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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정리하다 한참 전에 퍼논 글이 좋아서 여기에 올려 봄니다.    여친 생긴 아들에게 주는 엄마의 편지      아들아, 세상의 반은 여자, 그리고 나머지 반은 남자로 이루어져 있단다. 하느님은 어떤 생각을 하셧는지 모르지만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게 하셧어. 엄마가 인생의 짝인 아빠를 만났듯이 우리 아들도 나머지 반쪽을 찾게 되겠지.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너는 잘 모를 거야. 왜냐구? 그건 자석의 극과 극처럼, 그녀는 여자고 넌 남자이기 때문이지 진정으로 여자를 사랑할 줄 알아라는 말을 하고 싶구나. 그러기 위해서 네가 알아야 할 몇가지를 엄마는 당부하고 싶단다.   ♡ 아들아! 그녀의 몸은 유리와도 같아 너의 그녀의 가장 큰 차이는 뭐니뭐니해도 신체적인 차이겠지? 그러나 아들아, 네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자 몸의 소중함이란다. 여자는 유리와 같아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해. 잘못했다간 영영 붙일 수 없는 깨진 유리조각이 되 버리고 만단다. 요즘 너희들 세대의 성 가치관이 많이 개방됐다고는 하지만! 실제 행동이 앞서갈 때는 이미 그에 대한 책임이 뒤따라야 해. 낙태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사라져가고 사랑없이 쾌락만 좇아서는 안되겠지? 엄마가 너를 낳았을 때의 그 아픔은 실로 상상하기 힘든 것이란다. 하지만 아픈 만큼 믿음직한 아들을 보게 되었지. 그런데 여자의 몸이란 너무나 복잡하고 하나라도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안되는 것이야. 특히 한 번 낙태를 하는 것은 출산의 아픔, 후유증과 맞먹는 것이기 때문에 젊음은 물론 건강까지 앗아가게 되지. 네가 정말 사랑하는 "그녀"라면 그녀의 신체까지 소중히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중요해. 장차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생명을 잉태하게 될 그녀의 귀중한 몸을 조심스럽게 다뤄져야겠지?   ♡ 아들아! 작은 섬세함이 그녀를 감동케한단다 설마 너까지 여자는 화려한 것과 크나큰 이벤트에 감동하는 존재로 알지는 않겠지? 수백송이의 장미와 값비싼 반지, 브랜드 옷만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아니란다. 오히려 네가 무심코 내던진 자상한 말 한 마디, 길을 걷다 무심코 생각난 그녀를 위해 꺾은 들꽃 한 송이, 잘 자라는 전화 한 통화에 여자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야.  그녀를 위해 뭔가 큰 것만을 해주려 골머리를 앓지도 말 것이며 그녀를 감동시키는 자체가 귀찮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정말 사랑한다면 너의 감정 가는대로, 그녀를 위한 노력 그대로 표현하면 그녀도 가슴속으로 느끼게 될 거야. 여자를 감동시키기 위한 방법, 그것은 바로 작은 섬세함이란다.    ♡ 아들아! 때로는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다 왜 너는 항상 그녀에게 이기려 드니?  모든 싸움은 서로의 기와, 자존심, 고집 등이 부딪쳐서 일어나기 마련이란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네가 그 조그만 여자에게 이겨서 무얼 어쩌려고 그러니.  여자란 말이지, 자신이 잘못 했다는 걸 안다 해도 고개를 굽히려 들지 않아.  그건 고집이나 뻔뻔함만으로는 설명이 안돼. 최소한의 여자로서의 "자존심"때문이지. 여자는 자존심이 꺾이는 순간, 여자로서의 매력도 일순간에 상실하지.  이 세상이 모두 끝난 것만 같은 자포자기의 심정을 갖기도 하거든. 물론 너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겠지만, 여자의 속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단다.  혹시 그녀와 싸우게 되더라도 5번 중 3번 정도는 항상 져 주어라. 그렇다고 해서 넌 패자, 그녀는 승자가 되어 의기양양하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전보다 더 상냥하고 부드러워진 그녀의 태도를 접하게 될 걸? 여자는 남자의 무조건적인 이해를 갈구할 때가 많아. 알아도 모른 척, 그녀의 자존심을 받들어 주는 것이 현망한 길이며 사랑을 가꾸는 비결이란다.    ♡ 아들아! 환상은 욕심의 씨앗! 여자든 남자든 이성에 대해 크고 작은 환상을 갖고 있단다. 물론 너 역시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을 거야. 너희 아빠만 해도 총각 시절, 여자는 화장실도 안 가고, 이슬만 먹고사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 너희 세대야 그런 "순진함"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여자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아라.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야. "사랑하니까", "여자니까"라는 이유들로 그녀의 생각이나 행동에 한계를 긋다 보면 그녀도 힘들겠지만 오히려 네가 더 힘들어질 거야. 비록 네 눈에 못마땅한 점도 있을 테고 눈에 띄는 단점도 있을 거다. 하지만 옥에서 티를 찾으려 하지 말고, 티에서 옥을 찾는 습관을 길러라.  지나친 환상은 널 괴롭게 할뿐만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단다. 괜스레 욕심을 키워 한참 예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할 나이에 불만 투성이어야 되겠니? 너의 욕심은 잠시 접어두고 네 주위의 여자들의 장점부터 찾는 습관을 길러라. 특히 네가 사랑하는 여자라면 그녀의 단점도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여유로움이 필요하단다.    ♡ 아들아! 화려한 꽃보다는 너만의 꽃을 찾아라 화려한 꽃은 꺾기 쉽겠지만 모두 한 순간이란다. 예쁜 여자를 보면 엄마도 같은 여자이지만 감탄을 금치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모두 그때뿐이지, 그녀가 너의 꽃은 될 수 없을 거야. 그녀의 가치관, 성격, 말투, 행동가짐, 취미 등 여러 가지가 어우러졌을 때 더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  또한 화려한 외모의 여자들은 이미 너 뿐만 아니라 뭇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 마련이지. 그만큼 경쟁률도 높을 뿐더러 알고 보면 그 가치가 떨어질 수도 있는거야. 하지만 너의 안목, 심미안으로 고른 꽃은 오로지 너만의 꽃이 되는 것이지. 한 순간 폈다 져버리는 화려한 꽃보다는 꾸준하게 빛을 더해 가는 실속 있는 꽃을 골라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여자란 사랑받는 만큼 빛나게 되어 있어. 진실한 너의 사랑을 그녀에게 듬뿍 쏟아 보렴.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한 송이 꽃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9: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5-25 15:23:18 | 허광무
한참 전에 본 글인데 여기에 올려 봄니다.     아버지란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않을때 "괜찮아,괜찮아"하면서도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면서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곳을 직장이라고 한다)에는 즐거운 일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세개 달린 용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 시킬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여기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살이든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 : 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때 : 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 : 아빠와 선생님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때 : 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다. 14세때 : 우리 아버지요? 세대차이가 나요. 25세때 : 아버지를 이해하기는 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 : 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 : 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 : 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때 : 아버님 께서 살아 계셧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를 안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하고 성가도 부르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 간다. * 옮긴 글입니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9: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5-24 14:58:13 | 허광무
* 스포일러: 이 글은 잘 나가다가 뒷부분부터 삼천포로 빠지는 구조임을 밝힌다. 분명히 예고했다.   본인은 정확하게 언제 구원받았는지 모르는 일명 '예수쟁이'이다. 고등학생이던 1998년 가을에 처음으로 성경을 한 번 완독했으며, 2002년 무렵에 KJV believer가 되고 세례 대신 침례를 다시 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6년엔,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전체 거리 설교 때 난생 처음으로 preaching을 해서 지금까지도 이를 계속하고 있다.   주변의 불신자, 개독안티, 무신론자와 얘기를 나눠 보면, 그들은 교회 댕기는 주변 사람들의 행실 때문에 실망하고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잃은 경우가 많다. 도대체 어디서 접했는지 별 희한한 교회, 예수 사칭하고 다니는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사람에 의한 온갖 나쁜 기억과 응어리는 꼭 하나씩 갖고 있는 듯했다. 저런 인간들 때문에 예수 못 믿겠다고.   물론, “크리스천들의 행실은 불신자들이 보는 성경”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상대로 좋은 본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고 본인도 당연한 말이지만 그 점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예외가 아니다-_-. 그런 못난 것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고상하게 산 사람들도 다 예수 안 믿었기 때문에 죽어서 지옥 간다고 말하면 그것만치 기분 나쁘고 정 떨어지는 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기독교는 애시당초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란, 열심히 도 닦고 인격 수련해서 구원을 받으려 애쓰는 고매한 사람들의 모임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다니는 일종의 병원 같은 곳이다. 병원에 완벽한 사람, 성한 사람이 다닐 리가 없잖아..;; 100% 완벽한 교회에 당신이 가입하고 나면 그 교회의 100% 완벽 무결성은 깨진다. -_-;;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초청에 차별이 있던가?? 신앙생활이란 그런 마인드로 하는 거다.   그리고 기독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불신자들의 안목이 늘 객관적이고 정확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대형 교회에 대해서는 부패하고 비리 많고 돈만 밝힌다고 욕하면서, 한편으로 진짜 성경대로 좁은 길을 고집하는 마이너 교회에 대해서는 자기밖에 모르고 편협하고 옹고집 교조주의라는 식으로 응수한다면? 교회는 어떤 노선을 가든 어차피 욕을 하게 돼 있는 불신자의 취향까지 만족시켜 줄 의무는 결코 없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마 11:18-19 같은 부류들.   난 지금까지 살면서 참 다행스럽고 고맙게 여기는 점이 하나 있는데, 신앙생활에 관한 한 사람 때문에 시험 들고 실족한 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온갖 오덕질과 괴팍한 성격 때문에, 남들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이 원래 다 저렇나 식으로(ㄲㄲㄲㄲㄲㄲㄲㄲ) 시험 들게 하고 간증 망친 게 더 많을 것이며, 기독교계 전체의 관점에서는 내가 빚진 게 더 많을 것이다. -_-;;; 죄인을 받아준다는데 내가 왜 마다하며, 다른 죄인으로부터 끼친 여파에 그렇게까지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 사후 심판이 있다는 것,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의는 몹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거나 그에 반감을 품어 본 적이 없다. 신이 인간을 지옥에 보낸다는 말에 불쾌해하기에는 인간의 죄악이 너무 극심하다는 현실에 훨씬 더 공감이 갔다. 이런 발상의 차이가 불신자의 사고방식과 신자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만들어 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누구 만만찮게 나만의 인생 개똥철학에 빠져서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고, 죄의 결과와 여파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열폭하고 인생이... 으, 생각도 하기 싫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고전 15:10)   길거리에서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자기만의 패턴이 있다. 그리고 나도 나만의 패턴이 있다. 나는 내가 깨달은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성경이 어떤 책인지 먼저 얘기한 뒤, 인생은 유한하고 언젠가 죽음과 심판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얘기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경제· 교육· 정치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고 그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살인· 간음을 저질러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던 것,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던 것, 절대적인 선과 악이란 없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모두 바로잡아야 한다” ... 이걸 전하려고 한다.   거리 설교라는 게 처음에 입을 떼기가 힘들다. 본인도 초창기에는 원고를 미리 써 보기도 하고 여러 방법을 찾아 봤는데, 결국은 여러 번 하고 나니까 요즘은 원고 없이도 한번 말을 하면 최하 15분은 금방 지나는 것 같다. 나 자신이 복음과 구원 메카니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이를 조리 있게 얘기도 곧장 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다른 곳에서 공개적으로 얘기를 하다가 말 더듬고 혀 꼬이고 실수하는 것에 비하면, 내가 생각해도 거리 설교는 꽤 유창하게 잘 하는 것이다. -_- (본인, 작년 여름에 간증할 때도 얼마나 말 자주 더듬고 말투가 어눌했던가? ㄲㄲㄲㄲ)   또박또박 길거리에서 설교를 하고 나면 굉장히 기쁘고 후련한 마음이 든다. 이걸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내 안에 거주하는 성령님이 주는 기쁨”이라고 한다. “네가 드디어 나에 대해서 공개 석상에서 당당히 증언을 할 정도로 성장했구나! 아이고 기특해라!” 정도? ㄲㄲㄲㄲ거리 설교가 주는 유익: http://biblebaptistpublications.org/streetpreaching.html 클릭. (영어)   그런데, 하루는 거리 설교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문득 이런 선포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간절히 들었다. “여러분은 매일 이용하는 지하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나라 철도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전해 드리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어쩌구저쩌구... 중략)이처럼 철도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습니다. 철도는 21세기의 트렌드에 어울리는 친환경 고효율 교통수단입니다. 우리나라 철도를 알면 역사와 지식을 보는 눈이 바뀝니다. 철도는 정서 수양과 교양 함양에 좋습니다. 철도를 알면 국토 사랑 정신이 생깁니다. 이렇듯 철도 덕질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선한 간증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앞으로 철도에 관심을 갖고, 여행 갈 때 철도를 적극 이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나눠 드리는 열차 시각표를 꼭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설마 진짜로 길거리에서 이렇게 외치고 왔다면, 여기 계시는 크리스천들께서 “용묵 형제가 부디 철도를 끊고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도라도 하셔야 할 배도(背道)-_- 단계이겠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철도를 전하는 데는 영적 전투가 필요하지 않다. 철도를 전하다가 순교? 순직?했다는 사람 얘기는 못 들었다. -_-철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죄, 죽음, 심판, 지옥 같은 유쾌하지 못한 주제를 꺼낼 필요가 없다.“버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존중해 줘야지 왜 너만 독단적으로 구냐?” 이런 말을 들을 일도 없다.   요즘은 철도역, 시외버스 터미널, 고속버스 터미널을 통합해서 교통 허브로 건설하는 게 유행이라지만, 그게 무슨 교통수단간의 에큐메니컬 운동이랍시고 경계라도 해야 할 대상이지는 않다.   허나, 철도에는 불행히도 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없다. 하늘로부터의 보상이 있다고 약속되어 있지도 않다. 그런 인센티브가 없으니 철도 전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을 해야지 뭐, 별 수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내 안에 거주하는 성령님도 철도를 좋아한다고 굳게 믿는다. (뭐, 주변에서는 용묵 형제가 철도 덕질을 할 때마다 성령님은 탄식할 거라고 악담을 하는데... ㄲㄲㄲㄲㄲ) 새마을호 객실에서 Looking for you가 내 귀에 울려 퍼지던 그 날은 내게 정말 오순절 성령 강림절이나 마찬가지인 날이었다. 철도와 본인과의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고 필연이었다.   본인은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 밑으로 지하철이 깔리는 날을 꿈꾼다.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에서 “열 도시를 다스리라”(눅 19:17)가 ‘10개 철도 노선(사철 ㄲㄲ)을 다스리라’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사 40:3)는 사막에서 철도가 건설되는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어디 가서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나, 지하철 시스템에 대해서 강연이라도 실컷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철도 얘기를 담대하게 늘어놓고 싶다.   나는 한때는, 요즘 같은 영악하고 험악한 세상에 나 같은 별종, 괴짜, 덕후가 아니면 누가 성경 따위를 믿겠는지 의구심을 품은 적이 있었다. 나 말고는 이제 아무도 주를 안 섬긴다고 생각했던 엘리야 타입의 소영웅주의 중2병이긴 했다만, 세상의 유행 풍조하고 성경의 사고방식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다시 말해, 철도 덕후나 KJV believer나 비슷한 수준의 geek라고 생각했....는데, 후자에 속한 분에 따르면 그건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그 둘을 상호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그러네.. ㅋㅋㅋㅋㅋ 정말인지?? ㅠㅠ[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9: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5-23 23:22:37 | 김용묵
