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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성경적인 자녀 양육/하나님의 징계 조회수 : 12769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23분 6초
  • 성령의 열매: 성경적인 자녀 양육/하나님의 징계
     
    성령의 열매라는 제목으로 드리는 여섯 번째 메시지는 잠언 29장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요한일서 2장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있어 어린 자녀라고 불리는 어린 시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젖을 먹는 갓난아이 시절로도(고전 3:1) 묘사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단계로 청년 시절(young man)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시기의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강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용사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에 있어 요한일서에 나오는 세 번째 단계는 아버지(father)로서 이 단계에 이르면 하나님을 단지 아버지로서뿐 아니라 창조주 즉 처음부터 계신 그분으로 알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이후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가는 과정이 바로 이 세 단계인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나오는 어린 자녀(little children), 청년(young man), 그리고 아버지(father)라는 3단계의 성장과정을 거치기 전에 아기일 때가(baby) 있는데 이는 거듭난 직후부터 일주일, 혹은 1개월 혹은 1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갓난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 죄의 성품을 발휘하기 전까지의 기간이 있듯이 영적 출생도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직후 갓난아기일 때가 있는데 이 시기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열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때는 주님께서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지라고 하면 아마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기꺼이 몸을 던지려고도 할 겁니다. 이 시기는 구원받은 직후의 감격이 너무도 크고 강렬해서 설교 하나하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속을 파고들어 즉시로 순종하고자 하는 그런 시절입니다.
    그러다가 이 첫사랑이 점차 식기 시작하더니 빛은 사라져 가고 하나님께 반항을 일삼기까지 하는 모습이 됩니다. 이것이 영적 어린 자녀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계속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청년의 단계로 이끄시며 또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우리로 아버지의 단계에 이르도록 하시고 결국 “영적 성장”을 완성하시는 것이지요. 이 최종 목적지(end)에 도달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갓난아이에 불과하거나 어린 자녀에 불과한 그리스도인을 명령, 율법, 설교, 바로잡음, 징계, 훈계 등을 통해 다루시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로 “의”를 행하도록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어떤 명령이나 요구나 책망 없이 “옳은 일”이 옳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의”를 행하게 되는 그 수준입니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데 있어 최종 목적이 두세 살 때에는 억지로, “엄마나 아빠가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했던 그것을 30세가 되면 알아서 잘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양육하셔서 그 단계에 도달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이가 마땅히 갈 길로 아이를 훈련시켜라. 그리하면 그가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여러분 중에는 한 번도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주님께서는 그 아이가 “늙게 될” 날이 올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인간이 일곱에서 열일곱, 그리고 스물일곱이 되어 가듯이 우리의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성장과정을 우리의 영적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아이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하듯이 주님께서도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동안 같은 것들을 요구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요구를 고마워하거나 즐거워 않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그러한 반응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저는 오늘 이 메시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를 양육시켜 아버지가 되도록 만드는 과정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인 어린 자녀, 즉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아버지, 즉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워내시는 것과 어떻게 연관이 있는가를 신약성경을 통해 배우고자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원칙하에 이루어집니다.
