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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주님께 내어드리는 삶/마음이라는 영적 전쟁터 조회수 : 11831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22분 7초
  • 성령의 열매: 주님께 내어드리는 삶/마음이라는 영적 전쟁터
     
    오늘은 고린도후서 10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여섯 번에 걸쳐 성령의 열매에 관한 말씀들을 공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간직 되어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히브리서 2장 1절 말씀대로 “흘려보내” 버린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성령을 거슬러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성령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실은 바로 이 “영적 전쟁”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갈 5:17).
    일요일에 성령 안에서 걷고 육신을 따라 걷지 말라는 메시지를 듣지만 화요일만 되면 벌써 다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을 들어야 할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아담의 성품이 끈질기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사실 이번 이 메시지들을 증거하면서 우리의 부족한 모습 또는 가증스럽고 추악한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을 볼 때마다 한편으로는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힘”을 얻게 됩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우리가 우리의 문제들을 인정할 때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좇아 살다가 속히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할 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색”한다는 말입니다. 문제를 의식 못하고 있다면 해결책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여러분과 저는 이번 메시지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를 “완성품”이 되도록 역사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는 완성품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영적 성장을 시작도 아니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간 사람일수록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 줄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A) 우리의 부족함, 실패, 죄악된 모습을 정확히 인식해야 이것을 해결하여 합당한 열매 맺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법이지요. 영적으로 성장할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은 성장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고린도후서 10장 1절을 보십시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여기에 보니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등장하는군요. 지난번 첫 번째 메시지에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살펴본 적이 있었지요. 여기 보니 바울은 바로 그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으로 형제들을 사역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행하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여기 보니 바울을 포함한 우리 모두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육신 안에서 걷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우리, 영생을 얻은 우리,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육신 안에서 걷고 육신 안에서 행하며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다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목하십시오. 우리는 싸우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싸우기는 싸우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 “끝으로 내 형제들아, 주안에서와 그분의 강력한 권능 안에서 강건하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 중 그분의 강력한 권능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우리의 강력한 권능이 아니고 주님의 강력한 권능 안에서 강건하라고 합니다. 11절, 12절을 보십시오.
    11 너희가 마귀의 간계들을 능히 대적하며 서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
    여기 보면 우리의 싸움의 대상들은 한결같이 육신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사도 육신이 아니고 권능도 육신이 아니며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도 역시 육신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싸움은 영적싸움이요, 우리의 원수는 영적 원수입니다. 우리가 싸움을 하지 않거나 또는 싸워도 지는 이유는 우리가 육신의 에너지를 동원하여 싸우려 하나 우리의 적은 육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적은 우리를 속이고 미혹시키는 마귀의 술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인 영역에서 싸움을 해 이겨내야 합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우리가 승리하려면 영적인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오늘 이 진리를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여섯 번에 걸친 메시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영 안에서 행해야지 육신 안에서 행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합니다만 사실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제껏 다루어 온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 드릴 때 주님께서 행하시게 될 그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섯 번의 메시지 후에 드디어 우리가 해야 할 그 무엇에 도달했습니다만 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굴복시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인 마귀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 주님께 내어 드리면 주님께서 마귀를 굴복시키는 그 내용을 다루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3절과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3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걸으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 하노니 4 (우리의 전쟁무기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
    여기 보면 강력한 힘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육신에 속한 그 어떤 것도 강력하지 못합니다. 육신에 속한 무기를 가지고는 대적을 충분히 이겨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육신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어야 대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4절 뒷부분을 보니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여러분과 제 안에 그 어떤 요새들도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즉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하나님께서 강력한 힘으로 역사하시면 그 어떤 요새도 다 무너뜨려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아주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자신의 간증을 올바르게 지키고 싶어 니코틴 중독에서 벗어나려고 마음 먹은 그리스도인이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달성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과 아울러 자신의 무능력까지 다 하나님께 내어 맡겨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요새(니코틴 중독)를 부숴 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그 어떤 요새가 되었든지, 예를 들어 그것이 안목의 정욕이든 육신의 정욕이든 아니면 못된 성질이든 어떤 요새이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방식으로 무너뜨리십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육신적 노력으로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결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육신은 육신의 적이 아니고 육신은 육신과 동맹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 육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 육신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어 그 무기로는 어떤 요새든 다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구원받는 즉시로 끊어 버릴 수 있는 “망령된 행실”이 있고 어떤 것들은 점차적으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구축해 놓은 요새는 여전히 우리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우리가 아는 그것이 있다 그 말입니다. 육신의 죄들이 왜 그렇게 강력한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본성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육신의 죄들을 열거할 때마다 제일 먼저 성적인 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왜 간음, 음행, 부정함, 색욕 같은 것들이 먼저 언급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남자를 지으시고 즉시 여자를 만드신 후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결합하여 아이를 갖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욕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의 일부로 사람의 내부 안에 놓아두신 욕구입니다. 이 욕구를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까? 인간의 이 욕구를 겨냥하고 있는 온갖 것들을 인간의 육신으로 이겨낸단 말입니까? 포르노 영화, 음욕, 색욕, 성인 영화, 만화, 잡지 등 이 온갖 것들을 육신의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이것을 어떻게 이겨 낸단 말입니까?