말씀을 들으면서 킹제임스흠정역성경, 개역성경, 카톨릭성경, KJV, NIV 성경을 대조하면서 탐구하시면 아마 뭔가가 가슴에 와 닷는 것이 느껴질 것입니다. 제가 전에 올린 글에 빼먹으면 안될 것들이 있음에도 제가 빼먹어서 부담감을 가지고 늦은 시간까지 글에 대한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여기서 완성도라 함은 피차 바르게 말씀의 은혜를 나누어야 하는데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을 잘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5월 22일 주일 설교 : 믿음에서 믿음까지 (정동수 목사님)   http://www.cbck.org/NewSermon/View/1o8       로마서 10장 17절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느니라.   개역성경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카톨릭성경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KJV : So then faith [cometh] by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God.   NIV :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 개역성경은 난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자연 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믿음이 온다 라는 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빌립보서 3장 9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개역성경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카톨릭성경 :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KJV :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mine own righteousness, which is of the law, but that which is through the faith of Christ, the righteousness which is of God by faith:   NIV : and be found in him, not having a righteousness of my own that comes from the law, but that which is through faith in Christ--the righteousness that comes from God and is by faith.   *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명확한 말씀과 개념으로 이해를 가지면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풀려나가는 것을 발견하리라 봅니다.         로마서 4장 21~22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 /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개역성경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카톨릭성경 :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KJV : But now the righteousness of God without the law is manifested, being witnessed by the law and the prophets; / Even the righteousness of God [which is] by faith of Jesus Christ unto all and upon all them that believe: for there is no difference:   NIV : But now a righteousness from God, apart from law, has been made known, to which the Law and the Prophets testify. / This righteousness from God comes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to all who believe. There is no difference,           갈라디아서 2장 20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개역성경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카톨릭성경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KJV :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e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NIV :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단 한 번 도 불순종하신 적이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예수님에겐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말씀들을 묵상해 보면 아 이것이 바로 그것이구나! 하실겁니다.              로마서 1장 16~17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개역성경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카톨릭성경 :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KJV : For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of Christ: for it is the power of God unto salvation to every one that believeth; to the Jew first, and also to the Greek. / For therein is the righteousness of God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NIV : I am not ashamed of the gospel, because it is the power of God for the salvation of everyone who believes: first for the Jew, then for the Gentile. /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   * 사탄도 짝퉁복음이 있겠죠? 누구의 복음인가가 중요하겠죠! 그리스도 라는 말이 빠져도 별 문제없는데 뭘그러냐?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도 해 봐야겠죠! 온전히 보전된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꽝! 인쇄 도장을 찍혀있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   개역성경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카톨릭성경 :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KJV : Whom God hath set forth [to be] a propitiation through faith in his blood, to declare his righteousness for the remission of sins that are past, through the forbearance of God;   NIV : God presented him as a sacrifice of atonement, through faith in his blood. He did this to demonstrate his justice, because in his forbearance he had left the sins committed beforehand unpunished--       갈라디아서5장 22~23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개역성경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카톨릭성경 :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KJV :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longsuffering, gentleness, goodness, faith, / Meekness, temperance: against such there is no law.   NIV :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  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 성령의 열매란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면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로 인해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성품이라고 보면 될까요?  믿음은 성령님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 요~기 있네요!!!!!!!!      개역성경은 충성으로 번역되어 예수님이 자유를 주셨는데 요~기요 충성 땜에 교회에 열심히 ( ) ( ), 목사님께 ( ) ( ), ....이것은 요즘도 쌍방간에 많은 피해사례를 만들고 있는 부분이라는 것을 공감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2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개역성경 :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카톨릭성경 : 그러므로,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KJV : Wherefore seeing we also are compassed about with so great a cloud of witnesses, let us lay aside every weight, and the sin which doth so easily beset [us], and let us run with patience the race that is set before us, /  Looking unto Jesus the author and finish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that was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despising the shame, and is se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NIV : Therefore, since we are surrounded by such a great cloud of witnesses, let us throw off everything that hinders and the sin that so easily entangles, and let us run with perseverance the race marked out for us. /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 and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믿음을 따라 걸으면 되는 것입니다.   *킹제임스흠정역 성경과 개역성경은 번역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입니다. 한국교회가  킹제임스흠정역성경으로 교정되어지길 소망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   킹제임스흠정역 성경 :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개역성경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카톨릭성경 :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KJV : And they that are Christ's have crucified the flesh with the affections and lusts. / If we live in the Spirit, let us also walk in the Spirit.   NIV : Those who belong to Christ Jesus have crucified the sinful nature with its passions and desires. / Since we live by the Spirit, let us keep in step with the Spirit.   * 한국교회는 '행하라' 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그냥 성령안에서 삶의 길들을 걷고 또 걸으면 된다고 말하네요. 성령으로 누가 이걸 행하라 저걸 행하라 하면 참된자유가 이겁니다. 라고 프리~~한 모습 보여 줘야 하겠습니다.       ****  설교를 듣고 내용을 달아 보았습니다. ****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9: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5-23 02:38:09 | 노영기
(요 3:14~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   (요 5:1~4)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으며 낳으신 그분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분에게서 난 자도 사랑하느니라.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줄 아나니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겁지 아니하니라. / 무엇이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 5: 10~1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이 증언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분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었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주신 증언을 그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또 그 증거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     * 우리는 우리 안에 반드시 이 증언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거나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말씀을 임의로 발췌합니다.   제가 믿는 믿음은 성경의 기록대로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이심을 믿는 것이며 성경의 문자적 기록들 가운데 드러나는 모든 연대기적 역사적 기록들의 사실성을 믿는 것이며 인류역사 가운데 창조주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과 십자가 형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과 묻히신 것과 부활하신 것과 이것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과 이 사실과 관련된 많은 기록과 언약들이 성경의 기록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것도 나의 믿음입니다.   휴거에 대해서는 믿는 자들에게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위 나열된 말씀들을 믿음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휴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형제의 글 : 휴거가 자신있다는 분들에게 (부분적 스크랩)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했기에 나는 구원받았다 또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했으니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답은 옳은 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정해주셔야 한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우리를 휴거해 가시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체자인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정해주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구원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구절을 대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성경구절들과 예수님께서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존재이고 얼마든지 실족하면 생명책에서 우리의 이름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구절을 비교해볼까요?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하는 성경구절에 몇 십 배나 많은 성경구절에서 우리는 구원을 마지막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전자는 우리의 행위의 노력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고 후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십자가로 십자가로 나아가는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바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 중 사도바울보다 더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현재에 있다고 보십니까? 당대에 누가 있어 사도바울의 믿음을 따라 오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고전 9:27절에 남에게 복음 전파한 후 내가 도리어 버림받을까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애쓰며 살며 힘겹다는 뜻은 육체의 소욕을 죽이는 일이기에 힘들다는 것뿐이라는 것을 왜 모르시는지요. 육체의 소욕을 이겨냈을 때 받게 되는 성령님의 은혜 그 안에서 죄의 권세를 벗어난 참된 자유, 그리고 이어서 찾아오는 영적충만함, 진정한 행복감 그리고 평안함을 느껴보신 적이 당신은 없으십니까?   구원과 휴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은 개판으로 살면서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정죄하고, 술 먹고, 담배 필 것 다 피고, 포르노 볼 것 다 보고, 지나다니는 여성들 짧은 치마 입고 허연 다리 보이면 안 보는 척 하면서도 볼 것 다 보고 속으로 음탕한 생각들을 남모르게 즐기면서   구원은 완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안착하는 날이 우리의 구원의 종료시점입니다.   휴거는, 구원은 당신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인정하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왜냐면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해주시는 주체인 예수님의 눈높이와 판단이 우리의 휴거를 결정하고... 우리의 구원을 결정하신다는 것을 진정이 담긴 마음으로 여러 성도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9: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5-21 02:18:32 | 노영기
이웃블러그를 통해서 어느 형제님의 글이 눈에 들어와서 읽게 되었고 마음이 분개되어서 댓글을 달았었습니다. 그런데 제 견해를 밝히라는 댓글이 있어서 말씀들을 상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찌 이리 가벼이 취급하며,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데 말씀을 앞에 놓고 궤변을 저리도 늘어놓을 수 있을까 하는 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나름대로 자기열정과 하나님을 향한 강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알겠지만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과 바르게 표현하지 못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그릇된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킹제임스흠정역 성경을 통해서 성경을 다시 알기 전까지는 이 형제와 비슷한 생각들을 했지 않았을까?, 좀 과격한 표현을 써서 그렇지 의미하는 바가 이런 것 인가보다 그렇게 받아 들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래에 이 형제의 글을 부분적으로 스크랩한 이유는 현재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성경을 이해할 수도, 이렇게 믿을 수도, 이렇게 종교행위 가운데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어 한번 돌아보는 계기를 삼고자 해서 글을 다루었습니다.   이 형제는 현재 전도사 인것 같고 작은 개척교회를 담임하는 것 같습니다. 킹제임스흠정역성경을 언제부터 알았는지 모르지만 함께 참고해서 본다는 댓글도 보았습니다.   혹시 이 형제가 올바른 말씀을 찾아 이곳까지 왔을 때 자신과 관련된 글을 보고  그 형제가 상처받을까 하는 마음에 제가 올린 글을 보시고 상처주는 말이나 댓글은 삼가 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저는 이 형제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 형제의 글도 길어서 앞부분 부터 부분, 부분 스크랩했습니다. 참고로 제가 준비한 성경관련 구절들도 이런 비슷한 사례가 있다면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선포된 복음     (요 5:39)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 (딤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성경의 기록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된 책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도록 연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다시태어남   (요 3: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 니고데모가 그분께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하매 /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1:12~13)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   *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자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납니다.   * 예수그리스도의 보혈 (레 17:11)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   (히 9:22)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면이 없느니라.   (히 10:3~4) 그러나 그 희생물들에는 해마다 죄들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니라.   * 죄의 사면은 반드시 피 흘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짐승의 피를 통한 대신속죄는 죄들을 제거함이 불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히 9:11~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셔서 /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를 힘입어 단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   (히 9:25~28) 또 그분께서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시니 /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통해서 단 한 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제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단 한 번의 예수님 자신이 흘려주신 그 피로 죄들을 제거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안 받아 들일지라도 성경은 죄와 상관없이 우리를 위해 흘려주신 그 보배로운 피로 죄들을 다 제거해 주셨다는 것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심을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두 번째 다시 오실 때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진실하신 하나님이 이루신 그 일들을 믿으며 그 약속들을 지키실 것을 믿습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고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으로 100% 믿습니다.     (요 1:29) 킹제임스 흠정역성경 :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개역성경 :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KJV : The next day John seeth Jesus coming unto him, and saith, Behold the Lamb of God, which taketh away the sin of the world.   *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침례자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실 때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세상 죄를 짊어진,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갈 분으로 ‘지고 가는’ 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허다한 한국교회 목사들이 이 말씀을 잘 못 해석하여 행위 구원을 가르친 다던가 예수님처럼 무언가 우리도 짊어지고 가야한다든가 뭔가 종교적 열심을 가지고 소위 하나님의 일들이라고 하는 것을 성도들의 등짝에 지워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여 삼창 외치고 여러 번 회개기도도 시킵니다. 도리어 죄 짐에 눌려 살고 회개, 회개, 회개 하면서 얽매이게도 가르칩니다.   한 번 구원받으면 죄 짓고 살아도 된다는 것이냐? 음란하고 타락한 많은 죄 가운데 즐기며 살아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냐? 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상당합니다. 왜냐하면 요즘 교인이라고 하는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 믿는 사람답지 않은 세상의 정욕과 욕심,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러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눈과 이성으로는 충분히 구원에 대해 갑론을박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자면 내가 믿는 공평한 하나님은 자신을 절제하며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을 맺으며 살아가는 믿는자와 믿긴 믿되 세상의 것들도 취하며 믿는자를 같은 상급으로 대우하실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안목으로는 세상에서 보여지는 것들이 크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가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상급의 질적 차이는 다를 것이라 믿습니다.(히 11:35절 일부-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고 고문을 당하되 구출받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순례자의 길에서 잠시 누리는 그 어떤 풍요로움보다 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것을 예비해 두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창조주 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에쿠스를 몰고 다니든지 BMW를 몰고 다니든지 돈의 풍족함을 추구한다 든지 명품을 좋아 하던지 육체의 정욕을 좋아 하든지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며 회계보고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이 지옥에 가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며 예수님이 대신속죄의 보배로운 피로 죄들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묻지 않으시고 이 땅에 보내사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를 물으시고 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들을 따르며 믿음의 열매들을 맺은 것들에 대해서 상급과 보상으로 공평한 판단을 하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선포된 믿음을 통해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되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부르심이 있기 전까지, 살아가는 나 날 동안,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서 죄를 짓지만 방종함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자유의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겸손하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 26:28)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   * 예수님의 피는 새 상속 언약의 피입니다.     (골 1:13~14)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 /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 예수님의 피를 통해 죄들의 용서를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 1:16~20) 이는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왕좌들이나 통치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노라. / 또한 그분께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 그분께서는 몸 곧 교회의 머리시니라. 그분께서 시작이시요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난 자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에서 으뜸이 되려 하심이라. / [아버지]께서는 그분 안에 모든 충만이 거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 화평을 이루사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즉 내가 말하노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느니라.   *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려주신 그 피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 즉 예수님의 창조하신 창조세계 전체가 예수님께 화해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   (롬 3:23~27)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 / 내가 말하거니와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이 의롭게 되며 또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되려 하심이라. / 그런즉 자랑할 것이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이가 바로 나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어느 누가 이유를 달 수 있겠습니까?     (롬 5:8~9)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해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     (벧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요일 1:7) 그러나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롬 10:9~13)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또 성경 기록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니 / 이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 모든 사람 위에 계신 같은 [주]께서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니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서울대나 하버드대학이나 대학교를 졸업해야만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에 10년 출석을 해야 자격요건이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침례나, 세례나 화채를 받음으로 믿는 사람으로 인정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방법대로 입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것 또한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정해 놓으신 방법이므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 믿습니다.     (엡 1: 13)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였고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분 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느니라 /     (엡 2:1~9) 또한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이라. /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 안에서 생활하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이루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 /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 이것은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친절 속에 담긴 자신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다가오는 시대들 속에서 보여 주려 하심이라. /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 6:11) 너희 가운데 이 같은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을 통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기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게 되었느니라.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9: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5-21 02:08:57 | 노영기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이유를 망각하고 환상, 예언, 신유, 기적, 세상 복락만을 바라는 세대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탁한 세대에 살고 있다. 특히나 이 세대의 특수성에 힘입어, 그 혼탁성은 인류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혼탁하고 흉흉해서, 심지어는 지역 교회 안에까지 그 혼탁함의 손이 뻗쳐있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참 교회요'라고 하는 이름난 자칭 '정통'이라 하는 지역교회들을 보라. 지금 그 곳들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빛을 잃어가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차 강조하신 '참 은혜의 복음'은 신속히 사라져가고 있고, 다른 것들로 대체된, 명색만 겨우 그럴듯하게 남아 있는 '다른 복음'(갈1:6)이 신속하게 뿌리를 뻗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예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기적의 은사 등을 받았다며 다른 사람들을 거짓말로 속이는 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 배우기를 거절하며(호4:6)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직 환상과 기적과 세상의 복락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실정이며, 은사만이 구원의 표적이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을 부정하는(히10:29)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에게는 모두 한결같은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모두들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보존해 주신 이유와, 성경 보존의 가치와 성경의 가치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서 공부하고(딤후2:15),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알기 원하시는(호6:6) 하나님의 절절한 호소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한 마디로 냉담하고, 무관심한 표정들이 지금 필자의 눈 앞에 스쳐 지나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보존해 주신 이유는 바로 '바른 교리의 확립'과 '참과 거짓의 분별', 그리고 '바른 신앙의 확립'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딤후3:16-17; 히4:12; 호4:6; 6:6)   예수 그리스도는 닮으려 하나, 닮을 수 없는 세대   이 시대의 '교회' 청년들을 보라. 소위 '기성 교회'라고 하는 '정통'에 속한 '교회' 청년들의 모습들은 어떠한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청년인 필자도 하마터면 '교회' 청년들에 속할 뻔 하였지만, 이제 바른 말씀의 칼(히4:12)을 알고 난 뒤부터는 그들의 모습을 개인적으로 이렇게 정의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성품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부인하는 세대'(딤후3:5)라고 필자는 정의한다. 요사이 '교회' 청년들이라 하는 자들 중 대다수는 바로 이 말씀의 대언의 성취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참 열심히 한다. 교회 일, 교회 봉사, 교회에서의 헌신, 물 불 가리지 않고 다 열심히 하려 한다. 사람들 보기에는 참 좋은 모습들이다. 그런데, 핵심이 빠졌다. 필자가 말하는 핵심이란 과연 무엇일까? 바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우는 데에서 양육받지 않기 때문이다.(호4:6) 세상의 이름난 '정통' 교단교회들이 대부분 이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 사역자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젊은 층, 특히 청년들이 자신들의 말만을 잘 따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은 젊은 층이 자기네보다 더 성경에 대해 박식한 것을 차마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쉽게 말해서, 그런 청년들을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아하기 때문이다. 본래적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이 아닌, 자기네가 쌓은 '교단'이라는 바벨탑(창11:1-9) 안에서 그저 조용하게 지내기만 원할 뿐, 양을 참 은혜의 복음으로 이끌어서 하나님께 이겨오고, 올바른 말씀으로 양육할 생각조차도 없는 이른바 '삯꾼 목자'들(요10:12)이기 때문이니깐.   그런가 하면, 순진한 청년 양들에게도 분명한 잘못이 있다. 아래 우리 주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계실 때 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이제 그들이 갈 때에 그분께서 어떤 마을로 들어가시니 마르다라 하는 어떤 여자가 그분을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니라. 그녀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도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더라. 그러나 마리아는 섬기는 일이 많아 괴로워하더라. 그녀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섬기게 내버려 두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런즉 그녀에게 명하사 그녀가 나를 돕게 하소서,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에 관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가 필요하니라. 마리아는 그 좋은 부분을 택하였으니 그것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38-42, 흠정역)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롬4:3) 밑줄 친 부분과 볼드체 부분을 집중해서 다시 읽어 보라. 거기에 바로 답이 있다! 이 말씀에서, 마르다는 자기 일하느라 바쁘다고 자기 입으로 '주님'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삶 속에서 제쳐둔다. 한 마디로, 세상 말로 하면 주님 앞에서 가히 '일 중독자(Workholic)'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이다. 무언가 연상되는 것이 없는가? 자칭 '그리스도의 청년'이라 하는 그들은 자기 삶 속에서 살아있는 말씀이신 주님(요1:1), 곧 성경 말씀을 다른 데에 제쳐 두고, 아예 관심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 같은 바른 성경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 매우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필자가 그들에 대해 경고하건대, 이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이것은 겉보기에는 정말로 검증된 길 같고, 바른 것 같지만 실상은 '매우 위험한 사망의 통로'인 것이다.(잠16:25) 그들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부터 버리고, 거절하였기 때문에 겉보기에 그들은 매우 하나님의 자녀인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와 사역자가 되지 못하게 버리신 것이다.(호4:6) 고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약간은 닮을 수 있으나, 완전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는 데까지는 이를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자신들이 신앙심 깊다고 자부하는 이른바 자칭 '그리스도인' 장년들에게도 마찬가지 현상인 것이다. 이런 '교회' 청년들의 부모 세대인 그들부터도 바른 말씀으로 양육받지 않았으므로, 결국 그 폐악이 자녀 세대들에게까지 되풀이되는 것이다. 참으로 기막힌 십계명 중 제 2계명(출20:5)의 성취가 아니겠는가? 참으로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전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주 예수님의 성장 과정은 어떠하셨는가?(갈4:30)   이제 필자는 성경 기록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누가복음 2장 41절에서 52절 사이에 보면, 어린 예수님께서 그분의 양친과 함께 유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에 그곳에 있는 학자들과 지혜를 겨루신 이야기가 있다. 이 말씀은 글의 길이를 고려해서 일부러 생략했으니 여러분께서 읽어 보시길 권한다. 여러분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필자는 여기까지 본 글을 읽은 여러분께 지금 본 글의 핵심을 다시 한 번 묻고 있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공부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과연 주의 말씀에 능숙할 정도로 공부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그렇게 여러 박사들을 놀라게 하실 수 있었을까? 과연 그분의 백성들인 우리는 그런 그분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주의 말씀을 무시하는 세대여, 회개할 지어다!   이제 주님께서 교회들에게 '회개하라'고 하시는 말씀(계2:5,16; 3:3,19)을 귀 있는 자는 모두 들을지어다!(계3:22)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호4:6) 자들아, 분명히 하나님의 모든 불순종에 대한 보응은 모두 성취되었다.(히2:2)   참 목자를 잃고, 우상 목자만을 맹목적으로 따라다니고, 구원받지 못한 양들이여, 이제 은혜의 복음을 듣고 죄들로부터 회개하여,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함이 절실하지 않는가?(행16:31) 어서 주님께 돌아오라!(암5:4,6) 그리고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확실히 알고(호6:6) 주의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여 거기에서 자라가야 한다.(벧전2:2) 그 길만이 진리의 성경 말씀이 보증하는 참 생명의 길이다.(요5:39)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길들 가운데 서서 보며 옛 행로들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그 길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들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라."(렘6:16, 흠정역)   필자주: 필자는 '기성 교회' 안의 모든 청년, 모든 장년들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 이들 중 대다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표현인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4: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5-04 23:45:04 | 소범준
