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신 존엄성을 위한 선물인 '자유 의지'로 스스로 믿는 것이며, 그런 의지를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셔야만 구원이 가능한 것이니, 어쩌면 시간에 따라 순서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차원에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동시다발적이고 입체적이며, 그럼에도 모순이 아닌 합리적인 은혜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믿었다고 아무도 자랑할 수 없는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칼빈주의도 절름발이 이론이 되는 것이겠지요.
2011-03-03 10:13:33 | 김재욱
이 글은 "믿음은 성령의 열매다."에서 제가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오해가 있을까 하여 순전히 저 자신을 해명하려는 의도에서 쓰기 시작한 글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올리지 말까하다가 이왕 쓴 김에라는 생각에, 그리고 회개와 믿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적받아서 제대로 배우기 위해 올린 글입니다. 제대로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그것에 대해 주위사람에게 말할 때 잘못 알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 없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믿음은 성령의 열매다."라는 글을 쓴 이유는 김문수 형제님의 글에 회개가 없이 믿기만 해도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있어서가 아니었고, 참 믿음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것도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서 2:8,9에 나오는 믿음과 갈라디아서 5:22,23절에 나오는 믿음이 둘 다 같은 때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쓴 것이었습니다.
2011-03-02 22:52:25 | 김양규
아멘입니다. 얼마나 큰 주님의 은혜로 믿게 되었는지요.
그런데 또한 구원받은 이후 오랜 세월 성령의 열매가 없는 것을 제 힘으로 맺으려 헛되이 노력하고 있었더군요.
어느날 믿음을 포함한 성령의 열매등은 내안에서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제가 저도 모르게 헛되이 노력하고 있는 순간들을 점점 알게 되었고
주님은 주님에게서 기원한 것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히 부어주시기를
우리가 원하시길 바라시고 또 우리가 요구하시길 바라신다는 것을 깨닫고
제 힘으로 헛되이 노력하는 것을 멈추고
단순히 주님께 (예수님의) 믿음을 주시라고 성령충만하게 해주시라고 구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믿음이 많아지고 성령님의 열매가 제 안에 생기는 것을 차츰 경험하게 되더군요.
무엇보다 이러한 말씀의 깨달음과 경험은 순수한 킹제임스 성경말씀이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일곱번 흙도가니에서 단련한 은같이 순수한 말씀을 그대로 믿을 수 있고, 또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만일 개역성경을 잡고 있었다면 얼마나 헤매었을까합니다.
아! 정말 많은 분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바랍니다.
2011-03-02 20:35:05 | 김선희
예, 저역시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삶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지지 않고 그 증거가 드러나지 않는 믿음(헛된 믿음일까요)이 교회에 너무 많은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형제님께서 김 문수 형제님의 "은혜로 믿게 되는가..."의 글을 혹 말로만 믿기만 해도 구원받는다는 주장으로 오해될까봐 글을 쓰셨고
또 구원받는 순간의 사람의 자유 의지로서 믿는 것과 성령의 열매로서 나타나는 믿음의 구분이 정확히 안되어 있어서
참 믿음의 중요성을 설명하시려다가 무조건적 선택설을 지지하게 되는 오류를 보이신게 아닌가 합니다.
에고, 저도 국어 실력이 딸려서 열심히 정리해보았습니다.
아마도 읽은 것 같지만 혹 모르니 얼른 제임스 낙스의 "성령의 열매- 믿음편"를 읽어보아야겠습니다.
2011-03-02 20:15:33 | 김선희
이미 성경적이고 훌륭한 답변들이 많이 올라와 있으므로, 말씀을 더 인용하지는 않겠습니다. 제 소견만 말씀드리죠.
구원을 받은 이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제가 구원받기 전에 뭔가 영원한 가치, 혹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고 생각과 행동의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할 때, 복음의 진리를 믿을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우셨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즉 내가 믿으려고 하면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성령님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간발의 차이로 개개인의 믿고자 하는 의지가 우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이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또, 이제 막 태어난 생명과 장성한 생명이 다르듯,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과 이제 막 구원받은 믿음, 구원받은 이후 지속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성숙한 믿음)은 그 힘과 질에 있어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순종하지 않는 것을 보고(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성령의 열매가 없는 사람은 모두 구원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 경우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혹은 질 낮은 그리스도인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사료됩니다.
2011-03-02 19:43:39 | 류인선
사람이 의지적으로 believe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Faith를 주신다는 설명의 근거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갈 3:22, 킹흠정) 그러나 성경 기록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하심이라.
