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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을 하는 제 자신이 이상한 것인지...의문이 들면서   그래도, 많은 분들의 감사한 댓글로 많은 깨달음을 얻기에 질문을 드려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아담의 죄를 모든 인류의 죄가 되도록 하셨나요?"   범죄한 것은 아담이었는데,, 아담의 잘못이 수천년을 지난 우리 아기,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에게도 동일한 죄의 몫이 지워졌는데....   왜 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만 죄의 댓가를 물으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아담이 죄를 지었으니까요.)   왜 궂이 아담의 죄를,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다고 하여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의 몫을 가지고 태어나야 하나요?   내 부모가 범죄를 저지른 강도라고 해서 자식까지 죄인이지는 않지 않나요...?   과연,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는건가요? 아니면, 죄라른 것은 원래 유전이 될 수 밖에 없게끔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일까요? 아니면, 죄의 속성이 그런 것인가요?   좋은 답변 부탁드려 봅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3:3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2-09 11:23:41 | 나창주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 안의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필요하시다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으로서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와 같이 일 하기를 원하신다 (고전 3:9).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고 그 분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어 우리에게 면류관과 상까지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빌 3:14; 고전 9:24-27; 히 10:35).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내를 본받아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 앞에서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고 있는 것이며 (히 12:1), 다만 이 모든 명령 받은 일을 행한 후에 그저 우리는 우리의 해야 할 의무를 다했다고 겸손히 고백할 뿐이다 (눅 17:10).   이러한 하나님의 같이 일하심과 맡김의 원리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잘 나와 있다 (마 25:14-30).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이 5 달란트와 2 달란트 받은 종에게 열심히 일하여 이익을 남김에 대하여 칭찬을 하시되, 1 달란트를 받고 그저 땅에 묻어둔 종은 크게 나무라셨다. 그때 1 달란트 받은 종이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 뿌리지 않은데서 거두고 흩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라고 말하였는데 (마 25:24), 가만히 음미해 보면 이 말은 자신의 주인 즉, 하나님의 능력을 칭송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것만 믿고 오히려 자신의 일을 다 하지 않은 종이 되었기에 주인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게 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보통 신앙생활을 하면서 막연히 하나님을 높여 드려야 한다는 다소 충성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데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자칫 놓치기도 한다. 하나님은 분명 능력이 많으시지만, 그렇다고 아무 때나 맘먹을 때 하면 되지 하는듯한 방관된 자세로 그저 멀리서 팔짱끼고 계신 그런 분이 아니라, 오히려 열심으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사 9:7).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고 그 일을 완수하게 격려 하시며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뤄낸 성과들로 인하여 같이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상까지 주시며 세워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달란트에 맞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탁월함을 들어내는 것은 성경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렇게 하도록 권장해야 하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될 것이다. 다니엘을 보라. 다윗을, 모세를, 바울을 보라. 그들은 모두 믿음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 이었지만, 동시에 세상 가운데 자신의 달란트를 들어낼 수 있는 분야에서도 모두 탁월함을 일군 사람들이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성공을 이룬 뒤 하나님의 도우심을 잊어버리거나 세상 유혹만을 쫒아간다면 세상에서의 그 성공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한갓 이생의 자랑거리에 지나지 않으며 시들어 없어질 들의 꽃에 다름없게 되고 말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달란트를 사용하는데 게을리 하거나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도록 간절히 간구하며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그 분 앞에서 어떤 존재로 서있는지 관심이 있을 수 있다. 흔히들 내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이나 또는 그 일로 이뤄낸 어떤 성과 따위는 하나님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계시며 단지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쩌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존재를 따지기로 말 한다면, 우리의 구원 조차도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이뤄진 것이며 (롬 5:8), 성화를 위해 싸워 가는 과정에서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도 내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여전히 버거워 하는 존재일 뿐이다 (롬 7:13-25). 그런 ‘존재’인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은 같이 일하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오히려 죄의 법을 이기는 힘을 얻게 하기도 하시며, 그 크신 능력을 갖고 계신 하나님에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성과를 낸’ 우리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며, 그 작은 일을 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상을 주시며 칭찬하시겠다는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진정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3:57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2-07 21:58:03 | 김정훈
저번주말에 누나의 생일이었습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12세등급 실사영화도 욕이 난무하고, 정말 애들보기 민망한 장면도 너무 많아서   초등학생인 조카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애니메이션 해피피트2를 보았습니다.   전 이 영화를 보며, 정동수목사님의 UFO실체와 아귀가 딱 딱 맞아감을 두려움속에서 느꼈습니다.   어찌 이런 어린애들이 보는 것에 이런 내용들이 함축적으로 다 들어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니   가족영화로 애와 어른이 다 볼수있고, 이런 내용을 어릴적부터 본 아이들이 나중에 중장년층이 되면   평화의 세계단일화에 박수갈채를 보낼 교육을 받고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교리 게시판에 있는 UFO실체 글을 보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그것을 꼭 읽고 세상을 보는것이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영화 내용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 이 영화는 눈 요기거리와 노래로 사람을 감성적으로 이끕니다.   해피피트2는 펭귄을 의인화한 영화입니다.(저는 이런영화가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 지역에 잘 살던 펭귄(인간)들이 자연의 힘(재해)에 고립되어 꼼짝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잠시 나와있던 에릭과 친구들 아빠는 그들을 구해내기 위해   다른 지역(나라)의 펭귄(인간)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곳의 펭귄들의 우상인 마이티 스벤(펭귄이 아닌 다른 종)은 펭귄이면서 하늘을 날수 있습니다.   (펭귄들은 같은 종족인줄 알고있었습니다. 나중에 하나가 됩니다.)   스벤이 이끌고 온 다른 펭귄(인간)들은 열심히 도움을 주는데   이전에 스벤과 그의 심복 A(이름을 잊었습니다.)가 만났었던 인간(외계인)에게 말이통하지 않지만   바디랭귀지로 도움을 요청하여 그들의 기술(고도의 기술)로 고립 되었던 펭귄(인간)들을 금새 구출(혹은 구원)하려 합니다.(공교롭게도 영화내에서 인간들을 외계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다시한번 자연의 힘에 인간(외계인)들은 구출작전을 중단하고, 그곳을 빠져 나가 버립니다. (UFO실체에서 언급된 외계인이 우리와 기술을 나누다가 전쟁하여, 이젠 그 기술을 얻을수 없는 내용과 일치)   다시 죽음의 기로에 선 펭귄(인간)들은 다른 종인 바다코끼리(다른 나라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들도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영화는 중간 중간에 진화론을 언급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된다! 된다고 믿으면(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노력하면) 불가능한 무엇이든지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며 시청하는 애와 어른들에게 주입시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종인 수많은 새우 종들이 함께 힘을 합하게 됩니다.   각 지역의 펭귄들과 그들의 우상인 마이티 스벤(위대한 스벤, 다른 종) 그리고 바다코끼리, 수많은 새우들이   자신들의 힘으론 절대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을 자신들의 의와 행동으로 다른 종족(세계 각 나라)과   평화롭게 하나가 되어(세계단일화,종교단일화) 열심을 내어 일을하니   인간이 인간을 죽음 앞에서 구원해 버립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들의 우상이었던 위대한 스벤은 원래 펭귄(인간)이 아님을 실토하며, 펭귄 암컷(인간 여자)와 결혼하게 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당연히 교미를 하여 아이를 낳겠지요. 버림받은 천사들, 유전자조작.. 거인들 다른 외계종)   이것을 보고 마음이 요동하여, 어머니(교회 권사)께 이런 저런 말씀을 했더니 "너 정말 왜그러니","도끼눈을 뜨며 저를 피하십니다."   더구나 누나와 조카는 그걸 보고 두번이나 감동하여 울었다고 합니다.   정말 미칠노릇입니다. (교회 다니지요..)   어찌 이런것을 보고 우나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감동하여 울거나 울뻔한 세상사람들이 많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제 누나는 교회를 다녔지만, 세상 것을 좋아하며, 즐기지만 삶이 고통스럽던 차에 최근에 다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분별력이 없고 또한 그것을 분별할 생각조차 없습니다. (이 것을 말하는 것은 왠만큼 믿음생활했다는 교인들에게 꼭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 제가 KJV, 킹흠정을 알게 되었을때는 수개월동안 이것이 붙잡아도 될것인지 확인을 거듭했습니다. 