다. 7절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곧 그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겼으며
이 말씀에 따르면 바울의 인생에 있어 사울에서 바울로 되었던 그날, 즉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그날 이래로 그의 모든 것, 그중에서도 굉장했던 과거도 다 내려놓아야 했던 시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높이 평가해 주었고 율법 앞에서도 훌륭한 것들이었으나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님과 비교해 보니 항상 최고로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가 예수님과는 비교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죄인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같이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이요, 흠 없는 사람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그러하다면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좋은 종교적 배경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우리 역시 동일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성경구절을 척척 갖다대는 사람일지라도 예수님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당신이 아무리 십계명을 다 지켰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열매에 관해 공부하고 있는데 8절에서 12절까지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네 가지가 나옵니다. 이 네 가지는 나의 소유도 아니요, 당신의 소유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8절입니다.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여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는 다릅니다.(전치사 of 와 about의 차이) 우리의 지식은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셨다는 사실, 즉 그분에 관한 것들을 알고 있을 뿐 주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시련과 유혹과 고통을 견디시면서도 마음속에 평강과 기쁨을 유지하고 계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구원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셔서 당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들을 당신의 삶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그분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그 일을 행하셨는지를 아는 수준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빌립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에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 보니 바울이 잃어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은 실은 바울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던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입니다.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여기서도 중요한 부분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We have faith in Christ). 물론 우리의 믿음도 소중하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믿음(faith of Christ)에 이르도록 이끄십니다.
좀 더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시련과 문제가 닥칠 때,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 고뇌와 염려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우상이나 다른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일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기도 응답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그분께서는 그 기도 가운데 절망, 고뇌, 염려, 두려움 등을 없애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견디게 하셔서 결국은 올바른 결말이 나올 것임을 확신하게 만드십니다. 이 확신은 여러분과 제가 기도하고자 할 때 지니고 있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faith in Christ)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그분의 믿음(faith of Christ)입니다. 이 믿음은 주님께서 물 위를 거니셨을 때, 폭풍을 잠잠케 하셨을 때, 지옥에 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 소유하고 계셨던 그 믿음입니다. 즉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완전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바랐지만 여전히 내면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했어도 나의 믿음 가지고는 여전히 걱정하고, 여전히 두려워하고, 여전히 불안해 합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나의 연약한 그런 믿음으로는 최종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성령의 열매인 믿음, 즉 나의 믿음보다 훨씬 더 큰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내 안에서 열매로 맺어주십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내가 그분의 죽으심과 일치하게 되어 그분과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이요,
부활, 권능, 죽음 그 다음에 보니 고난의 교제(고난에 참여하는 것)란 표현이 나옵니다. 요한일서 3장으로 잠깐 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찍질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막대기가 다름 아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며 이는 우리로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함임을 공부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때론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이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우리로 단련되고 성숙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진리를 알고 있고 이 원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형제나 자매가 나를 모욕하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임을 인정하고 그 모욕을 감당코자 합니다. 다음에 또 그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에게 미소짓고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잘 대해 주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요, 그것은 올바른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물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화를 내거나 쓴뿌리를 내는 것보다는 뛰어납니다. 그와 교제를 단절하고 끝내는 것보다도 훨씬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나서서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해 보고자 하는 “육신”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나의 이 좋은 “육신”은 얼마 후 용량 부족이 될 것이고 시험의 때가 실제로 닥치면 견뎌내지 못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와 주님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만약 어떤 형제가 나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할 때, 혹은 하나님께서 내게 고통을 허락하실 때 만약 내가 진정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 모든 고통을 수용하고 견뎌내고자 할 것입니다. 약간의 불만과 분노와 절망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그래도 나를 힘들게 한 그 사람을 잘 대해 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하라고 명하셨으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과의 고난의 교제란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기 원하며 당신과 내가 서로 교제하려면 내가 당신의 손에 고통을 당해야만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그 고통을 받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다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자 원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로서 우리를 해치는 사람들에게 잘 대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로 그런 사람들을 잘 대해 주려고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잘 대해 주기를 “원하는” 자로, 그리고 그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자로 만드시려고 하십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고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관련 성경구절을 찾아서 고난과 고통에 대한 설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고통당하신 그 방식을 나로 하여금 배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결코 그리할 수 없습니다. 육신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딜지는 모르지만 그 고통을 부드러움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11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함이라. 12 나는 내가 이미 도달한 것처럼 여기지 아니하며 이미 완전한 것처럼 여기지도 아니하고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따라 가노라.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구원받은 그날부터 목적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그분은 곧바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부활 이후의 나의 모습을 이미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를 알고 계십니다.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 목표를 붙잡기 위해, 그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도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끊임없이 일하시고 계심은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저 세상에서 갖추게 될 그 모습을 이 세상에서 갖추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죄인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 만들어 내신 덕분에 자연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의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 일을 현재 주님께서 나와 여러분 안에서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보니 바로 네 가지가 주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셔서 그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선 8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지식”이 첫째이고, 둘째는 9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이고, 셋째는 10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교제”이며 넷째는 12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붙잡으심”입니다. 계속해서 빌립보서 3장 13절과 14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내가 이미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을 잡으려고 나아가 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치며 나아가노라.