    만약 당신이 성경 말씀에 따라 올바르게 양육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약점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 때문에 혹은 가족 때문에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이런 식의 변명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당신이 성경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는 어머니가 운전을 안 배우셨기 때문에 나는 운전할 줄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운전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제 조상들 가운데 한 사람도 선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선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모릅니다.” 이런 변명은 내려놓읍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우리가 원한다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말씀과 성령님을 통해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 당신 스스로는 결코 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자, 기도하십시다. “하늘 아버지시여, 오늘 우리를 도우시사 이 진리를 밝히시고 이것을 잘 깨닫게 해 주셔서 우리의 영적 생활에 유익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잠언 29장입니다. 세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29장 15절은 “회초리와 꾸짖음은 지혜를 주거니와 제멋대로 버려둔 자식은 자기 어머니에게 수치를 가져오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십시다. 이 말씀에 따르면 아이는 지혜없이 태어나는 것은 물론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이 지혜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성장해서 지혜를 갖춘 어른이 되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면 부모 측에서부터 먼저 무엇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꾸짖음이 지혜를 준다고 말씀하지도 않으며 회초리가 지혜를 준다고 말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회초리와 꾸짖음이 합력해서 원하는 결과인 지혜를 가져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린 아이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어린 아이는 죄의 성품을 지니고 있고 반항심이 가득하며 계속해서 반항적으로 행동하여 결국 지혜가 그 반항심을 몰아내기까지는 그런 상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심리학자보다도 어린 아이의 심리상태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책망”만으로는 어린 “반항아”를 가르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얘야. 우리 앉아서 이야기 좀 할까? 그런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빠가 말해 줄게. 자, 이제 알아듣겠니?” 이것으로만 그치면 이 아이는 곧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하고 맙니다. 반면 반항아를 회초리로만 다스리게 되면 아이는 거칠고 증오심으로 가득 차 마음이 완악해져 반항심만 꽉 채운 아이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회초리와 책망”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어 아이에게 주어질 때는 바른 길을 제시받지만 잘못된 길을 택할 경우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반항아가 가족의 명예에 먹칠을 하거나 수치를 안겨주는 존재 그 이상의 “누군가”가 될 만큼 성장하려면 이 두 가지가 균형이 잘 이루어야만 합니다.
    17절을 보기 전에 잠시 미국 역사를 한번 훑어보십시다. 1960년 미국은 히피시대였습니다. 가난하고, 더럽고, 부도덕하고, 냄새나는 젊은이들이 이 시대를 풍미했지요. 1970년대는 디스코, 프리섹스와 마약으로 얼룩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60년대의 히피와 70년대의 마약중독자들을 정죄하기 전에 우리는 1950년대의 상황을 파악해야만 합니다. 1950년대 소위 교육학 박사님들이 등장해서 당시의 부모들에게 아이들을 채벌해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었던 것을 기억해 보세요. 그러니까 1960년대의 히피와 70년대의 마약중독자들은 50년대에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어들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뿐입니까? 지금도 우리는 그때 뿌려놓은 것을 거두고 있습니다. 신학 혹은 기독교 분야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1960년 NASV(New American Standard Version)가 나오고 1962년 Good News for Modern Man, 그러더니 1970년 Living Bible, 그리고 드디어 1971년 NIV(New International Version)가 나왔는데 이들 엉터리 “성서”들이 당시의 사회 풍토(히피, 마약)와 무관치 않다는 것입니다. 히피, 마약, 엉터리 “성서들”은 결코 악을 멈추게 하거나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식” 킹제임스성경과 “구식” 교육이 필요합니다.
    잠언 29장 17절을 보시면 “네 아들을 바로잡으라. 그리하면 그가 네게 안식을 주고 참으로 네 혼에게 기쁨을 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수치대신 안식과 기쁨을 얻기 원한다면 막대기와 책망만으로는 부족하며 세 번째 요소 즉 바로잡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이 세상에 데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부모입니다. 자식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이 여러분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선택해서 이 땅에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의 결정과 행동에 의해 당신의 아이가 이 땅에 등장한 것이라면, 당연히 이 아이에게 올바른 인생길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것이 부모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자라다 보면 올바른 길을 알게 되겠지. 뭐, 아마 그럴 거야.” 이런 식의 무책임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성장할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당신은 저절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나요? 아니면 부모님께서 가르쳐 주셨나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부모들에게 “최선을 다해 자식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라”고 명하고 계십니다. “나는 애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구!” 이런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고 있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은 당신이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성장하는 것 말입니다.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 첫 번째로 막대기가 필요한데 이것은 “과거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 그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지우는 것입니다. 책망은 “미래적” 측면입니다. 이미 잘못을 저지른 아이에게 다시는 그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꾸짖고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를 얻게 될 것인지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러한 책망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올바른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거나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아이를 바로잡아 주는 일(Correct), 바로 그것이 부모된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네가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 앞으로 벌을 받지 않으려면 이렇게 행동하면 되는 거야! 알아듣겠니? 이렇게만 하면 앞으로 야단을 맞을 일이 없을 거다.” 이것이 바로잡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문제에 대해 기도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말해 주고,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회초리, 책망, 바로잡음에 이어 네 번째 요소를 살펴보십시다. 이 모든 요소들은 전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 29장 21절을 봅시다.