다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되는 "하나님 말씀" 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확신을하며 한글화 된 KJV 번역본 중에서는 가장 좋은 흠정역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KJV1611이 최종권위=변개되지 않은 하나뿐인 성경책임을 믿습니다.   정동수목사님 계열이 극도로 세대주의적이고 한킹계열과 좀 다를뿐이지 인정하지 않는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 여러분들이 하는 말은 자신이 정말 확인하며, 시험을 거듭하여 증명해본 것입니까?? 여러분들을 보면 남들이 하는말 또는 어디서 보거나 줏어들은 말을 읊을뿐이지 직접 확인하지 않음이 우리 눈에는 얼마나 미련해 보이는지 아십니까??"   그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요? 아니면 두개의 가면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십니까??   이곳에 와서 자신들이 취할 것만 취하고, 버리는 당신들이 세상속의 교인들과 뭐가 다릅니까?   여기 조금, 저기 조금 발 담그면 더 따뜻할까요? 이도 저도 아닌게 될 뿐입니다.   [계 3: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그런즉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니 각종 헐리웃영화를 보며 항상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인 내용들을 매번 빠짐없이 접합니다. 주님오실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제 어릴적보다 더욱 가깝게 느끼며 바른말씀을 붙잡아야 함을 알게됩니다.   벧전 4:7 오직 모든 것의 끝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저는 정말 부족하고 못난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미련한 저에겐 "바른" 하나님 말씀이 꼭 필요 합니다.   무조건 적인 신뢰와 믿음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바칩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6:00:3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2-06 08:18:36 | 이민혁
이 글은 아래 자유게시판 1458번의 댓글로 달았던 글을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새로운 독립글로 다시 올리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선악과는 과연 왜 있어야 했을까요? 그리고 선악과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하나님의 계획이셨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적어도 한번쯤은 고민해 보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저의 생각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여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1. 선악과는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음을 보여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로봇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하나님 또한 그 분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이 그 분을 의지적으로 순종함으로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 주기를 원하셨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을 때 하나님만이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소위 '짝사랑'의 존재로 지으시기 보다는 우리도 그 분의 형상대로 지은 바된 존재 답게 그 분을 우리의 의지로 '사랑'하길 원하시지 않으셨을까요?   2. 선악과가 있는데 그것을 먹지 말라는 말씀을 우리가 지켰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 하셨던 그 말씀 그대로 그 자체가 이미 천국입니다. 천지창조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합력하여 만드신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과 함께 거했을 것입니다. 3. 선악과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것을 먹었다면, 그 일로 우리는 하나님과 단절이 되고 그것은 곧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경우 우리의 영원한 죽음을 막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죄인된 모습으로 성육신 하시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정하신 그 방법에 참여하는 자에게 이제는 양아들 자격을 주시어 (엡 1:5)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구요. 안타깝게도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4.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선악과의 존재 자체는 오히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갖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경륜과 사랑의 표현이며, 이것에 대하여 '순종'으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함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없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과 에덴동산에서 함께 거닐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위의 2번의 경우에 해당). 따라서 이번 글의 서두에서 질문한 "선악과 사건이 있어야지만 예수를 믿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분명 "아니다"입니다. 선악과 사건 이전에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우리의 믿음에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5. 마찬가지로 또 다른 질문으로 "그렇다면 선악과 사건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양아들이 될수 있게끔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요?" 라고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선악과 사건이 저질러진 이상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양아들이 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일의 순서를 잘 따져 보시면, 선악과 사건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양아들이 되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방법, 그 방법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지 선악과 사건 그 자체가 우리를 양자 삼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여 지지요. 6.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선악과 사건을 계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선악과 사건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었고 그것의 결과로 인하여 비로소 구속을 계획하심이 맞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5: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2-05 02:42:43 | 김정훈
우상 숭배와 인본주의 진화론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들의 세계관이다. 그리고 그 기초는 진화론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고 인간을 우연 발생한 동물의 연장으로 이해한다. 진화론의 주장이 결코 성경과 같이 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적 방법을 인정하면서 창조도 믿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진화론의 핵심은 목적성 없는 무작위적 자연발생설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절대 그런 목적 없는 분이 아니시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이어지게 됨은 너무도 자명하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리차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의 말처럼 하나의 “망상”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매우 중대한 도전이다.   과학과 신앙   과학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연구하여 그 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주신 문화명령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하여 많은 부분에 있어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그분께서 권능의 말씀으로 떠받치고 계시며 (히 1:3),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기 때문이다 (골 1:17). 사실,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분의 발끝에도 못 미칠 만큼 아주 적은 것이다. 신앙엔 분명 믿음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 신앙이 진리에 관한 문제라면, 그 믿음이란 것이 결단코 무조건 적인 믿음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며, 오히려 과학적 접근을 통해서도 더욱 공고해져야 마땅할 것이다. 진정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분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이 사실이라면, 자연 만물 속에서도 그 분의 존재를 발견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 (롬 1:19-20).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증거 없이 믿음만을 강조하지 않으신다. 증거는 믿음을 더욱 강화 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부활의 증거가 우리에게 분명히 있듯이, 창조의 증거 또한 우리에게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을 발견하고 찾기를 원하신다. 과학도 그 분이 허락하신 축복이다. 따라서 그 분 안에서 올바른 과학을 한다면, 반드시 그 연구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고통 받는 욥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내가 땅의 기초들을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게 명철이 있거든 밝히 고하라. 누가 그것의 치수들을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누가 그것 위에 줄을 팽팽히 쳤느냐? (욥 38:4-5)”, “누가 아무도 없는 땅과 아무도 거하지 않는 광야에 비를 내리게 하며, 연한 채소로 하여금 싹을 내게 하였느냐? (욥 38:26-27)”, “누가 속 중심부에 지혜를 넣어 주었느냐? 혹은 누가 마음에게 명철을 주었느냐? (욥 38:36)” 욥기에 기록된 이 같은 하나님의 많은 질문들은 바로 그분이 우주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과학을 할 수 있는 지혜까지 주신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며, 그러나 그와 동시에 또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마음속의 교만을 물리치고 겸손한 자세로 자연세계를 들여다보면, 그곳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숨결을 발견할 수가 있다. 