    인간의 육신이 인간의 육신과 싸우면 육신이 분리되고 맙니다. 주님께서도 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왕국마다 황폐하게 될 것이요…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노략하겠느냐?” 그러나 육신보다 더 강력한 무기, 우리의 정욕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있다고 고린도후서 10장 4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구원받은 사람이 “나는 담배를 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성령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받은 사람이 “나는 욕을 안 할 수가 없다.”라고 하면 그는 성령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받은 자매가 “나는 남편에게 순종할 수 없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님께서는 나의 못된 습관보다 나의 육신보다 더 약한 분이시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보다도 성령님이 더 약하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술을 끊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한 고백입니다. “나는 거듭난, 구원받은 사람인데 술을 끊을 수 없다.” 이런 말은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솔직해지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는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용서하기 원치 않으니까.” 이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반대로 “나는 용서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닌 강력한 무기를 주셔서 요새들을 무너뜨릴 수 있게 한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 안에 있는 그 어떤 요새도 무너뜨리실 수 있는 무기를 갖고 계신 그분께 “우리의 무능”과 함께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왜 우리는 육신에 안주합니까? 그야말로 편하기 때문입니다. 승리보다는 패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고를 반복합니다. 죄 짓고 나서 “주여, 용서하소서.” 하는 것이 “주여,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소서.”보다 훨씬 쉽습니다.
    우리가 지난번 여섯 번에 걸친 메시지를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너무도 죄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직선적이고 분명한 방법으로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안락하고 느슨한 삶에 익숙해 그저 그러려니 하며 쉽게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늘 그랬어요.”, “이제껏 늘 그랬거든요.” 이런 식의 핑계를 대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마귀가 구축해 놓은 그 요새를 무너뜨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요새보다 강한 영적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이제 두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이 두 단어가 승리와 패배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모든 생각”(every thought)입니다. 모든 생각, 즉 우리가 “생각” 속에서 승리를 쟁취 못하면 우리의 영적 전쟁은 패배로 끝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담배를 예로 들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생각을 처리하지 못하면 결국 담배에게 지게 됩니다. 그래서 담배 생각이 나는 그 순간, 바로 그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로 가져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10분 후에 다시 담배 생각이 나면 또 그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로 가져가고 5분 후에, 10분 후에 아니 담배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그 모든 생각(every thought)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이 떠오를 텐데, 그때마다 그 생각과 상상을 사로잡아 주께 가져가 “주여, 저는 이 생각을 내 것으로 품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제 생각을 정결케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그 요새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영 안에서 행치 않고 육신 안에서 행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너무도 느슨합니다. 목사에게 여러 시간에 걸쳐 담배 끊지 못하는 이유를 대지만 하나님께는 단 1분도 “주여, 저는 담배 끊기 원합니다. 도우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친구에게 전화해서 설교가 너무도 강하다며 불평을 30분 이상 늘어놓으면서도 하나님께는 단 10초도 기도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생각을 체포하여, 사로잡아서 묶어 가지고 주님께 가져와서 “주님, 당신의 포로입니다. 가두소서.” 이렇게 하면 주님의 강력한 무기로 요새는 무너진다고 말입니다.
