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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열매에 대한 정의/두 성품의 내면적 갈등 조회수 : 12447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25분 52초
  • 성령의 열매: 열매에 대한 정의/두 성품의 내면적 갈등
     
    우리는 현재 성령의 열매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님은 신격의 제 3위이신 분이십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하늘 왕좌에 앉아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아들 하나님(그런데 이 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들 안에 내주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성령 하나님, 이렇게 삼위일체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목적은 여러 가지이나 우리는 이번 성경공부를 통해 오직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재생산하시기 위한 그 목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들을 십자가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신 아들 하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성도 안에 살기 위해 들어오신 바 그 목적은, 그분을 십자가로 가게 하여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게 했던 그 뜨거운 사랑이 여러분과 제 안에서 넘쳐나도록 역사하셔서 우리로 다른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만큼 되도록 하시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성경은 성령의 열매들(fruits)이 아닌 단수(singular) 즉 열매(fruit)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아홉 가지는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한 열매의 아홉 가지 특성인 셈입니다. 성령께서는 한 가지 열매만 생산하시는데 그 특징이 아홉 가지인 셈입니다.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첫째 사랑, 둘째 기쁨, 셋째 화평 등등 이런 식으로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한 인격을 내 안에서 만드시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이것을 달성하시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갖추고 있는 아홉 가지 특성 전체가 자동적으로 우리 안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28절까지 보겠습니다.
    26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形象)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27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에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우선 여러분과 제가 오늘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아버지 안에, 그리고 할아버지, 또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이렇게 이어 올라간다면 결국 노아, 그리고 아담, 즉 최초의 남자인 아담 안에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게 해 주는, 즉 생식이 가능한 씨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다 아담으로부터 육체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는 동일한 성경이 필요하고, 동일한 구원 계획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동일한 죄가 모두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남녀노소에게 필요한 것은 동일한 죄로부터 해방 받아 동일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한 사람으로부터 나왔기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 1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일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과일 나무를 땅 위에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이 말씀에 따르면 과일은 자체로 번식능력이 있는 씨를 갖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12절 말씀입니다.
    땅이 풀과 자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나무를 내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에 의하면 과일은 그 안에 씨를 갖고 있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성령의 열매(fruit)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그분께서는 자신을 재생산 즉 번식시킬 수 있도록 우리 몸 안에 씨를 가지고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A)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누가복음 8장 5절을 보면 씨 뿌리는 자가 자기 씨를 뿌리러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이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전서로 가겠습니다. 1장 23절입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born again)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
    저는 과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구원받고 싶습니다.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을 인하여 저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말씀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새로운 출생 즉 거듭남(다시 태어남)이라는 두 번째 출생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제가 첫 번째 출생했을 때는 단지 인간의 형상을 따라 인간으로서 태어났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출생, 두 번째 출생, 영적 출생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지금 읽은 베드로전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여러분과 저는 인간의 씨로부터 얻은 육신의 몸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썩을 씨이기에 부패될 그날을 향해 하루하루 전진해 가고 있으며 결국 육신은 완전히 썩어질 날을 맞게 됩니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쩌면 의학기술을 동원하거나 잘 관리하여 썩음을 미루어 볼 수는 있겠으나 완전히 멈추게 할 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 육체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태어난 또 다른 나가 들어 있고, 이는 새사람이라 불리며 썩지 않을 씨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겉사람(육신)은 날마다 쇠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매 순간 새로워진다고 합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는 ‘나’를 내 안에 지니고 있는 반면 내 겉사람은 이 새사람과 하루도 같이 지내기 힘든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전혀 공통점이 없으니까요. 요한일서 3장 9절의 “하나님께로 난 자”는 여러분이 쳐다보고 있는 나의 겉사람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나의 겉사람은 하나님께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의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나는 겉사람인 동시에 속사람 그러니까 둘인 셈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두 사람입니다. 이 둘은 서로 논쟁을 벌이고 다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한일서 3장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5절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서 물에서 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과 저의 겉사람 즉 볼 수 있는 육신에 대한 것이고, 또 성령에게서 난다고 한 것은 속사람에 대해 언급한 것입니다. 말씀에 의하면 두 번의 출생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 6절에 “육신에서 난 것은 육이요”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이 보고 계신 저는 제가 거듭난 20년 전의 육신과 똑같은 육신입니다. 이 육신은 제가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육신이며 여전히 죄로 가득하고, 여전히 천하고 반역적이며 처음부터 그랬듯이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모양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육신은 여전히 육신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난 것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그것이 썩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하여 지옥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면,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구원받은 때부터 하늘나라 가기까지 그 사이에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느냐입니다. 이 둘 사이에 우리에게는 가족, 직업, 교회, 이웃, 사회 등등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놓여 있습니다. 이 기간을 살아가는 동안 구원받은 우리는 육신과 영 사이에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 둘 사이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육신대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과 제 안에는 아담의 씨가 들어 있기에 따라서 아담의 생식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즉 아담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씨가 내 안에 거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재생산하는 생식능력을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제가 하나님이라든가 여러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보여주시는 속성을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생산하시고자 하는 열매를 생산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길 때 가능한 일입니다.