(갈 3:22, KJV) But the scripture hath concluded all under sin, that the promise by faith of Jesus Christ might be given to them that believe.
사도행전 18장 27절에 나오는 "은혜를 통하여 믿게 된 사람들"의 김 문수 형제님 설명도 매우 동의 합니다.
제가 사도행전을 읽고 있는 중이라 엊그제 22장 18절을 읽다가 "내 안에 있는 믿음(faith that is in me)"이 갈라디아서의 2:20의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the faith of the Son of God)"의 믿음을 말씀하는 것인지
갈라디아서 3:26 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faith in Christ Jesus)"인지
우리말 번역으로는 갈2:22 믿음 같은데 영어로 보면 전치사 in이 쓰여있어서 faith in me와
faith that is in me의 차이가 큰 것인지 궁금해서 질문하고 싶었지만 꾸~욱 참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지금 질문 해도 되지요?
(행 26:18, 킹흠정)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요, 또 그들이 죄들의 용서를 받고 내 안에 있는 믿음으로 거룩히 구별된 자들 가운데서 상속 유업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더이다.
(행 26:18, KJV) To open their eyes, and to turn them from darkness to light, and from the power of Satan unto God, that they may receive forgiveness of sins, and inheritance among them which are sanctified by faith that is in me.
(갈 2:20, 킹흠정)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 2:20, KJV)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갈 3:26, 킹흠정)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이들이 되었나니
(갈 3:26, KJV) For ye are all the children of God by faith in Christ Jesus.
2011-03-02 19:18:44 | 김선희
말씀 감사합니다.
구원에 있어 회개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처음 제자들도 자신을 거울로 바라보듯 하여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리고, 죄인이라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조금 조심스러운 말씀을 드리자면
회개는 천주교, 불교, 이슬람교, 심지어 사이비 종교에서도 다 합니다.
그들중 신실한 사람들은 날마다 애통해 합니다.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괴로워하고, 금욕하고, 성결해 지려고 '노력'합니다.
자기성찰하고, 자기를 씻으려 하고, 자기를 좀더 아름답게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엔 not by jesus 이면 됩니다.
육신으로 온 예수님의 피를 통하여 새생명으로 거듭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님께서 이런 생각을 하신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자칫 이글을 읽고 다른 분들이 위험한 쪽으로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해서 써봅니다.
글 감사합니다.
2011-03-02 15:52:09 | 곽연우
아래에 제가 쓴 글에 대한 답글들 덕에 무조건적 선택설에 대해 그동안 제 머리 속에 엉켜있던 것이 조금은 정리된 것 같고 또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적 선택설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난해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제 신앙의 성장을 위해 다른 부분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글은 아래에 제가 쓴 글에 대한 김문수 형제님의 첫 번째 답글을 보고 제가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작성했는데, 이후의 답글들을 보니 오해들을 하시는 것 같지 않아서 안 올리려다가 이왕 쓴 김에 올립니다.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머니에 있는 송곳이 밖으로 삐져나오듯 마음에 있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마음 밭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그 사람의 회개가 있는 믿음과 결합되어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면 그 싹이 땅을 뚫고 나올 것이며 그 싹이 계속 자라서 풍성한 열매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의 마음 밭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아무리 많이 뿌리고 물을 아무리 많이 뿌려도 그 사람이 회개가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씨앗이 생명력이 없는 채로 있게 되거나 조금 자라다가 시들어 버리거나 줄기와 가지가 자란 후 열매는 없이 잎사귀만 무성할 것입니다.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한 동네에 살고 있는데 '갑'이 '을'을 미워한다고 가정 해보겠습니다. 이제 '갑'이 집에 있어서 '을'을 보지 않는 동안에는 '갑'의 '을'에 대한 미움이 행위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이 길을 걸어가다가 '을'이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는 겉치레뿐인 인사조차 하기 싫어서 다른 길로 돌아갔게 되었다면 이것은 '갑'이 '을'을 미워하는 게 행위로 나타난 것입니다. 미움이 마음에 진정으로 있었기에 그게 행위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 역시 마음에 있다면 행위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믿는 사람이 스스로 마음에 죄를 품고 있으면서 집 밖에 나가 회개해야 할 죄인을 찾으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죄를 마음에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즉시 하나님께로 자신의 마음을 돌이킬 것입니다. 자신이 행위로도 죄를 짓고 있는 걸 깨달았으면 자신의 행위 또한 즉시 철저하게 고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가 없이 오는 믿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라면 회개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양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일 동전의 앞면을 주머니에 넣으려는 사람은 동전의 뒷면도 주머니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모든 죄에서 영원히 떠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영원히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 사람의 모든 죄의 삯을 대신 치르시고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미워하듯이 자신의 모든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자기 생명이라도 드리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려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로 인해 자기 생명을 잃으려 하는 자는 그것을 찾으리라." (마태복음 16:25)
이제 자신의 죄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알고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며 모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기로 마음에 정한 사람이 예수님을 통한 죄의 용서는 믿되 예수님을 통한 죄로부터의 승리는 절대 안 믿으려 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그것을 원하며 하나님께 구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믿음 없이 구하겠습니까.
