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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제님의 답변으로 링크해 주신 좋은 글에 조금 덧붙여 보겠습니다.하나님께서 일부다처를 권장하셔서 그들이 여러 아내를 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당시 족장 시대나 왕정 시대의 시대상과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인간의 의지와 관습에 의해 그렇게 된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실제로 일부다처를 선택함으로써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여러 고난과 불상사가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도 본처와 후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민족 간 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야곱 또한 가족 간의 질투와 분쟁이 일어났고 다윗도 어머니가 다른 자녀 간의 성적 범죄와 살인, 반역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바 대로 성경은 명확하게 일부일처가 하나님의 창조원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또 그는 자기를 위해 아내를 많이 두어 자기 마음이 돌아서지 않게 하며 자기를 위해 은금을 많이 늘리지 말지니라.(신17:1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 외에 다른 이유로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며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하느니라, 하시니라.(마19:9)성경에, 특히 구약에 나온 믿음의 사람들이 왜 일부다처를 했을까 의아해 하시기보다 그런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쓰시고 오히려 일부다처 때문에 생기는 가족 간의 갈등과 나아가 국가와 민족의 비극이 성경에 기록됨으로써 일부일처제도가 하나님의 선명한 뜻임이 증명되고 있다고 이해해야겠습니다.가을의 정취 속에서 말씀의 경건한 기쁨을 맛보시기 바랍니다.감사합니다.
2013-10-30 16:39:06 | 김대용
창세기때부터 하나님은 한남자가 한여자로 만족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것 같은데   왜?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고나서 4명의 부인을 더 두었으며 다윗도 많은 부인을 두었고  또한   솔로몬은 많은 부인을 두었어 이스라엘을 음행하게 만드는 일들이 생겼는데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을 터인데   지금의 우리보다도 더욱 말씀이 가까웠을 텐데 어찌하여 많은 부인을 두고도 주님은 그에대한 책망을 하지 않았을까요?   궁금해서 올립니다.
2013-10-30 11:19:58 | 예응진
김상진 형제님 반갑습니다.이렇게 댓글과 의미 있는 글로 성경지킴이에서 함께 해 주시니 기쁘네요.사상 최고의 흑인 배우 중 한 명이라고 평가받는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일라이(2010년)’는 저도 킹제임스 성경과 관련이 있는 영화라 몇 번을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을 형제님처럼 유심히 보진 못했습니다. 어두운 세력의 음모에 대해선 그야말로 짐작하고 예상하며 진단해야 하는 부분이라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는 공상일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김** 형제님의 의견처럼 겉으로 드러난 내용만 보자면 킹제임스 성경과 관련된 인간의 본성을 극한의 종말적 상황에서 다룬 영화이니 나름 유익을 얻을 부분이 분명 있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김상진 형제님의 의견처럼 음모 세력이 마지막 순간 발톱을 숨겨 놓을 수도 분명 있겠지요. 대중문화를 접할 때 항상 유익을 취하면서도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순물과 사악한 의도는 간파하고 걸러낼 수 있도록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형제님 덕분에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앞으로 사랑침례교회 7080 부부모임(70년~80년대 출생한 젊은 부부들의 모임) 지체들이 이곳 성경지킴이에서도 댓글과 좋은 글로 종종 참여함으로써 외부의 성도님들께 좋은 본을 보여 주시면 참으로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상진 형제님과 몇몇 형제님들이 앞장서 주세요.예리한 시각의 글에 감사합니다.