    창세기 1장으로 다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일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과일나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오렌지는 오렌지 씨앗에서 나오고 멜론은 멜론 씨앗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아담을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재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이 다 들어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든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디도서 2장 11절을 보면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11절 말씀은 구원받기 전 우리의 모습에서 구원으로 넘어오는 단계를 보여줍니다. 그 다음으로 13절을 보십시오.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늘로 가게 될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구원도 못 받았던 내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13절에서는 이제 구원받은 내가 주님께서 나를 하늘로 데려가실 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12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이 구절에 따르면 여러분과 저는 이 현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우리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육신이 아닌 영 안에서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세상적인 일들에 관해 왈가왈부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비록 구원은 받았으나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것들을 부인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즉시 비판합니다. “도대체 어째서 저런 짓을 하는 건가? 저렇게 세상적이고 육신적이며 속될 수가... 상종하기가 힘들겠구만.”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런 식의 비판 역시 육신적일 뿐입니다. 우리 안에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 안에서 역사하셨던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시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것처럼 우리가 살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십시오. 이 말씀에 우리는 몇점이나 나오는지 스스로를 평가해 봅시다. 7장 16절부터 보겠습니다.
    16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썩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육신의 일들”은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영적인 체 해 보아도 당신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육신적인 일들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는 말씀에 따르면 씨앗을 심을 때 그것이 무슨 나무인지 몰라도 나중에 가지가 나오고 열매를 맺게 될 때 결국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는 다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성령께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쳐서 바르게 살도록 해 주시지 않으면 결국 우리의 열매는 나쁜 열매로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분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열매 역시 좋은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야고보서 3장 6절에서 10절입니다.
    6 혀는 불이요 불법의 세계라. 이와 같이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하나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자기도 지옥불 위에 놓여 있느니라. 7 모든 종류의 짐승과 새와 뱀과 바다에 있는 것들은 길들일 수 있고 또 사람이 길들여 왔으나 8 혀는 아무도 능히 길들이지 못하나니 그것은 다스릴 수 없는 악이요 죽이는 독으로 가득한 것이니라. 9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곧 아버지를 찬송하며 또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을 저주하느니라. 10 같은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니, 내 형제들아, 이런 것들이 결코 그래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미스터 아담과 미시즈 아담 즉 아담의 후손은 그 누구도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혀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동시에 혀는 또 사람을 저주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끔찍합니까? 동일한 혀가 때로는 아담의 본성을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동일한 혀로 하나님을 찬송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들에게 “나는 정말 네가 미워!”라고 쏘아대기도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형제를 보고서 “반갑습니다! 형제님, 잘 지내시죠?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때론 “형제가 내게 그런 식으로 하면, 두고보라고 나도 똑같이 해 줄 테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혀로 어쩌면 이렇게 달리 사용할까요? 금방 상냥하게 말하다가 순식간에 독설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혀란 말씀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두 명의 ‘나’가 존재하고 있으며 둘이 동일한 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도 내 안에서 이 혀를 사용하려고 하고,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도 이 혀를 사용하시려 하니 내가 누구에게 혀를 내어주느냐에 따라 즉 우리 인생의 주인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 저는 목소리를 높여 단상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오,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주께로 나와 그분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화를 내며 내게로 와서 침을 뱉으면 내 혀는 당장 “당신 같은 자는 지옥에나 가야 돼! 그렇구 말고!” 이렇게 쏘아댑니다. 통제가 안 되는 것이 혀라는 하나님 말씀이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이미 이런 경험들을 했을 겁니다. 계속해서 야고보서 3장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11 샘이 같은 곳에서 단물과 쓴물을 내느냐? 12 내 형제들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 혹은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있겠느냐? 그와 같이 어떤 샘도 짠물과 민물 둘을 낼 수 없느니라.