올바른 과학은 결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발견하는 과학자들   실제로 과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발견을 통하여 초월적 설계자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 가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그저 우주의 수많은 평범한 행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어쩌면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일 수 있음을 깨닫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세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수록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 구성물질들의 정교함과 복잡함에 더욱 경탄하며 그 기원에 대한 무작위한 우연 발생적인 설명 방식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많은 물리화학자들이 마치 발견되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듯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자연의 법칙들과 수학적 상수들에 대하여 예사롭지 않은 경이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학은 과연 하나님을 발견했는가? “무신론을 향해 가던 길은 과학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얄궂게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도 그랬다.” 한 때 무신론자였다가 회심하여 지금은 목사가 된 리 스트로벨 (Lee Strobel)의 말이다. “내게 있어 지적 능력을 갖춘 신의 존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강력해 보이는데, 그것은 최근의 과학적 발견들로부터 온다.” 오랫동안 인본주의 무신론 진영의 최고 리더였던 안토니 플루 (Antony Flew)의 말이다. 과연 그들의 고백처럼 오늘날 과학은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냄 (시 19:1)” 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마치 미세 조정된 다이얼이 가득 찬 것과 같은 모습의 이 우주를 움직이는 뛰어난 지성의 존재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과 기독교   분명히 우리는 다윈 시대보다 앞선 과학적 지식 속에 살고 있다. 한 때 소위 ‘과학’의 이름으로 우리의 의식 가운데 ‘하나님’을 몰아내고 무신론의 강력한 토대를 세운 다윈의 진화론이 이제는 동일한 ‘과학’에 의하여 상당수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부정되어 지는 사실을 목도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손에 갖고 있는 기독교는 ‘기원’ 문제에 있어서 항상 명쾌하고 분명한 답을 갖고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진화론은 일부 신학사상에도 영향을 주어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 내지 ‘점진적 창조론’ 등의 타협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은 교회 내에서 확고한 “성경적 창조론”을 세우고 가르치는 일을 매우 등한시 하였다. 만약 인간이 정말 우주 진화의 부산물로서 우연 발생한 존재라면, 죄의 문제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되고, 도대체 복음을 사실로 받아드릴 논리적 이유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복음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진화론의 주장은 이와 같이 근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조화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결국은 기독교의 토대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 찬란했던 유럽의 교회들이 썰물처럼 젊은이들이 빠져 나가고 오늘날 텅 비게 된 이유는 바로 진화론의 출현이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교회여, 창조주를 선포하라!   하지만, 진화론이 어떤 절대적인 과학적 증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최신 과학 정보들을 볼 때 설계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걸 보면, 성경을 떠나 진화론과 타협을 시도하려는 신학적 노력은 언젠가 또다시 그 이론의 수정을 요구할 것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이제 답은 분명하다. 교회는 성경에 기술된 분명한 창조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선포 하고 전하는데 조금도 인색해서는 안 된다. 일부 교회가 진화론 과학자들의 눈치를 적당히 보면서 이론적 타협을 하고 있는 동안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진화론을 잉태한 동일한 과학의 이름으로 이제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내고 계시다. 과학자들의 입을 통하여 창조 사실을 증거 하게 함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하신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전도할 때 창조의 메시지를 들고 복음을 전하였던 것처럼 (행 14:15, 17:24-25),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기초가 들어갈 마음의 밭을 준비케 하는데 창조과학적 내용이 도구로 사용되어 질 수 있다. 기록된 바, 말세에 천사가 전할 ‘영존하는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그분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 (계 14:7)” 바로 그 분이 창조주 되심을 새삼 선포하는 것이며, 동일한 그 분께서 이제 곧 심판주로 오실 것이란 뜻이 아닌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 하나님께서는 그 분께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요 4:23). 우리들이 입을 열어 그 분을 창조주라고 인정하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분을 믿을 만한 확신을 주셨다 (행 17:31). 올바른 과학은 참 신앙과 대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강한 능력의 말씀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한다. (고후 10:5)”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5: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2-04 18:58:16 | 김정훈
인도인들에게 갠지스강은 어머니와도 같은 상징적 존재이다. 그들이 힌두교의 여신 쉬바의 신비스러운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이 강이야말로 그들에게는 거룩한 성지이며, 인도인의 정신 세계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매년 수백만 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몰려 드는 이 곳의 실상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오염과 부패로 얼룩져 있다. 무려 2,500여 Km에 달하는 긴 강이지만, 강변을 따라 몇 몇 도시 주변에는 소위 '가트'라는 장소가 발달되어 있고, 이 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종교 의식과 빨래, 목욕, 그리고 죽은 자들의 화장까지 행하고 있다.   문제는 죽은 자들의 시체와 정수 되지 않은 채로 방류되는 분뇨가 섞인 하수들로 인해 강물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가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 강물을 성수로 여기며 이 물로 목욕도 할 뿐만 아니라, 마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용가능한 일반적인 목욕물의경우 100ml당 150마리 정도의 대장균이 있는데 반하여, 이 곳의 물은 대략 수 백만에서 천 만마리에 이르는 대장균이 검출될 만큼 오염이 심각하여 각종 수인성 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인도인들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는 '어머니'인 강이 오염 되었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기에 정부 차원의 환경 운동은 적어도 아직 까지는 크게 효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잘못된 믿음, 어긋난 정신, 왜곡된 진리가 가져다 주는 참상을 보는 듯하여 가슴 한 쪽에 깊은 아픔을 느끼며 관련 사진 몇 장을 같이 소개한다.   (참고로 일부 사진은 매우 역겨울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 법을 고려하여 허가 받지 않은 사진을 삭제하게 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5: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2-03 00:14:39 | 김정훈
오늘 아침 다음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2/01/2012020102438.html?news_Head2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샬롬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5: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2-01 23:11:34 | 관리자
오래 전에 한국에서도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TV 프로그램 가운데, “특수 공작원 소머즈” 라는 프로가 있었다. 사고로 잃게 된 오른 팔과 두 다리 그리고 한쪽 귀를 인공전자기관으로 대체하여 정상인과는 다른 초능력을 갖게 된 한 여성 특수공작원의 이야기였다. “소머즈”에 있어서 특히 인기 있었던 것은 초능력적인 전자 인공 귀였는데, 멀리서 들려 오는 아주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그런 귀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과학은 아직 소머즈 같은 초능력은 아니지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사람의 귀에 인공 달팽이관을 이식하여 청력을 회복하여 줄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으니 이런 식으로 기술이 계속 발전해 간다면 실제로 공상과학 속에나 나오던 ‘소머즈의 귀’를 보게 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에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사실에 얼마만큼 고마움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귓속을 들여다보면 그 세밀한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귀에 부딪힌 소리는 먼저 외이도-우리가 귀지를 팔 때, 귀 후비개로 지나면서 건드리게 되는 부분으로 대략 2.5 cm 길이에 7 mm의 직경을 갖는다-라고 부르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서, 그 통로의 끝에 연결된 마치 펼쳐진 우산 모양으로 생긴 얇은 고막을 진동 시킨다. 이때 만들어진 진동은 고막에 연결된 세 개의 작은 이소골을 차례로 통과 하면서 그 귀에 들어온 소리의 강도를 증폭시키는데, 이소골이 들어 있는 이 부분을 중이라고 하며, 대략 우리가 보통 커피에 넣어 먹는 각설탕만한 크기의 공간에 해당한다. 중이 속의 이소골은 그 구조와 배치가 소리를 증폭시키기에 매우 적절하게 놓여 있어 우리의 귀에 들어온 소리를 거의 잃어버림 없이 들을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 이소골을 통과한 소리는 마지막으로 대략 완두콩만한 크기의 달팽이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달팽이관 속에는 약 눈물 한 방울에 해당하는 부피의 액체가 들어 있어, 고막에서부터 이소골을 통해 전해져온 소리의 진동은 이제 이 달팽이관 속 액체에 작은 물결을 일으키게 된다. 이 액체 위에는 얇은 막이 하나 떠 있는데, 물결이 움직일 때마다 이 막이 같이 움직이면서 거기에 붙어 있는 미세한 머리카락 모양의 신경세포들이 이 막을 통해 전해지는 물결의 높낮이를 감지하게 되고, 그것을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 뇌에 전달하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한 방울의 적은 액체 속에서 생겨나는 물결의 파고를 가지고 우리가 느끼는 수많은 소리의 신비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사람의 귀는 보통 20에서 20,000 Hz 사이의 주파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참고로 이야기 하면, 피아노의 소리는 27.5에서 4,186 Hz의 소리를 내며, TV를 켜고 소리를 가장 낮게 줄여 놓았을 때 나는 지지직거리는 소리는 16,000 Hz에 해당 한다), 그 중에서도 약 2,500 Hz 부근의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외이도의 구조가 이 주파수 부근의 소리를 가장 잘 증폭해주도록 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 주파수 부근의 소리는 자그마치 우리의 고막이 불과 1억 분의 1cm 즉, 수소 원자의 두께에 해당하는 길이만큼만 움직임으로도 소리를 전달 할 수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수소 원자의 직경에 해당하는 길이만큼의 고막의 미세한 움직임이 달팽이관 속의 눈물 한 방울만한 액체에 파고를 일으키고, 그 물결의 높낮이를 머리털 같은 신경세포가 감지하여 전기 신호를 일으키고 그것을 뇌에 전달하여 마침내 소리를 듣게 하는 과정을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설계를 통하지 않고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겠는가?   