2013-10-29 15:36:25 | 김대용
2010년에 ‘일라이(The Book Of Eli)’라는 영화를 관람한 적이 있었습니다. 영화의 주제가 성경을 보존한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서 다시 봤습니다. 그런데 ‘성경보존’ 관점에서 다시 보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글이 조금 길더라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내용부터 소개해드리자면, 물 한 방울 구하기 힘든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인류를 배경으로, 어느 날 일라이(주인공)라는 사람이 신(극중 하나님으로 묘사)으로 부터 인류 마지막으로 남은 성경책을 서쪽 어느 특정 장소까지 안전하게 가지고 가라는 소명을 받게 됩니다. 한편, 카네기라는 악당은 마지막으로 남은 그 성경책이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성경책을 손에 넣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 합니다. 그런 두목에게 부하가 묻습니다. “그깟 책이 뭐라고 그렇게 집착하십니까?” 그러자 두목은 말합니다. “그 책만 있으면 온 세상을 지배할 수가 있어. 그것은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지.., 그래서 그 책을 반드시 찾아야 해!”   어느 날 악당 두목인 카네기는 우연히 자신의 부하들을 손쉽게 제압한 일라이를 만나게 되고, 그런 일라이가 성경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결국 카네기는 무력으로 그토록 바라던 성경책을 일라이로부터 빼앗아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카네기는 성경책을 펼쳐 본 순간 깜짝 놀랍니다. 그 이유는 성경책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책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부상을 당한 일라이는 성경책을 잃은 채 신이 지시한 서쪽 지역에 겨우 도착하게 됩니다. 그 지역의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사람들이 일라이에게 총을 들이대며 찾아온 경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일라이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성경책을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하자, 그의 출입을 허락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말로 자막에 ‘성경책’이라고 나왔지만, 실제 영어 대사로는 ‘성경책’이라고 하지 않고 ‘King James Bible’을 가져왔다고 말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대표로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 일라이에게 묻습니다. “그 책은 어디 있소?” 그러자 일라이는 일단, 종이를 많이 준비해달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자신이 하는 말을 토씨하나 빼지 말고 받아 적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성경말씀을 암송하기 시작합니다. “The First Book of Moses Called GENESIS, CHPTER 1. 1.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2. 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of the waters. 3..., 등” 5절까지 암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1611 킹제임스 흠정역본’과 한 글자도 다르지가 않습니다.   여기까지 언 뜻 보면 이 영화는, 하나님의 성경을 지키려는 자와, 그것을 이용해 악용하려는 자의 선과 악의 구도로 오해할 소지가 높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라이가 힌 옷을 입고 죽는 순간까지(마치 순교자를 암시하듯) 암송한 것을 다 받아 적게 하고 드디어 한 권의 성경책을 완성됩니다. 그 책의 제목은 다름 아닌, “New King James Bible"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뉴 킹제임스 바이블’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결론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더 충격적입니다. 그토록 목숨을 걸고 어렵게 완성시킨 성경을 다른 종교의 경전들 사이에 끼워 넣은 장면으로 마치기 때문입니다.   이미 눈치 빠르신 분들은 이 영화의 의도를 파악했을 줄로 압니다.   이 영화가 의도하려는 바는 첫째, 문자로 온전하게 보존된 ‘성경’은 이미 없다. 둘째, 인간의 머리로 외워서 엮은 성경이 어떻게 완전할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지금 이 시대에는 완전한 성경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셋째, 그러므로 지금의 ‘1611 킹제임스 흠정역’도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그리스로마신화’와 같은 종류의 책일 뿐이다. 넷째, 결국 기독교도 종교의 한 부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전에는 별다른 의식 없이 단순한 액션장르의 영화로 즐기며 봤었지만, ‘킹제임스 흠정역’을 알게 된 지금. 사탄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킹제임스 흠정역’을 공격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문을 제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사탄은 시중에 나와 있는 그 수많은 역본들 중에서 하필이면 ‘킹제임스 흠정역’을 대표적으로 공격하고 있을까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왜? 여러 종류의 역본들 중에서도 ‘킹제임스 흠정역’을 사탄이 공격하고 있을까요? 바꿔 말하자면 마귀들이 왜, 그토록 ‘킹제임스 흠정역’에 민감하게 반응하느냐?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사람들에게 전달이 늦어지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탄의 계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짝퉁이 판치는 세상 가운데 어떻게 온전한 진리를 드러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결실’을 구원의 능력으로 드러내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빌 2:12>.   믿음의 여정가운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에 부족한 글이지만 처음으로 올려봅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진정한 평강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2013-10-29 12:06:43 | 김상진