천년왕국에 대한 성경적 이해     이 천년왕국은 기성교회들이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부분임을 먼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바르고 명확한 것을 가르쳐도 이해를 못할 뿐 아니라 이해조차 안하고 도리어 그렇게 말하는 자들을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유대 땅에 왔을 때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했던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기성교회에서는 예수 믿어서 천국가거나, 휴거와 재림이 이루어지면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산다고 하는 것으로 구체적 진술이나 성경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거의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 이상의 접근은 잘못하면 이단에 빠진다고 바운드리를 정해놓고 그 정도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알지도 못합니다.   그 이유는 킹제임스흠정역성경과 개역성경의 번역을 대조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끝의 삶에 대한 이해를 가지려면 하나님의 창조와 죄, 타락과 회복, 심판에 대한 이해,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성경의 전반적인 흐름과 중요한 맥들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문자 그대로 인식하고 믿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말씀들을 자기들의 상황과 삶에 맞게 절취해서 받아 들이다 보니 하나님 편에서의 창조의 역사들을 통해서 계획하시고 원하시는 것들,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들, 창조섭리와 회복, 구원계획과 그 이후의 일들을 말씀하심에도 사람들이 바라보지 못 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우선 먼저 많은 대언서 중에서 이사야서와 계시록에 언급된 천년왕국이 왜 필요한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천년왕국을 이해하려면 성경 66권 안에서 핵심이 되는 요소 중에 하나인 왕국, 왕권, 왕의 개념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명확히 가지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침례요한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늘의 왕국에 대한 이해도 생각해 보게 되지요 많은 개역성경을 사용하는 개신교회에는 죽어서 가는 세상으로 천국을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창세기의 중요성인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사람이 창조된 이유와 에덴동산을 만드신 배경,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은 이후의 창조물들의 변화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회복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유, 왜 메시아로 오셔서 고난 받으셔야 했는가? 그리고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지는 천년왕국의 모습은 성경을 통해 볼 때 회복의 역사라고 저는 믿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시면 우리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6일 동안, 매일 새로운 것들을 만드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100% 오염이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다음과 같은 일들을 초래했습니다.     아담 -(창3:17~19) (일부) 너는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네가 들의 채소를 먹으며 / 땅으로 돌아가기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저주하신 내용은 평생토록 고통 중에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 받은 땅의 소산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창1:29절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속에 씨 맺는 나무의 열매를 가진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었노니 그것이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 하셨는데 저주로 말미암아 들의 채소를 먹어야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를 더 이상 못 먹게 하시므로 사람이 흙에서 지어졌음으로 흙으로 돌아가라 하십니다. (창3:22 (일부)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 (24절)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 남자를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브 - (창3:18~19) 네게 고통과 수태를 크게 더하리니 네가 고통 중에 자식을 낳을 것이요, 또 너의 열망이 네 남편에게 있으리니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 남자는 여자들의 해산하는 고통을 잘 모릅니다. 성경에서는 그 고통이 크다고 하며 여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저주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남자에 의해 여자가 다스림을 받는 저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류역사를 들여다보면 여자의 수난과 고통들을 보게 됩니다.    땅 - 창3:17(일부)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땅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또한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냅니다.     모든 생명체 -{주}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일을 행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평생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 땅의 모든 생명체도 아담의 죄로 인해 다 저주를 받습니다. (창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과 속에 생명이 있어 땅에서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채소를 먹을 것으로 주었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0절 말씀을 보면 모든 생명체는 분명하게 푸른 채소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저주로 인해 지금의 생태계의 모습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창9:2절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내가 그것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었노라.) 말씀처럼 노아의 방주 이후에 다시금 생육하고 번성하는 때에 모든 짐승들과 날짐승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 대언자의 글을 잠깐 보면   (이사야11:6~10)이리도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하며 /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놀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로되 / 그것들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 그 날에 이새의 뿌리가 있어서 그것이 만백성의 기로 설 것이요, 이방인들이 그에게 찾아오리니 그가 베푸는 안식이 영화로우리라.     * 약육강식이 통하는 모든 동물의 세계에 평화가 임하여 살과 피를 먹는 일이 없어지고 다시금 창조의 때와 같이 동물들이 들의 풀과 식물들을 먹는 변화가 생길 것으로 믿습니다. 또한 노아의 방주 이후에 모든 짐승들과 날짐승들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였는데 그러한 것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오시는 날 이루어질 대언들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9:17~19절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 안에 서서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 모든 날짐승을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너희는 와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만찬에 함께 모여 / 왕들의 살과 대장들의 살과 용사들의 살과 말들의 살과 말 탄 자들의 살과 자유로운 자나 매인 자나 작은 자나 큰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   21절- 남은 자들은 말 타신 분의 칼 곧 그분의 입에서 나온 칼로 죽임을 당하니 모든 날짐승이 그들의 살로 배를 채우더라     *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짐승들의 역할이라고 할까, 모습이라고 할까 이런 일이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천년왕국의 시작     요한계시록 20장 1~3절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바닥없는 구덩이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 마귀요 사탄인 그 용 곧 저 옛 뱀을 붙잡으니라. 그가 그를 붙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 바닥없는 구덩이에 던져 넣어 가두고 그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이 차기까지는 그가 더 이상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니라. 그 뒤에는 그가 반드시 잠시 동안 풀려나리라     요한계시록 20장 7~8절 그 천 년이 다 차매 사탄이 자기 감옥에서 풀려나고 / 나가서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속이며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 사탄이 잡혀 바닥없는 구덩이에 천 년 동안 결박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풀려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일까요? 개역성경 신자들처럼 예수님 재림하면 모든 것이 끝나고 영원한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위와 같은 성경구절은 어디에 적용되겠습니까?             흰 왕좌 심판 때에 있을 일     또 내가 크고 흰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분의 얼굴을 피하여 물러가고 그것들의 자리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 흰 왕좌 심판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지금의 땅과 하늘이 물러가고 보이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2.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   3.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   3-1. 바다가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주고 3-2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 3-3.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       새 하늘과 새 땅   요한계시록 21:1~2절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나 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예비한 채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더라.   내가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라.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또 내게 이르시되, 다 이루어졌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의 샘에서 값없이 주리라.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으리니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천년왕국을 집중적으로 들여다 보기     아담과 이브의 죄로 인해 저주 받았던 모든 저주가 없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이사야11:6~10)이리도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하며 /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놀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로되 / 그것들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이사야 대언자의 대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천년동안 볼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이 재현될 것으로 믿습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죄가 없는 세상에서 사람의 번성함이 천 년 동안 있어진 후에 사탄이 잠시 풀려났을 때에 그들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이 다시금 일어나는 것을 성경기록을 통해서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생각하면서 사람의 자유의지 조차도 하나님의 자존하심과 거룩하심 앞에서는 비교할 바 못되며 창조자의 완전함에 견줄 수 없는 창조물이라는 결론으로 모든 창조세계의 생명체에게 밝히 드러내시는 것으로 시간의 역사를 마감하시고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윤영원 형제님이 천년왕국기간에 사람들이 태어난다는데, 이해가 안됩니다. 천년왕국에는 구원받은 사람들만 들어갑니다. 그러면 장가도 안가고 시집도 안가는것 아닌가요? 라고 질문 하셨는데 저는 위와 같이 전체적 이해로 보고 있습니다   교회로 7년 대환란 전에 휴거된 그리스도의 신부와 환란가운데 구원받은 사람들( 계20:4-또 내가 보니 왕좌들과 그것들 위에 앉은 자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심판이 맡겨졌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목 베인 자들의 혼들이 있는데 그들은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자기들의 이마 위에나 손 안에 짐승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더라.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통치하되)과 재림하는 순간까지 4절 말씀 같은 환란가운데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구원받은 자들을 구분해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교회로 휴거된 성도들은 예수님과 멋진 예루살렘에 거한다는 사실을 공부해 보세요 저는 이 천년왕국은 무너지고 깨지고 타락으로 더렵혀진 모든 창조세계를 회복하시고 어느 누구도 이유를 달수 없는 죄가 없는 세상을 천년동안 이루시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와 위엄과 공의를 드러내시는 것이라고 성경의 기록들을 보면서 그렇게 믿습니다.   이해가 안가실지도 모르지만 유추해석으로 휴거되어 변화된 성도들은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끝까지 살아남은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믿은 사람들을 통해서 1천년의 역사를 통해 1점 1획도 변함이 없는 신, 구약의 모든 대언의 성취를 이루실 것으로 봅니다.   형제님의 글에 대해 답변 글 만들면서 저도 공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인이야기도 기회 되면 공부하여 올려보겠습니다. 참고로 저도 부족한 것이 많아서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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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4 19:00:12 | 노영기
우연히 다시 성경바로보기를 또 보았습니다. 예전에 줄 그어놓았던 부분, 즉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이 아무래도 이해가 안되어 문의드리고자 합니다. 성경바로보기 127페이지, 403페이지(천년왕국 시대에도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것입니다.)입니다. 성경바로보기, 에스라 성경사전을 찾아봐도 답이 명쾌하지 않네요.   천년왕국기간에 사람들이 태어난다는데, 이해가 안됩니다. 천년왕국에는 구원받은 사람들만 들어갑니다. 그러면 장가도 안가고 시집도 안가는것 아닌가요?   누구는 부활하지 않은 몸으로 천년왕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아들 딸들을 낳는다고도 하는데 ( 인터넷에 찾아보니 http://www.headstone.pe.kr/09_dataRoom/LeeLewaeJa/Man_Ending/mille_ManEnding.htm더 헷갈리기만 합니다. 이단단체같기도 하고요.)   부족한 저로선 이해도 안되고, 성경 구절을 찾지도 못하겠네요.  혹시 아시는 분 계시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 예전에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얻었을까?하는 질문을 가진적이 있었습니다.솔직히 물어볼곳도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사람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아담을 창조한 구절보다 먼저이니까.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아담과 하와를 만들고, 그 다음에 가인이 태어났으니, 가인은 그전에 만들어졌던 여성과 결혼했나보다라고 생각했지요. (물론 틀렸습니다.)   칼 세이건도 이 질문을 어릴때 했는데, 아무도 답변을 못해 불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은 해답을 찾았지요. "이브의배꼽 아담의 갈비뼈"란 책에서,  아담과 하와가 건강하니까 계속 아이들(딸,아들)을 낳았고, 그 중의 하나와 가인이 결혼했을것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천년왕국때 아이들이 태어나는지에 대한 질문이 위와같이 아주 간단한 질문이거나 우스울수도 있고 혹은 제가 공부를 혹은 노력을 덜 해서 모르는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은혜를 배풀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실 답변에 미리 감사드립니다. 꾸벅     아...제 소개가 없었네요. 저에게 관심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저는 가끔...(아마도 1주일에 3~4번) 킵바이블에 들리는 40대 직장인 남자입니다. 아이디는 와이프것입니다. 제 이름으로도 가입했었었는데....로그인이 안되더군요. 솔직히 전 아직도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10년전 경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우연히 킹제임스성경을 알게되었습니다. 킹제임스성경을 알게된지는 7년정도 되는가 봅니다. 이후 많은 책(성경바로보기, 에스라성경사전, 신자들의 글등등)을 사서 보았습니다. 아니 보고 있습니다.  전 단지 하나님의 왕국에 맨 밑의 사람으로라도 구원받으면 원이 없겠다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왕국에 아주 자그마한 공간만 허락해주시길 바랄뿐이며, 지옥에만 안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어쩌면 다소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두렵기만 합니다. 언젠간 킹제임스성경 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4: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5-04 00:36:22 | 윤영원