우리들은 아주 어릴 적 엄마의 자궁 속에 있을 때부터 우리 주변의 소리에 익숙해 와서 듣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고 살고 있다. 그래서 청각을 잃어버린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쉽지 않은데, 마치 TV의 벙어리 화면을 보는 답답한 기분은 아닐까? 사실 소리는 우리에게 많은 신비감을 주며, 또 상상을 자극한다. 음악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라.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성을 떠 올려 보라. 소리의 세계는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지만, 우리를 또 다른 존재의 차원으로 인도한다.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으며, 말조차 할 수 없었던 삼중고의 유명한 헬렌켈러는 만약에 한 가지를 골라서 회복할 수 있게 된다면 자신이 겪고 있는 삼중고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놀랍게도 소리를 듣고 싶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과연 듣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새롭게 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과연 몇 번이나, 우리에게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청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었던가?   성경에서는 소리에 대하여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요한복음은 처음에 말씀이 있었는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요 1:1).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말씀으로 ‘이르심으로’ 천지를 지으시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의 길을 예비한 침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마 3:3). 예수님이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을 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있으며 성령이 임하셨다 (마 3:16-17). 마가의 다락방에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에도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으며 (행 2:2),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할 때에도 하늘에서는 음성이 있었다 (행 9:3-4). 이제 요한계시록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벌어 질 때에도 하늘에는 큰 음성이 있어 축제의 소리가 하늘에 자자하게 될 것이다 (계 19:1-8). 이와 같이 성경은 매우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소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청각을 가지고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을 것인가? 세상에는 수많은 다양한 소리가 있어 저마다 자기 소리를 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신다. 그것도 아주 고요한 작은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왕상 19:12) 그 분의 음성에 우리가 귀 기울이기를 원하신다. 그야말로 우리의 고막을 수소 원자 두께 만큼, 눈꼽의 눈꼽만큼 움직이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귀를 열어 그 분의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싶은 것이다. 태초부터 계시어 우리를 창조하신 그 말씀이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며, 너희는 내 음성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렘 7:23)라고 말씀 하신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 귀를 진리로부터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니 (딤후 4:4), 주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교회에 거듭하여 말씀 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3:9),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계 2-3장).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5: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1-29 19:21:56 | 김정훈
* 참고로 이 글은 필자가 전에 다른 매체를 통하여 소개한 적이 있는 글이지만, 이곳 KeepBible site를 방문하는 분들과도 같이 은혜를 공유하고자 여기에 소개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병 고침의 이적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전체 이적 가운데 3 분의 2에 해당되며,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까지 합치면 전체 이적의 80 퍼센트가 육신의 질병에 관한 것이다. 그만큼 그 분은 우리가 죄악 가운데에서 영혼이 죽어 갈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또한 육신이 고통을 받고 있는 사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런데, 그 분이 그렇게 많이 행하신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이적이 만약에 사실이 아니라면, 3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을 제한된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셨던 예수님에게 그렇게 많은 무리들이 병을 낫겠다고 찾아오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병 고침이 어떤 눈속임이었거나 혹은 일시적 착각으로 병이 나은 것처럼 사람들에게 밝혀졌다면, 그 소문이 또한 쉽게 사람들 사이에 퍼졌을 것이고, 또한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틈만 나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트집을 잡으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이 같은 사실이 하나라도 발견이 되었다면, 결코 예수님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으로만 보더라도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불신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심지어는 교회에 잘 출석하며 신앙이 있는 일부 교인들 중에는 여전히 성경에 나타난 여러 이적들을 하나의 허구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남아 있어 안타깝다. 그들은 이적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렇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하는데, 이 말은 결국 자연계에 초자연적으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과학은 당연히 자연 현상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초자연 현상은 설명할 수가 없다. 문제는 설명할 수가 없다고 해서 그와 같은 사실이 존재치 않느냐 하며는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병 고침의 이적들에 대해서 그 병 고침의 기전(mechanism)을 우리는 잘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만약에 당시에는 불가능 했지만 오직 오늘날의 발달된 과학 지식을 통해 알고 있는 어떤 병 고침 이후에 나타나는 특이한 호전 증세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으로 미루어 병 고침의 역사가 사실이었음을 강력히 증거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와 같은 사실은 성경 기자가 성경의 내용을 자신의 상상이나 허위로 거짓 증언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목격한 것을 기록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8장(22-26절)에 보면, 한 가지 매우 흥미 있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벳새다라는 한 지방에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기록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경이 눈을 뜨고 나서 무엇이 보이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매우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대답인즉, “사람들이 나무처럼 생긴 채 걷는 것을 내가 보나이다.” (24절) 하였는데, 이 말은 쉽게 말하면, 나무와 사람이 같이 하나로 섞여 보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과 나무가 각각 부분적으로 보이면서 동시에 나무가 사람처럼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도대체 왜 중요할까? 그것은 바로 이 구절이야말로 이 소경이 정말로 장님이었는데 이제는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아주 어려서나 혹은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던 사람이 어른이 된 후에,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의학적인 방법에 의하여 시력을 회복하게 되면, 보통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정상적인 시각을 완전히 회복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단순히 눈을 회복했다고 해서 전에는 보지 못하던 사람이 금방 사물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인데, 이것은 오늘날 현대 신경과학의 발달로 밝혀진 소위 ‘본다는 것 (seeing)'의 신경생리학적 과정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사물을 인지하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 들어온 새로운 정보가 뇌에 전달되었을 때, 이미 기억을 통하여 미리 저장되어 있던 기존의 정보와 새로운 정보와의 연관을 통하여 뇌에서 새로 들어온 정보를 처리함으로써 비로소 그 새로운 정보에 대한 해석을 내림으로 가능하다. 따라서 ‘본다는 것 (seeing)'도 비록 눈이라는 감각 기관에 의존하여 정보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정보를 처리하여 그것이 ’무엇이다‘라는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뇌가 같이 발달되어 있지 않으면, 엄밀히 말해서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게 된다. 시각이 정상인 사람은 처음 눈을 뜬 갓난아기 시절부터 시각이 완전히 형성될 때까지의 일정 기간을 지나오는 동안 수 없이 많은 시각 정보를 뇌에 저장하면서 발달해 왔기 때문에 눈을 잠시 감았다 뜰 때 한 눈에 여러 가지 사물을 인지할 수가 있게 된다. 하지만, 어릴 적 시각 발달에 매우 중요한 시기를 눈의 장애로 놓치게 된 경우에는, 그에 따른 뇌의 시각피질의 미발달로 말미암아 비록 나중에 눈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뇌에서 그 정보를 올바르게 처리할 수가 없게 되어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된다. 미국의 신경학자 Oliver Sacks는 그의 저서 <화성의 인류학자>에서 Virgil이라고 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는 세 살 때 소아마비와 뇌막염을 같이 앓으면서 망막에 손상을 갖게 되었는데, 또 여섯 살 때부터 두 눈에 두꺼운 백내장까지 생겨 단순히 밝고 어두운 정도만 어렴풋이 구별하는 정도로 시력을 거의 잃게 된 채로 약 45년을 소경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백내장 수술로 다시 시력을 갖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되고, 비록 망막이 손상은 되었지만 그래도 사물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되는 정도로 시력이 회복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쁨은 잠깐이고 그는 ‘본다고 하는’ 새로운 고통을 갖게 되었는데, 눈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시각 정보들이 그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도 많은 불편을 주게 되었다. 