이 글에 대해 한 형제님이 보조 자료를 보내왔습니다. 아마 요즘 구원파 교회(이요한, 박옥수 목사)에서도 킹제임스 성경이 이슈가 되는 것 같습니다. 진리의 홍수는 아무도(신지어 마귀도) 막지 못하지요. 좋은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자니 그 동안 잘 못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되므로 쉬쉬하는 분위기인가 봅니다. 이요한 목사를 대상으로 하는 대침바로세우기 카페에도 이 글이 올라왔나 봅니다. 이 형제님이 대답한 글이니 참조하세요. 1. 레위기 23장 40절에서 히브리어 단어 ‘페리’는 개역성경의 '열매'가 맞고 킹제임스성경의 '가지'는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영어번역본을 인용하며 히브리어 단어 ‘페리’는 ‘열매’로만 번역될 수 있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단어 ‘페리’를 킹제임스성경에서만 '가지'로 옮긴 것은 아닙니다. 아래 7종류의 영어번역본에서도 '가지'로 옮겼습니다(NASV - 잎가지). NET, NLT, LB, 21st Century KJV, Jubilee Bible 2000, The Voice, NASV 러시아어 Synadal Version 에서도 '가지'로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단어 ‘페리’는 개역성경대로 ‘열매’가 맞는다는 주장은 '히브리어 사전'을 의존하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신학자가 '열매'라고만 정의내린 히브리어 사전이 틀린 겁니다. 히브리어 단어 ‘페리’는 '열매'도 되고 '가지'도 될 수 있는데 레위기 23장 40절에서는 킹제임스성경에 있는 대로 '가지' 맞습니다. 2. 성경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혹은 신문이나 인터넷으로 입증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유대인이 현재 하고 있는 종교적 행위들은 대부분 엉터리가 많습니다. 그들이 현재 초막절에 열매를 흔든다면 그들이 틀린 겁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은 성경기록에 의해서만 입증하고 연구합니다. 느헤미야 8장 15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초막절에 관한 율법을 몇 백 년 만에 찾고 보니 모두 '가지'입니다. 신문에 보도되는 유대인의 삶이 성경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신문의 정보도 도움은 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성경과 신문을 비교하게 되면 큰 오류가 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13-10-25 10:57:08 | 관리자
원어 성경을 읽으며 단어를 찾거나 공부를 하다보면 스트롱 코드( Strong Code)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단어마다 매겨진 번호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스트롱 코드라 불리는 단어 번호표입니다.   다음은 공인본문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 1절입니다. 여기서 각 원어 단어에 붙은 번호가 바로 스트롱 코드입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신학자이던 제임스 스트롱(James Strong 1822 – 1894)은 성경 연구의 편의를 위해서 구약과 신약의 원어 어근 단어마다 번호를 붙여놓고 어느 성경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100여 명의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뽑아서 색인 사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총 히브리어 어근 단어(root word) 8674개와 그리스어 어근 단어 5523개를 KJV 성경을 기초로 해서 사용된 예를 찾아보기로 편찬해 놓은 책이 Strong's Concordance(스트롱의 콩코던스)입니다.       예를 들어 아벨(Abel)이라는 명사를 찾기 원하면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처음부투 끝가지 성경에 나오는 아벨이이 다 나열 되어 있습니다(오른쪽 컬럼 중간 아벨 항목).        http://www.amazon.com/Strongs-Exhautive-Concordance-Super-Series/dp/0785250565/ref=sr_1_2?ie=UTF8&qid=1382515498&sr=8-2&keywords=strong%27s+concordance   보시면 알지만 1920쪽이나 되는 이 책 안에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거의 모든 단어들이 번호로 목록화되어 들어 있습니다.   20년 전에는 이렇게 두꺼운 책을 가지고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연구를 하였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소프트웨어에 스트롱 코드가 들어 있어서 이런 책이 필요치 않습니다.   자세한 것은 위키피디아를 보기 바랍니다.   http://en.wikipedia.org/wiki/Strong's_Concordance   제임스 스트롱 (James Strong 1822 – 1894)은 미국 감리교 목사요, 성경학자였지만 킹제임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원어 연구 도구를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현대 역본 역자들의 전철을 밟기 쉽습니다.
2013-10-23 17:04:08 | 관리자
킹제임스 성경이 확실히 틀린 데가 있다고 누가 주장합니다.과거 수십 년 동안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확실하다고 믿었는데 원어와 대조해 보니 확실히 틀린 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제기하는 구절이 바로 레위기 23장 40절입니다.   흠정역: 첫째 날에는 너희가 좋은 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의 버들을 취하여 {주} 너희 하나님 앞에서 이레 동안 기뻐할지니라(레23:40).   개정 개역: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KJB: And ye shall take you on the first day the boughs of goodly trees, branches of palm trees, and the boughs of thick trees, and willows of the brook; and ye shall rejoice before the LORD your God seven days.   NIV: On the first day you are to take choice fruit from the trees, and palm fronds, leafy branches and poplars, and rejoice before the LORD your God for seven days.   