 저는 성경을 사랑하는 일반 청년입니다. 처음 이곳을 알게 된 배경은 [천사와 ufo 바로 알기]를 읽고 마지막장에 추천하는 책 목록을 보면서 하나하나씩 읽어나가야겠다는 결심에 의해서 성경바로보기, 천주교는 기독교와 완전히 다릅니다. 등을 읽고나서 이 홈피를 알게되고 많은것을 읽고 배웠고  깨달았습니다 그후  몇주전에 킹제임스흠정역을 구입해서 계속 읽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전부터 방언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오순절 은사주의 바로알기]와 부흥과개혁사에서 출간되는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저 옥성호, 를 읽고 그집사님이 쓴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 집사님이 스승으로 삼고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알게되고 존 스펄전 ,조나단 에드워즈등으로 통해서 청교도 신앙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생활 하면서 성경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고 부흥과 개혁사에서 출판된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를 읽고 있던중에 오늘 아침 그 시리즈 2권 (성령 하나님과 놀라운 구원)을 보다가 "흠정역 성경이 안타까운 실수"라는 글귀에 이거는 꼭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처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1장 성령의 인격을 다루는 내용에서 p25에 아래의 내용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격성에 대해 자주 어려움을 겪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신약 성경의 여러 서신서 서두에 나오는 인사말에서 성부와 성자만 언급할 분 성령은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매우 자주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위대한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13). 성령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도 자기의 첫 번째 서신에서 똑같이 말합니다. " 우리의 사귑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1:3). 여기서도 요한은 성령을 명확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또한 헬라어에서 영(Spirit)이라는 말이 중성명사이기 때문에 성령과 그 분의 사역을 비인격적이고 중성적 의미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흠정역(King James Version)성경이 안타까운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는 "성령이 친히(The Spirit itself)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는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친히" 라는 말을 "Himself"가 아닌 "itself"로 표현한 것을알 수 있습니다. 또 같은 장에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the Spirit itself)간구하시느니라."(롬 8:26)라는 말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개정역(Revised Version)이 훨씬 낫습니다 .비록 헬라어에는 명사뿐 아니라 대명사도 중성이지만 두 구절 모두 "Himself"라고 바르게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의 질문입니다. 부탁드립니다. 먼저 이부분에서만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말 흠정역이 실수입니까?..아님 niv가 실수입니까..아님 로이드 존스가..실수 입니까..당연히 흠정역이 실수가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요.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4:4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4-21 13:44:35 | 손정현
누구를 두려워할 것인가?    제가 어릴 때는 TV에서 무서운 음악과 함께 시작하는 ‘전설의 고향’을 보곤 하였습니다. 그 때는 그것을 보면서 무서운 귀신이 나와서 사람을 해칠 까봐 두려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어머니에게 ‘귀신 지나갔어?’ 라고 물어보곤 했었습니다. 또한,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의 ‘귀신들’이 나를 해치거나 죽일까봐 두려워하곤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의 대상이 있습니다.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인 인간은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각종 시험 및 학교에서 소위 주먹 좀 쓰는 아이들을 무서워 할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군대, 취업, 승진, 금전적 문제, 결혼, 출산, 질병, 죽음 등의 수많은 두려움의 대상들이 있습니다. 각자 마다 이 두려움을 잊기 위해서 혹은 이겨내기 위해서 방법들을 고안해 내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대상을 학문으로 풀어보려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운동이나 무술을 연마하고, 어떤 이들은 명상을 하고, 어떤 이들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술과 담배를 찾게 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종교생활’을 통해서 서로 위로하고 안락함을 얻고자 할 것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은 아주 원초적인 감정입니다. 두려움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범죄이후에 느꼈던 첫 번째 감정이기도 합니다. 창 3:9-10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렇듯 인간은 원초적으로 죄를 짓고 난 후에 두려움을 느꼈고, 현재도 쌓여가는 죄들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의 근간에는 죄의 결과물인 죽음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종교행위도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자구책에 불과합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어떤 인간도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두려워하는 자들=범죄한 자들=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귀와 사망과 지옥이 던져질 불호수에 던져지게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구속받은 성도들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시27:1 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주는 내 생명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23:4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참으로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며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두려움을 내어쫓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약속하시며 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창15:1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하시니   또한, 여호수아에게 사명을 주시며 하신 말씀도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수1:9 내가 네게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크게 용기를 내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주 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은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전12:13 우리가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니라.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구속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롬3:18)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엉뚱한 대상 즉, 하나님과 반대되는 대상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하나님께 범죄하다가 결국 아시리아의 포로로 된 이스라엘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왕하17:7-8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와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 밑에서 벗어나게 하신 주 자기들의 하나님께 죄를 짓고 또 다른 신들을 두려워하며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교도들의 법규와 이스라엘 왕들이 만든 그들의 법규 안에서 걸었기 때문이더라.   이러한 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잠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려니와 누구든지 주를 신뢰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신명기18:10-11에서 모세는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자나 점을 치는 자나 때를 관찰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마녀나 마법사나 부리는 영들에게 묻는 자나 마술사나 강신술사가 너희 가운데 있지 못하게 할지니라 하며, 22절에서 자기 뜻대로 말하는 거짓대언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찾기 보다는 사람을 찾으려고 하며, 점쟁이들의 말한마디를 하나님이 내려주신 천명인냥 따르고, 그들을 두려워합니다. 자기 위에 사제나 교주를 모시는 모든 종교에서 비슷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또한,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거짓대언자들은 그러한 인간의 두려움의 본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하나님이 원치 않는 교세확장과 자기만족을 위해 일하며 열심히 자기 배를 채우고 있습니다. 당연히 성도들은 이런 거짓대언자를 떠나야 하겠습니다. 롬16:17-18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그런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배를 섬기며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느니라. 빌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한 적이 있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많은 사람들 곧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걷느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파멸이요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수치스런 일에 있고 그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느니라.) 골2:8 어떤 사람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조심하라. 그것들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벧전3:16-17 너희가 자유로우나 너희의 자유를 악을 덮는 도구로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들로서 행하라.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경하라. 잠14:26-27 주의 두려움 속에 강한 확신이 있나니 그분의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생명 샘이라 사망의 올무들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죄를 멀리하게 합니다. 시4:4 두려움 가운데 서며 죄를 짓지 말지어다. 잠23:17 너는 마음에서 죄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며 종일토록 주를 두려워하라. 딤전5:20 죄짓는 자들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꾸짓어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내어 쫓아 주십니다. 딤후1: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시118:6 주께서 내 편이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리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거짓대언자들의 헛된 속임수에 속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단번의 속죄로(히9:28) 인해 지성소로 직접 들어가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은 우리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 당당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롬8:14-15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 받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느니라. 그분을 힘입어 우리가,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느니라.   세상과 분리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완전한 거룩함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후7:1 그러므로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또한, 이 하나님 안에서의 순종함과 두려움으로 우리의 구원을 당당히 드러내 보일 수 있습니다.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     인간은 원초적인 죄악된 감정인 두려움을 항상 느끼며 삽니다. 이는 죄의 결과는 사망이며 이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환자들을 가끔 보면, 건강에 대한 많은 두려움을 갖고 병원을 찾아옵니다. 자신이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아프게 되면 어찌해야 할까 걱정에 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심하게 아플 때나 심하게 힘들 때 그 사람의 본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평소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생각되어지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 본성을 드러내고 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처절한 두려움 속에서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간사한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거짓 믿음을 고백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종교생활(천주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무속신앙등)을 해왔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주에게 묻고 의지하기도 합니다. 자기 주먹만 믿고 살아 왔다고 하며 자신을 모시며 살아오던 사람들은 스스로 이겨내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신되신 예수님의 피흘려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 주시고, 우리를 양자 삼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성령님에 의한 인도함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에겐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더 이상 최후의 죽음이 아니며,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는 우리들의 생활 방식은 더 이상 이 땅에 있지 아니합니다.(빌3:20)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긴 자입니다.   요일4:16-17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알았고 또 믿었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 점에서 우리의 사랑이 완전하게 되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라. 요일5:4-5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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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 06:26:20 | 곽연우
마지막 나팔 소리 (*) 편집이 된 PDF 파일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성도라면 당연히 창세 이후로 없었던 극심한 7년 환난기를 통과하지 않을 것이다. 계시록 3장 10절은 분명하게 이를 약속한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계3: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정하셨느니라(살전5:9).   7년 환난기에 구원받는 성도들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 이런 무서운 환난을 통과한 사람이 단 하나도 없으며 통과할 사람도 단 하나도 없다. 초대 교회시대부터 지금까지 성경대로 믿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환난전 휴거(Pretribulation Rapture)를 믿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에는 환난전 휴거와 상치되는 듯한 말씀이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고전15:51-52)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미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남은 성도들의 몸이 변하는 때에 나팔 소리가 있을 것을 가르쳤다. 또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서 이미 죽은 성도들의 부활과 살아남은 성도들이 함께 땅에서 들려서 - 휴거되어 -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나팔 소리가 있을 것을 가르쳤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사도 바울이 동일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이 교회의 휴거를 가리키며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 역시 교회의 휴거를 가리키므로 우리는 이 두 부분에 나오는 나팔 소리가 동일한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결론지을 수 있으며 아마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의 휴거와 관련한 살전4:16-17의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당연히 고전15:52에 기록된 ‘마지막 나팔 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회의 휴거 때에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린다는 사실은 ‘환난전 휴거’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인다. 환난전 휴거관은 교회의 휴거가 7년 환난기 전에 일어날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이 ‘마지막 나팔 소리’는 반드시 환난기 전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계시록 8-11장은 7년 환난기에 일곱 나팔이 울린다고 말하며(사실임) 또 예수님께서도 7년 환난기가 끝나는 시점에  - 즉 일곱 나팔이 다 울린 이후에 - 친히 땅에 강림하실 때에 또 다른 나팔 소리가 있다고 마태복음 24장 29-31절에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날들의 환난 뒤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자기 빛을 내지 아니하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들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사람의 아들의 표적이 하늘에 나타나고 그때에 땅의 모든 지파가 애곡하며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자기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선택 받은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함께 모으리라(마24:29-31).   그렇다면 어떻게 사도 바울이 말한 ‘마지막 나팔 소리’가 7년 환난기 전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도 입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도 바울이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한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먼저 밝혀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가 의도한 것과 그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검토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이 단순히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말한 점이다.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분명히 그 ‘마지막 나팔 소리’는 그들이 이미 소유한 성경 기록 안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이거나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다른 부분에서 가르친 어떤 것임에 틀림이 없다. 혹은 그것이 그 당시의 그리스 문화권 사람들에게 익숙한 어떤 것이거나 로마 제국에서 흔히 행하던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자기들 주변의 유대인들을 통해 알게 된 유대교의 믿음이나 실행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이 의도하지 않은 것   만일 누군가가 ‘마지막 나팔 소리’의 ‘마지막’이 절대적으로 최종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면 - 다시 말해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다른 나팔 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 사도 바울은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도하지 않았음에 틀림이 없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계시록 11장 15절의 일곱째 나팔이나 혹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 전체가 ‘마지막 나팔’임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 같은 결론을 내리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천사들과 함께 친히 강림하실 때에 분명히 나팔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마24:29-31). 