그 사람 자신이 죄 가운데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고 믿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경건의 모양은 주시나 경건의 능력은 줄 수 없는 분이라 믿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실제로 죄에서 떠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주시기를 원하지는 않으신다고 믿겠습니까.
하나님께 그 사람이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신다고 믿을 것입니다.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당장 도우시리라 믿을 것입니다.
그의 생활은 죄악 된 생활로부터 실제적으로 변화되며 마음도 변화시키시고 평안을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회개 있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음과 행위의 분명한 변화로 즉시 나타날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예전의 자신과도 분명하게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죄를 범하게 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고 넘어지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죄성이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죄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며 더욱 더 죄에서 떠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죄 짓고 사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천국에는 가고 싶어서, 회개는 언젠가 하겠다고 약속하고서 일단 믿고 보자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를 하지 않고 적당히 자기 양심만 편하게 하는 회개를 한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세상에서 죄 짓고 살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기에, 적당히 자기 양심만 편하게 하는 회개를 하는 사람은 세상만 아니라 하나님도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일에 세상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항상 세상보다도 하나님을 위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광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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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2 15:27:42 | 김양규
갈라디아서 5장의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즉 구원 받아 성령님이 들어온 사람에게 나타나는 열매로서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지도 않았는데 이 믿음을 소유하면 문제가 생기지요.
성경에는 faith가 몇 종류가 나옵니다.
엡2의 faith와 갈5의 faith는 다르지요.
갈2:20의 faith가 바로 갈5의 faith입니다.
구원 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의 faith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faith입니다.
우리 사이트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우측 상단에 친 뒤 아래 분류에서 경건의 양식으로 가면 제임스 낙스의 성령의 열매 시리즈가 나옵니다. 거기에서 믿음 편을 가서 보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정론에 파묻혀서 구원의 믿음도 하나님이 주는 것으로 생각하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로봇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은 믿음을 충성으로 바꾸어 놓았지요.
그러니 성도들이 목사에게/교회에 충성하느라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샬롬
2011-03-02 13:43:00 | 관리자
우리의 구원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필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계시해주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으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사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은혜의 초청에 대하여 내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노라,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나에게 전해 주신 복음의 말씀을 통한 구원으로의 초청, 다른 어떤 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해주신다는 그 약속이 은혜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18장 27절에 나오는 "은혜를 통하여 믿게 된 사람들"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판단을 무시하고, 내 마음과 생각과 의지를 리모콘으로 원격 조종하여 내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강제로 믿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나 선행을 요구하지 않고 값없이 구원을 주시는 것이 "은혜의 선물"이지, 개인이 판단하고 선택하는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엡2:8,9).
만약 믿음 자체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나는 전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주시면 내가 믿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지 않으시면 내가 아무리 주님을 믿으려고 해도 헛수고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전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은혜를 베풀어 믿음을 선물로 주기로 한 사람은 어쨌든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강제로 믿음을 심어서 구원을 받게 하실 테고, 하나님이 그에게 선물을 안 주었다면 제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헛짓이 되기 때문입니다.
2011-03-02 13:05:36 | 김문수
만약 갈5:22,23의 믿음이 "구원받는데 필요한 믿음"이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엡2:8,9). 그런데 그 믿음은 성령의 열매이므로(님의 주장에 의하면) 성령을 받기 전에는 믿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갈5:22,23). 그래서 믿음을 얻기 위해서 우선 성령부터 받으려고 했더니 먼저 믿어야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엡1:13).
구원을 받으려면 믿어야 하는데,
A. 믿으려고 하니까 먼저 성령이 필요하다고 하고, (성경이 아니라 칼빈주의 교리에서)
B. 성령을 받으려고 하니까 성경에는 믿어야 성령을 준다고 하고...
결국 A와 B 사이에서 무한히 순환만 할 뿐, 이렇게 되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골치 아픈 문제에 빠지니까 칼빈주의에서 고안해낸 방법이 "먼저 중생해야 믿을 수 있다"라는 선중생 교리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허물과 죄로 완전히 죽어있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는 어떠한 영적 행위나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적성이나 능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성령이 중생시키실 때에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라는 것이 칼빈주의 논리입니다.