이 구절에서 개정 개역, NIV는 좋은 나무 혹은 아름다운 나무의 ‘실과’(fruit)를 취하라고 합니다.반면에 킹제임스 성경은 좋은 나무의 ‘가지’(boughs)를 취하라고 합니다.   이분은 좋은 나무의 ‘가지’(bough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다른 데서는 대개 ‘열매’(실과)로 번역되었으므로 당연히 여기도 열매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원어를 주장하는 이들은 성경을 교정하려 들다가 항상 이런 자충수에 직면합니다.   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가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스트롱 번호 6529를 가진 ‘페리’로서 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트롱 번호 : 6529 발음 : {per-ee'} : 페리 어원(기원) : 6509에서 유래TWOT : 1809a품사 : 명사,남성형 파생어: 없음 뜻: '과일'(문자적, 또는 상징적으로):- 큰 가지, (【첫】)열매 (【-열매가 많이 열리는】), 보상 periyda'.  페리다  6514를 보라 puriym. 푸림  6332를 보라1) 열매, 소출, 자식, 자녀, 자손, (행동의)결과   사전에서 보듯이 이 단어는 1차적으로 열매, 소출을 뜻합니다.그런데 이 단어의 원래 어원을 보면 이 단어는 스트롱 번호 6509를 가진 ‘파라‘에서 나옵니다. 다음은 ‘파라’의 뜻입니다.   스트롱 번호 : 6509 발음 : {paw-raw'} : 파라 어원(기원) : 기본어근TWOT : 1809품사 :  동사 파생어: 없음 뜻: '열매를 맺다'(문자적, 또는 상징적으로):- 열매를 맺다, (열매)내다, 결실하다, (결실하게 되다), 결실이 풍부하다, 자라다, 증산하다1) 열매를 맺다, 열매가 많다, 갈라지다   이것을 비교해 보면 이 두 원어는 ‘자라서 갈라지다’를 뜻합니다. 그래서 큰 가지(branch)에서 자라서 갈라지면 작은 가지(bough)가 되고 작은 가지에서 자라서 갈라지면 열매(fruit)가 됩니다.   따라서 이런 단어는 앞뒤 문맥을 보고 바르게 번역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이 단어가 있는 문맥은 무엇을 말합니까?   33-43절까지는 이스라엘의 장막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3 ¶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일곱째 달의 십오일은 이레 동안 {주}를 위한 장막절이 되리라.…42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booths)에 거해야 했습니다. 초막은 무엇으로 만들까요?굵은 가지와 잔가지로 만들지 않습니까?포도나 석류나 올리브로 초막을 만든 것 보았습니까?   장막절(초막절)에 대한 구약 성경의 전체 내용은 무엇입니까?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들로 엉성하게 초막을 만들어 거기 거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 사전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초막(草幕):Shelter, Booth [히] &s(sok) (시27:5), hK;s(sukkah)(욥 27:18,욘 4:5) [그] skhnh(skene) [영] Shelter, Booth 나뭇가지나 풀로 엮어 만든 간소한 가옥, 혹은 초가. 초막절 때에 지었다(레 23:39, 43, 느8:14). 이밖에 일광을 피하기 위한 일시적인 오두막집(욘4:5)을 말하기도 한다.   초막은 가지들로 만들지 열매로 만들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페리’와 ‘파라’를 고려하여 정확하게 이 단어를 가지로 번역했고 그 외의 다른 모든 역본들은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열매로 오역하였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항상 옳습니다.   우리는 알량한 원어 지식을 가지고 혹세무민하는 이들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자신의 단어들을 완벽하게 보존해 주셨고 흠정역은 이것을 정확하게 번역하였습니다.   원어를 들먹이며 성경에 대한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하는 사람들의 영적 배후가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013-10-23 16:49:31 | 관리자
요즘 독립 교회들 안에서조차 목사들이 원어를 거론하며 성도들의 기를 죽이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목사의 사명인 설교보다 성경 구절 안에 있는 단어들이 원어로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지식만을 중시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아직 성경에 대해 잘 모르는 성도들은 킹제임스 성경마저 교정해 버리는 원어 실력에 놀라서 감탄하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실제 삶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일부 목사들이 설교준비에 있어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 대개 들고 나오는 것이 원어입니다. 모든 원어에는 여러 개의 뜻이 있으므로 목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성경 단어를 바꿔가면서 성경을 영해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권위를 세우는 일에 이용되기도 합니다.   20세기 설교의 대가 중 한 분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원어란 정확성을 살펴보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성경 원어에 과도한 가치와 필요성을 부여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목사들의 목사라 불리는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도 설교 시간에 원어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킹제임스 성경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원어를 알아야만 성경을 알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큰 실수를 하신 것입니다. 원어를 능통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성경 원어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 나는 원어를 공부하는 MDiv. 석사 과정을 하느라 3~4년을 다녔고 다른 목사들은 원어를 다루지 않는 2년짜리 MA 석사 과정을 했으니 내가 낫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실은 공부를 못해서 학점이 안 나왔거나 돈이 없어서 학교에서 일하면서 공부해서 학교를 더 다닌 것인지 누가 압니까? 