    성령의 검을 빼어 들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으세요. 그리고 주님께로 넘기세요. 그런데 생각이나 상상이 우리 머리 속을 지나가거나, 마음속에 떠오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로잡지도 않고 주님께로 가져가지도 않습니다. 바로 여기가 우리가 패배하는 바로 그 지점입니다. 왜 우리는 육신의 죄들을 짓게 됩니까? 그거야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생각을 하기 때문이지요. 술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그렇다면 즉시로 그 생각을 없애십시오. 그 생각을 처리하지 못하면 무너집니다. 결혼하셨습니까? 그런데 어떤 여자가 당신을 유혹합니까? 그 순간 당신의 마음속에서 “이 여자에게 응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야.”라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순간에 그 문제를 척결하십시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는 순간 다윗처럼 무너집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여자가 속아 범죄하였다고 합니다. 속았다는 말은 마귀가 던진 미끼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나갔고 마귀의 유혹과 제안을 숙고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선악과를 보고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넘어진 것입니다.
    왜 젊은 사람들이 온갖 유혹에 넘어갑니까? 온통 머리 속에,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 속에 술, 담배, 여자, 이런 것을 채워 놓고 있는 사람은 그런 것들이 눈앞에 등장하면 즉시로 걸려듭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생각 속에 욕심이 잉태되어 있는 셈이지요. 따라서 모든 생각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부들은 어떠하십니까? 설거지하고 세탁기 돌리면서 괜히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이 잘못된 생각을 즉시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우울증에 빠지고 맙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우리의 생각을 장악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우리는 그야말로 마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과 다투었다고 합시다. 아침 출근 시간 당신은 운전을 하면서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할지를 생각합니다. “그 자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지.”,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는 이렇게 나가야지.”,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할까… 아니야, 그 자가 먼저 사과를 해야 돼.” 이런 식으로 한 시간 내내 머리 속으로 생각만 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단 일분만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면 해결책을 찾을 텐데… 그저 생각하느라 시간은 시간대로 보내고 생각은 주님과 말씀에서부터 벗어나 있으니…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 머리 속에서 쓸데없는 상상(imagination)만 하는 것이 육신적인 것입니다.
    성경에 상상(imagina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약 50구절을 보면 다 나쁜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단 한 구절도 긍정적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도 모르면서 괜히 누구누구가 자기에게 화가 나 있다고 상상하거나 누구누구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상상을 하는 것이야말로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무익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누구누구는 엄청나게 육신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누구누구가 자기에게 무슨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쓸데없는 상상일 뿐입니다. 마귀는 이처럼 우리가 쓸데없는 상상이나 생각을 하도록 해서 우리로 육신적인 삶을 살도록 바라는 것입니다. 상상과 생각이야말로 우리와 마귀와의 전쟁터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도 “어제 그 사람이 나한테 기분 나빴던 것이 분명해. 이를 어쩌지, 내가 실수했나?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들로 인해 무슨 내용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 채 두세 장을 지나쳐 갑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기분 나빠한 것도 아닌데 그냥 상상 속에서 그렇게 생각이 들어 그 생각에서 또 다른 생각으로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대신 즉시 기도로 바꾸십시오. 상상대신 즉시 주님께 맡기십시오.
    제 얘기를 하나 할 테니 여러분은 어떤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차를 운전하면서 복음을 전하러 가고 있는데 차 안에는 성경이 있고 카세트에서는 설교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리 속에서 “지금 이 시대에 교육받은 사람치고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 어디 있지?”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입니다. “목사가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지 모르지만 아마 마귀가 여러분들에게도 온갖 생각들을 집어넣어 줄 것입니다. 이때 제가 즉시 이 생각을 처리해야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생각이 떠나도록 하려면 이렇게 기도하면 됩니다. “주님, 저는 당신께서 처녀에게서 탄생하신 사실을 성경 말씀 그대로 믿습니다. 이 잘못된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키오니 이 생각을 처리해 주십시오.”
    직장에서, 식당에서, 길 가다가 자극적인 옷차림의 여자들이 눈에 띄면 우리의 육신은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때 “저 여자 한 번 더 쳐다봐야지.”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 이 생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즉시로 그 생각을 처리해야지 그렇지 않고 그대로 머리속에 머물게 놔두면 우리는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상상이야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을 결정짓는 핵심입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즉시 기도하여 처리하는 대신 그대로 머리속에 담아둔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남이 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미리 대비하는 생각을 하는 대신 기도해야 하고, 육신을 자극하는 생각들은 머리속에 둥지를 틀기 전에 기도해서 처리해야 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염려하는 대신 즉시 기도하고… 즉 어떤 생각이든 다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보면 상상을 무너뜨리고 생각을 사로잡으라고 했는데 이 말씀에 순종한 적이 언제이십니까? 하나님의 지식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합니다.