이 논리대로 하면, 현재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거듭나게 했다는 것이 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선중생 교리에 따르면, 사람은 예수님을 믿기도 전에 구원받은 것이 됩니다. 즉 "사람은 믿음 없이 구원받는다"라는 엄청난 이단 교리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믿고 나서 성령을 받는지, 성령을 받은 후 믿게 되는지는 아래 성경 말씀을 참고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라.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갈3:2)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였고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분 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느니라(엡1:13).
2011-03-02 12:49:01 | 김문수
사람이 의지적으로 believe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Faith를 주신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 문수 형제님께서 쓰신 글도 동의하고 구원받음에 대한 사람의 책임이 없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설은 비성경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 믿음의 창시자와 완성자는 예수님(히브리서 12:2)이시다고 하시고
사도행전 18장 27절에선 :은혜를 통하여 믿게 된 사람들"이라는 말씀도 나오더군요.
(행 18: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려는 마음을 먹으므로 형제들이 편지를 써서 제자들에게 권면하여 그를 받아들이게 하니라. 그가 거기에 이르러 은혜를 통하여 믿게 된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And when he was disposed to pass into Achaia, the brethren wrote, exhorting the disciples to receive him: who, when he was come, helped them much which had believed through grace:
또 믿음은 성령의 열매이기도 하고 선물이기도 하더군요.
고전12:4~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을...
2011-03-02 12:41:48 | 김선희
대학총장 말고...
자기가 대학총장의 아들이라면서 초라한 행색으로 나타나서, 그런 말을 했다면
학생들은 더 믿지 않았겠지요.
2011-03-02 09:43:29 | 곽연우
예수님도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믿지 않음'에 많은 탄식을 하셨습니다. (막 16:14, 요 5:38)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나
입학하기 어려운 어느 일류 대학총장이 대학설명회에서
고등학생들을 모아놓고, 우리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사람은 지금 손들면 내가 보내주겠다
라고 한다면
대부분 믿지 못하기에 손들지 않을 것입니다.
한 명이 손들었다면, 그 사람은 그 대학총장의 은혜로 대학에 그냥 합격할 수 있겠지요
대학 총장이 그 사람을 믿게 만들어서 했다기 보단,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히 그 학생이
그 대학총장의 말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 김문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2011-03-02 09:26:05 | 곽연우
그런 논리는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문제가 있는 주장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님의 주장에 의하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서 선물로 주어야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믿음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결국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지 않아서이기 때문에 그가 지옥에 가는 것은 믿지 않은 그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것이 됩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나중에 심판을 하실 때 "그분께서 은혜를 안 줘서 믿지 못하게 만든 사람들"에게 너는 왜 믿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며 심판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볼 때 합당하다고 생각합니까?
마태복음 3장과 7장이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것인지,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이 같은 것인지 성경을 읽으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2011-03-02 04:01:32 | 김문수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이끌어주고 싶은 그런 삶을 어른들이 특히 부모가 살아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가정예배입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이 아니라, 어른의 행동을 보고서 배웁니다.
가정에서 할 일은 형식을 갖춘 예배의식 보다는, 교회에서 배운 말씀대로 살아가는 어른의 모습입니다.
[내 얘기가 아니라, 매우 훌륭한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를 옮긴 것입니다]
2011-03-02 00:08:07 | 김재근
안녕하세요.
그동안 이곳의 많은 글들을 읽고 신앙에 많은 유익을 얻었는데 이것에 대해 우선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 글은 쓰게 된 것은 김문수형제님이 오래 전에 쓰신
은혜로 믿게 되는가, 믿어서 은혜에 들어가는가? (엡2:8, 김문수)라는
글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그 글에서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는데,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구원을 받는 믿음 또한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2:8,9)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엡 2:8,9를 보면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는데, 갈 5:22,23을 보면 믿음이 성령의 열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믿음이 생겼고, 이 믿음으로 인해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구원에 필요한 믿음과 구원을 받은 후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필요한 믿음이 서로 다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뒤에야, 비로소 성령의 열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이 생긴다.
는 주장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내던져지느니라."
(마태복음 3:8~10)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은 회개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순종 없는 믿음을 가지겠다는 말은 회개 없는 믿음을 가지겠다는 말에 불과합니다.