어쨌든 신학교 오래 다닌 것을 마치 원어를 공부하기 위한 것으로 포장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목사들에게 가서 “배가 아파서 오늘 교회에 못 갑니다.”를 히브리말이나 그리스말로 해 보라고 요청하면 백이면 백 모두 못 할 것입니다. 그들이 신학교에서 몇 년간 배운 원어 실력은 이미 성경 소프트웨어 등에 다 나와 있어서 누구라도 1시간만 공부하면 다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런 일에 주눅들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전에 소개한 성경 소프트웨어 딜럭스 바이블을 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http://www.keepbible.com/Cmn2/View/4CZ   거기에는 신구약 원어 성경이 모두 분해되어 있습니다.   원어 분해로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위에서부터 히브리말, 품사 등 분석, 스트롱 번호, 우리말 성경(개역),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모든 단어에 대해 분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하다’라는 단어를 누르면 그 단어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모든 설명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창1:1과 관련된 관주도 10개 이상 나와 있습니다.              신약성경도 동일합니다.           또한, 여기에는 방대한 성경 사전도 들어 있습니다. ‘가데스바네아’를 공부하고 싶으면 그 안에  A4 1장 분량의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여기서는 화면에 보여주기 위해 커트했음).     또한, 여러 종류의 주석도 있어서 각 구절의 의미도 볼 수 있습니다.   30만 원짜리 소프트웨어 하나면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다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누가 원어를 통한 알량한 지식으로 여러분을 누르려 하거든 이 글을 보라고 하기 바랍니다.   물론 성경 원어는 중요하고 알면 유익이 있습니다.그러나 이방인들의 교회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완벽히 보존해 두셨습니다. 또한,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한글로 정확하게 번역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있습니다.   스크리브너의 TR 이야기 http://www.keepbible.com/KJB2/View/2Vn   영감과 보존: 원본, 사본, 역본의 관계 http://www.keepbible.com/KJB2/View/2Vv     성도들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먹여야 합니다. 설교시간을 원어 뜻풀이 시간으로 만들어서는 성도나 목사나 교회가 바르게 성장하지 못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수확 밭에 신실한 일꾼들을 속히 많이 보내주시길 기도합니다.   샬롬   DSJ  (*) 참고로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업데이트를 하면서 딜럭스 바이블은 소수 본문의 원어를 채용하였으므로 킹제임스 성경과 다른 데가 많으니 유의해야 합니다. 즉 여기의 원어 본문은 개역 성경이나 NIV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말 흠정역 성경이 들어 있습니다.   현재 가장 좋은 툴은 슈퍼바이블입니다.   http://www.combible.com/   이것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슈퍼바이블 저자와의 갈등으로 인해 딜럭스 바이블이 나오면서 본문이 바뀐 것 같습니다. 둘 다 구동되는 형태 및 스크린, 내용은 동일합니다. 다만 원어 본문이 다르며 흠정역 성경은 딜럭스 바이블에만 들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이후로 저는 필요한 경우 슈퍼바이블만 씁니다.
2013-10-23 11:49:20 | 관리자
안녕하세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모든 형제 자매님들에게 인사드립니다. 흠정역으로 돌아선지 3년이 되어갑니다. 이전에 알고 있던 지식들을 포맷하고 새롭게 시작한지가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귀한 것을 알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평택에서 성경세미나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범위를 작게 해서 우리 교회 형제 자매들을 위해 시간을 마련하였으나 범위가 확대되어서 주변 분들을 초청하려고 합니다. 혹 이 글을 보시고 관심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은 오셔서 좋은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강사 : 김재근 목사(전주소망침례교회) 일시 : 2013년 10월 27일(일) 오후 4시 장소 : 생명나무교회 / 경기도 평택시 안중읍 현화리 334-1 3층 전화 : 031)683-7664, 010-8997-1804 김경완   # 방문하시는 분들 중에서(처음 흠정역을 경험하시는분들) 신약 비교성경(20권)과 한영대역성경(10권)을 무료로 선물합니다. 평택과 주변 지역에 사시는 분들 중에서 흠정역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2013-10-23 10:16:48 | 김경완
안녕하세요?   지금까지 살펴보니 성도들이 가장 관심을 많이 갖는 주제는 영혼육, 천국, 지옥 등입니다. 여기에 대해 조직신학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노트와 함께(40-47과) 보시기 바랍니다.   노트는 PDF 파일로 올렸습니다.   샬롬   DSJ   영혼육 01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97   영혼육 02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398   운명: 최종 목적지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442   지옥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443   천국 01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451   천국 02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write_id=452    
2013-10-22 17:59:28 | 관리자