바울은 다 잊고 오직 한 가지만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각, 그의 비전, 그의 친구들, 그가 했던 모든 일들을 제껴두고 좁은 길을 따라 딱 한 곳에 이르도록 밀고 나아갔습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울처럼 그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전진해 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죄들에 관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 죄들을 쫓아다닐 시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들을 추구하느라 빗나가는 법도 없을 테니 육신의 유혹에 관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 의해 시험을 당하고 미혹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기를 원하시는 그 한 가지를 우리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그것이 되기를 결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댄스홀과 바에 대해, 혹은 매춘과 마약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들을 얼마나 알아야만 할까요?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 어떤 구절에 대해 알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푯대를 향해 가고 있다면 나쁜 친구들에 관한 성경구절은 하나도 몰라도 됩니다. 이 달리기에 관해 한 구절 더 살펴보십시다. 히브리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마에 출전시킬 명마를 얻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들여 60여 년간 교배 끝에 드디어 명마를 얻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그 말을 출전시켜 우승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시합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들고 나온 안장은 다른 안장보다 5배나 큽니다. 그 안장에는 물병과 도시락과 비디오카메라와 CD 플레이어와 휴대전화가 얹혀 있습니다. 여러분은 즉시 아무리 명마라도 그러한 것을 지고 달리면 우승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말씀처럼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가장 작은 안장을 얹어 오직 기수만이 앉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큰 안장도 잘못이 아니고 덩치가 큰 기수도 잘못이 아니며 멋진 아내와 함께 시합에 나오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시합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님들과 벌이는 논쟁, 남편과 벌이는 논쟁, 아내와 벌이는 논쟁마저도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소의 사울이 행했던 것들도 다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경주자가 목적지에 다다르는 데 방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무엇에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돈을 버는 일일까요? 그 일에 올인(all-in)하고 계신지요. 물론 그것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에는 방해가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만약 사람이나 장소, 어떤 일이나 혹은 물건이든지 당신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떼어 놓는다면, 당신의 관심을 푯대로부터 떼어 놓는다면 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당신은 그것들로 인해 성령님과 대적하게 될 것이고 기쁨도 빼앗기며 행복도 빼앗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육신과 성령 간의 갈등을 가져올 것이고 이 갈등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인생을 즐기는(enjoy)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들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인생을 즐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것들을 즐기고 누리며 향유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 낚시, 여행, 원예, 야구, 테니스, 집 가꾸기, 그 외 그 어떤 것들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A)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정해 주신 그 코스를 벗어나게 하도록 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일해야 먹고 삽니다. 잘못된 것 없습니다. 그러나 직장이든 사업이든 재정적인 것이든 그 어떤 결정도 여러분을 교회 생활과 하나님의 것들로부터 멀어지도록 하지는 마십시오. 그 어떤 것도 믿음의 경주에 방해가 된다면 내려놓으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은 내려놓고 달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일, 인생, 즐길 것 등 모든 것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여러분과 저를 푯대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떼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눈을 떼는 순간 우리 안에서는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 갈등은 동료와의 갈등이 아니고 교회와의 갈등도 아니며 설교자와의 갈등도 아닙니다. 그 갈등은 여러분과 저를 푯대를 향해 한 방향으로 이끄시려는 성령님과 반대 방향으로 이끌고 가려는 육신 간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입니다.
아침에 직장에 나가시겠지요? 가십시오. 그러나 푯대에서 눈을 떼지는 마십시오. 학교에 공부하러 가십니까? 가십시오. 그러나 푯대에서 눈을 떼지는 마십시오. 가족과 휴가를 가십니까? 가십시오. 그러나 푯대에서 눈을 떼지는 마십시오. 돈을 벌기 위해 가십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푯대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떼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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