오직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는 자라야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도,
행함으로 증명되는 믿음이 자신의 마음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착각에 빠진 사람일뿐입니다.
순종에 필요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이런 사람이 구원받은 후
성령의 열매로 행함있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구원에 필요한 믿음과 순종에 필요한 믿음이 서로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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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1 23:06:00 | 김양규
요즘 아이들을 보며
큰 걱정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도 같은 걱정을 하게 됩니다.
가정예배를 통해 바른 신앙으로 이끌어 주려는데
지혜가 부족하여 쉽지가 않습니다.
혹시 가정에서 어떤 형식이나 방법으로 가정예배를 드리시는지
본문선택이나 시간 등등...
조언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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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1 11:43:44 | 박종철
야곱이 라헬에게도 들어가니라. 그가 또한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또 다른 칠 년을 여전히 그와 함께하며 섬기니라(창29:30)
And he went in also unto Rachel, and he loved also Rachel more than Leah, and served with him yet seven other years.
위 구절은 more than 이 들어가는 최초의 성경 구절이며, 상황 역시 love A more than B 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more than 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상적인 문법을 따라 읽으면, 야곱이 "라헬과 레아 둘 중에서" (레아에 비하여) 라헬을 더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문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레아가 라헬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야곱이 라헬을 더 많이 사랑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래 구절도 똑같은 형식의 love A more than B 형식입니다.
그의 형제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그의 모든 형제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평안하게 말도 할 수 없었더라(창37:4)
And when his brethren saw that their father loved him more than all his brethren, they hated him, and could not speak peaceably unto him.
their father loved him more than all his brethren.
요셉(A)과 요셉의 형제들(B)이 있는데, 야곱이 그 둘 중에서 요셉(A)을 더 사랑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고, 그 형제들도 요셉을 사랑했는데, "요셉에 대한 그 형제들의 사랑"에 비하여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는 정도"가 더 컸다는 뜻입니까?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게 필요한 음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들을 더 귀히 여겼도다(욥23:12)
Neither have I gone back from the commandment of his lips; I have esteemed the words of his mouth more than my necessary food.
"주의 말씀과 음식" 이 두 가지 중에서 욥이 말씀을 더 귀히 여겼다는 뜻입니다. "음식이 말씀을 귀히 여기는 것"에 비해서(?), 욥이 말씀을 귀히 여기는 정도가 더 크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편 69편 31절에서 ox or bullock와 비교가 되는 것은 그 앞에 있는 30절의 감사와 찬양입니다. 문맥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사람이 수소나 황소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요한복음 21장의 문맥은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에 비해 베드로의 사랑이 특별히 더 지극하기를 바라는 질문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이 나(예수님)를 사랑하는 것보다, 베드로 네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하느냐?" 그래서 베드로가 "예, 제가 딴 사람들보다는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면 그것을 듣고 좋아하실 예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의 사랑이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비해) 좀 미지근하고, 못 미치는 것을 주님이 바라신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로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매(마26:33)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 때문에 다 실족해도, 나는 안 그럴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주님을 배신하고 베드로만 주님을 끝까지 따르면(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의 사랑이 다른 제자들의 사랑보다 더 뛰어나니) 예수님께서 좋아하셨을까요? 이렇게 호언장담하다가 진짜 실족한 사람이 누군데 주님께서 또 다시 베드로에게 그런 어리석은 비교와 자신감을 요구하실까요?
베드로: "주여, 이 사람은 무엇을 하리이까?"
예수님: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요21:21,22)
베드로는 자기와 요한을 비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의 사랑과 헌신이 요한의 사랑과 헌신보다는 더 뛰어나야 내가 기뻐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문맥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지, 베드로의 사랑과 제자들의 사랑을 비교하려고 하는 맥락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숯불 이야기를 가지고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감동적인 묵상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Q.T.의 묘미지요.
날이 추우므로 종들과 관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거기 서서 몸을 녹이니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몸을 녹이더라(요18:18).
그들이 땅에 올라와 곧바로 숯불이 거기 있음을 보았는데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더라(요21:9).
