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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 개관- 사랑 1 조회수 : 12520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9년 5월 1일 18시 28분 56초
  •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 개관- 사랑 1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은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고 주님께 내어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서 맺으시는 열매로, 이것은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애쓰고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맺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예배와 기도회를 아무리 열심히 참석하고, 아무리 열심을 내도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지 않는 한 맺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계신지요. 아니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제하시도록 온전히 허락하셨나요? 여러분의 인생은 주어진 환경과 상관없이 기쁨이 넘치십니까? 아니면 환경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지속적으로 마음에 평안을 지니고 계시나요?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허락하시든 상관없이 오래 참고 계십니까? ‘선함’에 대해선 어떠하신가요? 혹시 상황에 따라 여러분의 행동이 바뀌지는 않습니까? 믿음에 대해서는 어떠하신가요? 주님을 항상 신뢰하십니까, 아니면 종교적 열심만 내고 계십니까? 온유에 대해서는 어떠하신가요? 주님께 공손히 복종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어떤 위치에 두시든지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나요? 또한 항상 성령님의 통제하에 자신을 두고 계십니까? 다시 말해서 절제하고 계시나요?
    아마 이 아홉 가지를 열거하는 동안 여러분과 저는 우리하고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성령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이것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공부의 목적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더 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 그것을 하시도록 삶에서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을 위한 우리의 열심과 수고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허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요즘 수적으로 성장을 해 왔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단지 인간적인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 일이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증거는 새로 늘어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잘 정착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수적으로는 늘어났는데 영적으로 성장하지 아니한다면 그 결과는 불보듯 끔찍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즉 죄인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영적 소경을 영적으로 눈 뜨게 할 수 없고, 교만한 자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죄인을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성도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 3장 3절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
    이 말씀에 의하면 구원받은 성도라도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처럼 어리석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곧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이 말을 듣고 오해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인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놀라시겠지만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는 거짓말에 능한 자도 있는데 눈 깜짝도 안 하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해댑니다. 설마 하실지 모르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아내를 학대하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여자 중에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무시하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구원받은 사람 중에는 담배와 술에 중독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날까요? 이는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 그저 휴거만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구원과 휴거 사이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오로지 구원과 휴거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작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결코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우리를 단지 하늘나라에 데려 가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맞는 말이며 성경이 주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목적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구원받은 결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즉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구원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람들은 종종 이 말씀 중 일부만 뽑아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왜곡하여 인용하지만 본문은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대상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구원받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그분의 아들처럼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은 그 시점부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도록 만들어 간다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따르면 구원받은 것이 성령님의 역사요 작품이듯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드시는 것도 역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주님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구원받은 후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자신의 상황에 자족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목적을 잊고 있는 자요, 성령님의 역사에 저항하고 있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에 만족하여 더 이상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성령을 억누르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사랑으로 권면하고 때론 책망할 때 그것을 우리가 거부한다면, 그 역시 성령을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들인데 이런 것들을 거절한 채 “나도 구원받았다구. 나도 성경을 읽고 교회도 다니고 주님을 섬긴다니까?” 이렇게 자신을 내세우기만 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육신을 동원하여 성령의 열매는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을 보시면 “그러나(But) 성령의 열매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말이 등장하는 이유는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여러분 간음이 무엇입니까? 간음은 결혼생활의 실패를 뜻합니다. 모든 간음 행위는 당사자의 결혼 실패의 증거가 됩니다. 육신의 행위의 첫 번째가 간음이라면(19절),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22절) 왜 남편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같이 눕는 것일까요? 이는 그들이 성령 안에서 걷지 아니하고 육신 가운데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행위는 구원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19절을 계속 보십시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육신의 행위는 숨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을 보면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이 등장합니다. 셋 모두 성적 부도덕에 관한 것들입니다. 창녀짓이든, 자위행위든, 동성애든, 음란물이든, 비디오 혹은 잡지든지 간에 다 성적으로 타락한 것들이요, 육신의 행위인 것입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를 보면 이와 대조적으로 기쁨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성적인 쾌락을 찾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삶에 참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돈이나 고급 승용차라든지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욕망을 육신적인 노력으로 끊어보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런 육신적 욕망은 오직 성령께 우리 자신을 순종하여 내어드릴 때 성령께서 제어하실 수 있을 뿐입니다. 즉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면 성령께서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심으로 육신이 일할 기회를 차단하십니다. 우리는 얼마 동안은 담배를 끊을 수 있고, 욕지거리를 중단 할 수 있고, 성질을 참을 수 있으며, 우울증을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처럼 육신의 행위들을 육신적 노력으로 이겨내려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육신적, 성적 부도덕은 오직 성령의 열매인 기쁨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emulation)과…” 여기서 경쟁이란 말은 원래 이런 의미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형편없음을 보고 실망해서 다른 사람처럼 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처럼 옷을 입고 다른 사람처럼 따라서 행동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파당 등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세 번째 열매인 “화평”과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허락하신 참 화평을 누린다면, 이런 것들과는 쉬이 결별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구원받은 사람 중에는 이 화평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다 육신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이 열매는 오직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께 복종시켜 우리 자신을 성령의 통제하에 내어 맡길 때만 맺힙니다.