    자기 종을 아이 때부터 자상하게 키우는 자는 마침내 그를 자기 아들같이 되게 하리라.
    말씀을 보면 “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 제가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대상은 다름아닌 주님의 종들이지요. 문제는 주님을 섬기는 종이기는 하나 아직 “아기”(baby)에 불과한 이들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들 영적 아기들을 우리 주님 즉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되도록 성숙시키는 일입니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회초리(막대기)와 책망과 바로잡음을 사용하시며 이 모든 과정을 자상하게(delicately) 이끌어 나가십니다. 자상하게란 말씀과 회초리가 어떻게 서로 양립할 수 있는지 이해가 잘 안 되실 수도 있습니다.
    “자상하다”(delicately)는 말은 상처나 해를 입히지 않고 조심스럽게 사람을 대하거나 다루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화가 나도 회초리를 들어서는 안 되며, 성질을 못 참아 분풀이를 하려고 회초리를 들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상한 관심을 갖고 회초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상하게 아이를 양육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감정과 원하는 바를 충분히 고려하여 세심한 관심을 갖고 사람을 다룰 때 우리는 바로 “자상하다”(delicately)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빗나간 행동을 했다고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아이를 회초리와 책망과 바로잡음을 통해 고쳐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상하게”라는 이 한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아이를 친구들이 있는 앞에서 종아리를 걷어 올리게 하는 짓은 안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아이를 자상하게(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으로 그 상황을 처리해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속히 어린 아이의 단계에서 성숙한 어른의 단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번의 “바로잡음”이 필요합니다. 물론 저는 이 일이 공개적으로보다는 개인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제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시거나 경고하시기보다는 하나님과 저 사이에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바로잡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때로 “나는 내 아이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부탁을 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하셔야 할 일을 하십니다. 사실 “제 잘못을 바로잡아 주세요!” 이렇게 하나님께 요청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얘야, 너는 참으로 못됐구나. 내가 너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이런 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 우리가 아이에게 그 의견을 물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회초리, 책망, 바로잡음… 물론 “자상하게”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잠언 29장 21절을 계속 살펴보십시다.
    자기 종을 아이 때부터 자상하게 키우는 자는 마침내 그를 자기 아들같이 되게 하리라.
    주목할 말씀은 “마침내”와 “되게(become)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장기적인 과정이라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13세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다가 30세가 되면서부터는 아예 의절하고마는 경우와 15세 아이에게는 “나쁜” 아빠처럼 보일지라도 25세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훌륭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장은 아이들과의 관계가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마침내”는 좋은 관계가 될 터이니 후자를 선택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잠언 19장 18절입니다.
    소망이 있을 동안에 네 아들을 징계하되 그가 운다고 네 혼이 아끼지 말지니라.
    징계란 상처를 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잘 보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실 때 바로 이 구절대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식이 바로잡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 경우 결코 자식을 징계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기까지는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을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이 징계를 멈춘다면 당신은 자신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아이에게 가망이 없다고 증언하는 셈입니다.