오랫동안 소경으로서 발달된 남다른 촉각과 청각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고 있던 그에게 시각이라는 새로운 정보는 그야말로 커다란 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그 후에 폐렴을 앓게 되면서 일시적으로 뇌에 산소 결핍 증세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아마도 그게 원인이 되었었는지 그나마 남아 있던 망막의 시각세포들이 모두 손상되면서, 다시 한번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잠시나마 시력을 회복하였을 동안에 그에 대한 많은 관찰이 이루어졌는데, 그가 사물을 보는 것은 마치 조각 단편들을 어떻게 맞춰야 될지 모르는 사람과도 같이 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 예로 고양이를 본다면, 얼굴과 발과 몸, 그리고 꼬리가 모두 따로 따로 연결이 안 되고 흩어져 보인다든지, 혹은 나무를 보는데 그 잎사귀와 밑둥이 따로 떨어져 보인다고 말하는 식이다. 바로 이것이다.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예수님께서 벳새다의 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후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그 소경이 대답한 말과 동일한 현상이 아닌가? 어려서부터 소경이었다가 실제로 눈을 떠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을 벳새다의 소경은 말한 것이다. 이것은 마가가 상상으로 지어낼 수 있는 성질의 말이 아니다. 여러분 같으면 앞에서 기술한 현대 신경과학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소경의 눈 뜬 후의 반응을 마가가 기록한 것처럼 기록 할 수 있었겠는가? 그냥 눈이 밝아져 사물을 전혀 어려움 없이 보았다고 기술하지 않았겠는가?              벳새다의 소경은 예수님께서 한 번 더 안수하심으로 완전히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는데(25절), 첫 번 안수 때에 눈을 회복하였다면, 이때에는 뇌까지도 회복하여 만물을 밝게 보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 가야 할 중요한 사항은,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에 눈과 뇌를 고치실 수도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의 다른 기사에는 소경이 눈을 뜨는데 마가와 같은 임상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였다고 기록된 요한복음 9장의 소경도 마가와 같은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왜 유독 마가복음에는 두 번에 걸쳐 치료를 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현대 과학이 이 기록을 발견하고 성경의 기록이 사실임을 증거 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경이 정말로 눈을 떴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바로 그 메시야임을 증거 한다는 것이다(사 35:5-6; 마 11:2-5). 할렐루야!!!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5: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1-26 19:30:03 | 김정훈
안녕하세요.  저희가게에 여호와증인 분들이  한달에  두번 정도는 방문을 하세요. 그때마다 같이 일하시는분이(여호와증인분들과친함)  성서 공부를 하세요..파수대인가 그거하고 성경공부요  전  정동수 목사님 강해를  그분에게 가끔씩 보여드렸는데..그분이 여호와증인 성서 내용과  너무 비슷하다구???   천년왕국 이야기도그렇고 너무 똑같은 말씀들이 많다고  하시는데..정말그런건가요??  지옥이 없다는거 빼곤 다  똑같다구  지옥이란 말은 성경 말씀에  없다는게  좀 이해가 안가면서도  인간을  지긋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일 없다는 말엔  너무나 공감이 가더라구요.   저희집에서 함께 일하시는분도 말씀을 잘모르고 저두 잘모르니.....인생의 삶도 괴로움에 연속인데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실 분이 아니란 말만빼고 거의  똑같다는데..   답변 부탁드립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8:2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1-26 17:35:23 | 정현정
현재 미국이 아주 빠른 속도로 반-기독교적으로 변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최근에 나온 글이 있어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자 한다. 특히 3위와 8위의 내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전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 지고 있는 것이다. 1위와 2위의 내용은 특히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교육법안을 생각할 때 더욱 피부에 와닿는 내용이라 생각된다. ******************************************************************************************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단체 'Defend Christians'가 온라인 투표를 통해서 2011년 미국에서 일어난 반(反) 기독교 10대 사건을 선정하여 발표했다.   이 단체의 게이스(Gary Gass) 박사는 이번에 선정된 10대 사건에 대해 놀라면서, 이는 기독교인들이 나라의 정치적 발전 방향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래는 미국에서 2011년 일어난 반 기독교 10대 사건 목록이다.   10위: NBC 텔레비전 방송국이 국기에 대한 맹세(the Pledge of Allegiance)에 나오는 ‘하나님 안에서(under God)’ 문구를 문제 삼다.   9위: 메사추세츠(Massachusetts) 주(州)에서 낙태를 반대하는(pro-life) 한 남성이 평화적으로 낙태 반대 홍보지를 나누어 주다 경찰에게 테러 용의자로 몰려 폭행을 당하다.   8위: 미네소타(Minnesota) 주(州)에서 직장 동료를 자신의 아내가 인도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하게 한 남성이 해고를 당하다.   7위: 플로리다(Florida) 주(州)의 한 기독교인 교사가 인터넷에 올린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는)전통적 결혼을 옹호하는 글로 인해 정직 당하다.   6위: 몬타나(Montana) 주(州)에서 낙태 반대자들이 낙태 시술소 앞에서 기도 모임을 갖다 폭탄 테러를 당하다(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음).   5위: 미국 자유인권협회(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의 제소로 미국 순회 법정이 샌 디에고(San Diego)에 있는 솔레다드(Soledad) 산(山) 전쟁 용사 묘지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결하다.   4위: 한 동성연애 인권운동가의 고발로 낙태 반대 기독교 단체들의 온라인 모금 활동이 조사를 받다.   3위: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州)의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San Juan Capistrano)시(市) 당국이 공공 안전과 보건에 위험이 된다는 이유로 한 성경 공부 모임을 폐쇄시키다.   2위: 오바마(Obama) 대통령이 6월을 ‘동성연애자와 양성애자 그리고 성전환자(transgender)의 긍지의 달(pride month)’로 선포하고 백악관에서 동성연애자들이 참석한 기념식을 거행하다.   1위: 캘리포니아의 제리 브라운(Jerry Brown) 주지사(위 사진)가 동성연애자, 양성연애자 그리고 성전환자들을 ‘축하(celebrate)’하는 내용을 공공 학교 교육 과정에 포함시키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하다.   Defend Christians는 이번 10대 사건들이 자신의 단체의 인터넷 회원들의 투표로 선정되었지만, 선정된 사건들과 자신의 단체의 사역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출처: 한국선교연구원(krim.org) 파발마 791호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8:2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1-19 21:22:09 | 김정훈
천주교라고도 하고 예배당의 이름을 '성당'이라고 부르며, 외국어 표기로는 카톨릭/캐톨릭과 얼추 비슷한데 공식 표기는 가톨릭인 종교가 있다. 심지어 아마 한국 한정으로, '개신교'의 반대 개념으로서 이 종교를 '구교'라고 표기한 게 간혹 통용되기도 한다.많은 사람들은 이 천주교와 개신교가 각각 기독교의 subset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똑같이 신을 팔고 예수 파는데, 둘이 뭐가 다른지 잘 모른다.이 천주교에 대해서 본인은 도대체 무엇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막막하고 한숨만 나온다.최대한 이성적이고 차분하게,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내가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천주교는 그냥 그럴싸한 인본주의 종교일 뿐 왜 성경을 믿는 기독교라고 여겨질 수 없는지에 대해 오랜만에 좀 써 내려가도록 하겠다.1. 기독교는 구원관과 내세관에 관한 한 매우 극단적이다. 예수님 외에 그 어디에도 구원이 없으며, 인간의 그 어떤 선행으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충족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한번 죽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완전히 끝이지만, 사람의 혼은 불멸이기 때문에 하늘 아니면 지옥에서 영원히 자기 의식을 갖고 산다고 가르친다.특히 기독교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가르친다. 한번 회개하고 믿고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그 뒤에 제아무리 잘못하더라도 구원을 잃지 않는다. 내 선행으로 구원을 얻은 게 아니니, 내 악행으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아멘. 이런 대인배적(?) 교리가 있는 다른 종교? 난 못 봤다. 그리고 반대로 제 2의 기회가 없이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뜨거운 지옥을 가르치는 곳도 흔치 않다. 천주교는 이 둘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종교 개혁의 빌미가 되었을 정도로 천주교의 큰 교리 차이 중 하나이고, 지옥의 경우 천주교는 연옥 교리가 있기 때문이다.2. 기독교의 '주의 만찬'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의식이다. 이때 같이 먹는 빵과 포도즙은 당연히 그냥 상징일 뿐이다. 그런데 천주교는 이걸 이상하게 배배 틀어서 그 빵과 포도즙 자체가 예수님의 진짜 옥체와 보혈이라고 억지를 부린다. 사제가 라틴어로 주문을 외우면서 평범한 빵과 포도즙을 예수님 자체로 변신시킨다고. 화체설이라고 들어 보셨는지?이게 도대체 뭔 궤변인가 싶지만, 이거야말로 가히 중세에 무수히 많은 크리스천들의 피를 부른 치명적인 교리이다. 김성한의 소설 <바비도>에도 잠깐 언급돼 있다. 천주교 하면 떠오르는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동그란 빵.. 이거 굉장히 사악한 배후에서 시작된 거라 한다.3. 또한 기독교는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유아 세례는 더욱 거부하는데... 이건 과거의 종교 개혁자들조차도 가장 청산을 못 한 분야에 속하는지라 어지간한 개신교 교파들도 천주교의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더 강하게 말을 못 하겠다.성경 구절을 편 각종 증명들과 세례의 역사적 폐해 나열은 시간과 분량상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도록 하겠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구원의 증표는 침례이다. 스스로 구원 간증을 하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사람이 물에 잠겼다 나오는 침례만이 맞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거 뭐 침례를 주는 교회만 침례교라고 따로 부를 정도이니 현실은 얼마나 시궁창인가?4. 마리아는 그냥 신실하고 현숙한 여인이고, 우리와 똑같은 죄인의 피를 물려받았다가 구원받은 평범한 크리스천이었을 뿐이다. 기독교는 마리아에게 기도를 한다거나 경의를 표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마리아가 오늘날 자기 신분이 얼마나 날조되고 있는지를 안다면, 아마 놀라 기절초풍하고 까무러치다 못해 심장마비에 걸릴 것이다. 이휘소 박사가 핵 물리학자로 왜곡된 것하고는 스케일이 급이 다르다.