    이사야 26장을 보십시오. 우리는 성령의 열매 중에 화평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화평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보십시다. 이사야 26장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생각을 주께 고정시킨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
    여기 보시면 지키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분은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십니다. 완전한 평강(perfect peace)이란 말씀이 실로 놀랍지 않으십니까? 누구를 지키십니까? 그의 생각(whose mind)이 주님께 머물러(is stayed)있는 자를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세계를 생각 속에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발적으로 생각을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고정시키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평강(화평, 평화)을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극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암과 투병하면서, 극심한 가난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평안한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신실하게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늘 생각이 주님께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는 완전한 평안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환경 가운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생각이 주님과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면 참 평안을 맛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사 26:3)에 따르면 완전한 평안은 우리가 처한 환경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생각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에 따라 주어질 수도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 자매가 병원에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둘 다 조건은 똑같습니다. 둘 다 암 투병 중이고, 최고의 의사들과 의료보험과 최고의 시설, 이 모든 조건이 동일합니다. 더군다나 두 자매 모두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가족들도 그녀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한 자매는 기쁨과 평안 가운데 미소를 지으며 안식하고 있는데 반해 다른 자매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두 자매 사이에 서서 그녀들을 쳐다보았습니다. 한 자매는 미소를 가득 머금고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간증하고 있고 다른 한 자매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토끼마냥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웅크리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한 자매는 구세주와 주님이신 그분을 생각하고 있고 다른 자매는 암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자매는 죽는 것을 생각하고 있고, 한 자매는 영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시지요? 환경과 여건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걱정, 근심, 악한 생각, 더러운 생각 이 모든 생각들 즉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생각들을 사로잡아 주님께 굴복시키면 주님으로부터 평강이라는 열매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건강과 질병을 스스로 선택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질병이 왔을 때도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머물게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번영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닥칠 때도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킬 수는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올바른 선택이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환경과 여건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thought)이 문제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3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3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식으로 가르치고 온전한 말씀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과 하나님의 성품에 따른 교리에 동의하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논쟁과 말다툼을 좋아하는 자니라. 이로써 시기와 다툼과 욕설과 악한 추측이 생기며 5 또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이득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
    여기 보니 “악한 추측”(evil surmisings)이란 말과 “부패한 마음”(생각)(corrupt minds)이란 말들이 등장합니다. 두 표현이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악한 추측이란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 형제는 나를 싫어하나 봐.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이런 식으로 의심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이유가 뭐예요?”라고 물으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 뭐 꼭 증거가 있는 건 아니구요.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거든요.” 이런 답변을 하지요. 바로 이런 것이 악한 추측이라는 것입니다. 악한 추측은 곧 부패한 생각(corrupt minds)에서 나옵니다. 언젠가 한번 지나가면서 나를 흘겨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부터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그대로 머물러 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계속해서 육신적인 상태로 머물게 됩니다. 육신을 따라 걷지 말고 성령을 따라 걸으라는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악한 추측이란 고린도후서 10장에서 보았듯이 상상과 생각 속에서 “어쩌면…(maybe) 그럴 거야.” 라고 추측하는 것을 말합니다. 확실한 사실이 아닌데 자기가 스스로 상상과 생각 속에서 그렇다고 여긴다면 진리와 사실(truth, fact)에 입각한 것이 아닌 억측이 됩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영적인 패배를 맛보며 살아갈게 자명합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자기 머리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창안(invent)해 내는 것은(참조-전도서 7:29, 특히 inventions를 주목할 것) 곧 억측에 불과합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식으로 억측을 하기 시작하면 온 교회가 육신적인 상태에 빠집니다. 문제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교제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사실과 진리에 입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상상, 생각, 느낌 즉 악한 추측에 근거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스스로를 잘 점검해 보십시다.
    “내 생각에는…”, “아마, 그런가봐.”, “그게 틀림없어…” 이런 것들은 다 악한 추측들입니다.(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 엡 4:15 참조)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서 난무하면 교회는 쪼개지고 맙니다. 설교를 듣고 나서 “이건 저 형제 두고 하신 말씀 같은데…”, “우리 편에 손을 들어 주셨다구.” 이런 식으로 상상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검을 들고 악한 추측들을 사로잡아 가지고 주님께로 가져다가 주님께서 “감옥”에 집어넣어 버리셔야 사라지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한마디, 몸짓, 어투, 기분 상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상상과 생각 속에서 악한 추측을 일삼기 시작하면 그 가정은 깨지고 맙니다.