    “그가 운다고 네 혼이 용서하지 말지니라.” 혹시 옛말에 “내가 너를 때릴 때 네가 상처받는 것보다 내가 더 상처를 받는단다.”라는 말을 아시는지요? 저는 그 말뜻을 모른 채 자랐습니다만 제 자식을 키우면서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자식에게 한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누가 상처를 더 받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잘 가르쳐서 반항이 가져온 결과로부터 속히 벗어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방식이 있으십니다.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막대기로 징계하시려고 한다고 합시다. 이는 나를 책망하고 바로잡아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징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만두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운다고 해서 그분이 그만두실 분이 아닙니다. “오, 하나님! 그만 하세요. 저는 못 견딥니다. 싫어요. 제발 그만 때리세요.” 이렇게 울부짖더라도 그분은 멈추시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분께 목표가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그만두시면 우리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아들과 같이 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육신은 그것을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는 그 징계마저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무리 울지라도 소용없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과정은 필수과목이야. 반드시 거쳐야만 되는 거다.”
    잠언 13장 24절엔 “회초리를 아끼는 자는 자기 아들을 미워하거니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 의견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성경을 읽어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 들지 않고 대신 “아들아, 네가 지금 살고 있는 그대로가 괜찮은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지금과 같이 살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구나.”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당신 아들에게 “가서 네 맘대로 네 인생을 망치거라. 성숙함에 이르는 것도 그만두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복된 사람이 되는 것도 그만두거라. 아빠 엄마는 상관없단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은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회초리를 내려놓고 자식들을 방치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식을 망치는 부모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중에는 “청소년 범죄”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떠들어 댑니다. 자식들을 망쳐서 범죄로 내 몬 사람들이 자신들인 줄 모르는 모양입니다.
    잠언 13장 24절에는 “그를 사랑하는 자는 어릴 때(betimes)에 그를 징계하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때(betimes)라는 말에 유념하십시오. 영어의 “be”란 말은 '빈 곳을 채운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자식들을 징계하되 하루에 8번 혹은 80번씩 징계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또는 12살까지만 징계하라든가, 당신보다 키가 커지면 중단하라든가, 요리할 줄 알 때까지만 징계하라든가 이런 식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징계는 자식의 행동이 징계가 필요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어느 때든지 징계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 자녀를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이 잠언 말씀에 따르면 당신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하던 일을 멈추고, 당신의 삶은 일시 중단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잠깐 기다리게 하고, 먼저 당신이 이 세상에 “데려온” 아들이나 딸의 미래부터 챙겨야 한단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당신의 인생에 있어 이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할 바로 그 일입니다. 잠언 23장 13절입니다.
    아이를 바로잡는 것을 금하지 말라. 네가 그를 회초리로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는 약간의 상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막대기로 머리를 때린다든가, 갈비뼈를 내리친다든가 하면 죽을 수 있으니까요. 이 말씀은 사람의 몸에는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적절하게 징계나 회초리를 “흡수”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회초리의 목적은 징계와 경고이지 상처를 내서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니까요. 14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를 회초리로 때려서 그의 혼을 지옥에서 건질지니라.
    어떤 분은 어떻게 회초리가 아이를 지옥에서 건져낼 수 있냐고 질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구원받은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당신에게 당신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살았으니 회개하고, 구원받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하셔서 당신은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당신은 그 말을 듣고 회개하고 구원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어렸을 때 부모님 말씀 안 듣고 잘못하면 벌 받을 것이라고 배웠고, 실제로 여러 번 벌을 받거나 회초리로 맞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잘못을 했는데도 회초리로 때리지 않으면 나중에 커서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대가를 치룬 적이 없으니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이 실감이 날 리가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백만 명 중 하나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지옥에서 벌 받기 싫어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분들은 잘 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째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심판과 형벌을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다 자식 손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렇지만 말 안 들으면 때리지요. 왜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실 것이라는 것을 안 믿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부모들이 하나님께서 자식들을 때리라고 말하신 것을 지키지 않고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는 신약성경으로 가 보십시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입니다.