    문제는 이것을 오늘날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등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 이런 일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더 열심히 합니다. 여러분도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없이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없이 많은 사람이 이런 일들을 잘 해 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혹은 내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되니까… 이러한 동기로 한다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 힘으로 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그 어떤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 힘으로는 만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열매가 우리 삶에서 맺히려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가지의 영광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영광도 없고 가지의 존재 의미도 없습니다. 열매는 가지가 맺긴 하나 자기를 위해 맺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주인을 위해 맺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실상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를 돌며 복음을 전해 그리스도께 많은 사람들을 인도했다고 한들 그 일들이 내적인 열매없이 이루어졌다면 그 사람은 그저 자신의 목표만 달성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잃어버린 혼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복음을 전파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기는 하나 따서 다른 사람들이 먹고 즐기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가지는 열매를 맺지만 그 열매가 가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열매 맺기를 원치 않는 줄 아십니까? 열매는 자기에게 전혀 이익이 없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은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아.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라고 한다면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가 봐야 뭐 별로 재미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데 뭐.” 이렇게 생각한다면 여전히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내가 거리설교 안 한다고 뭐 달라질게 있겠나…”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육신 가운데서 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들의 범위 정도를 스스로 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육신의 행위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으면 그 열매를 맺은 가지가 먹는 것이 아니고 그 주인이 그 열매를 따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기계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살아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행위를 강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합니다. 열매란 조용히, 차분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것으로 우리의 내적 생명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무가 열매 맺으려고 애쓰거나, 수고하거나, 땀 흘리는 것 보셨나요?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도록 나무는 자신을 내어드려 자연스럽게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정원사는 나무에 거름도 주고, 가지도 치고, 온갖 정성을 다해 가꿀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열매는 나무 자체가 맺습니다. 정원사는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울 수 있으나 열매는 나무가 맺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절을 유의해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에 유의하십시오. 누구의 열매입니까?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5장과 누가복음 6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주제에 대해 분명한 무언가를 보여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도다. 2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3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끝부분에 주목하십시오. 환난도 기뻐한다, 정말입니까?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저는 환난을 통과해 본 적이 있어 그 결과로 적절한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요? 앞에 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가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 이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휴거 때까지 여전히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계속해서 로마서 5장 3절에서 5절을 보겠습니다.
    3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여기 보면 “아직”이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즉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께 반역하고 원수노릇을 하고 있던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반역하고 죄를 짓고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이 사실이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 사랑을 우리에게 넓게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shed : 뿌리다. 눈물, 피 흘리다)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동일한 사랑이 네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노라.” 즉 우리가 죄 짓고 반역하고 있는 그 순간에 우리를 대신해 피 흘려 죽으신 바로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넘쳐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행실과 언어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는다면, 우리는 영 안에서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적으로 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얼마나 자주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우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이런 고귀한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졌으니 그 사랑이 성령님에 의해(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방으로 넓게 퍼져나가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원치도 않으며 심지어는 그런 기도조차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내 육신은 “환난”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 없는 사랑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라면, 누군가가 나에게 죄를 짓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내가 그런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6장을 보십시오. 이 시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천연적으로, 즉 본성에 따라 저절로 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하라.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행한 것을 그대로 되받아친다면, 즉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욕했을 때 여러분의 첫 번째 반응이 욕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때릴 때 여러분도 동일하게 그 사람을 때린다면, 여러분은 육신 가운데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잘 대해 주면, 여러분도 잘 대해 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여전히 육신적인 행동입니다.