마리아의 시점에서 천주교의 교리 오류에 대해 잘 써 놓은 전도지 <Why Is Mary Crying?> 클릭5.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이고 유대인을 주 대상으로 사역을 하다가(바울은 이방인들 대상) 세상을 떠난 사도이다. 그는 천주교나 교황 제도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돌멩이라는 뜻일 뿐이며,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결코 아니다.6. 기독교에 따르면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은 이미 하늘이나 지옥으로 가 버렸으니까 끝이다. 이는 제사나 추도 같은 망자에 대한 관념까지 바꿔 놓는다. 좋게 말하면 깔~끔하게 바꿔 놓는다.허나, 죽은 사람을 갖고 고인드립을 치면서 “헌금 많이 바치면, 뭘 열심히 하면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이 연옥에서 빨리 나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정말 골치 아파진다. 난 구원관과 사후 관념이 모 아니면 도로 깔끔한 지금의 내 신앙을 좋아한다.7. 그리고 끝으로, 천주교는 성경을 보는 마인드부터가 기독교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창조론 같은 쪽으로 들어가면 성경을 절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성경을 본다고 말은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각종 교회 전통, 교회법 등을 더 우선시한다. 아니, 중세 암흑기 때는 오히려 성경을 금서로 지정하고, 라틴 벌게이트 같은 부패한 역본이나 자기네들끼리 돌려 보고 성경을 읽던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집단이 그들이다.... 이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요즘은 기독교를 자처하는 어지간한 개신교 교회들도 성경에 그렇게까지 연연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고.난 차라리 아예 안 믿고 말지, 하나님 팔고 예수 팔고 성경을 판다면서 천주교처럼 믿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아주 오래 전부터 했다. 천주교의 각종 성화, 성상, 특히 마리아 형상을 보면 이것들의 배후와 기원이 떠오르기 때문에 마음이 굉장히 불편하며, 어떨 때는 오싹 소름까지 돋는다만..얘네들은 어째 세상 불신자들을 상대로는 굉장히 좋은 이미지로 appeal해 있다. 세례고 침례고 나발이고 교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일반 사람에게 천주교는 종교적인 비주얼이 아주 그럴싸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에서는 천주교는 아주 정의롭고 이성적이고 좋게 그려져 있는 반면(조선 명탐정처럼), 기독교 쪽은 그냥 뻘건 십자가에 개념 없는 광신자나 나약한 loser 내지 위선자 이미지이다(도가니, 파괴된 사나이, 밀양 등). 그래서 한숨뿐.천주교는 기독교와 이렇게도 다른데도 사람들은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 재판, 갈릴레이 갈릴레오 재판도 다 기독교의 과오라고 싸잡아 부르고 있으며, 종교 개혁으로 인해 개신교가 생기기 전부터 명맥을 유지해 왔던 기독교 집단(천주교로부터 탄압 받고 존재가 부정되어 온)들에 대해서는 절대 무지하다. 알비겐시스, 왈덴시스 등.난 애시당초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이 기독교에 플러스가 된 사건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건 기독교를 무력으로 박멸하는 게 불가능하고 그래 봤자 국익에 보탬이 되지도 않으니, 자기 식으로 융합· 짬뽕된 짝퉁 종교를 기독교라고 로마 황제가 공인해 준 것일 뿐이다. 싸움의 양상이 이젠 더욱 교묘해졌다. 마치 이북 평양에 있는 국영 교회라든가, 일제 강점기의 문화 통치하고 완전히 똑같다. 저게 어떻게 기독교계의 승리란 말인가? 그 로마 교회는 성경의 로마서가 기록되던 시절의 로마 교회가 절대 아니다.천주교치고 친이스라엘· 친유대인 노선을 주장하거나 이스라엘의 문자적인 회복을 믿는 사람은 단언하건대 결코 없다. 왜 그런지 설명하자면 말이 굉장히 길어지니 이 자리에서는 생략하겠다.천주교치고 킹 제임스 성경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다. 너무 당연한 귀결이다. 천주교의 오류를 가장 잘 까발리는 성경인데 좋아할 리가. 적장은 적장을 알아보는 법이다.천주교는 종교 개혁을 종교 분열이라고 부르고, 루터 역시 종교 분열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종교 개혁 이전의 각종 듣보잡 기독교 집단들은 다 이단 사이비들이며 자기네가 기독교 정통이라고 여전히 잡아떼는 중. 위클리프, 틴데일 같은 사람을 오늘날까지도 엄청나게 싫어한다.옛날에 천주교의 성경 변개는 이 정도로 막장이었다.예를 들어,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멸망하리라” (눅 13:3,5)에서 '회개'(repent)를 고해(do penance)로 바꿔서 고해성사 교리를 지지하게 해 놨다거나,눅 1:28에서 천사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에게 “너는 정말 복이 많기도 해라. 하나님으로부터 큰 호의를 입으니 참 좋겠다”(수동)라는 뉘앙스로 말한 걸 “넌 정말 은혜가 너무 너무 충만한 사람이구나”(능동)로 바꿔서 마리아를 마치 제 스스로 은혜가 가득해서 남에게 무슨 은총을 잔뜩 베풀 수도 있는 성인으로 신격화했다.이들의 마리아 '빠' 기질은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여자의 씨, 즉 예수님이 뱀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는 약속(창 3:15)을 “여자가 뱀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고 바꾸기까지 했다.거짓말이 아니다. 정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황당한 조작이 성경을 두고 벌어져 온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Douay-Rheims라는 옛 천주교 성경의 본문을 직접 보기 바란다.비록 오늘날의 변개된 성경들은 킹 제임스 성경에 비해 여전히 좀 불량 구절이 남아 있긴 하지만, 최소한 저런 짓을 하지는 않으며, 한국어 공동번역이나 영어 New American Bible 같은 오늘날의 천주교 성경들도 저건 고쳐졌다.이것도 그나마 성경이 널리 보급되고 진리의 빛이 퍼지면서 쟤들이 중세 암흑기 같은 깽판을 대놓고 벌이지는 못하게 되어 상황이 개선된 것이다.성경이 천주교 수뇌부의 전유물이어서 내가 구원으로 이르는 참된 길을 몰랐다면... 그래서 저런 변개된 성경에 속아서 평생 교회의 노예로 고생하다가 죽어서는 지옥 갔다면...? 이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나는 내가 믿는 이 믿음을 피로 지키면서 전해 준 믿음의 선진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옛날 같았으면 이런 글을 공개적으로 올렸다간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져서 열나게 고문 당하거나, 아예 진작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신앙이라는 건 인생의 본질과 영원을 다루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의 핵심을 보질 않고 왜 다들 대외 이미지라든가, 겉보기로 거~룩하고 경건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만 보는지 모르겠다. 한낱 인간이 제 깜냥에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다고?여기 들어오는 분들 중에 천주교의 실체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검색 결과를 통해 우연히 이 글을 접한 분, 적진 염탐(?)을 목적으로 여기 몰래 들어와서 이 글을 읽는 천주교인 중에는 기분이 언짢은 분이 있으려나 모르겠다.나도 이런 글은 몹시 조심해서 쓴다.그러나 그렇더라도 제발 내 글에 악이 받쳐서 해코지하고 어떻게든 지엽적인 허점 찾아내고 반박하려고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길 바란다.아예 무교나 기독교 안티라면 말도 안 한다. 천주교라면.. 당신은 도대체 천주교의 무엇이 마음에 들어서 지금과 같은 종교관을 갖고 있는지, 당신에게 예수님이나 성경은 어떤 존재인지를 곰곰이 좀 생각해 본 뒤, 이 글을 다시 읽어 보기 바란다. 사실, 이런 사람치고 자기가 소속된 천주교 교리를 제대로 알기라도 하는 사람을 난 못 봤다.겨우 인간적으로 고상하고 그럴싸한 종교 생활을 하는 게 목표라면 차라리 나처럼 철도교에 입문해라.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종교 레벨 자체가 아니다.아무쪼록 독자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을 발견하고 따르길 원한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57:2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1-16 00:49:57 | 김용묵
유인원 행성의 출현?   왠 낯선 침팬지   얼마 전 거리를 누비는 시내버스에 왠 낯선 침팬지 얼굴이 커다랗게 하나 그려져 있는 영화 광고를 본 적이 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사실 옛날에 TV에서도 보여준 적이 있던 오래된 추억의 명화인데.. 정확히 1968년에 개봉 되었으며, <벤허>로 유명한 찰턴 헤스턴이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의 제목이 바로 <혹성탈출>이었다. 최근 버스에 광고된 이 영화는 말하자면 그 뒤에 다시 새롭게 만들어진 <혹성탈출>의 앞 이야기인 셈이다.                       <저작권 법을 고려하여 허가 받지 않은 사진을 삭제하게 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우선 재미있어야 한다”는 필자의 기준을 일단 통과할 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는 그렇게 끝났다. 치매를 치료하려고 개발하던 약물이 공교롭게 실험용 침팬지의 지능을 상상 외로 높이게 되고, 그 한 마리의 침팬지가 주변의 다른 유인원들을 일깨우며 점차 무리를 확대하여 인간과 분리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것으로 영화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반면 침팬지의 지능을 높여 주었던 동일한 약물에 감염된 인간은 면역체계가 급격히 약해지고 결국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피를 토하고 죽는 일이 발생한다. 아마 이 영화의 다음 편이 만들어진다면 사람은 점차 멸종되어 가고 지능이 높아진 유인원들은 반대로 인간이 사라진 이 지구를 대신하여 지배하는 이야기로 전개될 것이 충분히 예측된다. 참고로 이 영화의 원제목은 <유인원 행성의 출현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이다.   영화를 보면 어떻게 유인원들의 감정을 진짜 같이 섬세하게 표현해 냈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 그래서 전에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화제가 되었던 소위 요즘 할리우드가 자랑하는 ‘이모션 캡쳐 (emotion capture)'라는 기술적 방법에 흥미가 당길 수도 있겠다. 유인원들이 한 명의 영리한 리더를 통해 점차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가고, 급기야는 인간이 만든 울타리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들 속에서 혹자는 어떤 이유로든 억압 받는 이 사회의 소수를 생각하며 사회적인 측면의 문제의식을 끄집어 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주인공 침팬지 ‘시저 (Caesar)’가 시간이 지나면서 도구를 사용하고 빠르게 언어 능력을 획득하는 것을 보면서 누군가는 또 ‘그래.. 과거에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어느 운 좋은 유인원이 저렇게 인간으로 진화했을 거야..’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앗, 그렇다면 이건 좀 곤란한데..! 영화에 사용된 기술적인 내용이나 혹은 사회적 문제를 영화 속 유인원들에 은유적으로 비유하여 하나의 담론으로 풀어내는 것은 뭐 상관없지만, 과학적 사실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비판 없이 사실로 믿게 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사람과 동물의 인지능력 차이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은 <인간의 혈통>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사람을 단지 ‘커다란 뇌를 갖고 있는 원숭이’ 정도로 여겼다. 그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인지능력들의 기본적인 형태를 모든 동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으며, 사람은 그저 운 좋게 좀 더 큰 용량의 뇌를 가진 덕분에, 그러한 능력을 갖게 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운 좋게? 