반갑습니다. 형제님께서 목사님의 설교를 그토록 반복적으로 들으셨다는 것은 진리를 찾아 올바른 길을 가보겠다는 의지라는 점에서 형제님의 열심을 높이 평가합니다. ^^ 그리고 위에 몇 분들께서 좋은 댓글을 많이 달아 주셨네요. 저는 왜? 그러한 행위구원이 사람들에게 많이 심겨져 있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지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저의 사견을 부족하나마 댓글로 올려볼께요. 최근 한국 교회들이 신사도운동, 번영 및 기복신앙 등에 정신이 팔려 ‘행위구원’을 팔아먹고 있다는 데서 생각의 출발점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구절들이 , , .., 얼마나 명쾌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상실관련 구절은 오직믿음 구원 구절만큼이나 명확하게 제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황상으로 밖에 설명이 안 되고 있지요. 그런데도 왜? 지금의 교회성도들에게 행위구원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의도적으로 노예의지를 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을 군림하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니골라당 교훈을 미워하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 속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이 시대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둘째, 성경변개입니다(첫째의 목표를 달성하기위한 수단). 대표적으로 이나, 등을 읽어보세요. 의도적으로 변개해서 내용을 바꿔 놓고는 마치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얻는 것처럼 해놓았습니다. 물론 ‘킹제임스 흠정역’과 비교해보셔야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인간들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를 성경보다 더 권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성경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리에 대한 참고서 용도로 밖에 활용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잘 저버리는도다. 넷째, 그들은 우리 하나님의 속성 중 ‘공의’, ‘거룩’,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만약 행위구원 또는 구원상실교리가 맞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성경에 아주 정확히 그리고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도록 기록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복음00:00)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라고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중에 거할 처소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해 놓으셨는데, "내[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가노니" 하물며 구원상실이 가능하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더 열심을 내셨을까요? 어렸을 때 교회에서 자주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저는 이 가사가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구원열차(방주)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죄악 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차표 필요 없어요. 주님 차장(선장)되시니 나는 염려 없어요. 빵빵~ 나는 구원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이렇게 부르도록 가르쳐놓고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전도도 해놓고서는 막상 교회에 오면 행위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기입니다. 속임수입니다. 마지막으로, 죄의 본질이 주님을 믿지 않은 것이라면, 반대로 믿음의 본질은 "HISTORY"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그의 이야기를 믿는 것이 아닐런지요.., 평강의 하나님이 형제님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013-10-22 15:28:40 | 김상진
레위기 17장 11절 등에 따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식물은 생명체로 볼 수 없고, 유기적 성장체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없다고 봐야겠죠. 물론 생명과 같은 유전자와 세포 등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식물을 섭취할 짐승과 인간 등의 생명활동에 직접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이 글의 둘째 단락을 참고해 보세요.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2041 인간과 짐승의 혼이 어떻게 다른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짐승도 생각을 하고 아픔도 느끼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말도 할 수 있으니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사람에게만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고 했으니 당연히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다른 차원의 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참고로 고린도전서 15장 39절에 나오지 않는 곤충들도 피가 없으므로 생명 있는 육체로 구분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들은 코로 숨을 쉬지 않기 때문에 방주에 타지도 않았고요. 때로는 곤충들도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듯하지만, 자기 의지나 판단이라기보다 창조된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성경적으로는 생명으로 분류하기 어렵다고 보고요, 식물의 수분과 성장에 도움을 주고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것들이 크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또렷이 알게 되겠지요.^^
2013-10-22 11:26:16 | 김재욱
동물도 인간처럼 3분적 요소(trichotomous)로 이루어 졌네요, 민수기 31장28절처럼.. 그러다면, 동물도 몸,영, 혼으로 이루어진건데, 인간의 혼과 동물의 혼은 어떻게 다른가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식물도 혼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경우 혼은 인간의 혼이 가진 기능은 발휘할 수없고 단순히 생명체란 의미에 불과한지요?, 여기에 게시된 내용으로는 그 차이점을 잘 알수가 없어서요.