    인간은 참 묘한 존재입니다. 단물이 내 입에서 나오는가 하면 쓴물도 내 입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재능을 발휘해 하나님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동시에 우리의 능력을 발휘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육신과 영, 아담과 하나님, 옛사람과 새사람이 하는 갈등의 모습을 방금 읽은 야고보서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2절에서 16절로 가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15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지으리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내주어 순종하게 하면 너희가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2절 “못하게 하라”, 13절 “내주지 말라”, 14절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임이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권능(power)을 주셨고, 능력(ability)을 주셨으며, 결정할 “기회”도 주셨습니다. 우리 안의 “아담”은 우리를 강요해서 죄를 짓게 하지 못하며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올바르게 살도록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담을 좇아 죄를 택할 것인지 성령을 좇아 주님을 택할 것인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서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중간 지점에서 육신의 길이 아닌 성령의 길을 택하고 우리 자신을 성령님의 통제에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를 의의 병기로 만드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대 방향을 택하여 육신 쪽으로 기울면 성령께서 슬퍼하시게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육신이 우리를 지배하거나 능력을 행사하여 우리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육신 쪽을 택할 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므로 슬퍼하십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께서 나의 아담의 성품에 통제권을 넘기시는데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일지라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무슨 짓이든 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주님께 드려 주님께서 우리를 통제하여 올바르게 살 수도 있고 반대로 통제권을 육신에게 내어주어 육신의 일들을 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문제의 초점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랑, 화평, 믿음… 이 모든 성령의 열매를 내가 맺을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내가 맺기를 원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내가 진정 이것을 원한다면 그분께 내 자신을 내어드릴 것이고 그리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열매를 맺으십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관건입니다. 자,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3절을 읽겠습니다.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19절에 보니 간음, 음행, 부정함과 색욕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성적인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로마서 6장) 이러한 죄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러한 죄를 짓게 강요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즉 내가 원하지 않으면 간음은 저지를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인터넷 포르노에 눈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분야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의(義)의 방향으로 향하게 할 것이요, 그리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런 죄들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의 의지를 확인하시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20절에 보면 우상숭배와 마술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영적인 죄들입니다. 이런 죄들은 우리를 강요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상숭배나 마술 등을 실행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보지만 제가 원하지만 않으면 그들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 역시 원하는 사람에게만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증오, 불화, 경쟁, 진노, 다툼, 폭동, 이단파당, 시기, 살인, 술 취함 등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개인적인 죄들로 이 모든 것들 역시 자신이 그 죄를 택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증오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행한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당신이 그를 미워하기를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스스로 증오를 택한 셈입니다.