도대체 사람과 동물의 인지능력이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에 이것들이 다윈이 상상한 대로 그저 ‘운 좋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일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진화론자들이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라고 여기고 있는 침팬지를 포함한 모든 동물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인지능력의 차이에는 도저히 우연히 생겼다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상상 이상의 엄청난 간격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영화에서 주인공 침팬지 ‘시저’가 관객의 시선을 고정 시키는데 한 몫을 단단히 하는 아주 중요한 한 장면이 있는데, 바로 인간의 언어를 말하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비록 ‘No'라는 한 단어 이었을지라도 영화를 보는 관객은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렬한 효과를 끌어내는지.. 왜냐하면 바로 그 언어야 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인지능력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엄청난 힘이 있는 능력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다른 동물은 물론이고 침팬지조차도 인간의 것과 비교될 수 있는 그런 언어능력은 없다.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 탁월한 언어능력은 가령 원하는 정보를 무한 반복하여 집어넣어 표현할 수 있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범주를 구별하여 인식할 수 있는 등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셰익스피어를 읽어 보라.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들어 보라. 지금까지 인간과 침팬지의 언어를 연구하여 얻어낸 중요한 결론이 있다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개념들을 습득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보통 3살을 넘어 가면서부터 배우게 되는 내용부터는 침팬지가 결코 따라 올 수가 없으며 그때부터 점점 인간과 침팬지의 언어 능력이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탁월한 인지능력 가운데 또 하나는 인간에게서만 관찰되는 복잡한 사회 인지능력이다. 가령 18개월 된 어린 아이도 ‘감정이입’의 능력이 있어서 자신의 인형이 상처를 입는 것을 보면 가서 위로해 주거나 고쳐 주는 등의 행동을 한다. 또한 6개월밖에 안 된 아이도 이미 마음속에 사물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심리적 표상을 갖고 여기에 긍정 혹은 부정의 값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마치 여러 개의 마주 댄 거울의 상이 겹쳐 보이듯이 속에 겹겹이 끼워진 여러 개의 심적 상태를 가질 수 있기도 하다. 가령, “A는 B의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야한다는 것을 C가 믿고 있다고 D가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거나, 실제 행동으로 관찰되는 상황을 가령 “선생님을 쳐다보는 A를 바라보는 B를 응시하는 C를 관찰할 수 있다.”는 식으로 기술해 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성에 기초한 인간의 심층적인 인지능력은 동물에게서는 그와 비슷한 것조차도 찾기가 어렵다. 더 나아가 동물에게는 소위 ‘지식’의 심적 표상이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관찰되는 형태의 ‘가르침’의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 동물에게서 간혹 관찰되는 ‘가르침’과 유사한 행동은 대부분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으며 ‘적응’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인간의 ‘가르침’은 제한이 없는 많은 목표를 향한 광범위한 영역에 적합한 가르침이다.     인간과 동물의 뇌, 그 구조적 차이점   이제 인간의 뇌는 동물과 어떻게 다른지 잠시 살펴보자. 신경과학자들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인간의 뇌는 다윈이 말한 대로 다른 포유동물의 뇌와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이에 힘입어 인간의 뇌를 보다 미세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인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즉, 사람의 뇌는 침팬지를 포함한 다른 포유동물의 뇌와는 달리 훨씬 복잡한 신경 연결망으로 엮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언어와 연관된 부위나, 감정이입과 죄책감 등 사회적 정서와 연관된 뇌 부위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저작권 법을 고려하여 허가 받지 않은 사진을 삭제하게 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에서 한 과학자가 치매 치료제로 개발한 약을 침팬지에게 주사함으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능을 획득하고 그 결과 침팬지가 인간처럼 도구를 사용하게 될 뿐만 아니라 논리 및 언어 능력을 얻게 되는 설정은 영화를 재미있게 끌어가기 위한 스토리 전개에는 필요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그런 약은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앞으로도 존재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영화 속의 그 약은 필경 신경 세포의 재생 및 성장을 촉진 시키는 약일 가능성이 높은데,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바, 뇌 속의 신경 세포는 단순히 그 양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망을 형성하느냐에 따라 그 기능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이때 연결망은 어떤 선행된 프로그램을 따라 기초 회로가 형성되어 있어야 하고 그 바탕 위에 반복적인 학습 및 경험을 통하여 가지치기를 해나가도록 짜여 있다. 따라서 어떤 약이 비록 신경세포의 양이나 가지 수를 증가시키도록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복잡하고 정교한 인지능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위에 이것들을 안내하는 또 다른 절차와 메커니즘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결국 이것은 ‘정보’의 개념으로의 선행 조건을 요구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간의 뇌에는 대략 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존재하는데, 이는 자그마치 은하계에 존재하는 별의 숫자와 동일하며, 이들 천억 개의 뇌세포 중 같은 것은 또한 단 하나도 없다! 인간의 뇌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전기화학적 신호들이 어떻게 지각, 기억, 감정, 사회성과 같은 고차원적인 인지능력으로 전환되어 나타나는지 그 규칙을 해독하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이 매달리고 있지만, 그 답의 극히 일부를 밝혀내는 것만도 아직은 너무도 버거운 상태이다. 뇌 속을 흐르는 신경암호들은 종종 디지털 컴퓨터의 기계암호에 비유되곤 한다. 한 계산에 의하면, 뇌의 약 10% 정도만 동시에 작동해도 뇌는 적어도 초당 약 1천조개의 정보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이것은 인간이 만든 가장 우수한 슈퍼컴퓨터보다 1,000배가 넘는 엄청난 능력이다.   침팬지가 우연히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망상   지난 2001년에 언론에 크게 보도되어 잘 알려진 것처럼 인간의 DNA는 총 30억 개 정도의 염기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적 차이를 DNA 염기배열만 액면 그대로 단순 비교하여 약 2%, 즉 6천만 개의 염기에 해당되는 정도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백질을 만드는 염기배열 가운데서도 염기치환이 일어난 것만을 선택적으로 골라 만들어진 수치이며,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임이 계속 지적되고 있다. 여기에다가 단백질을 만드는 DNA 염기 배열 이외에 아직 그 기능이 밝혀져 있지 않은 다른 DNA 영역까지 고려하게 된다면,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염기서열의 차이점은 10% 이상으로 벌어지게 될 것이다. 과학자들이 보다 정밀히 연구할수록 소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어떤 가능한 유전적인 원인 또한 생각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아내고 있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잠시 계산을 해보고 넘어가자. 진화론자인 할데인(Haldane)은, 자연선택의 과정을 통해 한 개체군 내에서 어떤 돌연변이를 고착하는 데 드는 높은 유전적 비용을 고려해 볼 때, 인간의 유전자 내에 약 천 개의 유익한 돌연변이를 고착시키는 데는 대략 600만 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수학적으로 계산한 바 있다. 그렇다면 1개의 유전자를 형성하는 데 평균 2천 개의 염기가 요구된다고 가정했을 때, 천 개의 유익한 돌연변이는 적어도 2백만 개의 염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200만 개의 염기마다 600만 년이 걸린다면, 어떤 공통조상으로부터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져 나와 그들의 DNA 중 2% 즉, 6천만 개의 염기 배열의 차이를 만드는 데는 아무리 ‘운이 좋아도’ 적어도 1억 8천만년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진화론자가 말하는 인류가 유인원으로부터 분리되어 진화되었다고 보는 200~400만 년의 시간과는 적게는 45배에서 많게는 90배가량의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나타나는 너무나도 현격한 인지능력과 또 이를 뒷받침할만한 뇌구조의 차이를 보여 주기 위해서 도대체 얼마만큼의 유전적 차이가 요구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도 모르고 있다.   생물의 우연 발생적 존재의 기원을 받아들이고자 할 때, 더 많은 유전자는 당연히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물은 단순히 유전자 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것들이 어떤 장소에서 어떤 순서로 발현되느냐를 지정하는 단계적 명령계통도, 즉 소프트웨어가 또한 필요하다! 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 역시 소위 해부학적 ‘회로’의 구성이 절대적이다. 이를 지시하는 어떤 상위 계통의 명령체계가 필요하고, 이것들이 돌연변이와 자연선택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과 가정이 요구된다. 여기서 잠시 인간이 만든 컴퓨터를 생각해 보자. 컴퓨터는 결국 하드웨어도 중요하지만 잘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들이 이상 없이 잘 구동이 되어줄 때라야 비로소 제 기능을 다한다. 컴퓨터를 사용해 보면 세상의 어느 누구라도 이것이 매우 정교한 지적 설계의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뇌라는 하드웨어적 구조의 존재도 우연히 이루어졌다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낮은 확률에 기댄 막연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놀랍도록 정교한 소프트웨어적 인지기능의 발현과 그것들을 나타내주는 문법(syntax)의 작동은 더더욱 우연 발생적 기원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슈퍼컴퓨터를 초월하는 인간의 뇌의 효과적인 정보처리 능력을 볼 때, 더구나 언어, 의식, 창의성을 가능케 하는 인간만의 놀라운 인지기능을 생각해 볼 때, 이 모든 것들이 발현될 수 있는 통로 역할을 하는 뇌의 존재야말로 그 어느 것보다도 지적 설계론적 기원, 즉 지적인 존재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음을 강하게 증거 한다. 침팬지가 인간이 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야기인 것이다! 미안하다, ‘시저~’!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 질서   성경에 따르면 사람은 분명 다른 동물과는 구별되게 창조 되었다. 그 차이점이 유전자 상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현재 사람이 갖고 있는 총 DNA 염기의 수 30억 중에 그것들이 우리의 세포 내에서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우리가 어렴풋이나마 아는 것은 고작 2% 미만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98% 이상은 아직 베일에 덮여 있다. 