2013-10-22 10:57:04 | 양경수
오늘 아침에는 전병국 형제님이 쓰신 글을 올립니다. 교리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바른 성경, 바른 구원, 바른 교리, 바른 교회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번 주에는 핵심 요약 성경 해석법 책자를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keepbible.com/Pds1-4/View/3oe   샬롬   패스터   교리 공부가 필요한 7가지 이유   우리는 교리(敎理; doctrine)를 소홀히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리 공부를 목회자나 신학자들의 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교리를 공부하면 머리만 커지고 영혼이 메마른다며 교리 공부 자체를 깎아내리는 경우도 있다. 또한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교리 때문이라면서 교리보다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신자는 어떤 것에 대해 입장을 정리할 때 사도 바울이 던졌던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What saith the script-xure?” (로마서 4:3)   자신의 기분이나 경험, 지도자의 가르침, 모임의 분위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은, 교리 공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1. 교리를 알아야 부흥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 2장의 끝 부분과 같은 부흥을 꿈꾼다.   “또 날마다 한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떼면서 단일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으니 주께서 구원받아야 할 자들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시니라.”(사도행전 2:46-47)   이렇게 사랑 넘치는 교회, 기쁨 가득한 인생을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개 이런 결과적인 모습을 흠모할 뿐 그들을 진정한 부흥으로 이끌었던 개혁의 모습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교회로 모인 사람들에게 부흥을 앞두고 나타났던 모습들이 있었다.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입은 베드로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한 교회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이 모여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찬양? 봉사? 기도? 아니다.   “그들이 흔들림 없이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더라.”(사도행전 2:42)   그들은 함께 모여 4가지 실천했다. 사도들의 교리(가르침)를 배우고 교제하고 빵을 떼며 기도했다. 그들은 제일 앞에 사도들의 교리를 두었다. 교제와 만찬과 기도는 그 다음이었다. 사도들의 교리란 오늘날 성경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교리, 성경의 가르침은 신앙생활이라는 기차의 기관실과 같다. 제일 앞에서 끌어주고 방향을 잡아준다. 교제 앞에, 만찬 앞에, 기도 앞에 교리가 있고 성경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이 4가지 일들을 “흔들림 없이, 변함없이(steadfastly)” 계속했다. 다시 말해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재미있을 때나 지루할 때나, 사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교리를 배우고 교제하고 만찬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많은 이적과 표적, 재산의 나눔, 매일의 모임, 교회의 성장 등은 그 뒤에 찾아온 일들이었다. 부흥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부분이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몫이 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성경의 교리를 배우는 것이다.   2. 교리를 알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의 복음은 감상적인 외침이나 피상적인 말로 꾸민 일시적인 위로가 아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체계적인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서 교리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달된 교리의 그 틀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 이로써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느니라.” (로마서 6:17-18)   사도 바울은 “죄의 종이…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생길 수 있는가? 로마의 성도들이 어떻게 했길래 그런 변화가 생긴 것인가? 그들이 “교리의 그 틀(that form of doctrine)”에 반응했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복음을 하나의 교리체계로 말하고 있다. 물론 조직신학이나 구원론같이 좀 더 학문적이고 복잡한 지식과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복음은 분명히 그 자체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죄인 됨,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에 대한 믿음이 차례로 이어진다(고전 15:1-5). 바울은 우리가 이 복음을, 이 교리의 틀을 지성으로(“전달된”), 감정으로(“마음으로부터”), 의지로(“순종하고”) 믿고 받아들이면 죄로부터 해방된다고 말하고 있다. 신자가 되는 것과 교리를 아는 것은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니다. 신자가 되는 것 자체가 이미 교리 공부의 시작이다.   3. 교리를 알아야 하나 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너희를 간절히 보고 싶다”(롬 1:11)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이유를 말한다.   “내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은 내가 너희에게 어떤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고자 함이니 이것은 곧 너희와 나 사이의 공통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와 함께 위로를 받고자 함이라.” (로마서 1:12-13)   간절한 그리움의 첫 번째 이유는 로마 성도들에게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굳게 세우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서로에게 위로받기 위함이었다. 사도 바울과 로마 성도들은 로마서를 썼을 당시 아직까지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비밀은 “너희와 나 사이의 공통된 믿음(the mutual faith)”에 있었다.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들이, 서로 만났든 적도 없던 사람들이 만났으나 서로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공통된 믿음이라는 것은 공통된 대상, 공통된 내용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교리의 일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대상, 다른 내용에 대한 믿음이라면 서로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오히려 서로를 나누어 놓을 것이다.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는 공통의 교리는 신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준다.   4. 교리를 알아야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다.   흔히 쓰는 단어는 뜻이 왜곡되기 쉽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중년의 나이에 예수님을 영접한 어떤 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그분이 신앙을 갖기 전에 교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꼭 나오는 표현 중 하나가 “은혜 받았다”였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 “은혜(grace)”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다. 천국행 티켓이나 면죄부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은혜는 그 이상이다. 은혜는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딛 2:11-14; 고전 15:10). 