그런데 계시록의 순서를 보면 분명히 일곱 나팔이 다 울린 뒤에 그분께서 강림하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강림하실 때 울릴 나팔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 이후의 나팔이다.   둘째로, 스가랴서 14장 16-19절은 천년왕국 내내 장막절이 매해 지켜질 것을 보여 준다. 예루살렘을 치러 온 모든 민족들 중에서 남은 모든 자가 심지어 해마다 올라와 그 왕 곧 만군의 주께 경배하며 장막절을 지키리라(슥14:16).   그런데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알 수 있듯이 장막절을 지킬 때는 항상 나팔 소리가 울린다. 천년왕국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 이후에 시작되며 따라서 장막절의 나팔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 이후에 있을 것이다.   셋째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마지막 나팔’을 언급한 뒤 30-40년이 지나서야 요한의 계시록이 기록되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받았을 때에 계시록 11장 15절의 일곱째 나팔 혹은 계시록의 일곱 나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그들이 그가 말한 ‘마지막 나팔소리’가 자기들이 아직 들어 보지도 못했고 그래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계시록의 일곱 나팔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고린도전서를 받고 거기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 나팔’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알았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고전15:52에 있는 ‘마지막 나팔 소리’에 대해 기록하면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알지 못한 계시록의 일곱 나팔 혹은 일곱째 마지막 나팔을 의미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점에 대해 칼드웰(J. R. Caldwell)은 이렇게 말한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아직 계시도 되지 않은 예언에 대해 언급한다거나 혹은 기록되지도 않은 책 즉 계시록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넷째로, 사도 바울은 결코 그 ‘마지막 나팔’이 계시록의 일곱 나팔 모두(즉 복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전15:51과 살전4:16에서 그는 단 하나의 나팔만을(즉 단수)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나팔 소리’가 절대적으로 최종적인 나팔 소리 - 즉 그 이후에는 또 다른 나팔 소리가 있을 수 없는 - 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너무나 명백하며 그래서 알포드(H. Alford)는 ‘마지막 나팔 소리’의 ‘마지막’이 결코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나팔 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의 ‘마지막 나팔 소리’는 다른 의미의 나팔 소리임에 틀림이 없다.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사회에서 나팔 소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고린도전서 15장의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고대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회중을 모을 때 나팔을 사용하셨다. 출19:10-20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뵐 때 나팔 소리가 울렸음을 알 수 있다. 시내 산이 온통 연기로 자욱하니 이는 주께서 불 가운데서 그 위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더라. 그곳의 연기가 화로의 연기같이 위로 올라가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더라. 나팔 소리가 오랫동안 나며 점점 더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음성으로 응답하시더라. 주께서 시내 산에 곧 그 산의 꼭대기에 내려오시고 주께서 그 산의 꼭대기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출19:18-20)   한편 로마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용도로 나팔을 사용했다. 그들은 황제가 있는 곳으로 사람을 모을 때 나팔 소리를 사용했다. 이것은 보통 ‘클래시컴’(Classicum)이라 하는데 그 기능으로 인해 이것은 ‘황제의 나팔 소리’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고대에는 적들을 놀라게 하거나 다가오는 심판 혹은 위험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사용했다. 성경에도 이런 용례들이 여러 번 나온다(렘4:19-21; 6:1; 겔33:3-6; 암3:6 등).   이제 고린도전서 15장의 문맥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는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과 사망의 패배이다.   둘째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 ‘마지막’ 것에 대해 언급한다: 패하여 없어지게 될 마지막 원수(사망 26절), 마지막 아담(그리스도 45절), 마지막 나팔 소리(52절).   셋째로,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여러 가지가 대비되어 있다. 바울은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 불명예와 명예, 약한 것과 강한 권능, 본성에 속한 몸과 영에 속한 몸, 땅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 죽는 것과 죽지 않는 것,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등을 대비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대비시키면서 첫 아담을 통해 육체의 죽음이 왔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몸의 부활로 사망을 이기는 승리가 있을 것을 보여 준다(20-22절, 45, 54, 57절).   넷째로 사도 바울은 고전15:56에서 죄로 인해 사망이 생겼으며(롬5:12-19) 사망을 일으키는 죄의 힘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주신 율법임을 보여 주고 있다(롬4:15; 5:13, 20; 7:7-13). 앞에서 우리는 교회의 휴거가 있을 때 울리는 살전4:16의 나팔 소리가 고전15:52의 ‘마지막 나팔 소리’임을 살펴보았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나팔 소리’라고 했는데(살전4:16) 이것은 곧 그 ‘마지막 나팔 소리’가 그 당시 황제들이 백성을 모을 때 사용하던 나팔 소리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표현은 아주 익숙한 표현이었다. 황제의 나팔 소리가 나면 백성들이 황제가 있는 곳으로 모이듯이 ‘하나님의 나팔 소리’ 즉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면 성도들이 휴거되어 그리스도가 계시는 공중으로 함께 모일 것이다.   그러면 바울은 왜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했을까?   고린도전서 15장에 여러 가지가 대비되어 있음을 고려해 볼 때 - 예를 들어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등 - 그는 그 ‘마지막 나팔 소리’와 성경에 처음 나오는 ‘첫째 나팔 소리’를 대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15장의 대비는 대부분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에 대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와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 역시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 그리고 사망의 패배를 대비시키고자 함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가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과 사망의 패배이므로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는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과 사망의 패배와 상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와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를 대비해 볼 때 우리는 마지막 나팔 소리의 용도와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첫째 나팔 소리의 용도와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에서 나팔 혹은 나팔 소리가 가장 처음 언급되는 곳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출애굽기 19장 10-20절이다.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 친히 내려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려 하시며 바로 이 시점에서 첫째 나팔 소리가 울린 것이다. 이 모임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심으로 자신과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모세의 율법 언약을 세우는 것이었다(출19:3-8; 20:1-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모세 율법과 관련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나팔 소리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만났으며 율법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와 고린도전서 15장의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위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죄가 사망을 불러왔고 사망을 불러일으킨 죄의 힘이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임을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만일 그들이 하나님이 계신 산에 다가와 그 산에 닿기만 하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출19:12-13, 21-25). 바울은 율법이 진노를 이루며(롬4:15) 또 율법을 통한 죄의 정욕들이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사람들에게 이루고(롬7:5, 13) 또 율법이 사람을 죽인다고(고후3:6) 분명히 말하였다.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이 사람의 죽음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참으로 율법은 죽음과 정죄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돌에 써서 새긴 사망의 직무에도 영광이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영광 곧 없어질 영광으로 인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무에는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무도 영광이 될진대 의의 직무는 영광이 더욱 뛰어나니라(고후3:7-9).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어 하나님을 만나게 하였고 그들을 율법 아래 놓이게 하였으며 또 그 율법이 죽음을 일으키는 죄의 힘이 되면서 사망의 직무를 감당하였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의 목적이 시내 산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로써 사망의 직무를 시작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너희는 만질 수 있는 산과 불이 붙은 산에 이르지 아니하였고 깜깜함과 어둠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씀하시는 음성에 이르지도 아니하였느니라. 그 음성을 들은 자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하지 마시기를 간청하였으니 (그들은 주께서  명령하신 것 즉, 짐승 하나라도 그 산에 닿기만 하면 돌로 맞거나 화살로 꿰뚫림을 당하리라, 하신 것을 견디지 못하였느니라. 그 광경이 이같이 무서웠으므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히12:18-21).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린도전서 15장과 데살로니가전서 4장은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의 목적이 백성을 공중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불러 모으고 이로써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몸의 부활과 몸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와는 전혀 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사람들을 불러내기 위해 울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사망)이 끝나고 그 직무가 폐지된다. 또한 이 마지막 나팔 소리는 고대의 나팔 소리의 또 다른 목적 즉 적을 두렵게 하거나 혹은 다가오는 위험이나 심판에 대해 경고를 주는 것 같은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가 사람들을 불러내어 사망의 직무의 시작을 알렸으므로 사도 바울은 이와 대조적으로 사람들을 불러내어 썩지 않고 죽지 않는 삶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사용되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한 것이다. 그가 이것을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한 것은 그 나팔 소리 이후에 또 다른 나팔 소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첫째 것과 마지막 것을 비교하면서 ‘마지막’이 ‘첫째’의 반대가 되므로 그 나팔 소리를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라 한 것이다. 이 나팔 소리는 교회의 휴거 때에 울릴 것이며 하나님의 첫째 나팔 소리가 울렸을 때의 목적과 정반대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들을 공중으로 그리스도께로 모으기 위해 사용될 것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나팔 소리’에 대해 칼드웰은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해 준다.   우리는 고전15장에서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에 대해 읽는다. 그러므로 여기의 ‘마지막 나팔 소리’라는 표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셨을 때에 즉 정죄와 사망의 직무가 시작되었을 때에 울렸던 나팔 소리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그것은 한 마디로 정죄와 사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반면에 ‘마지막 나팔 소리’는 부활과 생명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나팔 소리는 저주를 선포했고 그 무섭고 큰 소리가 지속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서 떨게 되었다. 반면에 마지막 나팔 소리는 복을 선포하는데 그 이유는 그 소리가 죽은 자들을 생명으로 부활시키고 살아남은 자들을 죽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 주는 일의 시작을 알리기 때문이다. 레날드 샤우어스(Renald Showers)의 「마라나타」(Maranatha: Our Lord Come!)에서
2011-04-16 14:13:34 | 관리자
샬롬 ~! 오늘은 저의 관심 분야와 관련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신 섭리에 대해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저는 현재 한 공업전문대학의 정보통신과 1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입니다. 오늘날 인터넷 등의 정보통신 관련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정보가 다량으로 지구상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유통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지구촌이 더욱 가깝게 되었다는 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보통신 관련 기술자들, 특히 보안 관련 전문가들은 늘 항상 여러가지 골치덩이에 시달려야만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골치덩이가 되는 문제라 하면 컴퓨터 보안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즈음 전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DDoS(Distribution Denial of Service; 분산 서비스 거부 공격) 등 대다수의 컴퓨터가 대상이 되는 공격이 일어나면서 컴퓨터 보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 가운데에서 과연 우리 손에 받아 쥔 하나님의 말씀책이라 할 수 있는 성경책이 과연 하나님께서 친히 오랜 시대 가운데서 정말로 보존해 주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나 시대의 손을 타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정보 통신 보안의 주요 3요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 보존 섭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어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가용성   컴퓨터나 정보 통신 보안에서 자료나 정보를 사용 허가된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보안의 특성을 가용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용성이란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가 받은 사용자들만 정보나 자료를 열람, 이용할 수 있는 정보 보안의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한 집단 사이에서만 이용해야하는 -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 정보/자료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그리고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제 3자의 손에 넘어갔다면, 제 3자가 입수한 정보/자료를 마음대로 편집하고 손을 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맡기실 때의 원칙과 상응하는 부분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말씀을 여러 세대,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고 또한 오랜 세월 동안 보존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그분의 뜻을 위해 예비하신 사람들을 부르셔서(시 4:3) 그 사람들에게만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보존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들의 임무는 바로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입으로 사람들에게 전해 주신 말씀을 인간의 자연 언어(원본은 히브리어/그리스어)로 그대로 옮겨서 여러 세대 가운데서 보존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2차적으로 여러 민족들과 나라들의 언어를 가진 그분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도록 각 언어로 번역해서 보존되게 하셨습니다.   오직 주께서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따르는 자를 따로 두신 것을 알지어다.(시4:3, 흠정역)   그런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도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사람들의 손을 많이 탄 것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저 사악한 자 마귀를 보십시오. 