    또 어린 아이 때부터 네가 거룩한 성경 기록들을 알았나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이 말씀에 보면 어린 아이(child)가 성경 말씀을 알고 있고 그 말씀으로 지혜롭게 되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시켜 하늘로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구원받은 사람이 가야 할 목적지가 나와 있습니다.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는 것, 이것이 완성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갓 구원받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사람, 즉 완성품이 될 수가 있을까요? 그러니까 15절에서 17절까지 가야 하겠는데 그러려면 16절을 통과해야 하겠군요. 15절의 어린 아이는 17절에 가서 어른으로 성숙합니다. 문제는 16절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말씀은 15절과 17절 중간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제일 먼저 “교리”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라는 교리가 확립되어 있는데 만약 당신이 사탕을 훔쳤다면 당신은 곤란한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이때 두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책망”입니다. 성경이 “훔치지 말라”고 말씀했는데 당신은 이 말씀을 어겼으니 이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세 번째는 “바로잡음”입니다. 책망에 이어 올바른 길이 제시되는 단계를 말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당신이 사탕을 먹고 싶으면 직장에 가서 일을 해 돈을 벌어 그것으로 사먹든가 아니면 친구에게 잘 보여 그 친구로부터 얻어먹든가, 어쨌든 사탕을 먹으려면 정당하고 합법적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먹어야 합니다. 이 단계는 단지 잘못된 행실을 꾸짖고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단계입니다. 자, 그 다음 단계 즉 네 번째 단계는 “의로 훈육”하는 것입니다. 물론 직장일을 해서 돈을 벌어 사탕을 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자, 이리와 봐라, 얘야. 아빠는 널 미워하지 않는단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까 아빠가 야단을 치고 벌을 준 것이란다. 그렇지만 아빠는 널 사랑한단다.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해 봐. 맛있는 사탕을 먹을 수 있으니까. 부엌에 가면 쓰레기통이 있는데 그 통에 있는 쓰레기 봉지를 잘 묶어서 밖에 쓰레기 버리는 곳에 갖다 버리고 새 봉지 하나를 꺼내다 쓰레기통에 잘 펴서 넣어 두면 되는 거야. 그러면 아빠가 50센트 줄 테니까 그 돈으로 내일 학교 가다가 사탕 사 먹거라.” 만약 당신이 당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훈육했다면 아주 지혜롭게 “의로” 훈육을 한 셈입니다. 잘못을 단지 처벌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칠 기회를 얻은 셈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어린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 아이에서 청년으로 영적인 성장이 진행되기 시작할 무렵 제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교리”입니다. 주님 안에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제일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교리공부입니다. “세대적 진리” 책을 구해 읽기 시작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출발입니다. 일단 교리에 관심을 갖게 돼서 성경공부에도 나오고 주일 오후 집회에도 나오고 주중에도 나오게 되면서 어떤 현상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책망받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모든 집회에서 휴거, 환란, 천년왕국, 아마겟돈전쟁 등과 같은 것을 기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집회에서는 우리의 죄를 다루기도 하고 우리의 “성질”을 다루기도 합니다. 당신은 이를 통해 서서히 어린 아이 티를 벗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어서 바로잡음이 시작됩니다. 기도생활이 시작되고 겸손도 배우고 인간관계도 바로잡힐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역사하시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당신이 누군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돼서야 비로소 당신은 아직도 어리고 많은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주목하십시오. 훈육(instruction)은 교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의”(righteousness)로 하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 교회들이 이렇게 엉망일까요? 그것은 많은 교회의 강단에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을 외쳐대고 있지만 성도들은 여전히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의 절정(peak)은 교리가 아닙니다. 성경을 믿는 성도로서(Bible Believer) 교리를 알고 책망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모든 사람을 바로잡을 만큼 성경을 알고 있어도 의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모든 과정의 최종목적지는 의로운 삶입니다. 이 의로운 삶이 이루어질 때야 비로소 우리는 청년에서 어른의 단계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른과 청년 사이에는 성경 지식에 관한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청년과 달리 그 지식을 삶에 실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12장으로 가 보십시다. 이 장을 읽어가면서 그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당신이 육신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상태로 전진하고자 하나님께 당신을 복종시키려 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나와 있으니까요. 12장 3절에서 5절을 보십시오. “죄인들이 자기를 대적하여 이처럼 거역한 것을 견디어 내신 분을 깊이 생각할지니... 또한 자녀들에게 하듯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여기서 자녀라 함은 신앙생활의 첫 단계 즉 어린 아이(children) 단계를 말합니다. 계속 성경을 보십시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징계를 멸시하지 말며…” 여기서 징계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앞서 잠언을 통해 배운 바 있습니다. 그것은 회초리 즉 막대기를 말합니다. 성경은 계속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여기서 책망이라 함은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분들로부터 말로 듣게 될 지적 사항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6절부터 보십시다.