    상상과 생각대신 기도하십시오. 상상과 생각을 사로잡아 주께 드리고 당신은 무릎 꿇고 제발 기도하세요. 빌립보서 4장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이 상상과 생각이라는 악한 추측과 부패한 생각을 그대로 둔다면, 밤새 이 생각 저 생각했던 것들을 그대로 둔다면, 아마 우리의 영적 생활과 교회 생활은 끝장날 것입니다. “오늘 그 형제가 날 무뚝뚝하게 대한 걸 보니 나를 이제는 안 좋아 하는 가봐.”, “그렇다면 나도 다음 주부터는 인사를 먼저 하나 봐라.”, “아니야, 아예 얼굴을 마주칠 때 피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니야, 나도 한마디 해줘야지. 말만 걸어봐라. 나도 쌀쌀맞게 대해 줄 테니까…”, “그 집 아이가 시끄럽게 굴면 이번에는 가만 안 놔둬야지.”, “오늘 설교가 혹시 나를 두고 지적한 것 아닐까?” 이런 식의 공상은 다 억측에 불과합니다. 모두 다 사로잡아서 주님께 가져가고 그런 공상을 할 시간이 있으면 주님께 그 형제와 그 집 아이들을 위해 축복을 하는 기도를 하세요. 있지도 않은 일을 갖고 몇 시간씩 상상의 날개를 펴지 말고, 즉시 주님께 그런 잘못된 생각들을 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성령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통제해 주시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영영 육신적인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입니다. 6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6절에서 염려(care)와 기도(prayer)는 서로 반대되는 요소입니다. 염려대신 기도하십시오. 7절을 보면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당신과 나의 평강이 아니고 하나님의 평강 말입니다. 그런데 이 평강이 우리의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생각”이 빗나가지 않도록, 상상으로 번지지 않도록, 억측으로 번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염려대신 기도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다는 이 말씀은 믿을만합니다. 이해가 안 되어도 평강이 임하면 된 것 아닙니까? 인간의 이해와 하나님의 평강 중 어떤 것이 큽니까? 하나님의 평강이지요. 여러분과 제가 상상과 생각 속에서 염려를 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을 주님께 기도로 가져가면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minds and hearts)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왜 내가 그 형제와는 잘 교제가 안 되고, 친절하지 못하고, 맘에 안 들고, 괜히 싫고 사랑하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내 마음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내 맘대로 안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때 이 모든 잘못된 생각을 주님께 가져가 기도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십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과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과 무엇이든지 올바른 것과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그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
    진실한 것부터 쭉 열거되다가 끝 부분에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그러한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think on these things). 생각이 무엇에 놓여지는가에 따라 우리의 영적 생활의 승패가 갈리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우리의 악한 추측과 상상과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드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진실한 것, 정직한 것, 올바른 것, 순수한 것…” 이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살아갈 때 영적 승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의심, 두려움, 염려, 분노, 쓴 뿌리, 이 모든 것들 대신 위에 열거된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의 생각을 가득 채운다면 곧 그것이 승리입니다. 당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저는 모릅니다.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 자주 실족하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 무너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놓이든 어떤 어려움이 닥치든 그것들을 생각하는 대신에 기도를 한다면, 곧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고 당신은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분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입니다. 저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과 추측을 하는 대신에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에 대한 저의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과 상상과 억측보다는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에 대해 생각과 추측대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서로를 위해 생각과 상상대신 기도를 한다면 우리 가운데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적 노력과 헌신으로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 보려고 애쓰고 티격태격하는 교회대신 하나님께서 각자 안에서 일하셔서 놀라운 열매가 맺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형제 자매들로 가득찬 교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찹니다.
    저는 영적 부흥에 관해 여러 책을 읽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앤드류 머레이에 의해 일어난 부흥, 웨일즈, 미국 등에서 일어난 부흥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휠씬 더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그렇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의 사역을 비롯해 주님께서는 여기저기서 그리스도인들의 수고에 축복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자유롭게 자신의 역사를 일으키신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주께서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생각대신 기도를 하십시다. 아멘!
    기도하십시다. “아버지시여!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들려주신 진리의 말씀을 우리 각자의 삶에 진지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붙드시고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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