바로 저 사악한 자 마귀는 지금까지도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손을 대려고 치열하게 자신의 수하들을 이용해 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의 말씀 변개(창3장)와 그리스의 인본주의-헬레니즘 사상에 도취되었던 자신의 수하들인 유대인 지도자들을 통한 알렉산드리아 변개 사건,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사용했던 기법들 (참조/비교:시편91:11-12 : 마4:6 및 눅4:10-11=>영어KJV를 참조하세요), 사탄 마귀의 최대 걸작품 로마 카톨릭(이하 RC)이 일반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한 것, RC의 첩자들(웨스트콧, 호르트 etc)이 RC의 밀지로 신약성경 공인본문(TR)을 변개한 것 등 자신의 힘으로 직접 말씀을 변개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사람들 - 말씀을 사용할 권한을 인가받지 않은 자들 - 곧 자신의 수하들을 이용하여 말씀을 수없이 날조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귀는 전 세계적으로 경악할 만한 해커/크래커들보다도 더 무서웠으면 무서웠지 못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주 치밀하게 자신의 말씀을 여러 세대 속에서도 놀라우신 섭리로 보존해 오셨습니다.   세상에 널린 꽃들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고 지며,(사40:7) 이 땅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도 지금은 한 때나마 젊은 시절을 보낼 지 모르지만, 시간이 되면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으며(창3:19), 이 땅위에 가장 오래된 고문헌들이 아무리 유서 깊고, 권위가 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변패와 파손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여러 사람들의 손을 타고 흐르면서 손때가 묻고, 또 여러 사람들의 편집을 거치면서 원문과는 다른 내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8, 흠정역)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흠정역)   하지만, 이 세상의 시간과 세월의 흔적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영원히 보존되리라는 약속을 변개치 않으셨습니다(사40:8; 시12:7; 시119:89; 마24:3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위해 예비하신 참 신실한 그분의 종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맡기시고 이 세상의 책들은 비교할 수도 없는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 사본들을 보존하셨습니다.(글자 하나하나 빠짐 없이) 그 후, 이렇게 보존해 주신 말씀의 원본들(구약 - 히브리 맛소라 전통 본문, 신약 - 그리스어 공인본문(Textus Receptus; TR)) 을 틴데일, 마틴 루터 등의 또 다른 신실한 자신의 종들에게 각자의 언어로 번역해서 각 지역에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그대로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1611년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칙령에 의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Authorized King James Bible; KJB)이 탄생하였으며 지금 우리들의 손에 들려지게 된 것입니다.   2. 무결성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순수한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결성(無缺性)이란 정보 통신상에서 시스템 내의 정보는 오직 인가된 사용자만이 수정하도록 하여, 데이터가 임의로 변조되거나 위조 등 훼손되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보를 주고 받는 데 있어서 위에서 언급한 가용성에서와 같이 사전에 미리 협약하여 정보/자료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가받은 사람들끼리만 정보/자료를 사용/열람할 수 있도록 하여 권한을 인가받지 않은 제 3자의 정보 시스템 침투를 방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만약의 경우에 제 3자가 중요한 정보를 유출시킬 경우 이 제 3자가 유출시킨 정보/자료를 마음대로 이용하면서 변조시키거나 훼손할 수 있는 위험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정보 통신에서의 정보 보안에 있어서 오직 사전에 허가를 받은 사람만 정보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신 원칙도 이와 같습니다. 구약 성경의 본문(히브리 맛소라 전통원문)은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필사되어서 히브리인들 가운데에서 계속해서 전해졌다고 합니다. 다음은 1960년 밀러(H.S. Miller)가 지은 <일반 성경 입문>(General Biblical Introduction)에 수록된 유대인들이 구약시대 회당에 있던 두루마리들을 복사하면서 지킨 여덟 가지 준수 사항입니다.   (1) 양피지는 정결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되 오직 유대인만이 만들 수 있으며 정결한 짐승으로부터 만든 끈으로 묶어야만 한다. (2) 두루마리의 각 난에는 48 줄에서 60 줄이 들어가야만 한다. (3) 잉크는 반드시 검은 색이어야만 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제조해야만 한다. (4) 어떤 단어나 글자도 머리로 외워 적어서는 안 된다. 서기관은 반드시 자기 앞에 정통 복사본을 놓고 기록하기 전에 먼저 각 단어를 큰소리로 읽고 발음해야 한다. (5)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 전에 그는 반드시 두려운 마음으로 펜을 닦아야만 하며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을 적기 전에는 그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온 몸을 씻어야만 한다. 이 단어는 영어 성경에서 주(主) 즉 전체가 대문자로 된 'LORD'로 번역되었는데 따라서 그는 필사 과정에서 수도 없이 많이 몸을 씻어야만 했다. (6) 글자의 형태, 글자와 단어 사이의 간격, 펜을 사용하는 방법, 양피지 색깔 등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한 규례들이 있었다. (7) 두루마리를 수정하려면 그것이 완성된 후 30 일이 지나기 전에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두루마리는 무효가 된다. 또한 한 장에 단 한 개의 실수라도 있으면 그 장은 버려야만 했으며 전체 필사본에서 세 개의 실수가 발견되면 전체를 버려야만 했다. 다시 말해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다 기록했는데 그 중에 단 세 개의 실수가 나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창세기부터 필사해야 했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 어느 정도 신중을 기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필사하는 말씀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들임을 믿었으며 따라서 이런 철저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보존해 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본문에서 빼거나 본문에다 첨가하거나 본문을 바꾸거나 하는 NIV, NASB, NKJV 등의 현대 역본 기록관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런 치밀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완전하게 보존해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친히 읽으신 말씀이 자필 원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럼없이 성경이라고 부르셨다. (8) 그들은 글자와 단어 수를 세었으며, 만일 글자가 삭제 혹은 첨가되었거나 다른 글자와 붙어 있으면 필사한 사본 전체를 버렸다.   - 킹제임스 흠정역 한영대역 성경(그리스도예수안에 발행)부록 <흠정역 성경의 4중 우수성>에서 인용   자, 이제 어떻습니까? 여기에서 수많은 현대 역본들과 킹제임스 성경의 확연한 차이점이 보이실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아주 치밀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말씀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올바로 전달될 수 있도록 글자 하나하나에 세밀한 관심을 기울이셨으며 단 한 군데라도 잘못된 곳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킹제임스 성경과 수많은 오류의 싹인 대다수 현대 역본들을 판이하게 가르는 결정적인 핵심입니다. 마귀는 자신의 음흉한 사상/생각이 담긴 수많은 성경 역본들 - 떨거지들! - 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단 한 가지의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이 탄생되기까지 아주 순수하게 말씀의 원본을 흠이 없이 보존하셨다는 것입니다.   3. 비밀성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의 말씀들이 담겨진 원본은 어떻게 해서 음흉한 제 3자의 손을 거치지 않았던 것일까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정보 보호의 비밀성과 관련해서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정보 보호의 보안 3요건 중에 하나인 비밀성이란 시스템 내에 전달된 정보는 제 3자가 접근할 수 없고 오직 인가된 사용자만 접근 가능하도록 보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비밀성은 위에서 언급한 가용성, 무결성과 결합하여 이 두 요건이 충족되도록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럼으로서 시스템 내에 있는 모든 자료와 정보는 오직 사용이 허가된 사용자만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은 비밀성의 원칙과 비교해 보았을 때어떻게 보존되어 왔을까요?그리고 킹제임스 성경에 이르기까지어떻게 하여 이전의 선각자들에게 전해진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후대에 자신의 말씀이변개되거나 왜곡될 수 있음을 아시고 위와 같이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해 오셨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사용할 때 중요한 원칙을 알려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믿음으로 이를 행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을 배격하고, 그분의 말씀을 바꾸려 하는 자들은 전혀 범접할 수 없게 하십니다.(신12:32; 잠30:6; 계22:18-19)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서로 간에 정보나 자료를 주고 받는 원칙이나, 인터넷/통신 상에서 정보/자료를 제공하는 원칙이나, 정보/자료 사용에 대한 규제의 원칙이 있어야만 정보/자료가 원활하게 소통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과 마음을 담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도 이와 같은 원칙을 그대로 지켜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손에 지금 들려진 킹제임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순수한 말씀들(시12:6,7,흠정역) 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모든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KJV 1611 에 담으신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정착되었사오며, 주의 신실하심은 모든 세대에 이르나이다. (시119:89-90, 흠정역)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0:5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4-12 10:29:19 | 소범준
“angel”과 “천사”       (계 1:20) 『곧 네가 본, 내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등잔대의 신비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본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   The seven stars are the angels of the seven churches   (계 2:1)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있는 이 곧 일곱 금 등잔대의 한가운데를 거니는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of Ephesus write     이 외에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필라델피아, 라오디게아 교회의 천사들에게도 편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천사(天使)들은 각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성도들임을 익히 잘 이해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잘 아시는 내용을 굳이 거론하는 이유는, 정동수 목사님의 마태복음 강해를 보다가 계시록에 나오는 이 “angel”이란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매우 고심하셨다는 말씀과 번역의 애로사항을 토로하시는 장면을 보고 확신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angel”을 “천사”로 번역한 것은 지극히 옳은 것입니다.   물론 이 천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타난 천사나, 신약시대의 초 중반에 사도와 성도들에게 나타난 천사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천사와는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역할(messenger)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한자문화권에서의 천사(天使)라는 단어에 대해 이해하려면 약간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됩니다.  - 약 100년 전까지 외교문서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중국황제는 자칭 하늘의 아들이라고 하여 천자(天子)라 불렸습니다. -파라오가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조선시대 까지 많은 나라들이 중국을 중심으로 조공무역을 하였습니다(일본은 소외됨).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조공무역은 왠지 비굴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과거의 조공무역은 약소국의 생존을 위해 귀중한 무역수단이었습니다.   작은 나라에서 큰 나라에 조공을 바치면, 대국(大國)이 선물을 받기만 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하여 답례의 물품을 보냅니다.    답례품은 최소 두 배 정도이며, 두 배 정도는 조공을 바친 나라의 사신 일행이 가지고 돌아가지만, 예우를 갖추고자 하는 나라(조선 등 중요한 동맹국)에는 4~5배 이상 까지도 답례품을 보냅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떤 물자를 보낼지 결정하는 일과 물자를 모으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양도 많으므로 정식으로 사절단을 갖춰서 호송부대와 함께 보내게 됩니다.   이 사절단을 천자의 사절(天子의 使節)이라고 하며, 줄여서 천사(天使)라고 불렀습니다. 그 역할은 물론 황제의 선물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중국어 성경이 번역되었을 당시 구약성경의 “angel”을 “천사”로 번역한 것은 매우 적절했으며, 그 적절함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사료됩니다.                        ※천제(天帝)의 사절(使節)=천사   개역성경에서는 천사를 사자(使者)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보낸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으므로 의미가 정확하지 않거나 약하고 한자를 모르는 어린이들이들이 동물로 오해 할 수도 있습니다. 천사라고 하지 않고 '사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며면  "하나님의 사자"라고 해야 분명한 뜻이 전달됩니다.   따라서 angel을 천사로 번역한 것에  문제는 전혀 없으며, 천사라는 단어의 유래와 의미를 설명해주는 일이 필요할 뿐입니다. (angel = ambassadors)   그런 의미에서 사도들도 하나님의 아들(진정한 의미의 天子)께서 교회를 위해 보내주신 천사들이었습니다.   (고후 5:20)“그런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너희에게 간청하시는 것 같이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가 되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해하라.”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0:5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4-08 13:34:17 | 류인선
안녕하세요? 익산의 믿음침례교회에서 섬기고 있는 형제입니다. 2년여 동안 아이디, 패스워드 오류로 접속을 못하다가 이제서야 로그인 했습니다. 성경검색을 비롯한 훌륭한 자료들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요즘 노트북이나 아이패드가 보편화되고 있어서 영어가 가능하신 분들에게 영문 신앙서적을 PDF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는 곳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Andrew Murray 목사님이나, R.A Torray 목사님, E. M. Bounds 등 이전 시대를 살다가신 믿음의 선배 분들의 좋은 책들을 자유롭게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1. http://www.prayerforallpeople.com/free.shtml   2. http://www.ccel.org       3. http://www.whatsaiththescripture.com/Fellowship/Andrew.Murray.html 위 사이트에 링크되어 있는 교회사 관련 너무 좋은 책을 언급하자면 1660년까지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Thieleman J. van Braght(1625-1664)의 "Martyrs mirror"입니다. A4 기준 2000 page가 넘을 정도로 방대한   분량이지만, 죽음을 앞둔 성도들을 격려할 목적으로 쓰여진 역작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가 잘 아는 '폭스의 순교사화'가  이 책을 바탕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http://www.homecomers.org/mirror/intro.htm  <= 링크 문서     구입하실 의향이 있으신 분들은   http://www.christianbook.com/martyrs-mirror-thieleman-van-braght/9780836113907/pd/611390X?item_code=WW&netp_id=107075&event=ESRCN&view=details     개인적인 얘기를 잠깐 말씀드리자면, 1994년 고등학교 시절, 윌리암 에스텝의 "재침례교도의 역사"를  눈물을 쏟으며 새벽녘까지 읽어내려갔습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기독교 장로회에 속한 교회에서 나이가 찼으니  세례를 받으라고 할 때, 순교자들의 모습이 떠올라 침례를 받겠다며 거절했었습니다. 제가 그냥 세례를 받으면  침례신앙을 지키다  죽어갔던 수많은 성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것 같아서요. 역사를 알고나서는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는 '누구네 아들 이단에  빠졌다더라'는 편견과 소문을 견뎌야 했지만, 참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번역하셨던 분이 얼마전 교회사 강의를 해주신 정수영 목사님이라니요. ^^    1. 피흘린 발자취  2. 폭스의순교사화  3. 재침례교도의 역사  4. Martyrs mirror    읽을 때마다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책들입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책들입니다.   ****** 마지막으로   1. Campbell Morgan  http://www.gcampbellmorgan.com/eowb.html   2. The writings of William Kelly http://www.stempublishing.com/authors/kelly/     주님 안에서 평안하세요~ 샬롬~[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0:5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4-06 02:41:49 | 최형철