즉, 인간 유전자 지도를 책으로 비유 한다면, 책의 글자를 읽을 줄은 알았지만, 읽고도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는 단지 2% 정도 밖에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제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유전학의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면 될 수록 그 새로운 결과들이 진화를 증거 하기보다는 오히려 생명체의 설계 가능성을 더 뒷받침하게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새로운 증거들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야 비로소 사람들이 창조주의 살아 계심을 고백하게 될 것인가?   사실 바울이 말한 “그분의 보이지 아니 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세상의 창조 이후로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 (롬 1:20)”는 말씀처럼 인간의 육체만 자세히 들여다보더라도 그 놀라운 창조주의 설계 솜씨를 발견하지만,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사실이 또한 창조주를 증거 한다. 성경은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사람들이(창 1:27)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고 말한다(창 2:7). 더 나아가 “사람의 혼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고 목이 탄다 (시 42:1-2)”고 말한다. 물질로부터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비물질적 영혼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며, 또한 그 분의 설계를 강력히 증거 한다.   영화 속에서 약물을 개발하는 과학자 ‘윌’의 여자 친구 ‘캐롤라인’이 몇 번인가 이런 말을 한다. “윌, 자연의 법칙을 거슬려선 않되.” 과학은 잘 다스리면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도구가 되지만, 인간의 탐욕과 오만함이 결합되면 치명적인 재난을 불러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바로 그런 것이 SF 영화의 단골 소재가 아니던가! 그러나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도구로서의 과학조차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법칙을 설계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잊는다면 그것은 현대의 바벨탑일 뿐이다! 캐롤라인의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윌,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법칙을 거슬려선 안 돼!!”   - 김정훈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8:2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1-10 23:16:03 | 김정훈
* 사랑침례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형제입니다. Keepbible 사이트를 통하여는 처음 인사 드립니다.   상당수의 과학자들이 외계 생명체를 찾고자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가며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이며, 일반인들도 외계인의 존재에 대하여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들 생각하는 이유는 대개 우주가 너무도 크고 넓기 때문에 우주 한 구석 어딘가에는 어떤 형태라도 생명체가 있을 법 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당연히 진화론적 사고가 깔려 있다.    최근에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주관하여 발행하는 인터넷 과학신문 <Science Times>에 이런 생각을 바꿔 줄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기에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57313     P.S. 여기에 실린 글이 창조과학 진영의 매체가 아닌 일반 과학언론 매체에서 나온 글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5:18:2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1-09 11:44:09 | 김정훈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께선 엘리야 선지자 처럼 기도에 능력을 가지신거처럼 매번 말씀하시고  병고치는은사..제몸에  악한 영이 들어 있다면서  기도해주시고  금식 하신다며  저를  부담을  주십니다....개역성경으로  성경 공부를 사모님께서  가르쳐주셨는데  제가  도중에  그만뒀어요...자꾸 절 위해  목사님이  사역하시기두  힘드신데   금식기도를  너무 힘들게  계속 하신다고  강조 하셔서...제느낌이지만.....전  하나님를  잘모르는  사람입니다..말씀에  갈급함을  좀  느낀달까~~~~  이곳에  다는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꼭  주일  예배를  참석해야하나요??  집에서  동영상 설교 들으며  예배보면  안되나요??? 또  목사님께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영적인 목사님께  저주 받을수도있나요?? 목사님께서  예언 해주셨는데..그걸 믿어야할지??   그리고  흠정역 성경요  진짜!! 이단 종교아니죠?? 넘  바보같은 질문인가... 잘  모르니  이해해주세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57:2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1-07 17:20:29 | 정현정
http://www.ted.com/talks/lang/ko/alexander_tsiaras_conception_to_birth_visualized.html#.Twaa4oLXV9k.facebook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57:2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1-07 10:24:03 | 허광무
미국 메사추세츠 주 캠브릿지 퀘이거학교에서... 레즈비언 긍지의 날에 벌어지는 교육... 한글 자막영상이 페이스북에서 봤는데 유튜브에는 없어서 그냥 올림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57:2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2-01-06 09:44:22 | 허광무
왜 우리나라의 목사님들은 자신들을 모세의 위치로 앉히려는지 너무나 한심하다 못해    분노가 입니다  목사가 언제부터 영적인아버지며  성도들의 축복의키를 쥐고있다고 주장   하는지 이건 마치 우리가 중세 카톨릭시대로 회귀한것은 아닌지 내살을 꼬집어볼정도로   진저리가 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된 성도들이 모여 주님의교회를 위해 저마   다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주님의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려고 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보여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한국의 모든 목사들은 어째서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보다 자기   가 주인행세를 하여 성도들을 우롱하고 구약의 율법주의에 갇혀 성도들을 영적으로 기만   하고 유린하는지  이러다가 머지않아 개신교에서도 카톨릭의 고해성사를 지지하겠다는   망언을 하지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며칠전에 교회에 미국의 제인스목사라는 사람이 와   서 예언을 한다고하여 4일동안 교회를나가지 않았더니 부목사님이 집에와서 어서가자   고 하 기에  성경의 계시가 완성된 지금 은사주의에서 기인한 예언은 나는 동의하지않는다   ( 정동수목사님버젼으로) 하였더니  교회의 담임목사님되시는 아버지께서 검증하신분이니   담임목사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자고 자꾸 재촉하였지만  저는 결코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예배는 드려야 되지않겠냐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나의 상한마음을   건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목사님이 담임목사님을 그런표현으로 말씀하시는것을 동의   하지 않습니다 라고 거듭 밝히며 끝내 가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담임목사님이 우리의 영적인 부분을 책임지는 아비의 마음   을 가지고 목양을 하기떄문에 다소 담임목사님과 안맞는부분이 있어도 목사님께 순종하여   야한다고 하면서 다시한번 가자고 권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안에 거하고 있고 말씀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를 통하여 예언   을 줄수는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모든 개개인 성도들에게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예언해준다는것은 성경적으로 저는 지지할수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 연후에 그냥 가시더군요  저의 마음도 많이 안좋았습니다.   많은 목회자나 목회자를 돕는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분들의 모습은   목사님의 목회철학에 따라서 움직여지는 광대가 아닌가 하는 씁쓸하고 슬픈마음까지 들었   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이나라라를 복을주신 하나님의 알수없는 경륜에 다시한번 경외   감을 느꼇습니다, 요즈음 그래도 힘이나는것은 저희 집사람이 킹제임스 성경세미나를 듣   고 몇가지 정동수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서 제가 엉뚱한것에 빠진것이 아니고 이게ㅡ 맞다   라고 하는 나름대로 판단을 해줘서 조금 위로는 받았습니다  어제는 제가 집사람에게  나   도저히 교회에 못다니겠다  킹제임스성경을 통해  진리를 알았는데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   이나 양육을 해야할 사람에게 개역성경을 보게하는것도 그렇고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   수님의 경영시스템이 아닌  일개 목사의  목회철학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이라 하여   이루어지는 일련의 시스템이 물론 이것이 다 잘못되었다는것은 아닙니다 단지 성도인 내   가 원하는것은 말씀위에 더하여진 목사님의 목회철학이나 신념이 아닌 (이것이 자의적이   거나 인위적으로 목사의 영성으로   왜곡되는 현실)  목사님이 양이되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양질의 하나님말씀을 잘가르쳐서 올바른 진리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그것 하나뿐인데 말씀을 하면서도 말씀에서 주는 하나님의 교훈위에 영해를 통한 문맥에   맞지않는 설교로 인하여 정말 왕짜증이 날지경입니다  이런고충을 얘기했더니  다소 혼란   스러워하더니  그냥 흘려들을건 흘려듣고 받아들일건 받아들여야지 여기서 매주마다 사랑   침례교회를 갈수는 없지않겠느냐 그러더군요  저도 많이 답답해지더라고요  문득 이방원   의 하여가라는 시가 생각나더군요  그러나 진리를 사수하려고하는 내속의 피가 움직이는   동안은 그리할수는 없다라고 곧 생각이 되어지더군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아무쪼록 힘내시고요 여러분들의 외로운 결   단을 전폭 지지하며 죽을떄까지 많은사람들이 킹제임스흠정역성경을 진리라고 하는 우리   들을  교회와 융화되지못하는   무교회주의자들이라거나  우리들에게 갖은 조소와 야유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진리를 알고 보존한자로 그야말로 빛도없이 이름도 없이 소위말해 별   볼일없이 살다가 간다고 해도 나중에 예수님앞에 섰을떄는 우리의  대우는 달라질거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요즈음 제가 킵바이블 늦둥이로서 여러교우님들에게 글을 드리고 위로   도 받고싶은 마음이네요  참 그리고 질문할께요    오늘날 목사님이 과연 예수님으로부터 교회를 위임받아 그곳에 속한 성도들에 대한 모든   치리와  영적인 다스리는부분들이 모세에게 주어진것 같은 그런 절대적인 권한행사를 할   수 있는것인지 묻고싶습니다 그분들도 바보가 아닐진대 성경적으로 말씀해주는 부분이 있   으니깐 그렇게 대놓고 성도들을 괴롭게하는것 아닙니까?   부탁드리지만 성경에 비추어서   답변을 듣고싶습니다 개인적인 사견은 사절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57:2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12-16 20:50:22 | 김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