그런데 이런 것이 단지 지식이나 이해의 정도 차이가 아니라 생사(生死)의 차이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것은 또 다른 참 복음이 아니며 다만 너희를 어지럽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 하는 자들이 더러 있도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6-8)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피상적인 단어에 머무르지 말라고 경고한다. ‘복음’이란 단어를 쓴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된 복음과 다른 복음, 거짓 복음, 저주받을 가짜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단어가 아니라 복음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쓰는 단어가 대충 비슷하면 서둘러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 칭의, 은혜 같은 기독교의 핵심 개념들을 피상적으로 사용하면서 종교통합을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언뜻 관용과 사랑이 넘치는 것처럼 들리지만 성경과는 크게 어긋난 모습이다. 참 사랑은 결코 진리와 충돌하지 않는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한다(고전 13:6) 이 모습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가 됨을 위해서 기도하셨지만 아무하고나 무작정 하나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 사람들이(요 17:6), “아버지의 진리로…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이(요 17:17)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며 기도하셨다.   5. 교리를 알아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다.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그 비결을 보여주고 있다. 성도들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걸으며 서로 참아주고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대로 교회를 잘 섬겨야 한다(엡 4:7). 또한 교회 안에 가르치는 사람들을 잘 세워야 한다.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주님의 뜻이다(엡 4:12).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건강한 교회를 이루게 된다.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속이려 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간교한 술수로 말미암아 교리의 모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에베소서 4:13-14)   건강한 교회는 앎에서 하나가 된 교회요, 점점 자라 그리스도께 이르는 교회다. 그리고 속이는 자들이 “교리의 모든 바람(every wind of doctrine)”을 부채질해도 흔들리지 않는 교회다. 진짜를 아는 사람은 가짜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한국 교회에 신천지 같은 이단이 판을 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 안에 바른 교사와 바른 교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에 나타난 성장은 개인적 성장이 아니라 공동체적 성장이다. 혼자서 열심히 책을 본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몸은 함께 자란다. 신앙은 교회를 이룰 때 자란다. 교리를 알아가며 자란다.   6. 교리를 알아야 싸울 수 있다.   교리는 우리끼리만 알면 그만인 지식이 아니다. 참된 교리는 늘 공격의 대상이 된다. 어떤 때는 노골적인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슬그머니 기어 들어온 자들에 의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오염되어 갈 수도 있다. 이런 공격은 한 교회가 아니라 한 시대의 교회들을 향할 수도 있다. 교회사를 보면 예수님의 신성이나 삼위일체 교리가 공격 당한 때가 있었다. 지난 100여 년간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에 대한 공격이 특별히 치열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공통의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쓰려고 모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너희가 힘써 싸우라고 너희에게 써서 권면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기어 들어온 어떤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 (유 3-4)   원래 유다는 “공통의 구원(the common salvation)”에 대해서 편지를 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이단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싸움을 독려하는 전투적인 편지를 쓰게 되었다. “단 한 번 전달된 믿음(the faith which was once delivered)”이 공격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 속의 이단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예비된 것은 캄캄한 어둠뿐이다(유 13). 참된 믿음은 참된 경건을 낳는 법이다. 싸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 믿음을 지키려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공격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엡 6:17)   7. 교리를 알아야 전할 수 있다.   “너희가 선한 것을 따르는 자들이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행복한 자니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며”(베드로전서 3:13-14)   세상은 고난을 불행이라 말하지만 성경은 행복이라 말한다. “의로 인하여 핍박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 5:10). 무서워할 필요도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마 10:30-31)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베드로전서 3:14-15)   신자가 할 일은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반응하는 우리를 보면 사람들은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그들이 찾아와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에 대해서 묻는다. 우리에게는 구원, 예수님의 재림, 영생의 소망이 있다. 베드로는 이에 대한 대답을 “항상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어느 날 찾아올 영혼구령의 기회를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자. 준비된 사람은 좀 더 온유할 수 있다. 자신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은 교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야기가 상대의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일 수 있기에 애타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온유함과 두려움 가운데 교리를 알고 있어야 상대를 인도할 수 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고린도전서 8:1)   교리 공부 좀 했다고 우쭐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교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교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지식만 추구했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고 얼굴을 닦지 않은 것이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이다(마 7:24-29; 약 1:22-25). 하나님은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아는 불쌍한 사람이다.   하지만 성경의 교리를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귀한 약속이 기다리고 있다. 성경을 통해 교리를 배우고 책망에 귀를 열고 방향을 바로잡으며 의의 가르침을 따르면 점점 더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약속이다. 교리 공부에 주어진 찬란한 축복이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6-17)
2013-10-21 10:00:4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