    이단파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 거짓교리와 연관시키지만 실은 이단파당(Heresy)이란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주님의 몸의 분열을 획책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그 누구도 당신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면 얼마든지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죄들은 인간관계와 관련된 죄들로 만약 우리가 우리를 성령께 내어만 드리면 누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든, 무슨 말을 했든, 어떻게 대했든 전혀 상관없이 이 모든 죄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담은 결코 이것들을 사용해 나로 하여금 죄 가운데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죄는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술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술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약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약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이 마약을 원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술을 권하거나 마약을 권할 때 당신이 “안 돼!”라고 말하고 당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면 하나님의 영께서 승리를 가져다주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술과 마약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마음을 빼앗겨 당신의 몸을 그쪽으로 내어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반대쪽을 살펴보겠습니다. 22절에 보면 “사랑과 기쁨”이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 살펴본 간음과 음행의 반대가 곧 사랑이라고 하나님께서 대비해 놓으신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셔서 영원토록 당신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루나 한 주 혹은 한 달이나 일 년 정도 지속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육신은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을 추구하나 성령께서는 사랑과 기쁨을 추구하십니다. 세상은 온통 더러운 것들과 색욕에 대해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는 영원한 기쁨과 사랑과 화평이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은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를 가져다주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좋은 화평이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인들이 섬기는 신은 종교인들을 죽음으로 협박하고 위협하여 강제로 자기를 경배하고 섬기게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모든 것을 자신의 몸에 지시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아닌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육신의 일들 중 불화, 경쟁, 진노, 다툼 등과 대비됩니다. 아담은 자기가 잘못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그만두지 못하고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오래 참으시고 하나님께 잘못 행하는 자들에게도 선하시고 부드러우신 분입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께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 보응하셨다면 저는 이미 오래 전에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의 열매는 믿음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것들은 어떤 것들과 대비될까요? 여러분 알코올을 반대하는 단체에서 사용하는 표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절제”(temperance)입니다. 왜냐하면 술과 마약은 사람들을 제정신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올바른 정신을 허락하셔서 “절제”하도록 해 주십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시점부터 하늘나라에 가는 시점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육신의 통제하에서 마치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살 수도 있고 반대로 성령님의 통제하에서 아무리 이 세상이 부패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23절도 보면 “이 같은 것을 반대할(대적할) 법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성적인 죄들을 금하는 수많은 명령들이 있고, 성적인 죄들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많은 실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내 삶을 통제하셔서 내가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나는 그 어떤 명령도 경고도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당신의 아내를 취하거나 당신의 딸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에게 이런 명령(계명)이 필요없음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성령께서 그것은 제가 할 짓이 아님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아담의 성품은 너무 부패해서 제약을 가하고, 재갈을 물려 봉쇄를 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아담들”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속박에서 해방시키고자 오셨습니다. 만약 오래 참음이 늘 나와 함께하고 온유함이 내 마음을 장악하고 있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그 어떤 규범이나 명령도 필요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잘 대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15절로 가겠습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2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을 세우면 13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날 터인데 그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14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고 15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여기 보면 그 일이 얼마나 많으냐가 포상의 기준이 아니고 그 일이 어떤 종류이냐, 즉 양이 아닌 질이 포상의 기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으므로 하늘로 가게 될 터이나 그곳에 가게 되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출두하여 이 세상에서 내가 행한 일들이 어떤 종류의 일인가를 판정받게 될 것입니다. 아담 즉 옛사람에 의해 행해진 것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 다 타버릴 것이요,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신 것들은 그대로 남게 되어 그에 대해 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 하늘나라에서는 오직 주님만 찬양을 받으시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오직 주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신 것들만 보상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 그분께서 하신 것이기에 당연히 그분께만 찬양이 돌아갑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전도지도 나누어주고 그 밖의 많은 봉사들을 다 하십시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그것들 중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 일만이 보상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셔서 우리 안에서 자신이 직접 일하심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에게 사랑과 기쁨과 화평을 만들어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취하셔서 자신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자,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제 안에는 우리를 죄로 사로잡아 가는 그 무언가가 들어 있어서 우리가 그 죄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얼마 안 있어 즉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그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결국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바울의 고백 아니었습니까?
    내 지체 안에서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
    결국 이런 상태에서는 절망감이 엄습하고 바울의 절규가 터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악순환이야말로 아담이 빠져든 함정이요 평생의 올무인 것입니다.
    단지 아담이 한 것이라곤 죄에 기댄 것뿐인데 그 놈의 죄가 아담을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담이 승리의 방향으로 기울여 기대는 순간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사로잡아 성령의 통제하에 두시고 우리가 원하기는 하나 할 수 없는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능하게(enabling)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방향으로 기대실 건가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분과 저는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아담처럼 죄의 법 아래에서 살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의존하려고 마음 먹으신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뜻이니까요. 그것이 그분께서 갈망하시는 바입니다. 주여, 저희를 도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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