★ 축복(祝福)이란 말을 제대로 써라! 축복은 내가 내 자신에게, 또는 남에게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시기를 바랄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한자어로 빌 축(祝) 복(福) 복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을 빌다”입니다. 우리말은 분명히 “아”다르고 “어”다릅니다. 일상대화에서야 혼용되어도 의사소통에 지장주지 않는 범위내에서 통용된다 치더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올리는 기도에서만큼은 바르게 써야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저를 축복해 주세요” 또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등의 표현은 “하나님! 저를(여러분을) 위해서 복을 빌어주세요.”라는 말인데 하나님이 누구한테 복을 빌어 주라고요. 하나님위에 하나님을 두는 불경스런 표현이 됩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국어사전에 혼용되는 경우도 있다라고, 하지만 원칙이 중요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 말씀하실 때 축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시는 경우가 복음서에서 발견됩니다만 어디까지나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서 인성적인 입장에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흔히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써온건데 뭐 어떠냐라는 반문도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만큼은 대충 전통 운운하면서 넘겨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입니다.   아래 성경구절들을 살펴 보시고 축복(祝福)과 복(福)의 차이를 제대로 느껴서 바르게 사용합시다. 우리 한글 흠정역 성경은 복과 축복의 정확한 구별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 좀 길지만 성경 구절을 모두 읽어보시면 복주실 것입니다)   (창 1:22, 킹흠정) 『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바다의 물들을 채우고 날짐승은 땅에서 번성하라, 하시니라.』*축복을(x) (창 1:28, 킹흠정)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창 2:3, 킹흠정)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히 구별하셨으니 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며 만든 자신의 모든 일을 떠나 안식하셨기 때문이더라.』 (창 5:2, 킹흠정) 『그분께서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고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의 이름을 아담이라 부르시니라.』 (창 9:1, 킹흠정)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창 12:2, 킹흠정) 『내가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네가 복이 되리라.』 (창 12:3, 킹흠정)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네 안에서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하셨더라.』 (창 14:19, 킹흠정) 『그가 아브람을 축복하여 이르되, 하늘과 땅의 소유주 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창 17:16, 킹흠정)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어 그녀로부터도 네게 아들을 주리라. 참으로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리니 그녀가 민족들의 어머니가 되고 백성의 왕들이 그녀에게서 나리라, 하시니라.』 (창 17:20, 킹흠정) 『이스마엘로 말하건대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보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었으며 또 그로 하여금 다산하게 하고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그가 열두 통치자를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리라.』 (창 18:18, 킹흠정) 『내가 보건대 아브라함은 분명히 크고 강력한 민족이 되며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 안에서 복을 받으리니』 (창 22:17, 킹흠정)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창 22:18, 킹흠정) 『또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창 24:1, 킹흠정)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연로하니라. 주께서 모든 일에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니』 (창 24:31, 킹흠정) 『라반이 이르되, 주께 복을 받은 분이여, 들어오소서. 어찌하여 밖에 서 있나이까? 내가 집과 낙타들의 방을 예비하였나이다, 하니라.』 (창 24:35, 킹흠정)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셨으므로 그가 크게 되었으며 그분께서 양 떼와 소 떼와 은과 금과 남종과 여종과 낙타와 나귀들을 그에게 주셨고』 (창 24:60, 킹흠정) 『리브가를 축복하여 그녀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의 누이로다. 너는 수천 수백만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가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의 문을 소유할지로다, 하니라.』 (창 25:11, 킹흠정) 『아브라함이 죽은 뒤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시매 이삭이 라해로이 우물 곁에 거하였더라.』 (창 26:3, 킹흠정) 『이 땅에 머무르라. 내가 너와 함께하고 네게 복을 주리라. 내가 이 모든 지역을 너와 네 씨에게 주고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 맹세를 이행하며』 (창 26:4, 킹흠정)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번성하게 하고 이 모든 지역을 네 씨에게 주리니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라.』 (창 26:12, 킹흠정) 『그때에 이삭이 그 땅에서 씨를 뿌려 그 해에 백 배를 받았고 주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 26:24, 킹흠정) 『바로 그 밤에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내가 너와 함께하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씨를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매』 (창 26:29, 킹흠정) 『우리가 네게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를 평안히 내보낸 것 같이 너는 우리를 해치지 말라. 이제 너는 주께 복을 받은 자니라.』 (창 27:4, 킹흠정)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내게로 가져와 내가 먹게 하고 이로써 내가 죽기 전에 내 혼이 너를 축복하게 하라, 하니라.』 (창 27:7, 킹흠정) 『나를 위해 사냥한 고기를 가져다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가 먹게 하고 내가 죽기 전에 주 앞에서 너를 축복하게 하라, 하셨느니라.』 (창 27:10, 킹흠정)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지고 가서 그분께서 드시고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축복하게 하라, 하니라.』 (창 27:12, 킹흠정)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보일 터이니 그러면 내가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니이다, 하거늘』   *나머지 (축)복의 성경구절은 pdf파일로 올립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10:5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3-24 19:40:28 | 김규태
  저는, 사랑침례교회 다니는 이청원이라고 합니다. 교회 이곳저곳을 다니다 저에게 무한한 감동을 주는 일이 있어서 그 감동, 여러분과 나누려 이렇게 사진을 올립니다.   위 성경구절과 함께 그림이 있는 이문서는 역시 사랑교회에 다니시는 올해 85세되신 한숙향 어르신의 주일공부 교재입니다.     어른신의 따님되시는 남윤수 자매님을 통해 이교회 나오신지 2년이 되가시는데 개역성경을 평생을 봐오셔서 입과 귀에 익숙하실텐데 어르신께서 뜻하시는바가 있어 (실은, 한글을 잘 읽지 못하십니다.), 흠정역 성경으로 이렇게 조금씩 한걸음을 내딛는 모습에 제 자신도 돌아보게 되더군요.     주일학교 시간, 맨 왼쪽가에 어르신 모습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어찌 이쁘시지 않겠습니까.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00:1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3-21 13:51:19 | 이청원
창조과학 홈에서 퍼온글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데 왜 지진과 쓰나미가 있는가?  김홍석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지진과 쓰나미로 고통 받는 분들에게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오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통 중에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하시고, 도와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는 왜 지진과 쓰나미가 있는가? 이러한 끊임없는 현상들이 오늘 나에게 무슨 의미를 주고 있는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데(마 10:29), 많은 참새보다 귀한 우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0:30-31)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대량의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이 과정을 통하여 나는 어떤 의미를 발견해 내야하는 걸까? 2000년대에 들어서서만 해도 나의 기억 속에는 2004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의 쓰나미가 23만여 명의 희생자를 냈고, 2005년 파키스탄의 지진, 2008년 중국의 스촨성 지진에서도 각각 수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리고 2011.3.11, 일본의 쓰나미 참사를  실시간(real time)방송으로 보고 있다. 불가항력적인 파괴적 현상들은 지진과 이로 인한 쓰나미만이 아니었으며, 아주 근래에만 있었던 일도 아니었으며, 지진만이 대재앙도 아니었다. 주후 79년경에도 폼페이의 화산폭발로 수천 명이 사망했으며, 1340년대 몰아친 흑사병으로 인해 1억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유럽인구의 반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1918년에 시작된 스페인독감으로 수천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2003년에는 사스(SARS)가, 그리고 조금 전까지 조류독감과 신종플루가 우리를 위협했고, 지금도 구제역이 우리의 가축들을 통하여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여기서 크게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의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첫째, 세상에는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망가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망가진 원인은 우리에게 있다. 노아홍수라는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면서 남긴 해령과 지판의 격변적 이동의 여력이 아직도 증거로 남아 지진과 쓰나미를 일으키면서 그 사건을 기억하게 해준다. 무지개와 함께, 지층과 화석들과 함께 그 날을 기억하게 해준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이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나게 해준다. 지구의 평안이 그저 있는 것이 아니며, 만유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통치 아래 있음을 생각나게 하며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며, 우리 자신의 약함을 자각하게 한다. 우리의 분수를 각성하게 된다. 일순간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생각나게 한다. 더욱 근원적으로, 만유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나게 한다. 우주 공간에 지구가 떠 있고 지구를 감싸고 있는 우주의 온도는 영하 270도씨 정도,  수 없이 많은 혜성들이나 거대한 운석들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어디로부터 언제 지구를 향해 날아올지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지각 아래에는 바위가 녹아서 끓고 있다. 우리는 그 위에 떠있는 지각 판에 살고 있다. 지각판들은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임에 인류는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이 그저 할 수 있는 한 예측하고 피할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인류의 현실은 불안하기가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에는 자기장이 장치되어 있어서 태양풍을 비롯한 우주의 유해한 영향들을 막아주고 차가운 우주의 온도와 뜨거운 지각 아래의 온도와 태양으로부터의 적당한 거리와 빛으로 오늘도 우리는 적절한 온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들의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 우리의 누구이신가? 우리는 만유와 그 현상들을 바라보며 조금씩 더 알아갈수록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제공되는 장치들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인류의 문제와 답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것에나 또는 스스로를 의지하며 추구하고 높아지려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사건(”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노아홍수의 심판(”하나님의 아들들과의 결혼”), 바벨탑사건(”하늘에 닿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 모두 사람이 분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릇된 욕망으로부터 초래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늘 기억하면서 사람과 만유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임을 끊임없이 명심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 되도록 세상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하여 욥기를 통해 들려주시는 위로와 지혜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욥은 왜 의인에게 혹독한 고통이 있게 되었는지를 하나님께 호소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하나님께 항변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이상하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신다(욥 38:4). 때가 되면 아침이 오는 것도(욥 38:12), 흙덩이에 점성이 있어서 서로 붙는 것도(욥 38:38), 산 염소가 새끼 낳는 때를 아는 것도(욥 39:1)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욥은 더 이상하다. 대답 같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욥은 답을 얻고 크게 깨달았으며 앞으로 다시는 하나님께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욥이 무엇을 깨닫고 답을 얻었을까? 그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완전하신 분이심을 각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그분의 피조세계 가운데 피조물로 살아가며 완전하신 하나님의 경륜(economy)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때때로 불만스럽게 느낄 뿐, 사실은 모든 것은 완전하고 공의롭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욥 40:8)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 이러한 현상들은 마지막 날의 징조인가? 우리에게 이런 일들은 어떻게 의미 있는가?  마태복음 24장, 25장은 마지막 날에 이르는 재난의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셨다(마 24:3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셨다(마 24:36). 예수님께서 속히 오시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7). 그리고 거듭 진실로(반드시, surely) 속히 오시리라고 약속하셨다(계 22:20). 그리고 또 사도바울을 통하여 아울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롬 2:40)과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심(롬 9:22)을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할 것이며(마 24:37),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므로 깨어 있으라(마 24:42),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므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한다(마 25:13). 그렇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해야 하는 바는 주님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일이다. 성경의 연대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1,656년이 지난 후에 노아홍수 심판이 있었고 그로부터 약 200년 후에 바벨탑사건이 있었으며(바벨탑사건이 일어났을 때 벨렉이 50세였다면 노아홍수 후 겨우 152년이 지난 후였다), 그로부터 2,300여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약 33년 후에 십자가에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반드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제 2,000여년이 흘렀다.    마지막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우려할 바가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하신 창조주로 믿으며, 예수님을 유일하신 그리스도로 믿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이 한 분 하나님이심을 믿는 우리에게 그날은 소망의 날이다. 세상이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게 되었으며(벧후 2:5), 지금의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로 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벧후 2:7).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아이를 낳는 고통을 보게 되면 선악과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지개를 보게 되면 노아홍수의 심판을 기억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판이 아직도 움직이면서 섭입(subduction)이 일어나고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노아의 때에 모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온 세상이 물에 잠겼다가 지각판이 밀리고 충돌하면서 밀려올라와 다시 뭍이 드러나고 거대한 산맥들이 형성되고 물이 물러가면서 만들어낸 계곡들과 산줄기를 바라볼 때 노아의 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퇴적지층과 그 속에 땅과 함께 멸하여진 화석생물들을 바라볼 때도 우리는 노아의 때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어 공부가 힘들다고 느낄 때면 바벨탑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나는 ”상속받을 너희”에 속한 것인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긴장하며, 깨어 기다리자. 내일 당장 종말이 오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깨어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마 24:33, 36 ; 계 22:7, 2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아멘.   ----------------------------------------------------------------------------------------------------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요 3:16-17, 흠)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요 3:18, 흠)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00:1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3-19 11:08:46 | 허광무
  사소한 것입니다만, 흠정역 한글로 표시한 위 명칭이 예레미야와 에스겔서에서는 "느부갓레살"로 되어 있고, 다른 곳에서는 "느부갓네살"로 되어 있네요.   특별한 구별 이유가 없다라면, 다음 개정 작업이 있을때에는 한가지로 하시는 것이...   혹시라도 다른 의미가 있다라면, 알게 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00:1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3-17 06:31:06 | 황경수
요즘 세상에서 하나님이 심한 푸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하나님만을 생각하게 하는 찬양을 듣게 해 주었습니다. 너무 감동이 되어서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이 노래가 있는 블로그는 제가 본 적도 없고 그래서 그 안의 내용을 알지도 못합니다. 혹시라도 제가 그 블로그를 소개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만 이 찬양을 소개하고자 하니 다른 것은 신경쓰지 말고 가사와 함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찬양하는 분이 누구인지, 어떤 CD인지 알면 좋겠습니다.   하나님만이(God and God Alone)   샬롬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1 15:00:1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1-03-12 14:06:14 | 관리자