    반대로 누가 내게 어떤 식으로 대하든 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대로, 혹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대하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가 행동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형성되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나의 행동원칙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 대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해 주셨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의롭지 못하던 때에도 햇빛과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고 의롭게 된 지금도 여전히 햇빛과 비를 내려 주십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일관성 있게, 변함없이 저를 선하게 대하고 계십니다. 이에 비추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꾸준히 선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영적이지 못한 상태, 즉 육신적인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 누가복음 6장 3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내게 잘 대해 주는 그 사람에게 잘 대해 준다면 이것은 내가 거듭나기 전 하나님을 모를 때에도 할 수 있었던 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에게 신사적으로 대하는 사람을 내가 신사적으로 대한다는 사실이 나의 거듭난 생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왜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까요? 이는 내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친절하지 않고 호의롭지 않은 자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호의를 베푸는 일이 그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것 역시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거듭나기 전, 즉 주님을 알기 전 가지고 있던 본성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났다고 해서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께서 우리의 자아로 인해 이 육신을 처리하지 못하심으로 우리의 육신적인 모습이 불쑥 튀어나오니 이처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33절과 34절을 보겠습니다.
    33 너희가 너희에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34 너희가 어떤 자들에게 받기를 바라며 빌려주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준만큼 받으려고 죄인들에게 빌려주느니라.
    누가복음 6장 32절, 33절, 34절 모두가 자아에 근거해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아는 이런 식으로 반응합니다. 즉 “네가 나에게 잘해 줘. 좋아, 그렇다면 나도 잘해 주지.”, “네가 나를 사랑해? 좋아, 나도 사랑해 주지.”, “네가 나에게 밥을 산다고? 좋아, 나도 밥 한 끼 살게.” 이런 방식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세상적인 유치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35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리니 그분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시니라.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처음 나신 분이 되도록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예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에 보니 우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는 때가 있으니 다름 아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할 때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이 행한 그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대해 주신 그 방식대로 그들을 대하기 시작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에는 쉽지만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기적인 생명으로 태어났기에 그렇습니다. 35절 끝부분과 36절을 보십시오.
    35 그분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시니라. 36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같이 너희도 긍휼을 베풀라.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만약 죄를 범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기를 바라십니까? 당연히 긍휼을 베푸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형제를 벌 주시고 징계하시고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진실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로 하여금 육신으로 할 수 있는 그 차원을 넘어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온전한 통제하에 놓이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교회는 설교도 뛰어나고 성경공부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많은 것들을 배워 나갑니다. 주일 낮, 수요일 저녁, 토요일도 빠지지 않고 나갑니다. 놀라운 지식도 얻고 난해 구절들에 대한 해석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얻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얼마 후 점점 지겨워지고 지루한 순간들이 닥쳐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모든 과정 동안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않은 채 온갖 지식만 채웠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우고 보니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부족한 것들이 눈에 띄고 결국 비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내가 예배와 성경공부와 기도회와 거리설교와 기타 모든 모임에 참석하고 봉사와 섬김에 있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셔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했다면, 결코 지루함이나 지겨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런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이 무궁무진합니다. 허나 이 모든 일을 지루하게 느끼셨다면 여러분은 육신적인 것입니다. 교회생활이 지겨우신가요? 못마땅한 면만 자꾸 눈에 들어옵니까? 그렇다면 여지없이 여러분은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도무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실은 내 교회 형제, 자매도 그렇게 사랑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더 많은 설교를 들어야 하고, 더 많은 성경공부,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오해와 더 많은 비방, 그리고 더 많은 박해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육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형제 자매들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는 일이 힘들고 지칠 때는 우리는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다보면 받는 사람이 별로 없을 뿐더러 흘깃 쳐다보거나 비켜가거나 심지어 이런저런 말을 던지기도 합니다. 반응이야 어떻든 간에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일이 내 마음을 흥분시키고 기쁨과 감사가 마음 안에 있다면 당신은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당신은 당신의 “자아”를 위해서 전도하거나, 실적이나 의무감에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주고 싶은 뜨거운 마음에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렸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입니다.