그래서 베드로로 하여금 그가 주님을 부인할 때의 그 숯불을 생각나게 하려고 예수님이 숯불을 피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옛날에 이런 식의 감동적인 Q.T.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숯불은 그냥 숯불입니다. 그 때는 종들이 추워서 숯불 피운 거고, 이번에는 예수님이 물고기 구우려고 숯불을 피우신 겁니다. 전기오븐이나 가스렌지가 없는데 당연히 숯불 피워야지요. 숯불이 무엇을 의미할까, 여기에 무슨 신비한 심리학적인 의미나 영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열심히 생각해봤자 숯불은 그냥 숯불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그분의 진리를 찾기 쉽게 기록해 놓으셨지, 보물 찾기 하라고 꽁꽁 숨겨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준오님이나 혹은 다른 어떤 분들이 어떤 해석을 취하건 저는 별로 상관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제 해석을 받아들여 달라고 호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며, 성경의 단어와 용법은 성경의 정의와 용례를 따른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저는 문자적(문법적), 역사적(historical), 문맥적(contextual) 해석을 따릅니다.
이준오님의 견해에 동의하는 많은 설교가들이나 신학자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우선 축하를 드립니다다. 그러나 스펄전이 뭐라고 했건, 매튜가 뭐라고 썼건 그게 제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주석이나 해설들은 성경 말씀과 같은 절대적이고 신성한 권위가 없기에, 저는 그것을 교회 역사 상 성경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발견한 하나의 의견으로 간주할 뿐 그들의 글이나 해석에 절대적인 권위를 두지 않습니다.
2011-03-01 04:19:26 | 김문수
형제님!
킹제임스 성경의 문법은 오늘날 현대의 문법과 약간 다릅니다. 킹제임스성경은 그것이 번역된 그리스 원문의 문법체계를 최대한 따라 번역되었습니다. 그 점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위의 영어 답문에 fish가 나와있는데 킹제임스 성경의 fish는 단수 혹은 대표의 성격을 갖습니다. 복수는 항상 fishes를 써왔습니다. 위에서 말하는 여러종류가 아니더라도 복수면 항상 fishes로 옵니다. 오늘날의 문법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말할 때에도 five loaves and two fishes입니다.
또한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 본문의 문법을 최대한 따랐기 때문에 than 다음에 비교의 대상만 나오고 동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콘코던스로 than을 찾아보아 확인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시편 69:31을 보면
Psa 69:31 This also shall please the LORD better than an ox or bullock that hath horns and hoofs.
현대의 문법에 따라, "이것이 또한 수소나 굽이 있는 황소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로다" 라고 해석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이것이 또한, 수소나 굽이 있는 황소가 주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더 주를 기쁘게 하리로다."라고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흠정역은 "이것이 또한 수소나 뿔과 굽이 있는 황소보다 주를 더 기쁘게 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지만 문맥상 두번째 의미로 모두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요 21:15의 more than these의 해석의 논란은 형제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합니다. 적어도 200년 이상되어 온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 부분을 해석해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 왔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love me?" 즉,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런 식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석한 사람들을 적어보자면, St Augustine부터 시작해서 제가 확인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Spurgeon, Warren Wiersbe, Albert Barnes, Adam Clarke, John Darby, John Gill, Matthew Poole, John Wesley, Arthur Pink.
동일하게 말하는 주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Combined Bible commentary, The Greate Biblical Commentary of Cornelius, Daily Study Bible, People's New Testament, Jamiesson & Fausset & Brown Commentary, Robertson's Word Pictures, Treasury Scriptural Knowledge, Vincent's Word Studies.
여기서 DSB(Daily Study Bible)는 두가지 견해 즉, 물고기와 그물과 배 즉 어부의 삶의 견해와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견해 모두 제시합니다.
반면 Guzik은 "fish and a fishermans's life"이라고 제시했고 Fourfold gospel(1914, J.W. McGarvey, Philip Pendleton) 역시 "fishes and this fishing business"이라고 해석했습니다.
Matthew Henry는 세가지 의견을 모두 언급했습니다: 물고기와 배와 그물,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문맥상 잘 맞는다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부를 때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눅 22:31을 생각나게 합니다.
눅 22:31~32 또 주께서 이르시되,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갖기 원하였으나 32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쇠하지 않도록 기도하였은즉 너는 돌이킨 뒤에 네 형제들을 강하게 하라, 하시니
주님은 또한 추위에 떨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숯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주님은 또한 베드로에게 세번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지극히 베드로 개인과 연관이 있는 질문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주님이 물고기와 어부의 삶을 두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베드로 뿐 아니라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에게도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베드로를 따라 고기를 잡으러 배에 올라탔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이 견해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기 때문에 "이들"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들"이 되면 오직 한 견해만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영어 성경처럼 스스로 판단하도록 여지를 둘 수 있게 "이들"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2011-03-01 02:01:11 | 이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