    6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친히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느니라, 하셨느니라. 7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무슨 아들이냐? 8 모든 사람이 징계를 받으므로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너희가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
    8절 말씀에 유의하십시오. 만약 여러분 부모들께서 자식을 징계하거나 책망치 아니하면 그들은 부모 없는 사생아라고 합니다. 부모가 없어도 정부가 잠자리도 제공하고 먹을 것도 주고 옷도 주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바르게 살라는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서 8절까지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을 결코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를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때로는 징계로, 때로는 책망으로, 때로는 채찍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이 생기면 낙심하거나 멸시하거나 도망치거나 하지 말라.”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집 안에서 징계 당하는 것이 징계 없이 광야에서 지내는 것보다 낫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에게 있던 우리 육체의 아버지들이 우리를 바로잡아도 우리가 그들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우리가 더욱 복종하고 이로써 살아야 하지 아니 하겠느냐?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부모님은 항상 옳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0절에 보니 이 분들은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시고자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시려고 혹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징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고 하늘로 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징계는 그 목적이 여러분과 제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과 저로 말하자면 아마도 자식들을 징계하거나 때릴 때 화를 못 참는 그런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또는 우리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때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그 어느 하나도 나의 유익을 위하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의 모든 징계 하나하나는 결국은 나로 거룩함에 이르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참으로 합리적인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징계를 즐겁다고 하지 않으니까요.
    이제 어떤 징계도 그 당시에는 기쁘게 보이지 아니하고 슬프게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 의와 화평의 열매를 맺느니라.
    여기 보니 화평의 열매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령의 열매가 나오는 갈라디아서 5장의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 보면 단련(exercised)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운동 즉 뛰고 비틀고 뻗고, 이런 동작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복동작을 통해 단련되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를 여러 번 단련시켜서 결국은 영적인 열매들을 맺도록 할 텐데 그렇게 되기까진 고난을 많이 당할 것이다.”
    왜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줄 아십니까? 우리 주변에는 암과 투병 중이거나 자식을 잃었거나 가정이 파괴되었거나 관계가 깨어진 형제 자매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무언가를 행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징계”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잘 단련될 때까지 견디어 내라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는 늘 영적으로 아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채찍질을 잘 받아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12 그러므로 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해 곧은 행로를 만들지니 이것은 저는 것이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고침을 받게 하려 함이라.