    그때에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기름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아무것도 예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일부를 보내라. 이 날은 우리 주께 거룩한 날이니라. 너희는 또한 슬퍼하지 말라.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끝부분을 주목하십시오. “주의 기쁨(the joy of the LORD)”이 너희의 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로마서 5장 5절에서 하나님의 사랑(Love of the God)이라는 표현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주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절에서는 성령의 열매(fruit of the Spirit)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인 노력으로 기쁨을 얻으려 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얻어낸 인위적인 기쁨을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상황이 바뀌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즉 슬픈 일이 닥치거나 원수들이 조롱하더라도,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다가 나쁜 일이 생기면 슬퍼하고, 대접 잘 받으면 기뻐하다가 누가 조금이라도 섭섭하게 대하면 화를 내는 건 다 육신적인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기쁨이 나를 통해 표현되어지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괴롭고 힘들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사역이 힘들 때도 간구할 수 있으며, 병이 들었을 때도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심과 그분의 은혜를 기뻐하고 사랑으로 돌보심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육신이 결코 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우리의 기쁨이 아닙니다.
    시편 18편 34절, 35절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주목하십시오. 사실 다윗은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사자를 죽였고, 적장을 단숨에 물리쳤던 전쟁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발과 아비가일 사건을 잘 알고 계시지요? 다윗은 나발이 자기 부하들의 요청을 거절하자 즉시 칼을 차고 나발과 그에게 속한 자들을 죽이려고 떠납니다. 육신 가운데 있는 다윗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반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영적으로 올바른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영 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다윗은 육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의 다듬어지지 않은 육신적인 성질이 그대로 표출되어지는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시편 18편 34절, 35절로 가겠습니다.
    34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내 팔이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도다. 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부드러움(gentleness)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
    전쟁을 배우고 활도 부수며, 사자도 죽이고 곰도 찢어 죽이고, 골리앗도 죽이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을 크게(위대하게) 만든 것은 이러한 용맹이 아니었습니다. 35절 끝부분에 주의 부드러움(thy gentleness)이 다윗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누구의 부드러움입니까? 다윗의 부드러움이 아니고 주님의 부드러움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용맹을 보이며 힘을 과시한다고 해서 위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셔서 역사하실 그때에 우리가 위대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 하나님의 사랑, 주의 기쁨, 주의 부드러움….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성품을 내 안에서 재생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내 보이실 때 여러분과 저는 그분과 같이 닮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 즉 예수님의 평안에 주목하십시오.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화평 곧 평안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냥 화평(peace)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평안(my peace) 즉 주님의 화평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의 죽음을 통보받는 순간, 아니면 건강검진 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또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 발생했을 때 두려움과 불안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통제하고 있는 사람은 그분의 화평으로 인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주어질 때 우리가 노력한다고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 그분이 우리를 장악하고 계실 때만 우리는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 26절을 보십시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으며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26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지도 모르고, 우리는 어떻게 평안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며 또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다고 하십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어떠한 요구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착각을 합니다. 교회의 회원도 늘어나고, 헌금도 늘어나고, 구령도 잘 되고, 한마디로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기대하고 계신다면 당신은 육신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분의 성품 즉 성령의 열매를 우리를 통해 재생산하셔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도 사랑하고 괴로운 상황에 쳐해도 기뻐하며 거칠게 구는 자들에게도 부드럽게 대해 주고 슬픈 일이 닥쳐도 화평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부탁을 하고자 합니다. 이번 주제에 대해 공부하는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 보겠다든지 죄를 끊어 보겠다든지 새롭게 변화를 시도해 보겠다는 이런 결심이나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단 한가지, 오직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장악하시고 통제해 주시도록만 기도하십시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이것저것 다 내려놓고 오직 한 가지만 기도하십시다.
    “주님 저를 장악하셔서 주의 통제하에 두시고 저를 통해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바 그것을 이루소서.” 오직 이 한 가지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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