    어린 자녀의 상태로 머물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말고 손과 무릎과 발을 곧게 세워야 합니다. 이제 한 말씀 더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이 메시지를 여러 번 설교해 왔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무엇이 하나님의 채찍질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징계요 막대기인지 확실히 이해하고 해 온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메시지를 전할 때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3절을 보면 죄인들의 거역(contradiction : '모순'이라 번역되기도 함)이란 말이 나오고 14절에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이 두 말씀을 잘 묵상해 보면 14절의 “모든 사람”에는 우리를 거슬러 거역하는 죄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의 막대기는 다름 아닌 당신의 바로 옆자리에 지금 앉아 있는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살고 함께 교제하고 함께 일하고 있는 가까이 있는 죄인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도록 허락하시고 결국 우리로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나고, 상처받고, 눈물을 흘리도록 만드십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우리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 믿는 사람이나 세상이나 마귀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는 상처를 입지 않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반드시 그런 사람이어야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뒤에서 남의 얘기 하지 말라”는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실제로 우리 뒤에서 “수군대는” 것으로 인해 상처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많이 들어도 그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해 줄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설교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반당하고, 버림받고, 속임 당하고, 억울함을 겪는 그 순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그런 사람들과 화평함을(peace) 유지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부드럽게(gentleness) 대해 주고, 선하게(goodness) 대해 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상처를 가져다 줄 사람이 우리의 성숙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남편이 옳지 않기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떠나거나, 부인이 잘못됐다고 해서 부인을 버리거나, 아빠 엄마가 완벽하지 못하다고 집을 나가거나, 교회 사람들이 당연히 갖추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교회를 떠나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손에 들고서 당신을 채찍질하셔서 당신으로 울부짖도록 만드시며 울부짖는다고 채찍을 거두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늘어진 손을 들고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서서 입술을 깨물고 견뎌내라. 그래야 네가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징계가 싫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싫고, 사람들이 제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싫고, 제 자식들에게 상처 주는 것도 싫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의 뜻이 징계 안에 들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모든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징계를 싫어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징계의 막대기만 보고 있지 그 막대기가 하나님의 손에 쥐어져 있으며 하나님께서 마음을 정하시고 목표를 갖고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징계의 폭풍이 몰아칠 때 징계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다툼이나 논쟁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가르치셔서 단지 느낌(feeling)의 영역에서 살고 싶어 하는 육신적 사람 그 이상의 “누군가”로 나를 만드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는지 아십니까? 자신의 등을 채찍으로 내리친 사람들을 위해 그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누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자신의 수염을 뽑아버린 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 누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자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친 자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까! 그분은 이런 자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도록 십자가 위에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는 못 해요.”라고 말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어릴 때와 달리 영적인 청년이 되면 강력한 설교도 하고, 마귀도 물리치고, 영적 싸움도 해 낼 것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저는 완전하게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못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철저히 구비되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딤후 3:17).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께서는 여러분들 중 한두 사람을 사용해서 제 마음을 계속해서 상하게 만드실 것이며 저를 결국 주님께 나아가 이렇게 하소연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는 그들에게 화가 납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그들을 용서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그들을 사랑하라고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계속해서 제기하시면서 저에게 회초리를 대실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에 따르면 징계는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다고 했지요. 12절을 보세요. 늘어진 손,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고 하시지요. 13절도 보면 발을 위하여 곧은 행로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징계와 관련된 요소들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괴롭히는 자, 내게 상처를 주는 자, 이런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표란 말씀입니다. 내가 이런 수준에 도달하면 마음 상할 일은 무엇이며, 그 누구와 관계를 끊을 일은 무엇이며, 그 누구에게 등 돌릴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수준에 도달했을 때 나는 디모데후서 3장 17절 말씀대로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철저히 구비된 셈입니다. 잠언 16장 7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의 길들이 주를 기쁘시게 하면 그분께서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와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참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여전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평안하지요.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 모두가 나를 잘 대해 주도록 하셔서 나로 하여금 삶을 향유토록 하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생길 만큼 나를 변화시키셔서 나로 하여금 그 삶을 향유토록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셔서 우리가 행복하게 되도록 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변화시키겠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변화되든 안 되든 너는 모두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표입니다. 자, 어머니, 아버지 되신 분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대로 아이들에게 합당한 관심을 갖고 합당한 징계를 하십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바로 동일한 방식으로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며 약간의 고통이 있더라도 그것이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상처를 받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요. 하여간 좀 혼돈스럽습니다.” 괜찮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일은 없으시기 바랍니다. 전보다는 그래도 약간 더 거룩해지고 주님을 조금은 더 닮아 가실 것입니다. 회초리에 초점을 맞추시지 말고 그 회초리를 사랑이 가득한 손에 들고 계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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